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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권 - 20화 (231/513)

11권 - 20화

최치곤이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속을 들여다보는 친구라면 눈앞의 이병렬은 늦게 만난 영혼의 선배나 길잡이의 느낌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실망시키지 말라는 눈빛으로 이병렬이 다부지게 물었고,

“도끼? 가서 하나 박아주고 오지 뭐.”

별거 아니란 투로 강성태가 받아쳤다.

왜 이렇게 다부지게 답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먼저 보낸 서달수와 누워 있는 이병렬에 대한 미안함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었다.

“혼자 가는 건 아니다. 알지?”

“몇 명이나 데려가?”

순순히 따르는 강성태가 의아한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고분고분해?”

“제대로 된 조직 만들려고. 다시는 나와 함께하는 사람 잃지 않으려고. 이병렬 혼자 두지 않으려고.”

이병렬의 질문에 강성태는 솔직하게 지금 심정을 털어놓았다.

“씨발. 그런 자리에는 내가 꼭 있어 줘야 하는데.”

아쉬움을 토해낸 이병렬이 한숨을 내쉴 때였다.

응급실 통로에서 다가온 덩치 둘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형님.”

강성태에게 인사한 김진용과 조봉진이 몸을 돌려 이병렬에게 고개 숙였다.

김진용을 올려다보는 순간, 이병렬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김진용 역시 이병렬을 보면서 억지로 눌러두었던 슬픔이 울컥 올라온 것처럼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누구도 강성태와 최치곤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세월의 깊이가 있다면 이병렬과 김진용에게도 비슷한 무언가가 당연히 있겠다.

이럴 때는 비켜주는 게 도리였다.

슬픔으로 바뀌었지만, 그들만의 추억을 곱씹을 공간에 강성태가 버티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어디 가?”

“잠깐 눈 좀 붙이려고.”

“그러지 말고 오늘은 진용이하고 봉진이 있게 들어가.”

지난 이틀을 힘겹게 견뎠는데 괜찮을까?

두 사람을 돌아보았던 강성태는 이내 수긍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

몸을 돌리려는 강성태를 이병렬이 불렀다.

들어가라고 해놓고, 막상 자리를 비켜주는 강성태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 이병렬, 김진용, 조봉진, 세 사람이 작당해서 내 뒤통수 때리면 웃으면서 맞을 테니까 우리끼리는 이런 거 부담 갖지 말자.”

“감사합니다, 형님.”

믿어주는 거? 아니면 자리 비켜주는 거?

김진용은 뭐가 고마웠을까?

눈시울이 붉어 있는 김진용을 향해 옅게 웃어준 강성태는 그렇게 응급실에서 나왔다.

화창한 일요일 오후였다.

불과 두어 달 전에는 이런 날 커피알리고 주차장에서 한가함을 즐겼고, 때론 책을 읽었으며, 어떤 날은 느지막이 일어난 최치곤과 함께 키득거렸었다.

병원을 나선 강성태는 잠시 벤치에 앉아서 최치곤에게 문자를 보냈다.

[진용이랑 봉진이가 와서 자리 비켜줬다. 세 사람만 있고 싶은 눈치니까 너도 오늘은 집에서 자.]

이어 강성태는 유섭우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 유섭우입니다, 형님.

“내일 오전 10시에 신월동과 강서구 숙소 식구들 모아서 연락해. 도끼 커다란 거 하나 준비하고.”

- 예? 형님?

“오늘 김전동 찾은 거로 충분해. 내 식구 건드리려고 들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보여줄 생각이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문짝 부술 도끼 커다란 거 하나 준비하라고.”

- 알겠습니다, 형님.

“입단속 확실하게 해. 불안하면 무슨 일인지 아예 말도 하지 말고.”

- 예, 형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면서 픽 웃었다.

미친 것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도끼라니, 확실히 이병렬은 조폭 세상에서도 참 특별한 인간이란 세상이 들었고, 그걸 또 순순히 따르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웃겼다.

이병렬에게 약속한 일이니까.

강성태는 또다시 번호를 찾아 눌렀다.

- 여보세요?

확실히 흉내는 내는데 진품이 주는 응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벼운 대꾸가 건너왔다.

“난데, 처남에게 전화해서 내일 오전에 나를 시행사 임원으로 올려놓고, 명함 하나 파놓으라고 해. 10시 전에 찾을 수 있게.”

- 예? 형님?

전화를 받은 입장에서는 느닷없는 지시일 수 있겠다.

이세종이 무조건 명령을 들어야 하는 조직의 일원도 아니었고.

강성태는 다시 한 번 시행사 관련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 10시 전이면 됩니까, 형님?

“내일 일을 시작하면 물리지도 못해. 알지? 그리고 내일 시행일 보고 나서 오후에는 지방에 가서 현장 보도할 테니까 준비 철저히 하고. 저녁 8시쯤 방송 나가야 해.”

- 감사합니다, 형님.

오전 10시라는 말과 물리지 못한다는 다짐이 이세종에게는 오히려 강한 희망으로 다가섰는지 그의 답에 힘이 잔뜩 들어있었다.

