12권 - 12화
눈치 빠른 아르윈이 강성태가 내놓은 조건을 우리말로 전해주었다.
돌려보내 준다고? 먼저 쓰러트리면?
혹시 적당하게 넘기고 싶은 건가? 아니지. 그러려면 강성태가 쓰러져야 하는데?
조태완과 신강남파 간부들이 복잡한 표정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서달수가 열아홉 번을 찔렸다. 기억해라. 열아홉 번이다.”
강성태가 독한 눈빛으로 경고를 전했고,
“내가 어떻게 삼합회의 간부가 됐는지 기본적인 조사는 했을 거 같은데?”
원자춘이 바로 받아쳤다.
“아득바득 올라왔다. 목을 물어뜯어 죽인 놈도 있고, 이 손으로 파낸 눈알을 모으면 이 그릇이 넘치고도 남아.”
오른손을 들어서 흔들어 댄 원자춘이 입술을 씰룩였다.
“오늘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마카오의 카지노 지분과 한국에서 벌어들이는 돈의 30퍼센트, 그리고 중국 내 삼합회와의 합작을 제안하려고 했었다. 알아듣나? 중국 내 삼합회의 일을 합작하려 했다고!”
“원자춘.”
열변을 토하는 원자춘을 강성태가 나직하게 불렀다.
“여기는 내 구역이다. 남의 밥그릇에 관심 없으니까 헛소리 집어치우고, 열아홉 번만 기억해.”
말을 마친 강성태가 몸을 세우자 조태완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서달수가 연장에 당한 숫자를 기억하고 있었나?
그걸 복수하려고, 권총을 겨눈 상태에서 원자춘에게 기회를 주었고?
돌이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는 먼저 연회장의 출입문과 직원들이 사라진 통로를 확인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정영권이 단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영권도 그렇지만, 누구보다 김진용이 강성태를 돌아보며 뜨거운 숨과 함께 볼을 씰룩였다.
서달수가 느꼈을 막막함과 두려움을 되돌려 주기 위해 강성태가 나섰다. 똑같이 살기 위해 버둥대는 상황을 만들어가며 말이다.
원자춘은 목을 좌우로 꺾은 뒤에 몸을 세웠다.
강성태의 코에 머리끝이 걸리는 키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는 중국어로 떠들었다.
그 직후였다.
“우리 형님이 이긴다면 무사히 나갈 수 있도록 옆에 있는 간부들에게 확답을 들어놓으라십니다.”
중국어 억양이 묻어 있었지만, 분명한 우리말을 삼합회 남자가 내놓았다.
하여간, 의뭉스러운 놈들.
옅게 웃은 강성태는 조태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문님. 내가 쓰러지면 원자춘과 일행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내내 강성태를 말렸던 조태완이었다. 그런 그가 당부를 듣자 강렬한 눈빛으로 우리말을 지껄인 삼합회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스가 쓰러진다면 무사히 보내주마.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삼합회 남자가 원자춘에게 중국말로 설명을 전하느라 잠시 틈이 있었다. 그사이 강성태는 테이블을 빙 돌아 널찍한 공간으로 움직였다.
김진용부터 신강남파 간부들이 몸을 세웠고, 이어 삼합회의 네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성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재킷을 벗어 정영권에게 건넨 강성태는 셔츠의 소매를 팔뚝까지 걷었다.
맞붙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아르윈은 아직 원자춘을 포함해 네 명을 총으로 겨누고 있었다.
권총은 짐작하는 것보다 무겁다.
‘서툰 수작을 부린다면 언제고 방아쇠를 당겨주마.’
게다가 의외의 무기를 지니고 있을지 모를 삼합회의 네 명에게 이보다 확실하게 경고할 다른 방법은 없었다.
강성태의 앞으로 움직인 원자춘이 야비한 눈빛으로 양팔의 팔꿈치를 뒤로 돌렸다.
폭력 조직에서 굴러먹은 세월만큼의 경험이 묻어나오는 동작이었다. 강자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였고, 삼합회 간부라는 위세를 보이고 싶은 오만함도 묻어 있었다.
달수야.
유치한 거 안다.
그런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병렬이에게 가서, 그리고 함께 너를 찾아간 뒤에 할 말이 없을 거 같아서 나섰다.
네가 희생하며 지켜낸 내 구역에서 삼합회 아니라 그 어떤 조직이라도 설치지 못하게 할 테니까 꼭 지켜봐.
팔을 돌리던 원자춘의 눈이 비릿하게 뒤틀렸다.
온다.
휘익. 휙.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보던 원자춘이 느닷없을 정도로 빠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상체를 뒤트는 동작으로 강성태는 그가 휘두른 주먹 두 번을 피했다.
이제는 달려들 거다.
와락.
실제로 상체를 젖힌 강성태에게 뛰어든 원자춘이 허리를 휘감았다.
들어 메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허리를 뽑아 옆으로 던지기 위해 원자춘이 몸을 비틀었다.
주먹은 쇼였고, 그가 진짜 노린 건 함께 쓰러져 뒤엉키는 개싸움이었다.
