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권 - 3화 (235/513)

12권 - 3화

김진용과 조봉진이 지켜보는 앞이었다.

2인자가 돼달라는 강성태의 요구에 이병렬은 분명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하지 뭐, 2인자. 대신 내가 뒷감당 다 할 테니까 진짜 제대로 된 조직 만들어주라. 그래야 2인자 하는 보람이 있지.”

남자라면, 그것도 이병렬 정도 되는 실력과 강단을 갖춘 인물이라면 보스가 되고 싶은 포부쯤 지녔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2인자를 자청하며 강성태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왜 그래? 감동했어?”

실없는 이병렬의 농담에 강성태는 가볍게 웃었다.

“참. 조태완 고문의 눈치가 이상하던데, 장태섭과 안 좋은 일이 있었어?”

“그거? 나도 들은 말이긴 한데.”

김진용을 올려다보았던 이병렬이 강성태에게 시선을 가져왔다.

“태완이 형님 엔터 소속 연예인이 강북 업소에 출연했는데 장태섭이 졸라 밟아버렸나 보더라고. 그때는 나도 어영부영 신월동에 발 디디고 있을 때고, 프리 스테이션을 운영하고 있어서 귀동냥으로 들었다.”

“고문님이 그런 일을 참았어?”

“참은 게 아니라 눌린 거지.”

눌렸다고? 조태완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강성태의 눈을 보며 이병렬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지? 장태섭이 모사꾼이라고. 개새끼가 신호남파 도진이 형님하고 노익이 형님까지 꼬드겨 놓고 명분 잡기 위해 나선 거라서 태완이 형님이 달려갔다면 그 모든 세력을 한 번에 상대해야 했던 거지.”

“양아치네.”

“그렇다니까. 누가 우리 구역에 와서 도끼 박아놓으면 내일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꼴을 그냥 보겠냐고? 그런데 장태섭은 아마 그대로 뒀을 거다. 그러다가 자신 생길 정도로 세력을 긁어모으고 나면 그때 가서 도끼 뽑겠지. 그것도 졸라 큰소리치면서.”

설명을 마친 이병렬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몸이 멀쩡했다면 분명 도끼 앞에서 장태섭을 기다릴 성격이라 이렇게 병원에 있는 게 몹시 아쉬운 얼굴이었다.

“시행 일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시행사가 있다며?”

“시선 개발. 윤중선.”

“지금부터는 누가 많이 합의하느냐의 싸움이니까 그 사람한테 맡겨둬. 장태섭이 너무 양아치 짓을 해놔서 그런 쪽으로는 우리가 훨씬 유리할 거야.”

“결국, 시선 개발이 합의서를 받기 시작하면 싫든, 좋든, 장태섭이 달려드는 거네.”

“그렇지. 시선 개발하고, 장태섭 모두 사놓은 토지와 주택이 있을 거거든. 물론 강제로 편입하는 방법도 있는데 아마 마지막에는 장태섭이한테서 그걸 사와야 할 거다.”

예상보다 기간이 꽤 길어지겠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거기에다 조태완이 왜 그렇게 다른 조직을 조심하라며 당부했는지도 확실하게 알았다.

“오늘은 뭐 해?”

“원주에 가보려고.”

강성태는 마약 파티와 관련된 일을 이병렬에게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일이 진짜 많네, 씨발.”

내용을 모두 들은 이병렬이 대놓고 툴툴거렸다.

그의 표정과 눈빛으로 봐서는 이런 순간에 병원에 있는 게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한 느낌이었다.

**

강남의 중급 호텔이었다.

입구에 도착한 박노익은 운전하던 덩치와 조수석에 탄 덩치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로비로 향했다.

호텔 커피숍에 들어선 그는,

‘에이, 쫄보 새끼.’

안쪽에서 몸을 일으키는 장태섭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오전에 강성태가 도끼를 찍어놓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남에 넘어오려니 졸리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박노익도 혼자 들어서는 자리에 오갑철과 덩치 둘을 병풍 세울 줄은 몰랐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러네. 우선 앉자.”

