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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 8화 (240/513)

12권 - 8화

방지병원에 도착한 강성태는 곧장 이병렬의 병실로 향했다.

제법 생기가 올라온 눈빛으로 강성태를 바라보는 이병렬의 눈이 좋았다. 악착같이 달려가 특집 보도를 막은 대가를 받은 느낌도 들었다.

“뭔데 표정이 그래?”

어쩌면 처음 의논했던 대로 이병렬이 보스를 맡고, 강성태가 차라리 두 번째였으면 어땠을까?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인 조봉진이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프리스테이션은?”

“우선 닫아두었습니다, 형님. 적당한 업자 나오면 넘길 생각입니다.”

이병렬, 김진용, 서달수, 조봉진에게는 많은 추억과 애환이 담긴 주점이었고,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래도 괜찮겠냐는 투로 강성태는 이병렬을 돌아보았다.

“진용이도 엔터테인먼트로 가고, 관리할 사람이 없잖아. 나중에 은퇴하면 그런 가게 하나 꼭 차려주라.”

침대 옆에 앉는 강성태를 향해 이병렬이 농담 반, 진담 반의 소망을 전했다.

“갔던 일은?”

“나만 당할 수는 없으니까 영상 한 번 볼래?”

“뭔데?”

궁금해하는 이병렬에게 강성태는 별장의 일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흐느끼는 웃음을 터트렸던 이병렬이 배에 손을 올리며 통증을 이기기 위해 애썼다.

“그걸 진짜 줄줄이 세워놓고 때렸어? 고검장에 부의장을?”

“소 회장이 소파랑 같이 넘어가는 거 보더니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가던데?”

“씨발!”

또다시 웃음을 터진 이병렬은 아예 우는 표정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잠시 뒤에 숨을 길게 내쉬며 웃음을 누른 이병렬이 걱정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도를 막은 건 잘했는데 그 인간들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알지?”

강성태는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넷이서 서로 싸우게 해야지. 지켜볼 만하겠지?”

“어떻게 할 건데?”

“하나씩 준비하려고.”

“조직 보스 안 했으면 어쩔 뻔했냐?”

이병렬의 질문에 강성태는 옅게 웃고 말았다.

“이세종이, 보도국장 새끼는?”

“고문님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니까 내일 만나보면 알겠지.”

강성태의 말을 들은 이병렬이 뭔가 짐작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바닥에서 수완 좋은 거로 태완이 형님 누를 사람 별로 없다. 계산도 빠르시고.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결정을 하셨더라도 다른 소리 하지 말고 따라.”

분명 이병렬은 뭔가 짐작하는 눈치였다. 그것도 강성태가 모르는 무언가를.

“사람 사는 거 진짜 웃기지 않냐? 태완이 형님이 고문 역할을 저렇게 열심히 할 거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했었겠냐? 그런 거 보면 너는 하늘이 보스를 시키려고 처음부터 일을 하나씩 만들어준 거지.”

이병렬은 정말 모를까?

이렇게 누워 있는 자신 때문에 강성태가 보스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는걸?

강성태의 표정을 힐끔 본 이병렬이 궁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치곤이 이 새끼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주변 정리하지 않겠냐?”

“애새끼가. 주변을 정리할 게 뭐 있어? 그건 그렇고. 내일은?”

“조금 뒤에 아르윈 만나서 준비하려고.”

“바쁘면 가 봐.”

“좀 쉬자!”

툴툴대는 음성이었는데 그 안에 든 감정과 장난기를 알아챈 이병렬이 보기 좋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

이세종은 억울하고, 황당하다는 표정과 태도로 병실에 들어섰다.

“저 왔습니다, 형님.”

“형님이라니? 내가 왜 네 형님이야?”

“예? 형님?”

조태완은 비둘기의 눈알처럼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눈알로 이세종을 바라보았다.

“형님. 그게 아니고….”

“누가 앉으래?”

“예? 형님?”

침대에 있는 의자에 앉으려던 이세종이 엉거주춤한 태도로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김정훈을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전 같으면 고개를 깊게 숙였을 김정훈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무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저기, 형님….”

“긴말 할 거 없고, 앞으로 절대 식구 이름 팔고 다니지 마라. 그리고 보스가 개발 사업을 끝까지 챙겨준다고 한 모양인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돌아가.”

“예? 형님?”

놀란 이세종이 습관처럼 깡패 흉내를 낸 직후였다.

“너도 사람 새끼라면 최소한 양심을 지니고 살아. 그동안 나한테 받아 처먹은 돈, 클럽에 이놈 저놈 데리고 가서 처마신 술, 그거로도 모자라 보스가 직접 나서서 남의 구역에 도끼까지 박아줬다.”

하얗게 서리가 내린 눈빛으로 조태완이 말을 뱉었다.

“백억이 넘는 돈을 처먹는 개발 사업까지 찾아다 주는데 회장과 관련한 보도라고 그냥 나와?”

“그게 아니라…….”

“닥쳐, 이 새끼야. 아가리를 찢어버리기 전에.”

그동안 잊고 있었다.

처음 그의 화려한 빌라 거실에서 두들겨 맞을 때 조태완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는지.