퍽! 퍼억.
그 짧은 틈에 강성태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넣은 원자춘이 허리 뒤로 손을 돌려 반대편으로 몸을 비틀었다.
이대로 들어서 함께 쓰러지겠다는 의도였다.
개싸움은 중국에 가서 너같이 뻔뻔한 놈들과 해!
휘익. 콰작. 쩌어억.
강성태는 팔꿈치로 원자춘의 목덜미 아래를 세차게 찍었다. 그런 뒤에 팔을 아래에서 위로 들어 그의 얼굴에 강하게 주먹을 꽂아넣었다.
비틀하는 원자춘의 목덜미에 강성태는 또다시 팔꿈치를 찍어 넣었다.
콰작. 콰작. 콰작. 콰작. 털썩.
네 번이나 더 목덜미를 맞고 나서야 힘이 풀린 원자춘이 무릎을 꿇었다.
콰악.
강성태는 원자춘의 짧은 머리칼을 움켜쥐고서 고개를 젖혔다.
주인에게 자비를 바라는 노예처럼 원자춘의 눈이 강성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맷집은 인정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미 기절했을 상황에서 아직 눈에 초점이 있는 것도.
“한 번.”
쩌어어어억.
조태완이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섬뜩한 소리가 원자춘의 얼굴에서 터져 나왔다.
흐물거리는 원자춘의 멱살을 잡은 강성태는 그를 위로 들었다. 셔츠가 위로 들리면서 배가 그대로 드러난 원자춘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강성태의 손아귀 안에서 흔들렸다.
그러게 왜 남의 구역에서 설쳐?
“두 번.”
콰득.
강성태는 원자춘의 심장 아래 옆구리에 있는 힘껏 주먹을 꽂아넣었다.
누구 마음대로 남의 구역에서 마약을 돌리고 지랄 떠냐고?
콰득. 콰득. 콰득. 콰득. 콰득.
분명 갈비뼈가 부러졌다. 그 증거로 고통에 가득한 비명을 토해낸 원자춘의 입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콰득. 콰득. 콰득.
“크륵.”
피를 게워내기는 했지만, 얼굴을 때리지 않아서 원자춘은 아직 정신을 잃지 않았다.
달수야.
이거 잘 봐.
“아직 아홉 번이 남았는데 너는 간부니까 특별히 한 번으로 해결해 주마.”
그게 무슨 소리…?
맥이 풀린 원자춘의 눈이 강성태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내 구역이다. 작게는 강남, 넓게는 서울, 삼합회든, 야쿠자든, 멕시코 카르텔이든, 너희 같은 놈들에게는 이 땅 전체가 내 구역이다. 알았어?”
살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 원자춘이 피에 흥건히 젖은 입술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에서는 대답을 똑바로 해.”
쩌어어어어억.
누군가 뒤통수를 잡아챈 것처럼 고개가 홱, 젖혀진 원자춘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넘어갔다.
털썩.
팔을 벌린 자세로 똑바로 누워 있는 원자춘을 강성태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달수야.
우선 여기까지 하마.
그렇게 시선을 내리고 있던 강성태가 고개를 들었다.
“아르윈.”
“예, 형님.”
고개를 숙인 아르윈이 왼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통화버튼을 누른 그가 좌우로 눈짓을 던지고는 강성태의 옆으로 다가왔다.
필리핀 조직원 다섯이 움직여 권총의 총구를 삼합회 네 명의 목에 찔러 넣고, 호텔 직원들이 움직이는 통로로 밀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기고 남을 눈빛을 확인한 삼합회 네 명이 총구에 고개가 젖혀진 채로 직원들의 통로를 향해 밀려 나갔다.
익숙하게 권총을 다루는 필리핀 조직원 다섯 명이 삼합회 네 명을 끌고 연회장에서 사라졌다.
보면 볼수록 현명한 판단이었고, 믿음직한 행동이었다.
삼합회의 네 명이 사라진 뒤였다.
이번에는 계단에서 보았던 필리핀 조직원 넷이 들어와 자루를 펼쳤고, 커다란 이불 빨래를 담아가듯 원자춘을 구겨 넣은 뒤에 통로로 움직였다.
아르윈이 저 정도였어?
예상하지 못했던 능력을 깨달은 듯 정영권이 놀란 눈으로 권총을 든 아르윈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서 직접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형님. 승합차에 있던 두 놈도 함께 처리하겠습니다.”
뒷마무리가 철저해서 나쁠 건 없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뭐라 해도 아르윈이 직접 확인하며 지시하는 게 무엇보다 현명했다.
강성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체를 깊게 숙인 아르윈이 직원 통로를 향해 사라졌다.
“후우.”
자욱한 적막을 깬 건 조태완의 커다란 한숨 소리였다.
“너는 재킷 얼른 드리고, 나가서 저 인간들 숙박 기록하고, 사용하던 방 깨끗하게 정리해.”
“예, 형님.”
조태완의 지시를 받은 정영권이 재킷을 들고 강성태의 뒤로 움직였다. 그가 재킷의 어깨를 들어 강성태의 팔에 꿴 다음 위로 들어주었다.