박노익이 앉기를 기다렸던 장태섭이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 뒤에 동생들은 저쪽에 가 있으라고 하지?”

“예, 형님.”

박노익이 혼자 들어선 것을 확인한 장태섭이 그제야 고개를 뒤로 돌려 건너편 자리를 가리켰다.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상체를 깊숙하게 숙인 오갑철과 덩치 둘이 건너편 테이블에 앉았다.

“강북 대장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를 찾아?”

“형님 혹시 강성태란 놈 만나보신 적 있습니까?”

“강성태? 신강남파 강성태를 말하는 거야?”

“예, 형님.”

“클럽에서 잠깐 인사한 적은 있지. 갑자기 강성태는 왜?”

내용을 짐작하지만, 박노익은 시치미를 뚝 떼며 장태섭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니 그 개새끼가 갑자기 다 끝나가는 성북구 개발 사업에 고춧가루를 뿌리는데 혹시 이유를 아시는가 해서 그렇습니다, 형님.”

“강성태가?”

“예, 형님. 이 씨발 새끼가 오늘 오전에 농성하는 놈들 앞에 도끼를 박아놓고, 달려간 경일이를 아주 아작을 내놨습니다.”

박노익은 자연스럽게 클럽에서 보았던 강성태를 떠올렸다.

거침없이 이광준을 제압하던 모습, 한 방에 김종수를 쓰러트리던 강렬함,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박노익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강단.

“퉤.”

아무리 중급 호텔이라고 해도, 다른 손님들까지 있는데 장태섭은 고개를 비틀어 커피숍 바닥에 침을 뱉고 있었다.

‘못 배운 양아치 새끼.’

생각은 그랬는데 박노익은 내색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나야 마귀들 데리고 상장사 일만 하잖아. 그런 문제면 내가 도울 게 없겠는데? 중재를 해주려고 해도 내가 나설 건더기가 없잖아?”

“그게 아니고, 형님. 제가 강성태를 깨버릴 테니까 강남 손에 넣으시겠습니까?”

“신강남파가 쥐고 있는 클럽과 카지노가 전부 다 돈다발인데 그걸 왜 날 줘?”

“형님이 강남 대장이시니까 신강남파 깨는 거 일단 말씀드리고, 인수하는 것도 형님 뜻에 따르려고 하는 겁니다.”

어쩌면 예상했던 모습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지, 장태섭의 시커먼 속을 확인한 박노익은 입술을 비틀며 쓴웃음을 흘렸다.

모사꾼답게 장태섭은 클럽과 카지노를 박노익의 눈앞에 대고 흔들며 강성태를 함께 상대하자며 꼬드기고 있었다.

아직 손에 쥐지도 못한 클럽과 카지노로 말이다.

“나는 별로 관심 없는데?”

“일은 제가 다 할 테니까 형님은 그냥 지켜보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대신 제가 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러니까 클럽과 카지노 인수와 처분만 도와주십시오.”

“글쎄.”

빨래질로 유명한 장태섭의 저 말에 혹했던 사람은 모두 뒤가 좋지 않았다. 거기에 박노익은 헛된 욕심으로 강성태에게 달려들었던 문도진의 최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 모든 걸 떠나서, 깔끔하고 시원시원한 강성태와 커피숍 바닥에 침을 뱉는 장태섭, 둘 중 한 명과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한다면 박노익은 전자였다.

뜨뜻미지근한 박노익의 반응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형님이 강남 대장인데 강성태같이 족보도 없는 놈이 설치는 걸 지켜만 보실 겁니까? 이번에 아예 강남을 손에 넣으십시오, 형님.”

“나는 뭐 마귀들 뒤 봐줄 때하고, 박승양이라고 먼 친척 되는 사채업자 일 봐줄 때나 동생들 움직이는 게 전부라서 힘도 없어.”

“그럼 형님. 클럽과 카지노를 인수할 회장님들을 소개해 주실 수는 있습니까?”

