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 10화
정적이 길어지자 강성태는 김정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식사를 주문하기 위해 서 있던 참이었다.
아차, 하는 얼굴로 스마폰을 든 김정훈이 급하게 버튼을 눌렀다.
“태완이 형님 식사 가져와.”
통화를 마친 그가 양손을 앞으로 내린 다음이었다.
“내가 보스 좋아하는 건 알지?”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음성으로 조태완이 뜬금없는 고백을 내놓았다.
“국회부의장, JBC 회장, 고검장, 부장판사의 따귀를 때렸다는 말에도 놀라기는 했지만, 확실히 우리 보스는 다르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말을 마친 조태완이 김정훈을 짧게 돌아보았다.
“저놈도 그럴 거야. 강북 대장이라는 장태섭 구역에 들어가 도끼 박아놓고 오는 보스, 아무리 거물이라고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따귀를 갈기는 보스, 말이 돌까 봐 떠들지는 않았지만, 저놈도 보스가 자랑스러웠을 거라고.”
조태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신호를 받은 연주자처럼 김정훈이 고개를 숙였다.
“원자춘은 달라. 그쪽이 공산당인 건 알 거 아냐? 삼합회 핵심이면 이미 당 간부와 연결돼. 그런데 한국에 와서 살해되거나 실종돼 봐. 자칫하면 중국 정부가 나서게 돼.”
급하게 말을 쏟아내던 조태완이 진심을 알고 싶다는 투로 강성태의 표정을 살폈다.
“정말 그럴 건 아니지? 그 정도 이성은 있지?”
“광룡이 도발하는 바람에 서달수가 당했습니다. 그걸 지시한 게 삼합회입니다. 멕시코와 러시아에서 용병을 불러 우리 식구들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중에는 고문님도 포함됐습니다.”
“그거야….”
“용병 중 두 놈을 잡아뒀습니다. 만약 그놈들을 해결하지 못해서 고문님이나 병렬이, 내가 당했다면 저기 정훈이, 진용이, 종환이, 영권이, 줄줄이 다른 조직의 타깃이 됐을 겁니다.”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조태완은 마른침을 삼켰다.
“전에 지방 조직에게 우리를 잡는 조건으로 10억 원씩을 주겠다던 인간들입니다. 그렇게 달려들던 놈들에게 얌전히 식사를 대접해서 보내면 다음에 또 사람을 보낼 겁니다. 더 강한 놈으로요.”
“뒤탈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고문님. 상대 조직이 회칼을 들고 달려들 때 처벌을 계산하면서 상대하셨습니까?”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한편으로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처럼 보였다.
바람 빠지듯 한숨을 내쉰 조태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 칼을 들이댄 놈을 그냥 둔 적은 없었지. 하지만 우리나라 조직이니까 덮을 자신이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줘야지. 그 정도 수완도 있었고.”
혼잣말처럼 생각을 털어놓은 조태완이 강성태를 향해 눈매와 입술을 뒤틀었다.
“알았다. 원자춘이 삼합회 간부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중국이란 변수를 계산했겠지. 어떻게 해결할 건지만 알려주라. 그래야 내가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킬 거 같다.”
“문제가 커지면 아는 회장님에게 부탁해볼 생각입니다. 이번 용병의 타깃에 포함된 데다, 삼합회 인물 실종 정도는 해결할 능력이 있습니다.”
곤잘레스 이두안을 제대로 모르는 조태완에게는 전혀 해결책이 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도 해결이 어렵다면 중국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중국에? 자수하려고?”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을 제거해야죠.”
강성태의 대꾸가 나온 뒤였다.
멈칫했던 조태완이 우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또다시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덩치 넷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지간한 한정식 식탁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반찬과 찌개, 국, 밥을 가져온 덩치들이 테이블을 붙여가며 음식들을 옮겨놓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형님.”
인사한 덩치들이 나간 뒤였다.
혹시 밥을 더 찾을 때를 대비한 것처럼 옆에 내려놓은 쟁반 위에 공깃밥이 세 개나 더 와 있었다.
강성태는 김정훈을 돌아보았다.
“이리와.”
“아닙니다, 형님.”
“와서 함께 먹어. 그리고 부탁 하나 들어줘.”
강성태를 돌아보았던 조태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갯짓을 받고 나서야 김정훈이 조심스럽게 움직여 식탁에 앉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형님.”
공손하게 인사한 김정훈이 숟가락을 들었을 때였다.
“부탁이 뭔데?”
조태완이 나서서 김정훈에게 했던 당부를 들췄다.
“나중에 따로 말하겠습니다.”
“뭔데 그래?”
그저 궁금했던 일이었는데 강성태가 말을 돌리자 느닷없이 조바심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연달아 재촉한 조태완이 궁금한 얼굴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자춘을 제거할 때, 고문님 곁에 바싹 붙어 있으라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밥 먹는데 별!”
툴툴대기는 했는데 조태완은 분명 감동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편치 않은 얼굴로 숟가락을 놀렸다. 원자춘을 제거하겠다는 말이 그에게 그 정도로 부담되는 모양이었다.