재킷을 걸친 강성태에게 깊게 고개 숙인 정영권이 급하게 몸을 돌렸다.
“야!”
“예, 형님.”
“어설프게 흔적 지우려다 문제 만들 거 같으면, 아예 외출한 거로 처리해. 밖으로 나가서 실종된 거다. 어떤 식으로든 상황 봐서 처리하고, 내용을 따로 전해.”
멈칫하고 몸을 세웠던 정영권이 고개를 숙인 뒤에 바쁘게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삼합회 반응을 보고 판단할 생각입니다.”
“그게 아니라 어디로 갈 거냐고?”
“고문님 집을 둘러보기로 했었는데 아닙니까?”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조태완의 표정이 그랬다.
**
병실에 들어선 김진용의 표정이 무난한 것을 확인한 이병렬은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그런 한편으로 호텔에서의 일을 듣고 싶은 표정으로 침대로 다가서는 김진용을 기다렸다.
“어떻게 됐어?”
“성태 형님께서 원자춘하고 함께 온 네 명을 모두 작업하셨습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호텔이었는데 작업을 어떻게 해?”
“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형님. 처음 원자춘이 들어오고, 형님.”
가뜩이나 직접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이병렬이었다. 그런 그가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의 심정을 김진용은 충분히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조봉진이 듣고 있는 데도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가능한 한 자세하게 이병렬에게 들려주었다.
“풀어주시려고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태완이 형님도 이해하지 못한 눈으로 바라보셨는데, 형님. 성태 형님께서 열아홉 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열아홉 번?”
“달수가 연장에 당한 숫자가 열아홉 번이라고, 형님.”
“씨……발.”
김진용의 설명을 듣기 무섭게 이병렬이 길게 들리는 욕을 뱉어냈다.
주먹을 피하는 모습, 이어 허리를 잡은 원자춘을 개 패듯 두들기는 장면, 숫자를 세 가면서 갈비뼈를 부수는 강성태의 독기를 김진용은 본 대로 전했다.
“마지막에 형님. 성태 형님이 삼합회 간부로 대접한다면서 한 방 날리셨는데, 형님. 원자춘이 그대로 뻗어서 바닥에 늘어졌습니다, 형님. 그런데, 형님.”
볼을 씰룩인 김진용이 감정을 꿀꺽 삼킨 뒤에 입을 열었다.
“원자춘을 내려다보는 성태 형님이 분명 달수를 떠올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형님.”
눈을 껌벅인 이병렬이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쉬어도 치솟은 감정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씨발.”
인상을 찌푸린 이병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진용과 조봉진이 얼른 고개를 떨군 상태에서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쉰 이병렬이 환자복 소매로 눈가를 닦아냈다.
“보스는 어디로 갔어?”
“태완이 형님 퇴원하신 집을 구경하러 가셨습니다, 형님.”
“집들이를 한다고?”
“그게 아니고, 형님. 구조를 확인하셔야 위험한 순간에 제대로 대처한다고 하셨습니다, 형님.”
“지독하다, 진짜.”
혼잣말을 뱉어낸 이병렬이 따지듯 시선을 들었다.
“그런데 너는 회사를 어쩌고 여길 왔어?”
“제가 없어도 잘 돌아갑니다, 형님.”
“야, 이 새끼야. 보스가 너를 믿고 맡긴 일인데 그게 할 소리냐? 책임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랑 아닌 게 같아? 잘 돌아가면 뭐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건지, 혹시 터질 일은 없는지, 하다못해 직원들이 점심에 짬뽕을 먹는지, 짜장을 주문했는지, 손바닥 보듯 하는 게 조직 수장의 일이야, 이 새끼야.”
“죄송합니다, 형님.”
“나는 이 새끼야. 프리 스테이션에 사과가 몇 개 남았는지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가! 가서 회사 완전히 꿰뚫기 전까지 나타나지 마.”
어떻게 이병렬을 한 번도 안 찾을 수가 있겠나.
차마 답을 하지 못한 김진용이 고개만 숙였다.
“아참. 전에 보스가 신경 썼던 여자애 있다. 보스 이모 아들이 만나는 여자의 여동생. 그거 때문에 한바탕 비상 걸렸었잖냐? 그 새끼 이름이 뭐였지? 네가 전화했던 놈?”
“최근식이 말씀하십니까, 형님?”
“그래. 그 새끼가 데리고 있던 여자애. 그 여자애 키워줄 방법 있는지 알아봐. 아 참. 아직 보스 이모 아들하고 그 여자가 만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게 먼저인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형님.”
“거봐, 이 새끼야! 찾아보면 할 일이 얼마나 많냐? 보스가 그런 거 부탁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런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조직이 그렇게 돌아간다면 얼마나 멋있냐!”
“예, 형님.”
“가!”
“말씀하신 일 처리한 뒤에 결과 말씀드리러 오겠습니다, 형님. 몸조리하십시오, 형님.”
다시 찾을 명분을 얻은 김진용이 고개를 깊게 숙였고, 이병렬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