박노익의 태도를 확인한 장태섭이 마지막 한 자락을 깔았다.

“그거야 아까 말한 박승양이라는 먼 친척이 기업 회장님들을 많이 아니까 그쪽 통해 알아볼 수는 있지.”

“알겠습니다, 형님. 일 마치면 그거나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지 뭐.”

“안 가십니까?”

“먼저 가. 나는 커피나 한잔하고 가게.”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자리에서 일어난 장태섭이 고개를 짧게 숙이고 걸음을 옮기자, 건너편에 있던 오갑철과 덩치 둘이 상체를 구부린 뒤에 뒤따랐다.

“양아치 새끼들.”

커피숍을 빠져나가는 장태섭과 오갑철을 보며 박노익은 거친 평가를 혼잣말로 내뱉었다.

장태섭이 아니라 강성태가 이 자리에 나와서 성북구 개발 사업을 도와달라고 했으면 어떻게 했을까?

박노익은 다시 한 번 샴페인 병으로 이광준의 머리를 세차게 내리치던 강성태를 떠올렸다.

다들 몸 사리느라 동생들 시키는 요즘 세상에 강성태는 참 오랜만에 보는 진짜 보스의 모습이었다.

강성태와 장태섭이 맞붙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박노익은 강성태 쪽에 1억 원쯤 시원하게 배팅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박노익은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 오라버니 어깨에 기대어 볼래요. 커다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통화음으로 들리는 노래를 들으며 박노익이 입술을 뒤틀었을 때였다.

- 어이구, 박 회장님. 어쩐 일이셔?

얍삽한 음성이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 나야 뭐 늘 그렇지요. 우리 박 회장님은 요즘 재미가 어떠셔?

“나야 늘 그렇지 뭐. 저기, 미안한데 성북구에 개발 사업이 하나 있는데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 요즘 내가 선물하고 옵션에 빠져서 시간이 없는데 어쩌지요? 아시지? 선물, 옵션? 홱홱홱홱, 몇 초 만에 수십억이 오가는 거래?

“그거 함부로 하다가 큰일 나.”

- 에헤이! 내가 누구요? 그러지 말고 점심 안 먹었으면 여기 증권사로 와요. 여기 회장이 점심 살 테니까.

“밥은 먹었고, 하여간 부탁한 것 좀 알아봐 주소.”

박승양의 요란스러운 화법에 질린 박노익이 용건을 전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박승양이 움직이면 시공사가 누군지, 현재 장태섭이 어느 정도 승산이 있는지, 가져다 쓴 돈은 얼마인지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일단 알아보는 데까지만.”

혼잣말을 마친 박노익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

방지병원 바로 옆의 커피전문점에 도착한 강성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왔어?”

재킷과 바지, 블라우스, 그리고 안쪽 주머니에 검사 신분증, 옷이 정말 한 벌밖에 없는지 바깥의 테이블에 앉은 강선영은 늘 보던 복장 그대로였다.

“깡패, 뭐 마실래?”

“내가 사올 테니까 마시고 싶은 거 말해.”

“나는 아이스 커피.”

안으로 들어간 강성태는 반갑게 맞아주는 여주인에게 아이스 커피와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여기에서 드시나요?”

“아니요. 가져갈 거라서 일회용 컵에 부탁합니다.”

오늘도 주문대 안에 있는 남자는 강성태를 불편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최치곤도 커피알리고에서만큼은 억지로 웃으려 애쓰는데 참 한결같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옅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강선영이 테이블에 앉아 있지만 않았다면 그냥 갔을 거다. 그런데 커피전문점을 운영하다 보니까 이런 순간이면 고지식할 정도로 주문을 외면하지 못했다.

얼른 받아서 나가면 되지.

강성태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여주인이 주문한 커피를 건네주며 불편한 기다림이 끝났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얼른 다른 커피전문점을 찾는 게 좋겠다.

