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 - 15화 (226/513)

11권 - 15화

사람의 의지는 무섭다.

쿠크리가 심장을 파고들었는데도 강성태의 목을 움켜쥔 놈의 손아귀는 악착스러울 만큼 강하게 버텼다.

이런 거, 수없이 경험했다.

버티는 만큼 이쪽도 더 독하게 나가서 끝낸다.

강성태는 꽉 잡은 쿠크리의 손잡이를 아래로 세차게 당겼다.

뿌드득.

갈비뼈가 잘리는 소리와 함께 발악처럼 버티던 놈의 몸이 축 늘어졌다.

여기까지.

아직 목에 매달려 있던 놈의 손목을 비틀어서 뗀 뒤에 몸을 일으켰다.

강성태의 셔츠 앞섶과 놈의 상체 주변이 온통 피로 물들었고, 문 앞에서 총을 맞은 놈 주변 역시 부어놓은 것처럼 흥건하게 피가 고여있었다.

문 바깥에서 지켜보았던 모양이었다.

‘진짜는 저런 사람이었어?’

아르윈과 필리핀 여직원이 질린 얼굴로 강성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놓고는 또 처참하게 죽은 두 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안으로 들어왔다.

“아래에 있는 조직원을 부르겠습니다.”

“이게 정리되겠어?”

객실을 돌아본 강성태가 질문을 던진 다음이었다.

“자살하는 손님이 간혹 있습니다.”

필리핀 여직원이 염려하지 말라는 투로 답을 내놓았다.

“아르윈. 옷이 필요해.”

“준비하겠습니다.”

답을 한 아르윈이 고개를 돌려 여직원을 찾았다.

“가서 타올 몇 개 가져와.”

복도로 나선 여직원이 여러 장의 타올을 들고 돌아왔다.

“셔츠 벗어주시고, 피를 닦으십시오. 피 묻은 셔츠는 이놈들하고 함께 정리하는 게 좋습니다, 형님.”

나쁘지 않은 의견이었다.

“씻을 테니까 서랍이나 가방, 베개, 침대 커버, 매트리스 아래까지, 방을 전부 뒤져 봐. 사소한 메모 하나라도 버리지 말고 모두 확인하고.”

“예, 형님.”

강성태는 샤워실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귀 아래가 울긋불긋하게 물들었고, 목덜미 주변은 피멍이 올라와 있었다.

두 놈은 해결했지만, 혹시 이놈들이 삼십 분이나 한 시간 간격을 두고 연락했을지 몰라서 가능한 한 서두르는 게 좋았다.

샤워실 안에서 셔츠를 벗은 강성태가 문을 열었다.

그사이 필리핀 조직원 여럿이 들어와서 세탁 수레에 죽은 놈들을 구겨 넣고 그 위에 침대 커버를 덮고 있었다.

“우선 이거밖에 없습니다, 형님.”

피 묻은 셔츠를 받은 아르윈이 반듯하게 개켜놓은 라운드 티를 내밀었다.

급하게 셔츠를 구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라운드 티를 가져왔다고 해서 뭐라 할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갈색 바탕의 한가운데 펭귄이 웃고 있는 건 좀 너무했다 싶었다.

먼저 세면대 옆에 풀어놓은 쿠크리의 날을 깨끗하게 닦았고, 마른 타올로 조심스럽게 물기를 제거했다.

기름을 살짝 먹이는 게 좋지만, 당장은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이어서 얼굴과 상체를 닦기 위해 세면대에 몸을 구부리자 역시나 피멍이 올라온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적당한 수준에서 피를 닦아낸 강성태가 밖으로 나왔을 때, 수레와 죽은 두 놈은 보이지 않았고, 조직원 둘과 못 보던 여직원이 한 명 더 있었다.

분명 당황한 기색이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침착하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바닥의 핏물을 닦았다.

“형님.”

이번에는 그나마 무난한 점퍼를 아르윈이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필리핀 조직원이 차에 가지고 있던 게 아닌가 싶었는데 사양할 처지는 아니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형님.”

