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 - 19화 (230/513)

11권 - 19화

제7장. 뭘 그렇게 빙빙 돌아?

북엇국 하나를 시원하게 들이켠 성경일이 한 그릇을 추가했을 때였다.

전화를 받았던 미아리 동생 오갑철과 얼굴이 엉망으로 망가진 돼지 다섯이 줄줄이 들어왔다.

“애들 데려왔습니다, 형님.”

퉁퉁 부은 얼굴, 울긋불긋 올라온 피멍, 군데군데 찢어져 딱지가 맺힌 상처들까지, 돼지들이 얼마나 험악해 보이는지 식당에 있던 손님들이 음식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겠다던 성경일은 막상 처참하게 깨진 돼지들을 보자 눈이 확 뒤집혔다.

“야,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김전동 한 놈이었다며?”

입을 열지 못하는 돼지들을 보며 성경일은 뜨거운 숨을 푹 쏟아냈다.

“너희 혹시 족보 팔고 다녔어? 생활한다고 구라쳤냐고?”

“아닙니다, 형님.”

“그런데 왜 김전동이 미아리를 들먹여? 죽여 버리기 전에 솔직하게 말 안 해?”

“그게, 형님. 어제 형님께서 기분 풀라고 하셔서 다니던 술집에 갔는데, 형님. 아가씨들이 틱틱거리는 겁니다, 형님. 그래서 좀 뭐라 했더니 대뜸 들어와서는…….”

“그러니까, 이 새끼들아! 대뜸 들어온 김전동이 왜 미아리를 찾냐고!”

“그게, 형님.”

“확!”

돼지가 자꾸 말을 돌리자 성경일은 뜨거운 북엇국 그릇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놀라서 팔뚝으로 얼굴을 막았던 돼지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사우나에서 형님.”

그런 뒤에 강성태와 만났던 일, 이어 유섭우에게 성경일의 이름을 댔다는 이야기를 쭈뼛대며 털어놓았다.

“하아. 그러니까 사우나에서 신강남파 강성태를 몰라봤다가 따귀 맞았고, 술 처먹으러 가서 또 개 맞듯 맞았다는 거네?”

“예, 형님.”

“야. 너희 잠깐 나가 있어. 안 그러면 내가 죽여 버릴 거 같으니까 얼른 나가.”

상체를 깊숙하게 숙인 돼지 다섯이 고개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식당을 나섰다.

“신강남파 유섭우가 강서구 광준이 형님 아래 그 섭우 형님이냐?”

“그런 거 같습니다, 형님.”

“미치겠네.”

성경일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걸 어떻게 하지?”

“생활하는 놈들도 아닌 것들이 하필 신강남파 대가리를 건드려 놓은 거라서 뭐라고 말할 명분이 없습니다, 형님.”

“그러니까 너도 사실은 김전동이가 사우나 일로 벼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업장이 그렇잖습니까, 형님. 진상을 쳤다고 해도, 형님이 데리고 있는 거 알았으면 조용하게 타이르는 게 맞지, 들어오자마자 손질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형님?”

“와, 이거. 분해서 숨이 턱턱 막히네.”

팔을 길게 벌려서 테이블의 양 끝을 붙든 성경일이 또다시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김전동이 그 새끼가 누구 또래라고 했지?”

“진규, 섭이, 광기 또래입니다, 형님. 행사장에 함께 가기도 하고, 그 새끼가 관리하는 업장에서 술도 팔아주고 해서 친분 있게 지냈답니다, 형님.”

“광기 시켜서 그 새끼한테 연락해. 내일 영업 전에 나한테 와서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빌면 그냥 넘어가는데 아니면 끝장 보게 된다고 분명하게 말해.”

“예, 형님.”

어지간하면 말렸을 텐데, 성경일의 눈이 워낙 뒤집혀 있었고, 김전동이 심하게 나온 것도 사실이어서 오갑철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

최치곤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찌뿌둥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주차장으로 나서던 그는 강성태를 향해 눈을 끔벅였다.

“언제 왔….”

아르윈을 본 최치곤이 뒷말을 어색하게 끊었다.

“아르윈이 우리 관계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런 자리에서는 편하게 하자. 대신, 너는 아르윈을 형님으로 대하면 되지 않겠냐?”

멋쩍은 얼굴로 다가온 최치곤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최치곤입니다, 형님.”

“이제 제대로 인사하네. 아르윈이다.”

목덜미에 그려진 해적 문신이 최치곤을 흐뭇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밥 먹자. 배고프다.”

강성태는 아르윈, 최치곤과 함께 설렁탕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가는 길에서부터 설렁탕을 먹는 동안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최치곤에게 들려주었다.

“급한 불은 끈 거네.”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 쪽이 그렇지, 우리는 내일도 엄청 바빠. 당장 미아리 태섭이파 반응 봐야 하고, 저녁에는 마약파티 덮쳐서 특별 보도하겠다는 놈들 숨통도 움켜쥐어야 하거든.”

육개장은 별것 없었는데 설렁탕은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강성태는 아르윈, 최치곤과 함께 또다시 작은 커피전문점에 들렀다.