어떡해서든 말려야 하는데.
그의 눈빛이 자꾸만 강성태를 향했다.
**
서울로 올라온 최치곤은 곧바로 이병렬의 병실에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너는 이 새끼야,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집에 다녀왔습니다, 형님.”
침대 앞으로 다가온 최치곤을 이병렬이 대강 알겠다는 투로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형님?”
“헛소리하지 말고. 마음의 준비는 마쳤냐?”
“예, 형님.”
“누구누구 데리고 있을 건지도 생각했고?”
“형님과 의논하려고 왔습니다.”
최치곤의 답을 들은 이병렬은 옅게 웃은 뒤에 입을 열었다.
“조직이 커지면 오만 잡일이 생긴다. 내가 앞에서 줄갈이 하겠지만, 뒤에서 모사치는 놈들까지 전부 커버하기는 어려워. 보스가 위험하다고 여기면 일단 저지르고 나한테 알려. 네가 무슨 짓을 했든 간에 우선 네 말을 믿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형님.”
“감사는 이 새끼야. 여자한테 차이고 온 새끼가.”
“예? 형님?”
당황하는 최치곤을 보며 이병렬이 히죽 웃었다.
“야! 우리는 그냥 마법사 하는 거야.”
“그게 뭡니까, 형님?”
“멍청한 새끼. 30년을 홀로 지내면 간단한 마법을 쓰게 된다는 말도 못 들었냐?”
농담을 건넸던 이병렬이 표정을 가라앉혔다.
“마법사란 말 기억해라. 너한테 매력을 느끼는 여자는 없다고 생각해. 느닷없이 아름다운 여자가 너한테 다가오면, 그 순간에 연장 든 놈들이 보스를 노린다고 판단해.”
환자라고 여기기 어려울 정도로 이병렬은 강렬한 눈빛과 표정으로 조언을 내놓았다.
“조금 지나면 온갖 청탁이 너한테 몰릴 거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사심이 생길 정도로 혹한 조건을 듣게 된다면, 그놈이 보스를 노리는 인간이다. 만약에 말이다. 네가 꾐에 넘어간 걸 알게 된다면 보스에게 말하지 않고 내가 너 작업할 거다.”
“혹시 그런 모습을 보이면 차라리 칼을 주십시오, 형님.”
“대답은, 씨발.”
툴툴거리면서도 이병렬은 기특한 눈으로 최치곤을 바라보았다.
**
핏줄이 터진 고강준은 왼쪽 눈알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뺨에는 손바닥을 대고 그린 것처럼 멍 자국이 선명했다.
눈알이야 과로해서 그렇다고 변명한다고 쳐도, 손가락 마디가 선명하게 남은 멍은 둘러댈 방법도 없었다. 결국, 그는 왼쪽 뺨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메디 폼을 붙이고 출근했다.
따귀를 맞고 쓰러질 때의 비참함, 머리칼을 붙들려서 비명을 지르던 순간의 치욕, 연달아 뺨을 얻어맞는 동안 눈앞에서 펑펑 터지던 별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죽인다! 죽이고 싶다!
말뿐이 아니라 누군가 붙들게 한 뒤에, 정말 칼로 배를, 심장을 푹푹 찔러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마음은 그런데 염병할 영상이 문제였다.
성폭행을 했어도 무마할 자신이 있었다.
길거리에서 자위를 하다 걸려도 망신은 떨겠지만, 그럭저럭 넘길 능력도 지녔다.
“읍!”
그날의 영상을 떠올렸던 고강준은 울컥 넘어온 구역질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JBC 소신영 회장, 이우섭 국회부의장, 그 외에도 많은 사람에게 엄청나게 많은 공을 들인 덕분에 검찰총장 자리에 오르는 건 정말이지 시간문제였다.
여기에서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냥 참자니 검찰총장이 되기 전에 마음의 병을 얻어 죽게 생겼다.
“흐음.”
독하게 눈을 뜨고 맞은편 액자를 노려보던 고강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다.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 수법이기도 했다.
강성태를 건드리지는 않지만, 고강준이 어떤 힘을 지녔는지를 보여주고, 이어 분풀이도 좀 하고, 마지막으로 남의 손에 피를 묻히는 수법으로 깡패놈을 끝장낼 수도 있었다.
마음을 굳힌 고강준은 책상 위에 있는 구내전화기를 들었다.
“나다. 오후 2시까지 범단 자료 들고 내 방으로 와. 그래. 특히 서울, 강남, 계보 철저하게 파악해서 가져와. 말 나가지 않게 조심하고. 특종처리할지 모르니까 기자단에는 아예 입도 뻥긋하지 마.”
통화를 마친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긴 숨을 내쉬었다.
“내 손으로 하지 못하면, 다른 놈 손을 빌릴 수도 있지.”
그나마 마음이 좀 풀린 고강준이 비릿하게 웃었다.
**
이세종은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다른 손으로 머리칼을 긁었다.
