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 - 12화 (223/513)

11권 - 12화

드미트리예프라는 이름, 흡사 한국인처럼 보이는 동양인까지는 확인했다. 그러나 불행하게 호텔의 이름을 알지는 못했다.

‘호텔 이름이나 장소를 보여달라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강성태는 악착같이 눈을 부릅떴다.

아득한 저 너머에 의식을 맡기면 이 고통이 끝난다.

눈을 뜰지, 심장이 멎어 이대로 죽을지는 몰라도 이 끔찍한 고통만은 끝난다.

‘끄으-윽.’

그런데 여기에서 무너지면 로라와 이병렬, 그 뒤로 줄줄이 죽는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정도의 고통을 견디는 강성태의 시야 앞에서 어둠이 영상을 서서히 덮었다.

‘안 돼!’

마지막 발악처럼 영상에 집중하던 강성태는 테이블 위의 작은 창 너머에서 ‘크랩 하우스’라는 희미한 글자를 눈에 담았다.

정말 크랩 하우스 맞나?

헛것을 본 건 아닌가?

점차 좁혀지던 어둠이 창의 그 부분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절대 확인하지 못했을 정도로 흐릿한 글자였다.

어둠이 영상을 모두 덮으며 암흑과 고통만이 강성태에게 남았다.

이모 장숙경과 호텔까지 벌써 영상을 두 개나 보았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들기 위해 강성태는 볼 안쪽 살을 이에 넣었다.

강성태가 이를 깨물기 직전이었다.

좀 더 괴롭히고 싶은 것처럼 어둠의 중앙이 다시 열리며 새로운 영상이 떠올랐다.

“너는 뭐야, 이 새끼야?”

거친 욕설과 함께 고개를 조아린 최치곤의 모습이 나왔다.

“야, 이 씨발 놈아. 너 꼴리면 나오고, 안 내키면 잠수 타는 게 생활하는 놈이야? 보스 친구면 더 잘해야 할 거 아냐, 이 개새끼야.”

“꼴린 대로 살 거면 깔끔하게 인사 물리고 생활 접든가. 보스랑 친구라고 이 씨발 새끼가 위아래가 없어.”

고개를 떨군 최치곤을 둘러싼 네 명이 거친 욕을 쏟아내고 있었다.

예전에 이동재라고 갈치같이 생긴 놈이 저런 욕을 했을 때, 대뜸 들이받았던 인간이 최치곤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깔의 최치곤이 고개를 떨군 채 묵묵하게 욕을 삼키고 있었다.

“야! 뭐라고 말을 해봐, 이 새끼야!”

“죄송합니다, 형님.”

“씨발! 병렬이 형님도 너무하지. 이런 새끼한테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니까 조직 꼴이 개판이잖아!”

강성태는 고개를 떨군 최치곤의 옆모습을 보았다.

이병렬과 유섭우, 이종환이 지켜줄 때는 몰라도 강남과 안산까지 흡수한 이면에서 최치곤은 저런 수모를 감당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조직 앞에서 너 곤란하게 할까 봐 장례식에도 못 갔다.”

이병렬의 앞에서 최치곤이 했던 말이었다.

혼자 있는 최치곤이 수모를 당하는 것도 몰랐지만, 이병렬의 지시가 저렇게 갈굼의 이유가 되는 줄도 알지 못했다.

강성태는 최치곤을 둘러싼 덩치 넷을 똑똑하게 눈에 담았다.

다른 조직과 싸우는 것만큼이나 내부 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가뜩이나 하얗던 머릿속이 분노로 가득한 순간이었다.

스며들 듯 다가온 어둠이 강성태를 품었다.

‘이대로 눈을 감아.’

곧바로 고통이 멀어졌고, 이어서 잠에 빠지는 것처럼 감각이 무뎌졌다.

‘너 혼자 모든 걸 짊어질 필요도 없다. 이제 쉬어도 돼.’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 죽는다.

최치곤은 피를 토하며 울 테고.

그 멍청한 놈은 복수한답시고 인생을 망치거나 아니면 몸을 망칠 게 분명했다.

‘잠깐만이라도 눈을 감아.’

강성태는 어둠이 보란 듯이 픽 웃었다.

실제로 웃었는지, 어둠이 보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둠이 속삭일 틈도 없이 독하게 이를 깨물었다.

으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삽시간에 어둠이 사라졌고, 곧바로 볼 안쪽에 비수를 박아넣은 뒤에 머리까지 쑤시는 듯한 고통이 강성태를 덮쳤다.

“끄윽.”

“형님! 형님!”

있는 힘을 다해 상체를 세운 강성태의 눈에 아르윈이 들어왔다.

살아난 거겠지?

차창 밖의 불빛과 입에서 주르륵 흘러나오는 핏물이 강성태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여기 어디야?”

“방지병원 바로 앞입니다. 고통이 심하신 거 같아서 일단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빠앙! 빠아앙! 빠앙!

아르윈이 멈추는 바람에 뒤에 줄줄이 늘어선 차량들이 연달아 클랙슨을 울려댔다.

