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 13화
제5장. 할 거면 제대로 하자.
최치곤은 40분쯤 뒤인 밤 8시 20분에 방지병원에 도착했다.
커피알리고에서 잠깐 본 게 전부인 데다, 서열 정리도 명확하지 않아서 최치곤과 아르윈의 인사는 어색했다.
“잠깐 올라가자.”
아르윈에게 기다리라는 눈짓을 전한 강성태는 최치곤과 함께 병실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병실이었다.
침대 앞의 테이블에 앉은 최치곤이 강성태에게 쿠크리를 건네주었다.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길래 그걸 가져오래?”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하고 딸을 살해하기 위해 훈련받은 러시아 대원 다섯이 들어와 있다.”
아직 일을 제대로 모르는 최치곤이 멍한 얼굴로 눈을 껌벅였다.
“씨발.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니냐?”
“심하게 커졌지. 내일 오전에는 다섯이 더 들어오는데 그놈들의 목표가 또 조태완 고문, 이병렬, 그리고 다미 씨 같거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 정도면 혼자 이러지 말고 숙소 식구들이라도 부르지?”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의견을 듣고 싶은 거 하나와 부탁이 하나 있다.”
“뭔데?”
“저녁에 터널을 지났었다.”
눈가를 좁힌 최치곤이 강성태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너 욕먹는 모습을 본 거 같다.”
“말 돌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 내가 죽냐? 아니면 집에 가는 길에 누가 덮쳐서 연장 맞아? 그거 막으려고 부른 거냐?”
“정말 그런 건 아니고. 전에 병렬이가 너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었잖아. 병렬이의 지시를 어기고 너한테 윽박지르는 꼴을 보니까 조직 내부에 뭔가 뒤엉킨 건 아닌가 싶었다. 이광준이 욕심내다가 주접떤 것도 그런 맥락 같고.”
“흠.”
“병렬이가 있으면 물어보겠는데 조직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진짜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게 좋아? 두들겨, 아니면 지금은 모른 척 넘어가?”
최치곤은 이제야 강성태의 고민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광준이 형님이 사고 쳐서 형님들이 날카로운 것도 있으니까 이번 건 넘어가야지. 이럴 때 네가 나서면 병렬이 형님과 내가 더 이상해진다. 대신 진짜 보스가 되기로 했다면 친위부대 하나쯤은 만들어. 숙소도 꾸리고.”
생각해두었던 일들을 알려주는 것처럼 최치곤은 막힘없이 답을 내놓았다.
“태완이 형님 하면 김동팔, 병렬이 형님은 진용이 형님. 달수 형님, 광준이 형님은 아래에 섭우 형님. 그렇게 오른팔이 있어야 하는데 너는 그게 없어.”
“병렬이가 있잖아?”
“지금까지는 그 역할을 병렬이 형님이 알아서 맡아주셨는데 엄밀히 말하면 친위부대라고 하기 어렵지. 너 대신 조직 관리해야지, 너 아쉬워하는 거 해결해야지, 일이 너무 많았지.”
강성태가 한 걸음 빠져 있는 바람에 이병렬이 짊어져야 했던 무게를 최치곤도 느꼈던 모양이었다.
“성태야.”
테이블을 내려다보는 강성태를 최치곤이 나직하게 불렀다.
“너 지금 여유가 하나도 없어 보여. 뭐든 혼자 다 해결하려는 느낌이고.”
“병렬이 앞에 세워두고 늘 한 걸음 빠져 있었으니까. 너랑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꿈을 접은 건 아닌데 병렬이가 일어나서 봤을 때 만족할 정도로 보스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러시아에선가 왔다는 놈들 상대한다는 것도 그런 거냐?”
“그건 좀 달라. 제대로 훈련받은 놈들이라 이병렬이 열 명쯤 있어도 위험해. 오죽하면 이걸 부탁했겠냐?”
강성태는 시선으로 쿠크리를 가리켰다.
“내가 할 일은?”
“밤에 병원을 비울 거다. 오전에 들어온다는 놈들이 일찍 올지도 모르고. 내일 아침에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이병렬을 지켜주라. 이병렬을 믿고 맡길 사람을 고민하니까 너밖에 없었다.”
“졸라리 욕먹는 거 보고 안됐다는 생각에 부른 건 아니고?”
“그것도 좀 있고.”
솔직한 대답을 들은 최치곤이 맥 빠지는 얼굴로 웃었다.
“병렬이 형님은 염려하지 마라.”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씨발. 강성태가 졸라리 몰리기는 했나 보네.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이 한꺼번에 나오는 걸 보면. 그러지 말고 내려가자. 병렬이 형님 지켜야지.”