“이세종. 이번 시행일에 뛰어드느라고 우리 식구 한 명은 몸을 피하고 있고, 강서구 조직은 피를 봐야 해. 감추거나 그만두고 싶으면 내일 오전 10시 전에 말해.”

-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형님.

말하지 않은 이권이 더 있는 눈치였는데 강성태는 잠자코 통화를 마쳤다.

이제는 집에 가서 씻고 조금이라도 자야 할 시간이었다.

**

강성태가 떠올렸던 햇살 좋은 일요일 오후 주차장이었다.

주차장 구석에 선 최치곤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미안하다. 이렇게 말해도 믿지 않으면 그만이고, 욕해도 할 말은 없는데 장난으로 다가선 건 정말 아니다.”

차가운 이은주를 향해 최치곤은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생활 접는 거 심각하게 고민했다. 성태도 그러라고 했고. 그런데 달수 형님이 저렇게 가시고 나니까, 성태를 두고 커피전문점에서 시간 보내는 내가 벌레처럼 느껴지더라.”

“매니저님이 깡패 일 그만두라고 하셨다면서요?”

“맞아. 그랬어. 아버지가 실망하실 거 걱정하고, 은주가 배신감 느낄 거 염려했고. 그런데 성태가 만들려는 조직은 지금 은주 네가 아는 거랑 달라. 그만큼 위험하지만, 또 그런 위험을 감당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왜 이렇게 멋진 말이 술술 나오지?

스스로의 모습에 당황했던 최치곤이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마약, 사채, 인신매매 없애겠다고 나선 바람에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조직이 적으로 돌아섰고, 중국과 멕시코 조직들까지 달려드는 상황이거든. 그런데 성태 뒤를 지켜줄 사람이 없어.”

“그걸 꼭 매니저님과 치곤 씨가 해야 하는 거예요?”

“성태가 나서기 전에는 나도 몰랐거든. 그런데 돌아보니까 우리 주변에 마약이 꽤 많이 깔렸더라. 그걸 막을 사람이 내가 보기에는 성태밖에 없어. 능력이나 의지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없을 테니까.”

여전히 차가운 이은주를 향해 최치곤이 말을 이었다.

“그런 성태 뒤를 지킬 사람이 필요해. 돈, 여자, 어떤 거로든 유혹해서 절대 안 비켜날 사람. 내가 능력이 안 돼서 칼을 맞을 수는 있겠지만, 비켜서지 않을 자신은 있거든.”

건물에 깎인 빛줄기가 칼날처럼 떨어지는 아래에서 최치곤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치 형님께 인사하는 조직의 동생처럼 공손한 인사였다.

“미안하다. 가능하면 여기는 안 올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성태 없는 동안, 카페 잘 지켜주라.”

몸을 세운 최치곤이 서운할 정도로 단호하게 돌아섰다.

그가 주차장 입구로 돌아설 때였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느닷없이 달려든 이은주의 질문이 최치곤을 붙들었다.

잠시 시선을 떨구었던 최치곤이 고개를 돌렸다.

“성태가 만들려는 조직이 어지간해서는 쉽게 안 될 거야. 그걸 만들어서 틀 잡으면 병렬이 형님이란 분께 넘기고 우리 둘이 은퇴해서 커피전문점, 심부름센터 하기로 했는데 언제가 될지는 몰라.”

최치곤의 세모꼴 작은 눈이 이은주의 이마, 머리칼, 눈매, 코, 입술을 새기려는 것처럼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깡패 만나는 거 싫어하는 거 이해한다. 미칠 것처럼 고민도 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 때문에 가슴도 아린데 성태 뒤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는 편히 먹고 잘 자신이 없어.”

이은주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최치곤이 숙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늘어진 그늘을 통과한 그가 도로로 사라질 때까지 이은주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

집으로 돌아온 강성태는 가장 먼저 쿠크리를 세심하게 관리한 뒤에 후련하게 씻었다.

거실, 소파, 냉장고, 식탁, 하다못해 싱크대까지, 익숙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자 전쟁터에서 후방 막사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모처럼 침대에 누워 푹 잤다.

우우웅.

[큰 수술이 연달아 물려서 틈을 못 내겠어요. 혹시 서운한 거 아니죠?]

늦게 들어온 안다미의 문자는 수술과 케어 때문에 내일 연락하겠다는 내용으로 끝났다.

러시아와 멕시코의 암살팀을 해결한 덕분에 여유롭게 문자를 주고받는다.

다시 깊게 잠들었던 강성태는 새벽 일찍 깨어났다.

얼마 만에 하는지 모를 운동으로 몸을 풀었고, 지난밤에 땀처럼 흘러나와 끈적하게 묻어 있던 피로를 샤워로 닦아냈다.

날이 환하게 밝은 시간이었다.

주방에서 커피를 내린 강성태는 모처럼 기분 좋은 향을 즐기며 식탁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이른 아침에 예상하지 못했던 전화가 들어왔다.

“여보세요?”

- 이세종입니다, 형님.