당시의 눈매와 음성, 표정, 그리고 등 뒤에 선 김정훈까지, 이세종은 침대 앞에서 실제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보도? 회장은 무서워서 못 하겠는데 우리 조직은 만만하다는 거냐? 어디 한번 해 봐라. 네놈 집구석 어떻게 되는지 나도 궁금하다. 보스가 그런 일을 시키지는 않겠지만, 그동안 너한테 고개 숙인 저기 정훈이나 애들이 가만있을 거 같으냐?”

이세종은 대꾸도 못 하고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나가, 이 더러운 새끼야!”

조태완이 턱으로 가리키자 김정훈이 곧장 다가왔다.

도망치듯 문으로 움직인 이세종은 그제야 인사를 못 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처럼 침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 뒤에 다급한 동작으로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힌 다음이었다.

“노익이한테 전화해서 내가 잠깐 보잔다고 해라.”

“예, 형님.”

조태완이 지시하자 김정훈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

최치곤은 평택의 집에 있었다.

부친 최재섭과 함께 갈비성에 가서 돼지갈비로 저녁을 먹었고,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TV를 보았다.

“과일 먹을래?”

“그걸 왜?”

“하루에 한 번은 햇빛을 직접 받은 걸 먹여야지. 아까 보니까 쌈에는 손도 대지 않더만.”

“돼지 먹었잖아. 걔들도 다 햇빛 받고 살았을 거 아냐?”

말을 말지, 하는 표정으로 최재섭은 냉장고를 닫았다.

2층 양옥이었다.

좁은 거실의 오래된 창틀 앞에 놓인 낡은 소파와 종일 켜두는 TV를 최치곤이 차지했는데도 최재섭은 나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언제 올라가냐?”

“내일.”

소파의 팔걸이에 머리를 걸치고 누운 최치곤이 기다렸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커피숍에서 무슨 일 있었냐?”

“일은.”

“너, 거기 아가씨 마음에 뒀었지?”

“그랬는데 깨끗하게 차였어.”

최치곤이 이러고 있는 이유를 알겠다는 듯 최재섭은 TV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전에 했던 오락프로그램의 재방송이었는데 뉴스 외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최재섭은 그저 아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 반사적으로 지켜보았다.

“아버지.”

그런 최재섭을 최치곤이 불렀다.

여전히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걸친 최치곤의 목소리가 제법 진지했다.

“아버지, 돈 없다.”

“미안해.”

혹시나 싶어서 건넨 말에 아들 최치곤은 뜬금없는 사과를 내놓았다.

“사고치고 도망 왔었냐? 그런데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혹시 조금 있다가 잡으러 오냐?”

놀란 최재섭의 질문에도 최치곤은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

“큰 죄를 지었어? 얼마나 있어야 하는데? 이 집 팔아?”

“그런 거 아냐.”

“그럼 뭐야? 뭔데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해?”

조급한 최재섭이 재촉하자 최치곤이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나한테 정말 많은 걸 해줬는데 내가 너무한 거 같아서. 그냥 아버지하고 이렇게 며칠 시간 보내고 싶었어. 그게 다야.”

“너, 사람 죽였구나!”

“아니라니까.”

“혹시 카페 아가씨한테 몹쓸 짓 했어?”

“에이, 진짜!”

“그런데 왜 이래?”

불안해하는 최재섭의 모습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최치곤이 웃었다.

“카페 그만뒀어. 성태랑 의논해서 새로 직장 나가기로 했고. 바빠질 거 같은데 그전에 아버지랑 이렇게 며칠 보내고 싶었어. 생각해보니까 다쳐서 내려온 적 말고, 아버지랑 지내본 적이 없더라고.”

“카페는 왜? 그 아가씨가 너 죽어도 못 보겠대?”

“그것도 있는데, 성태가 새로 시작한 일을 같이 해보고 싶더라고. 카페 일 그만뒀다고 하면 아버지가 실망할 거라고 걱정하는데 내가 그냥 하겠다고 우겼어.”

“무슨 일인데?”

“연예 기획사도 하고, 보디가드도 하고, 또 심부름도 하는 일.”

당장 이해하지 못한 최재섭은 눈만 껌벅였다.

“그냥 심부름센터라고 생각해.”

“성태가 하는 거 맞지?”

고개를 끄덕여 답한 최치곤은 또 옆으로 기울어져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댔다.

“내일 올라가면 당분간 바쁠 거야. 아버지는 여자친구도 없어? 있으면 데려와. 내가 넙죽 어머니, 하고 절할게.”

“성태하고 하는 일 맞지?”

“그렇다니까. 나중에 성태한테 직접 물어봐.”

마음이 반쯤 놓인 얼굴로 최재섭이 TV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일 몇 시에 가냐?”

“아침 먹고.”

TV를 향해 최재섭이 물었고, 역시 오락 프로를 보며 최치곤이 답했다.

슬쩍 시선을 내린 최치곤 앞에서 늙어버린 아버지는 별 재미없는 TV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오락프로그램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아들 옆에 있는 게 좋아서 그런다는 사실을 최치곤은 처음으로 실감했다.