“일단 병원으로 들어가.”

“예, 형님.”

차를 움직인 아르윈이 방향을 틀어 병원 주차장에 세웠다.

티슈를 꺼내 입을 닦은 강성태가 뒷문으로 내렸을 때, 아르윈이 운전석에서 급하게 몸을 빼냈다.

“물 한 병만 구해와.”

아르윈에게 물을 당부한 강성태는 주차장 구석으로 움직여 스마트폰을 꺼냈다.

검색 플랫폼에 접속한 뒤였다.

‘크랩 하우스’라는 글자를 입력하자 여덟 곳의 주소가 줄줄이 나왔다.

논현동을 확인한 강성태는 찾아가기를 눌렀다. 그리고는 지도가 떠오르자 크랩 하우스의 맞은편을 살폈다.

‘서브시티 호텔?’

꼼꼼하게 확인했으나 맞은편 반경 백 미터 안에 다른 호텔은 없었다.

어둠이 엉뚱한 러시아 사람을 보여주었을 리 없으니 영상에서 나온 두 사람은 스페츠나츠 암살조라고 보아야 했다.

강성태가 입에 고인 핏물을 구석에 뱉을 때였다.

물병과 티슈를 든 아르윈이 빠르게 다가왔다.

먼저 입을 헹군 강성태는 이어 스마트폰에 입력된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암살조를 찾은 거 같다. 한국의 논현동, 서브시티 호텔, 투숙자 드미트리예프를 확인해 봐. 최소 두 명이 투숙했는데 한 명은 동양인으로 보인다.”

결정적인 단서를 주었는데 바르지오 만시니는 바로 대꾸를 내놓지 않았다.

- 혹시 코드를 사용했나?

“그건 아니니까 안심해. 알게 된 과정을 설명하자면 복잡해. 그러니까 확인부터 해.”

- 알았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다시 입을 헹구고 티슈로 닦았다.

“논현동 서브시티 호텔이라고 하셨습니까, 형님?”

강성태는 시선만 들었다.

“모텔은 주로 조선족이나 베트남인을 고용하는데 강남의 중급 호텔은 필리핀 노동자들을 선호합니다. 영어가 되고, 야간에 바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설명의 끝에서 강성태의 시선을 살핀 아르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조직원에게 확인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형님?”

혹시나 싶었던 질문이었다.

“연락해 봐.”

강성태의 지시를 들은 아르윈이 구석으로 움직여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푸후.”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낸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고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여러 번 울린 뒤였다.

- 여보세요?

가라앉은 최치곤의 음성이 들렸다.

당장 쫓아가서 뒤집어엎고 싶지만, 내일 서달수의 발인을 두고 할 일은 아니란 생각에 강성태는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어디냐?”

- 장례식장에서 나와서 택시 타고 가는 길이다.

“바쁘냐?”

- 뭔데 그래?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최치곤의 음성에 조금씩 활력이 피어나고 있었다.

“안 바쁘면 좀 도와주라. 오늘 일이 진짜 많다.”

- 뭐? 커피 마실 인간이 많냐? 아메리카노라면 내가 좀 만들 줄 알지.

“연장 쓰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겁나면 그냥 가든가.”

- 어디로 가면 되냐?

숨도 안 쉬고 대꾸가 넘어왔다.

“집에 가서 쿠크리 가지고 방지병원으로 와. 되겠냐?”

- 한 시간 안으로 간다.

강성태가 통화를 마쳤을 때였다.

기다리고 있던 아르윈이 다가왔다.

“그쪽에 필리핀 출신 여직원 세 명이 근무합니다, 형님.”

“연결돼?”

“우리 조직 안 거치면 그런 곳에 취직 못 합니다, 형님.”

“드미트리예프라는 러시아 손님이 투숙했는지 알아봐. 함께 투숙한 인원이 몇 명인지도 알아보고.”

입술로 ‘드미트리예프’라는 이름을 외우며 아르윈이 다시 구석으로 향했다.

결과를 기다리며 강성태는 물로 입을 헹궜다.

최치곤에게 말한 대로 정말 일이 많은 주말이었다.

월요일, 화요일에 굵직한 이벤트도 많았다.

거기에 부수입이나 아르바이트처럼 미아리 개발 건까지 달려서 이병렬의 존재가 진심으로 아쉬웠다.

입안에 찝찔한 핏물이 다시 고일 때였다.

통화를 마친 아르윈이 다가왔다.

“서브시티에 러시아인 두 명이 일주일 전에 투숙했는데 객실 청소 때문에 문제가 있었답니다, 형님.”

“객실 청소?”

“두 사람이 외출해서 들어간 적이 있는데 침대 커버를 교체하는 순간에 돌아와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 뭔가 감췄나?

강성태의 생각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자존심을 다치면 절대 못 참습니다. 제가 조직을 이끌면서 가장 많이 달려가는 일 중 하나가 무시당한 일에 보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형님.”