이곳이 좋다기보다는 설렁탕집에서 병원에 오는 길에는 다른 카페나 커피전문점이 없었다.

“내가 다녀올게. 뭐 마셔?”

“나는 아메리카노. 병원에 가서 마시게 일회용 컵에 달라고 해.”

“형님은 뭐 드시겠습니까?”

“나도 성태 형님 드시는 거로 하지.”

서열이 엉킨 만큼 오가는 대화가 이상했는데 누구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서 묘하게 편했다.

“멕시코에서 온 놈들은 제대로 지키고 있지?”

“말씀드린 대로 조직원 여섯이 둘러싼 데다 서로 뚝 떨어트려 놨습니다. 화장실 아니라 죽어 자빠져도 묶은 자리에서 옮기지 말라고 해놓아서 용변도 옷 입은 채로 봅니다, 형님.”

확실히 필리핀에서 총기나 마약을 자주 접한 경험 때문인지 이런 일 처리는 아르윈이 한 수 위였다.

강성태가 고개를 끄덕일 때 최치곤이 나왔다.

그의 얼굴이 평온한 것으로 봐서 주문대 안쪽 남자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

스마트폰이 울리자 김전동은 빠르게 액정을 확인했다.

올 것이 왔다.

큼큼거리며 마음을 독하게 먹은 김전동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다. 광기.

“무슨 일이냐?”

- 야, 인마. 몰라서 물어? 어쩌려고 애들을 그렇게 두들겼어? 다른 말 할 거 없고, 내일 가게 열기 전까지 경일이 형님한테 와서 무릎 꿇어. 그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 병신이 뭐라는 거야?”

김전동의 반응이 워낙 예상 밖이어서 그런지 대꾸는 반 박자 늦게 나왔다.

- 야, 김전동?

“야, 이 새끼야. 생활하는 놈들도 아니고, 병풍 세우는 돼지 새끼들 몇 놈 때렸다고 나더러 무릎을 꿇으라고? 하여간 양아치 새끼들.”

-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양아치라고 했다, 이 새끼야. 족보도 없는 것들이 진상 치다가 맞고 가면, 쪽 팔려서 대가리 처박든가, 아니면 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든가 해야지, 뭐? 무릎을 꿇어? 니미! 어쩌냐? 내가 관절염이 심해서 그런 게 안 되는데?”

- 너, 이 새끼, 죽는다?

“뒈뒈뒈뒈. 말 배우냐? 뭘 그렇게 옹알거려?”

김전동이 멸시하다시피 말투를 붙들고 늘어진 직후였다.

- 야! 김전동?

건너오는 음성이 확 바뀌었다.

오갑철인 걸 김전동은 분명하게 알았다.

“넌 또 뭐야, 이 새끼야?”

하지만, 이미 유섭우에게서 받은 지시가 있어서 상대가 성경일이었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뭘 돌아가면서 자꾸 주접을 떨어? 너 뭐야, 이 새끼야?”

대놓고 오갑철을 김전동이 씹었고,

- 김전동? 나 오갑철이다.

이를 꽉 깨문 게 분명한 독 오른 답이 건너왔다.

“아? 형님이셨습니까?”

그런데도 김전동은 뒤에 붙여야 할 “죄송합니다.”와 “모르고 그랬습니다.”를 꾹 삼키고 침묵을 지켰다.

-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영화 많이 보시나 봅니다, 형님?”

- 이런 씨발 새끼가? 알았다.

기가 막힌 웃음이 묻은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아무리 김전동이라도 해도 선배를 씹은 건 켕겼다. 숨을 크게 뱉은 그는 유섭우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병원 주차장에서 커피까지 마시고 나자, 밤을 새운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최치곤과 아르윈까지 세 사람 모두 지난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었다.

“아르윈. 들어가서 쉬고 내일 와.”

“괜찮습니다, 형님.”

“내일 하고 모레, 정신없이 바빠. 잠이 부족하면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내일 오전까지 체력 충전해. 그게 좋아.”

누구보다 일정을 잘 아는 아르윈은 두 번에 걸쳐 강성태가 권하자 어쩔 수 없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아르윈이 병원을 나선 뒤였다.

“그러지 말고 너도 집에 가서 씻고 푹 자. 그래야 네 말대로 내일 하고 모레, 바쁘게 뛰어다니지.”

답도 듣지 않은 최치곤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강성태가 말리기 전에 응급실로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치곤아. 잠깐만.”

강성태가 부르자 최치곤은 고개만 돌렸다.

“아까 의자에서 자고 있을 때 나 들렀다는 말 못 들었냐?”

“몰라. 내가 깼을 때는 병렬이 형님이 주무시고 계셨거든.”

“일단 와서 앉아 봐.”

벤치로 돌아온 최치곤에게 강성태는 이병렬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언제고 내 생각은 같았다. 체계를 잡아놓고 물러나는 거. 그런데 내부 정리도 안 된 상태에서 반걸음 물러나 있는 바람에 서달수가 당한 거지.”

고개를 삐뚜름하게 튼 최치곤은 병원 정문을 향해 시선을 준 채 움직임이 없었다.