땅 팔고, 집 팔고, 사고만 치는 아들이 밉지 않았을까?

이상하게 늙어버린 최재섭의 얼굴과 몸이 최치곤의 가슴에 깊게 담겼다.

**

승용차가 멈추자 기다리고 있던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원들이 곧장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형님?”

차에서 내린 강성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안산의 공장이었다.

주변은 이미 다 문을 닫아서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의 라이트가 유독 밝게 보였다.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아르윈이 공장문을 향해 움직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파레트와 몇 가지 자재들이 쌓여 있었고, 그 뒤로 돌아가자 공장 건물 기둥에 묶인 두 명이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입에 물린 재갈, 양팔을 하나씩 감아서 기둥에 묶은 밧줄, 바싹 묶어둔 무릎과 다리, 저렇게 계속 두었는지 두 놈은 진이 완전히 빠진 얼굴이었다.

강성태를 본 두 놈이 너무도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왜 저러냐는 투로 강성태는 아르윈을 돌아보았다.

“물을 달라는 거 같습니다, 형님.”

“여태 물도 안 줬어?”

“괜히 소변 핑계로 일 만들까 봐, 여기 데려온 뒤로 계속 저렇게 뒀습니다, 형님.”

답을 하는 아르윈의 목덜미에서 해적 문신이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강성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한 인간들이었다.

확실히 지키라고 했었다.

아르윈이 좀 과하게 대한 면이 있지만, 방심했다가 일을 만드는 것보다는 확실히 현명한 처리였다.

“물을 가져와.”

“예, 형님.”

아르윈이 고갯짓을 하자 필리핀 조직원이 작은 생수병을 가져왔다.

기둥에 묶인 놈 앞에 자세를 낮춘 강성태는 왼편에 있는 놈의 입을 가로지른 손수건을 당겨 아래로 내렸다.

“푸후.”

많이 힘들었는지 재갈을 풀기 무섭게 턱을 좌우로 움직인 놈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물병의 뚜껑을 연 강성태는 놈의 입을 향해 물을 천천히 기울여주었다.

서너 모금을 마신 놈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입을 벌렸다. 그렇게 몇 번에 나눠 물 한 병을 마시고 난 놈이 기다란 숨을 토해냈다.

숨을 돌린 놈이 강성태의 눈을 바라본 다음이었다.

강성태는 재갈을 당겨 놈의 입을 다시 막았다.

아직 물을 못 마신 놈이 애타는 눈으로 강성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일 준비는?”

“말씀하신 준비는 다 해놨습니다. 혹시 몰라서 여기 다섯 명과는 연습도 했습니다. 이리와.”

강성태가 묻자 아르윈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그런 뒤에 한쪽에 있던 조직원 다섯을 불렀다.

“모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조직원입니다.”

아르윈이 소개하자 다섯 명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여 인사했다.

“공항에서 고생한 것도 있고, 끝나고 뭔가 해주고 싶은데 원하는 걸 생각해 놔.”

강성태의 말을 들은 아르윈이 고개를 돌려 조직원들을 돌아보았다.

“가수들을 제대로 출연시켜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형님.”

“그러지 말고, 하나 말해 봐.”

목덜미의 해적이 어색한 표정을 지은 다음이었다.

“우리가 운영하는 작은 업소 하나 가져보고 싶습니다, 형님.”

예상했던 것보다 소박한 소망을 그가 내놓았다.

“가게 정도는 얼마든지 꾸미잖아?”

“식당은 아무 문제 없는데 우리 가수들이 공연하는 업장은 아직 어렵습니다, 형님. 처음 오는 가수들이 적응하고, 우리끼리 편하게 운영할 업장이 하나 가지고 싶습니다.”

아르윈이 업장 하나를 못 꾸민다고?

강성태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목덜미의 해적과 아르윈을 번갈아 보았다.

“형님이 살펴주시기 전에 가수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과 비슷합니다. 필리핀 출연자나 노동자들 관리는 몰라도 업장을 차리면 주류 납품부터 지역 건달들과 충돌이 잦습니다, 형님.”

“안산에서는? 원래 그쪽에서는 활동했었던 거 아냐?”

“형님께서 통합하셨으니까 어떨지 모르지만, 이전에도 업장을 직접 개설하는 건 어려웠습니다, 형님.”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월동 어때?”

“예? 형님?”

“지하에 주점하던 곳이 있는데 작게나마 무대하고, 노래방 기계 들어 있는 룸이 여러 개 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반가워하는 아르윈의 얼굴을 보며 강성태는 픽 웃었다.

“내일 일 마치고 한 번 가봐. 신월동 오거리에서 바로 보여. 프리 스테이션.”

“감사합니다, 형님.”

깊게 인사한 아르윈이 자랑이라도 하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내일은 힘들 수 있어. 준비 철저히 해.”

“맡겨주십시오, 형님.”

가벼운 다짐을 던진 강성태가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읍! 으읍!”

기둥에 묶인 놈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투로 애타는 소리를 질렀다.

놈을 돌아본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궁금해하는 놈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던 강성태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내일 죽게 될 거란 말을 굳이 해서 좋을 게 뭐 있겠나.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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