- 이러다가 일 망가지면 다시는 시공사와 일 못 합니다.
출근하기 무섭게 처남 윤중선이 전화해서 징징대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 매형. 아직 저쪽에서 아무도 안 왔습니다. 도끼도 그대로 있고요. 그러니까 유섭우란 분과 한두 명이라도 보내주십시오.
“그게….”
- 아니면 오늘 시공사 투자금이 들어오는데 뭐라고 변명할 거리라도 주셔야죠.
“그런 건 좀 알아서 돌리면 안 돼?”
- 투자금을 받으면서 엉뚱하게 말 돌렸다가 일 틀어지면 사기죄로 들어갑니다.
윤중선의 대꾸에 이세종은 다시 말문이 턱 막혔다.
- 매형. 시공사가 이런 쪽에서는 정보가 엄청나게 빠릅니다. 혹시 신강남파와 일이 틀어진 겁니까? 그런 거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뒷수습이라도 합니다.
“그게 그렇게 됐어.”
- 예?
“그렇게 된 거 같다고.”
이세종이 투박하게 말을 건네자 세상이 아예 무너진 듯한 윤중선의 한숨이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 용역 하루 동원하는 데 드는 비용이 2천만 원입니다. 그 외에 부대비용은 말도 못 합니다. 신강남파 강성태 회장님을 만나게는 못 해주십니까? 제가 무릎이라도 꿇겠습니다.
“에이, 참. 지금은 뭘 하기 어렵다니까? 그러지 말고 어느 정도는 기선을 제압한 거니까 다른 조직을 대보면 어때?”
- 모르셔서 그런데요. 태섭이파 두목 장태섭이 강북 대장이라고 불립니다. 거기에 신강남파 강성태 회장이 도끼 박아놨는데 누가 들어오겠습니까.
“일단 끊어.”
- 매형? 매형?
애타게 부르는 윤중선의 음성을 무시한 이세종이 통화를 마친 뒤에 스마트폰을 책상에 툭 던졌다.
“하이, 씨!”
머리칼을 벅벅 긁어대던 이세종은 문득 궁금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엄청난 거물들과 함께 JBC 회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들었다.
강성태 성격에 절대 그냥 오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뭔가 일이 벌어졌을 텐데 묘할 정도로 방송국은 조용했다.
신강남파의 배경, VIP 대접받던 클럽, 그리고 백억 대의 이익을 기대했던 개발 사업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왜 그걸 망설였지?”
책상에 올린 팔로 얼굴을 문지르던 이세종은 한숨을 푹 내쉬며 창을 돌아보았다.
강성태를 만나봐?
그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조태완도 무섭지만, 냉정하게 바라보는 강성태의 눈빛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뭔가 들고 갈 게 필요해. 뭔가.’
강성태가 만족해할 만한 선물, 이세종은 눈가를 좁힌 채 타는 냄새가 날 정도로 머리를 굴렸다.
**
승용차가 아우라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정장 차림의 덩치 넷이 깊게 고개를 숙인 뒤에 문으로 다가왔다.
뒷좌석에서 내린 강성태가 주변을 돌아보는 사이, 조수석에서 내린 김정훈이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내렸다.
몸에 꼭 맞는 정장과 셔츠차림의 강성태, 조금은 넉넉한 재킷과 셔츠, 그리고 스카프를 두른 조태완, 검은 정장 차림의 덩치들, 고개를 깊게 숙이며 조심하는 도어맨과 발렛 직원들.
승용차와 택시를 기다리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성태와 조태완에게 달려들었다.
강성태는 조태완, 김정훈과 함께 로비에 들어섰다.
“나오셨습니까, 형님?”
안쪽에서 기다렸던 정영권과 신강남파 덩치들이 서열에 따라 줄줄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도 있었다.
한가한 시간이라고 해도 입구보다 많은 손님들이 있었다. 시선들이 달려드는 로비에 오래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었다.
“올라가자.”
강성태가 걸음을 옮기자 김정훈이 휠체어를 밀었고, 정영권과 아르윈이 곁으로 붙었다.
“동선은 확인했어?”
“예, 형님.”
강성태가 짧게 던진 질문에 아르윈이 무겁게 답했다.
“이동은?”
“공항에서 함께 움직였던 조직원들로 꾸렸고, 지하에 승합차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형님.”
지금 나누는 대화를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조태완과 김정훈밖에 없었다.
강성태와 조태완, 김정훈, 정영권, 아르윈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앞을 지키고 있던 덩치들이 계단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클럽은 어때?”
“살펴주신 덕분에 잘 이끌고 있습니다, 형님.”
강성태가 던진 질문에 정영권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클럽을 맡더니 무게가 생겼고, 눈에 힘도 실렸다. 거기에 이광준과 김종수를 두들길 때, 한몫했다는 자부심도 눈가에 묻어 있었다.
“원자춘은?”
“얌전히 룸에 있습니다, 형님.”
정영권이 다시 답을 할 때, 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오셨습니까, 형님?”
신강남파 덩치들이 서열에 따라 물결치듯 강성태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