“지금은 목표가 좀 바뀌었다. 확실하게 조직을 정리해서 이병렬이 감당해야 할 부담을 줄여놓는 거로. 그러려면 또 내부 정리를 확실히 해야 하는 거고.”

아직 정문을 바라보고 있는 최치곤을 향해 옅게 웃은 강성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욕먹는 장면 보고 나서 전화했었잖아. 그때도 말했지만, 불러서 두들길까 하는 고민한 한편으로 우리 둘이 멋지게 물러날 때까지 이 짓거리 같이해볼까 싶기도 했었다.”

결과가 궁금한 눈치로 최치곤이 시선을 돌렸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나는 아버지가 가장 걸린다. 너 커피점에서 일하는 거로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아니까.”

“우리 아버지 안됐지.”

“이대로 네가 나하고 일하게 되면 은주 씨 가지고 장난친 꼴 되는 것도 싫고.”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겠지.”

어쩐지 떨떠름한 반응에 강성태가 시선을 돌린 다음이었다.

“그런 거 내가 다 해결할 테니까 나도 같이 다니게 해주라.”

최치곤이 전에 없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속을 털어놨다.

“나 알잖아? 예전에 일반인한테 돈 뜯어오라는 거 시키면 개긴 거. 엿 같은 거 시키면 들이받기도 했고. 그렇게도 견뎠는데 병렬이 형님하고 진짜 조직을 만드는 일에서 밀려난 거야.”

“아버지는 어떻게 하냐?”

“우리는 자식 낳지 말자.”

“에이, 미친 새끼야.”

실없는 웃음이긴 했어도 최치곤과 함께 웃고 나자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은주 씨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솔직하게 말하려고.”

“진짜 좋아하긴 했냐?”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아리다. 은주 같은 여자 만날 줄 알았으면 고등학교 때 공부라도 좀 할 걸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강성태를 힐끔 본 최치곤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알아주라. 너 없어졌을 때, 나 진짜 네팔 뒤졌었다.”

옅게 웃은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화요일에 있는 삼합회 일까지 정리하고 준비할게. 그때까지만 병렬이 지켜줘.”

“숙소는 꾸밀 거냐?”

“필요하면.”

비장한 표정으로 최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말고 네가 지금 커피알리고로 가. 일요일이라 한가할 테니까 기회 봐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정리해. 우리 둘 다 피하지 못할 길에 묶인 거라면 그나마 하나씩이라도 제대로 매듭짓고 가자.”

“괜찮겠냐?”

“아예 한숨 자고 와. 그래서 자정쯤 교대해 주라. 나는 내일 오후에 움직일 거니까 여유 있거든.”

몇 가지 더 이야기를 나눈 최치곤이 복잡한 얼굴로 병원을 나섰다.

당연하게 강성태는 응급실로 들어가 소독을 마친 뒤에 이병렬을 찾았다.

이병렬은 눈을 뜨고 있었다.

상태가 좋아지는지 낯빛도 많이 돌아왔고,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아온 눈빛이었다.

“치곤이는?”

“커피알리고에 갔다. 사과하러.”

“잘된 모양이네?”

이병렬이 입술만 움직여 웃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유섭우입니다, 형님. 미아리 성경일이 움직였습니다, 형님.

“어떻게?”

유섭우는 고광기, 오갑철과의 통화를 아는 대로 들려주었다.

- 미아리 쪽 애들 불러들인다는 거로 봐서 오늘 밤에 김전동이 달아갈 계획인 거 같습니다, 형님.

“김전동이 지금 어디 있는 데?”

-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형님. 오늘 김전동이 못 찾으면 아마 내일 업장으로 찾아올 겁니다.

강성태는 고개를 비틀었다.

“내일은 내가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바쁜데?”

- 내일 업장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형님.

“막나가는 놈이라면서? 괜찮겠어?”

- 그런 놈까지 형님이 직접 상대하시면 오히려 우리가 망신당하는 게 됩니다.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형님.

“일단 그렇게 알고 있을게.”

통화를 마친 강성태를 이병렬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옆에서 통화를 지켜본 참이라 강성태는 앞의 내용을 모두 들려주었다.

신기하게도 이야기를 듣는 이병렬의 눈에서 좀 더 강렬한 생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빙빙 돌아?”

“뭐?”

“보스 생각대로 시행사 인수했다고 하고 밀고 들어가. 가서 버티는 철거민 집 대문에 도끼 하나 박아줘. 신강남파 강성태가 여기 접수했으니까 죽고 싶은 놈 있으면 도끼 뽑으라고. 그거만 한 명분이 어디 있어?”

“고문님도 명분이 필요하다고 하던데?”

“오늘 미아리 애들이 김전동이 찾아다닌 거로 명분은 충분하지. 내일이 월요일이잖아. 시행사에 임원으로 올리라고 하고, 명함부터 하나 파 놓으라고 시켜. 그리고 가서 도끼 찍어놓고 와.”

강성태가 거부하면 당장 침대에서 일어날 것처럼 이병렬은 다부진 눈빛이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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