최치곤과 함께 일어난 강성태는 그 길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응급실에 있을 테니까 일 끝나면 연락해.”
“내일 오전은 돼야 할 거야. 계획대로 되면 새벽에 잠깐 들를 수 있을지 모르고.”
고개를 끄덕인 최치곤이 아르윈에게 눈인사를 전하고는 응급실로 들어갔다.
강성태는 아르윈과 함께 주차장 벤치에 앉았다.
“객실 키는 알아봤어?”
“카드키를 사용하는데 마스터키가 있답니다. 혹시 몰라서 준비해 놓으라고 말해뒀습니다.”
“서브시티에 연락해서 빈 객실이 있으면 예약해. 이왕이면 놈들이 있는 객실보다 위층이면 좋겠다. 또 어느 쪽이든 외출하는 놈들이 있으면 바로 알려달라고 하고.”
강성태의 지시를 받은 아르윈이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몸을 돌린 그가 통화하는 사이에 강성태는 다리에 올려놓은 쿠크리로 시선을 떨궜다. 그리고는 손잡이를 감싼 부분의 천을 벗겼다.
강성태가 쿠크리의 손잡이를 지그시 쥐는 순간이었다.
벤치 앞쪽의 주차장, 정문, 주변의 담들이 물결치듯 구불구불 흘렀다.
왜 이러지?
처음 겪는 현상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런가 싶어 강성태는 시선을 돌렸다.
“3층 다음이 5층이랍니다, 형님. 5층 객실을 예약했습니다.”
통화 내용을 알려주는 아르윈도 일정하게 왼편으로 흘러갔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아르윈이 물어볼 때였다.
고개를 좌우로 털어낸 강성태가 다시 시선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아르윈을 비롯한 주변 풍경이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냐. 예약했다고 그랬지?”
“예, 형님.”
아르윈의 답을 들은 직후였다.
이번에는 내내 괜찮았던 볼 안쪽이 느닷없이 욱신거렸다.
일렁이던 시야, 갑자기 흘러가는 듯 보였던 세상, 그리고 불현듯 일어난 입 안쪽의 통증까지.
‘더는 미래에 기웃대지 마.’
어쩐지 쿠크리가 주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만에 하나, 스페츠나츠 대원들을 앞에 두고 이런 상태에 놓인다면, 강성태는 무조건 죽은 목숨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미아리 태섭이파와 마주한 상태에서 눈앞이 흘러간다면 몸뚱이에 회칼 박히는 일 말고는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짐작은 그랬는데 이걸 또 다른 사람에게 의논할 수도 없었다.
강성태는 궁금한 얼굴로 기다리는 아르윈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은 일은 가서 의논하자.”
“예, 형님.”
강성태는 아르윈과 함께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랐다.
호텔이라고 해야 병원에서 10분 거리였다.
승용차의 뒷좌석에 앉은 강성태는 화려하게 빛나는 창밖을 보며 쿠크리의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쿠크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정말이지 막 사용하기 위해 시장에서 구하는 게 있고, 다른 하나는 성인식을 거친 남자나 용병에 선발된 대원이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로 구하는 두 종류였다.
평생을 함께할 쿠크리는 날을 함부로 꺼내지 않는다.
한 번 꺼내면 반드시 피를 먹여서 넣어야 탈이 없다는 말에 따라 혹시 벨 사람이 없으면 주인의 손바닥을 갈라서라도 피를 묻힌다.
그렇게 함께한 쿠크리는 주인의 영혼을 지켜준다는 전설이 있었다.
전장에서 죽은 주인의 영혼이 다음 생까지 무사하게 가도록 쿠크리가 길이 되어주었다는 설화도 있었다.
‘내가 걱정됐었냐?’
강성태가 쿠크리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질문을 건넸을 때였다.
논현동 대로를 달리던 아르윈이 빌딩 사이에 뜬금없이 서 있는 작은 호텔의 입구로 방향을 틀었다.
국제적인 행사를 유치한 것도 아닐 텐데 좁은 주차장에는 비싸다는 온갖 수입차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었다.
강성태는 먼저 쿠크리를 허리 뒤에 꽂았다. 그리고는 아르윈과 함께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오른쪽에 작은 프런트, 정면에 2인용 소파, 다시 왼편에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이 전부일 정도로 로비는 좁았다.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카드 키를 건네주는 우리나라 직원이 궁금한 눈으로 강성태와 아르윈을 살폈으나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강성태는 아르윈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5층으로 올라갔다.
예약했던 객실까지 맞은편으로 이어진 복도를 십여 미터 걸으면서 왜 주차장에 그토록 비싼 승용차들이 촘촘하게 서 있는지 알았다.