하여간, 이득이 생기면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공손한 사람답게 그의 음성은 조심스러웠다.

- 처남에게 연락했는데 10시 전에 모두 마치겠답니다. 어떻게 전해드리면 좋겠냐고 연락이 와서 전화 드렸습니다.

“우리가 지금 들어가도 사업을 뒤집을 가능성이 있는 거 맞지?”

- 물론입니다, 형님. 시에서 허가에 제동을 걸어둔 상태라 우리 쪽이 동의서를 더 얻으면 사업권 분명하게 가져옵니다.

“지난번에 보상금 깎아서 지급한다는 건 뭐야? 저쪽이 이미 동의서를 받은 거잖아?”

- 상대방 시행사가 시공사에서 선투자 받은 금액입니다. 그 돈으로 합의서 거둬서 허가를 받으려는 겁니다.

그래도 취재를 여러 번 했던 보도국장답게 이세종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사업장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곳이 어딘지 알아봐서 주소를 문자로 넣어줘. 거기에서 11시에 보자고 하고.”

- 현장 말고 다른 곳에서 잠깐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사업 관련 브리핑을 들은 뒤에 가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권유였다. 그러나 한가롭게 브리핑을 들을 여유가 부족했다.

“그럼 명함은 나중에 받기로 하고, 회사 하고 처남 이름, 가장 상징적인 장소를 문자로 보내줘.”

- 알겠습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가 아직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뒤였다.

우우웅.

이세종이 보낸 문자가 들어왔다.

솔직히 하루 이틀 시간을 두고 이세종의 처남과 먼저 만나보는 게 제대로 된 순서인데 이병렬의 독촉을 받고 나서 막무가내로 일 처리 하는 느낌이었다.

아직 남은 여유를 이용해 강성태는 키란에게 전화했다.

며칠 사이에 익힌 우리말을 들었고, 어머니가 이사한 집의 사진에 관해 이야기 나누며 대략 30분 정도 떠들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액정을 내려다보며 잠시 망설였다.

최치곤이 어떻게 있나 궁금했다.

돌로 만들어놓은 거 같은 최치곤이 속이 아리다는 표현을 쓸 정도면 어지간히 속이 아플 거라서 지금은 잠시 시간을 주는 게 현명했다.

셔츠에 정장을 차려입은 강성태는 느긋하게 집을 나섰다. 그런 뒤에 집 근처 제과점으로 향해서 샌드위치로 아침을 해결했다.

바쁜 출근 시간이 막 지난 거리는 격렬한 전투를 마치고 쉬는 전장의 느낌이었다.

느긋하게 앉아 제과점 창밖을 바라볼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유섭우의 이름이 스마트폰의 액정에 올라왔다.

“여보세요?”

- 식사는 하셨습니까, 형님? 준비 마쳤는데 어디로 모시러 가면 되겠습니까?

“지금 어디인데?”

- 신월동 나이트에 있습니다, 형님.

“내가 그리 갈게.”

제과점에서 나선 강성태는 한가로운 길을 택시를 타고 달렸다.

큰 도로에서 신월동 나이트로 걸어간 다음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신월동 나이트 주차장을 가득 메운 승용차들과 승합차, 검정 정장의 덩치들이 강성태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나이트 주차장이라 다행이지 자칫하면 신고 들어가기 꼭 좋은 모습이었다.

“어디 가는지 알고 나온 거야?”

“말이 새나갈 거 같아서 아직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형님.”

“내가 전화번호를 문자로 보내줄 테니까 우선 그거부터 전부 알려줘.”

강성태는 유섭우의 번호로 주소를 보냈다.

내용을 확인한 유섭우가 모여있는 덩치들에게 문자를 보내느라 잠시 틈이 있었다.

주소를 확인한 덩치들이 혹시, 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모여봐.”

“다들 형님 앞으로 모여.”

강성태는 다가온 덩치들을 돌아본 뒤에 입을 열었다.

“성북구에서 하는 개발 사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주소를 보며 짐작했던 모양이었다.

덩치들이 긴장한 눈으로 강성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양아치 짓거리하지 말고, 정당하게 보상받게 하고, 떳떳하게 벌자. 수익금은 조직으로 넘겨서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전체가 나누겠지만, 그래도 오늘부터 함께하는 인원에게는 수고한 만큼 더 돌아가게 하겠다.”

옆에 있는 유섭우를 돌아본 뒤에 강성태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형님이랍시고, 중간에 잘라먹는 놈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다시 말하지만, 정당하게 보상하고, 떳떳하게 버는 거다. 주민들 함부로 대하지 마라.”

유섭우가 고개를 숙이자, 서열에 따라 물결을 이루듯 줄줄이 고개를 숙였다.

“도끼는?”

“트렁크에 실어뒀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승용차의 뒷문을 향해 움직였다.

문을 열어준 유섭우가 조수석에 타기 무섭게 승용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요즘 자주 느끼지만, 깡패 두목 참 일 많다.

그것도 다양하게.

강북 대장 장태섭?

창밖을 보며 강성태는 픽 웃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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