점퍼를 입은 강성태를 아르윈이 불렀다.

권총 두 자루, 날이 얇고 짧은 대검, 스마트폰, 그리고 작은 가죽 가방이 의자에 놓여 있었다.

강성태는 가죽 가방을 열어보았다.

지도, 여권, 달러, 원화, 그 외에 곤잘레스 이두안과 로라가 있는 호텔 안내서 등이 담겨 있었다.

“선샤인 호텔은?”

“확인했는데 객실이 모두 비었다고 하고, 별다른 이상은 없답니다, 형님.”

“혹시 모르니까 복도 양 끝에 무선 카메라가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해.”

지시를 마친 강성태는 처음부터 함께했던 필리핀 여직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족을 불러달라고 했어?”

“예.”

“어떡해서든 들어올 수 있게 나도 신경 쓸게.”

“감사합니다, 사장님.”

양손을 앞으로 잡은 필리핀 여직원이 공손하게 상체를 숙였다.

**

화장실을 다녀온 것을 빼고 최치곤은 줄곧 이병렬의 침대 옆에 앉아 버텼다.

강성태가 특별히 지켜달라고 당부한 일이었다.

체온과 혈압을 체크한 간호사가 주사제를 꽂을 때도 눈을 독하게 뜨며 지켜보았는데 별다른 일은 없었다.

사명감이 불타오르는 건 분명한데 무료한 건 또 다른 문제여서 최치곤은 스마트폰으로 만화를 보며 무료함과 심란한 마음을 달랬다.

자정이 훨씬 넘었을 때였다.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든 최치곤을 향해 이병렬이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형님?”

“뭐냐?”

기운이 부족해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나마 선명하게 들을 정도의 음성이었다.

“성태…, 형님이 내일 오전까지 지키라고 해서 있었습니다, 형님.”

목이 타는지 입술을 빨아들였던 이병렬이 눈을 옆으로 돌렸다.

“거기 링거 중간에 십자로 된 연결 부위 있지? 그거 좀 잠가.”

“예, 형님.”

“진통제를 오래 꽂으면 이상하게 머리가 아프다. 잠깐 쉬었다가 맞자.”

약의 종류와 증상까지 설명한 이병렬이 다시 눈을 옆으로 돌렸다.

“달수 발인이 언제냐?”

“내일 오전입니다, 형님.”

확실히 이병렬은 강한 남자였다.

몇 차례 토해내는 숨소리에 분노와 슬픔이 역력한데 눈빛만큼은 독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예? 형님?”

“갈팡질팡하고 있잖아. 뭐야?”

답을 못 하는 최치곤을 이병렬은 물끄러미 보았다.

“뭔데 그래?”

“아닙니다, 형님.”

“야, 이 멍청한 새끼야. 갑갑해 뒈지겠는 얼굴을 하고도 말도 못 할 정도면 생활 접는 게 맞아. 꼴도 보기 싫으니까 가.”

“그게 아니고, 형님.”

이병렬의 눈매에 설득당한 심정으로 최치곤은 이은주를 향한 마음부터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차례로 설명했다.

“날 밝는 대로 그 아가씨한테 먼저 가라. 죽어도 보스를 혼자 못 두겠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무릎 시원하게 꿇고 빌어.”

눈만 돌려 최치곤을 보았던 이병렬이 다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네가 말한 대로 보스는 친위부대가 없다. 태완이파, 신호남파, 신월동, 안산, 이렇게 뒤엉켰는데 그걸 조율하지도 못했고. 나 역시 바쁘기만 했지 제대로 줄가리를 못 했다.”

힘겹게 말을 한 이병렬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달수를 저렇게 보낸 것도 다 내 잘못이다. 네 말대로 친위부대와 숙소를 제대로 꾸몄다면 달수를 잃을 일도 없었을 거다. 그러니까 네가 친위부대를 맡아.”