그리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문을 열어준 아르윈이 객실 입구에 키를 꽂은 다음,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객실 안으로 들어선 강성태는 내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정면에 좁은 창과 그 아래 둥그런 테이블, 의자 두 개, 영상에서 본 것과 같았다.
다음으로 화장실의 위치와 구조까지 확인하고서 테이블로 향했다.
“너 지금 여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아.”
테이블에 앉은 강성태는 최치곤의 말을 떠올렸다.
많이 급했었나?
강성태가 픽 웃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객실 문이 열렸다.
먼저 서른 중반의 필리핀 여자가 들어왔고, 그 뒤에서 움직인 아르윈이 문을 닫고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한국식 예의를 익혔는지 필리핀 여자가 양손을 마주잡은 자세로 강성태의 앞에 섰다.
“러시아 투숙객이 묵는 객실의 전원을 내릴 수 있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을 전해준 아르윈이 여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함께 다닐 때는 몰랐는데 필리핀 사람을 대하는 아르윈의 눈빛과 표정, 목덜미에 그려진 해적 문신에 묵직한 위엄이 담겨 있었다.
“지금은 만실, 새벽 1시, 객실 텅 비면 카운터 직원 들어가요. 그때 전기 내리면 연락 와요.”
필리핀 여자가 어설픈 우리말로 상황을 설명했다.
“의심이 많은 놈들이라 여기 직원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줄 거야. 너무 위험해.”
강성태가 영어로 말하자 필리핀 여자가 아르윈을 돌아보았다. 나서도 되겠냐는 의미로 보였는데 실제로 아르윈이 고개를 끄덕이자 입을 열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새벽 1시면 객실 손님이 대부분 나갑니다. 간혹 늦게 들어오는 손님이 있는데 입구에 만실이라는 표시를 걸면 됩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소란이 일어나도 특별히 문제될 게 없습니다.”
두려울지 모를 상황인데도 필리핀 직원은 무척이나 덤덤한 표정이었다.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 40분이었다.
“일단 내용은 알았으니까 조금 고민하고 결정하자.”
아르윈이 눈짓으로 문을 가리키자 고개를 숙인 필리핀 여자가 객실을 나섰다.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강성태의 권유를 받은 아르윈이 자리에 앉았다.
“직원이 너무 위험해. 긴장해서 실수할 수도 있고.”
“이런 말씀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필리핀에서는 워낙 흔한 일입니다. 경찰과 짜고 관광객 작업하는 일도 흔하고, 택시, 오토바이 기사, 하다못해 클럽에서도 관광객을 상대로 이런 식의 작업을 많이 합니다.”
어쩐지 너무 태연하게 상황과 계획을 설명하더라니.
“잘할 겁니다, 형님.”
아르윈이 재차 뜻을 밝힐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유섭우입니다, 형님. 사우나에서 보셨던 돼지들이 또 업장에 와서 진상치고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형님.
“거기가 어딘데?”
- 스토리 라인이라고 논현동에 있는 룸살롱입니다, 형님.
“논현동?”
오늘은 종일 논현동을 뱅뱅 돈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저쪽에서 성경일이 튀어나올 정도로 다부지게 두들겨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 그 정도면 저보다 업장 관리하는 김전동을 시키는 게 더 좋습니다, 형님.
“그럼 그렇게 해. 대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혹시 얻어맞게 되면 시원하게 깨져야 한다고 알려둬. 아니면 진짜 저쪽이 이를 북북 갈고 달려올 정도로 족치고. 연장은 들지 마.”
- 알겠습니다, 형님.
다부진 답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권총은?”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강성태가 묻자 아르윈이 재킷 안쪽에서 권총과 소음기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알겠지만, 소음기를 걸어도 이 정도 복도면 객실에서 모두 들어. 다음으로 탄알이 유리나 벽을 깰 수 있고.”
“탁자나 침대는 교체하고, 벽은 벽지를 바르면 되는데 유리는 아무래도 문제가 될 거 같습니다.”
철컥.
권총을 확인한 강성태는 소음기를 들어 총구에 대고 돌렸다.
“뒤처리는?”
“객실에서 처리하시면 세탁물 수거함에 넣어서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남은 처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소음기 조립을 마친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아서 당장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외출한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소음기를 조립한 권총을 내려다본 아르윈이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건넸다.
“택시를 불러달라면 문 열었을 때 작업하는 거고, 바로 객실에서 나오면 따라가면서 기회를 노려야겠지.”
답을 한 강성태는 입술을 뒤틀었다.
진심으로 키란이 아쉬웠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