아르윈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침대 커버 문제로 다투고 나서 두 사람이 외출한 뒤에 일부러 방에 들어갔었답니다. 귀중품이라도 빼내서 복수하려는 거였는데 매트리스 아래에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는데 아르윈은 아직 상체를 기울인 자세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을지 모르니 일단 앉아.”

강성태는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옆자리에 그를 앉혔다.

“여기까지는 별거 없는데 제가 다섯 명 아니냐고 물어봤던 게 걸렸답니다, 형님.”

지루하던 이야기가 툭 튀었다.

“테이블에 근처 중급 호텔 명함이 있어서 메이드가 그쪽에 일하는 동료에게 연락했답니다. 다툼이 있었다는 하소연도 하고, 혹시 옮겨가면 조심하라는 뜻으로 연락한 건데 그곳에 이미 러시아 사람 셋이서 룸 두 개를 빌려 투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이렇게 쉽게 남은 셋을 찾았다고?

아르윈의 말을 듣는 순간 강성태는 픽 하는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지이이잉.

그리고, 그 직후에 아르윈의 스마트폰이 짧게 울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투숙할 때 적었던 내용입니다, 형님.”

“문자로 나한테 보내줘.”

“예, 형님.”

아르윈이 사진을 찾아 버튼을 누르자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짧게 울었다.

“근처 호텔 이름이 뭐야?”

“선샤인 호텔이랍니다.”

답을 들으며 강성태는 받은 서류를 바르지오 만시니에게 보냈다.

[논현동 선샤인 호텔, 암살조 세 명이 투숙 가능성 있음. 확인 바람.]

문자의 끝에 내용까지 전한 강성태는 시선을 들었다.

“권총은?”

“실탄하고 소음기까지 차에 실어뒀습니다.”

최치곤이 쿠크리만 가져오면 대강 준비가 끝난다.

“내가 암살조를 해결하고 나면 뒤처리할 방법이 있나?”

“우리 조직원 다섯만 부르게 해주십시오, 형님.”

모처럼 조직을 동원할 일이 생겼다고 여겨서인지 아르윈의 목덜미에 그려진 해적이 눈매를 뒤틀었다.

“호텔에서 해결할 생각이십니까, 형님?”

“CCTV와 투숙객들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강성태의 답이 떨어지자 아르윈과 목덜미의 해적이 동시에 묘한 미소를 그려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놈들이다. 쉽게 생각하지 마.”

“솔직히 형님이 제 권총을 가져가실 때 꼼짝도 못 했습니다. 또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뒤가 어떻게 되든 방아쇠를 당기고 수습할 거 같습니다.”

강성태의 경고에 아르윈이 빠르게 대꾸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CCTV와 투숙객 해결, 그리고 뒤처리입니다, 형님.”

“프런트 근무자도 아니고, 객실 담당이라며?”

“중급 호텔은 야간에 담당자가 거의 자리에 없습니다, 형님. 지하 바라고 해도 손님 몇 명 앉는 작은 공간에서 노래하는 건데 그 정도면 프런트도 수시로 맡깁니다.”

중급 호텔에 투숙한 경험이 거의 없는 강성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르윈이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훈련받은 암살조의 경계를 쉽게 넘어서기는 어렵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았다.

바꿔 말하면, 어설프게 건드려서 해결도 하지 못하고, 일만 크게 벌어질 위험이 크다는 의미였다.

운이 좋은 것도 있었다.

다섯 놈이 한 호텔에 있는 게 아니라 안전과 경계를 위해 두 개의 호텔에 나뉘어 있다는 점이었다.

“최치곤은 봤었지?”

“전에 터널을 지나는 바람에 커피전문점으로 가서 인사했었습니다, 형님.”

그러고 보니 아르윈과 최치곤은 강성태가 볼을 씹은 날에 만나는 기묘한 인연이었다.

“조금 뒤에 이리 와서 밤에 함께 움직일 거다.”

강성태가 최치곤에 관해 말해주었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손에 든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자존심 상하지만, 암살조가 확실하다. 지휘자는 선샤인 호텔에 투숙한 유리 세브첸코,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에서 러시아에 반대하는 인물 암살을 전담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은 대원이다. 47세로 나이가 제법 많아.

“동양인은?”

- 중국계 어머니를 둔 미하일 드미트리예프. 러시아 정착 한국인의 암살과 동향 파악을 담당했던 스파이 겸 암살요원으로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기록이 있었다.

“주의할 다른 사항은?”

- 이번 암살조는 이름과 여권 번호를 거꾸로 들어가 찾아냈을 정도로 아예 기록이 없다. 스페츠나츠 공식 임무가 아닌 셈이지. 이 기록을 CIA에 올려도 되겠나?

질문을 받은 강성태는 잠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이 정도면 CIA는 모두 알아차린다.

나중에 도움받을 경우를 생각해서 한 자락 깔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화이트 테일이 알아낸 거로 하자.”

- 이래서 내가 미스터 강이라는 남자를 좋아하지. 행운을 빈다.

폭력조직의 보스, 참 일 많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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