“성태 형님이 그렇게 나서는 걸 배신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야, 이 새끼야. 친구로 그냥 배신해. 그리고 형님으로 모셔. 보스한테 나 소개한 게 너지? 이번엔 내가 너 끌고 오는 거다. 그리고.”

힘겨운지 잠시 뜸을 들였던 이병렬이 다시 말을 이었다.

“돌아갈 자리를 모조리 불태워버려. 보스가 그래도 안 된다면 차라리 지방 숙소에 들어간다고 버티라고. 너 말고 누구한테 보스 등을 맡길래? 엉뚱한 놈이 뒤에 연장 들고 있으면 잠이 오겠냐?”

대답하지 못하는 최치곤을 보며 이병렬이 쓰게 웃었다.

“약 좀 틀어.”

아닌 게 아니라, 그 짧은 대화의 끝에서 이병렬은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

선샤인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1시가 넘어서 주차장이 한산했다.

건물주가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외형부터 내부구조가 서브시티 호텔과 같았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서른 중반의 필리핀 남자와 여자가 카운터에서 강성태와 아르윈을 맞았다.

“영어로 말해도 돼.”

아르윈이 짧게 말을 건넨 직후에 필리핀 남자는 프런트에 있던 모니터를 돌렸다.

복도 위에서 잡은 영상으로 중간에 마주 본 두 개를 제외하고 객실 문이 줄줄이 열려 있었다.

“여기 중간에 문이 닫혀 있는 객실입니다. 이쪽이 두 명, 맞은편 이곳에 한 명, 이렇게 투숙했습니다. 저녁 전에 들어와서 여태 꼼짝 않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청소하는 척하면서 꼼꼼하게 살폈는데 없었습니다.”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묘하게 필리핀 남자는 억울하다는 느낌으로 무선 카메라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프런트에 기대서 영상을 바라보던 강성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소음기를 건다고 해도 방아쇠를 당기면 맞은편 객실에 커다랗게 울린다.

권총을 사용하지 않고 맞붙는다고 해도 탁자가 부서지거나 의자를 집어 던지면 맞은편에서 튀어나올 테고.

알고서 객실을 저렇게 잡았겠지만, 기습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거기에 정기적으로 문자나 통화를 통해 연락하기로 했다면, 지금쯤 서브시티 호텔의 두 놈이 당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대비했을 수도 있었다.

“여기가 3층이라고 했지?”

“예.”

강성태가 묻자 필리핀 남자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2층이나 4층에 투숙객이 있어?”

“2층은 비었는데 바로 위쪽 5층에 아직 두 팀이 남았습니다.”

“4층 복도를 볼 수 있을까?”

강성태가 요구하자 필리핀 남자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딸각하는 소리와 동시에 모니터의 화면이 바뀌었다.

“여기 입구 바로 앞과 안쪽 객실입니다.”

잠시 복도를 노려보던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그놈들 전화기 가져와.”

“예, 형님.”

강성태의 지시를 받은 아르윈이 빠르게 주차장으로 움직였다.

“전기를 내릴 필요는 없어. 대신 소음기 걸린 총소리가 나면 투숙객들이 물어볼 수 있거든. 그것만 대답 잘해줘.”

“영어로 대답하면 어지간한 건 그냥 넘어갑니다.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필리핀 남자가 답을 마쳤을 때, 양손에 스마트폰을 든 아르윈이 안으로 들어왔다.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버튼을 눌렀다.

보안을 걸어서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대신 문자나 전화가 걸려온 흔적도 없었다.

“이거 보관하고 있어. 전화 와도 받지 말고.”

필리핀 남자에게 스마트폰을 맡긴 강성태는 고갯짓을 한 뒤에 비상계단으로 움직였다.

“복도 중간에서 총을 쏠 거다. 훈련받은 놈들이라면 반대편에서 튀어나오게 돼 있거든. 그때를 노릴 거니까 비상계단에서 기다리고 있어.”