밖으로 나선 강성태는 테이블에 앉은 강선영에게 일어서라는 고갯짓을 던졌다.

“마시고 가.”

“그럴 거면 머그잔에 받아야 했어. 가는 길에 마시면 되니까 얼른 일어나.”

툴툴대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강선영이 강성태를 따라 걸었다.

“장소는 알아뒀어?”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여 답해주었다.

“얼마나 걸려?”

“두 시간 잡으면 넉넉해. 가서 저녁 먹고 시간 좀 보내다가 들어갈 거니까 급할 거 없어.”

“확실한 거지?”

강선영이 다짐처럼 질문했을 때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덩치가 급하게 고개를 숙인 뒤에 강성태가 들고 있던 커피를 받으려고 다가왔다.

“놔두고, 얼른 출발하자.”

강성태는 덩치가 열어주는 뒷좌석을 또다시 고개로 가리켰다.

뒷문으로 들어선 강선영이 앞쪽 좌석의 등받이를 붙들고 운전석 뒷자리로 움직였다.

지켜보던 강성태가 커피를 든 채 뒷좌석에 앉자 문을 닫아준 덩치가 고개를 깊게 숙인 뒤에 조수석에 올랐다.

“여기, 커피.”

강성태가 아이스 커피를 건네줄 때 승용차는 이미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강한 척하지만, 막상 승용차가 출발하자 강선영은 확실히 피어나는 긴장에 눌리는 표정이었다. 거기에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덩치들, 최고급 독일제 승용차가 주는 부담이 강선영을 딱딱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원래는 현장을 찍는 대로 뉴스에 내보내려고 했는데 어떤 모습이 있을지 몰라서 일단 보도는 보류했다.”

일회용 컵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문 강선영이 고개만 돌렸다.

“대신 보도팀은 그대로 다 불렀다. 우선 목격자가 많아야 저쪽에서 함부로 우리를 누를 생각을 못 할 테고, 다음으로 보도국장의 입지를 최대한 세워두는 게 앞으로 우리가 일할 때 편할 거 같아서 그랬다.”

“그럼 나는?”

“동생 복수하고 싶다며?”

“그러니까. 진짜 죄지은 놈들이 없는데 복수가 돼?”

오늘 계획을 모두 알고 있던 강선영이 출발한 승용차 안에서 원론적인 질문을 던졌다.

몰라서 이러지는 않을 테니 복수의 방법을 돌려서 묻는 게 분명했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이냐?”

“깡패.”

“그럼 내가 그 세 사람을 어떻게 할 거 같냐?”

“때려?”

강성태는 픽 웃으며 답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 건데?”

“그 인간들이 하는 게 마약 파티다. 당한 사람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죽음으로 호소하는 데도 그걸 모두 권력으로 덮은 거고.”

강선영이 마른침을 삼키며 강성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독하게 마음먹어.”

“나? 내가 왜?”

“잔인한 광경을 보게 될 테니까.”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보던 강선영이 뭔가가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진짜 왜 이렇게까지 하니?”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아. 그중에서 가장 악독한 방법 중 하나가 마약으로 인생을 망가트리는 거거든. 높은 자리에 있는 놈들이 그러기 시작하면 아들놈, 주변 놈들이 따라 하고 결국 그게 놀이처럼 번져.”

“그러니까 왜 네가 이렇게까지 하냐고?”

“그날 주점에서 거기 있는 놈들한테 당했다고 생각해 봐. 그랬다면 너는 죽어도 끝나지 않을 거 같은 지옥에 떨어지는 거야. 그것도 살아 있는 채로. 그럼 넌 어떻게 할래?”

“어차피 죽을 거 다 죽여버리고 나도 죽지 뭐.”

“각오는 그런데 방법이 없어.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법에 호소해 봐야 권력에 눌리고, 언론에 매달려도 힘에 눌린 사람들의 소원은 네가 방금 말한 대로 죽이고 함께 죽는 거 아닐까? 그런 일 하는 깡패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던 강선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검사가 깡패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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