“양쪽에서 모두 나올 수 있잖습니까, 형님. 저도 그렇고, 조직원 중에 히트맨 출신이 셋이나 있습니다. 한 명쯤 맡겨주시면 어떻습니까?”

어둑한 계단을 올라가며 오간 대화였다.

“사업가나 반대 조직원을 상대했던 경험으로 저런 놈들을 대하면 무조건 이쪽이 죽어.”

서운하게 들릴 답이었다. 그러나 서브시티 객실에서 싸우던 장면을 떠올렸는지 아르윈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눈치였다.

3층까지 걸어간 강성태는 점퍼를 벗은 뒤에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쿠크리를 꺼냈다.

손잡이가 아래로 가게 왼쪽 팔뚝에 걸고서 천으로 감았고, 이어 마지막 부분을 엮어 매듭지었다.

두 번째 보는 데도 아르윈은 신기한 눈치였다.

다음으로 강성태는 권총을 꺼내 조심스럽게 장전을 확인했고, 안전핀을 풀었다.

“조심하십시오, 형님.”

짧게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그대로 복도로 나섰다.

먼저 문을 열어둔 빈 오른쪽 객실로 들어가 베개 네 개를 모두 집어 들었다. 그런 뒤에 다시 나와서 마주보며 닫힌 객실 앞까지 걸었다.

오른쪽에 한 놈이 투숙했다고 들었다.

놈의 객실 바로 옆의 빈방으로 움직인 강성태는 열려 있는 문을 완전히 잠기지 않을 정도로만 당겼다. 그리고는 그 옆 벽에 기대다시피 베개 네 개를 차례로 쌓았다.

쌓아 놓은 베개를 꽉 밟았다. 그런 다음 소음기 달린 권총을 꺼내 발로 밟은 근처의 눌린 부분에 총구를 붙였다.

곤잘레스 이두안이 끔찍하게 싫어하던 방식이었다.

경호원이 왜 먼저 공격하느냐며 질책하곤 했었다.

강성태가 다칠 것을 염려한 게 컸고, 다음으로 먼저 공격하는 바람에 명분을 뺏기는 것은 물론, 카르텔에게 추궁당할 일을 염려하는 면도 있었다.

“로라를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강성태가 나서지 않았다면 로라는 분명 납치당했거나, 강성태와 함께 죽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곤잘레스 이두안도 더는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로라를 지키는 게 첫 번째, 삼합회든, 멕시코 카르텔이든, 한국에 마약을 풀지 못하게 하는 게 두 번째.

고개를 좌우로 비튼 강성태는 왼손을 들어 방금 닫은 객실을 두들겼다.

쾅쾅쾅. 쾅쾅쾅.

복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직후에 맞은편 닫힌 객실에서 의자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두 놈이 먼저 반응했다는 의미였다.

강성태는 왼손으로 살짝 걸어둔 문을 힘껏 밀었다.

쾅.

“유리 세브첸코!”

아무도 없는 빈방에 대고 이름을 불렀다.

마치 유리 세브첸코가 문을 열고 나선 것처럼 말이다.

양쪽 방에서 들을 수 있도록 이름을 부른 강성태는 베개에 바싹 붙여놓았던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푸슝! 푸슝!

소음기를 통해 터진 소리가 거칠게 복도를 메우고, 베개의 속이 피어난 직후였다.

철컥.

맞은편 객실 문의 고리가 풀리며 문이 열렸다.

문의 안쪽에 걸쇠가 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 뼘쯤 열린 문으로 총구를 넣은 강성태는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푸슝! 푸슝!

바로 앞에 있던 놈의 심장에서 튄 피가 짧은 문틈으로 튀어나와 문과 문틀, 그리고 강성태의 손과 가슴, 얼굴에 튀었다.

푸슝! 푸슝! 푸슝!

무너지는 놈의 뒤에서 어른거리는 사람 모습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강성태는,

철컥.

급하게 열리는 맞은편 방으로 향해 달렸고,

콰아앙.

어깨로 힘껏 들이받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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