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 11화
기다리던 바르지오 만시니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 미스터 강? 여러 방향으로 확인하는데 러시아에서 넘어간 다섯 명의 명단, 여권 사진, 그리고 현재 위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기다리는 강성태의 심정을 짐작하는지 바르지오 만시니는 대뜸 결과를 먼저 전했다.
- 아무리 내가 개인적으로 움직인다 해도 지금껏 구축한 정보망이 있는데 여권 사진조차 얻지 못했다는 게 너무 실망스러웠다.
바르지오 만시니가 이렇게 나오면 뭔가 알아낸 게 있다는 의미였다.
설렁탕집 앞에 도착한 강성태는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뒤에 통화에 집중했다.
- 걸리는 건 하나밖에 없었지.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내가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되는 곳.
“정보국이 직접 개입했나?”
- 스페츠나츠 암살팀이다.
“후우-.”
바르지오 만시니의 말을 듣기 무섭게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확실해?”
- 하마터면 꼬리를 잡힐 정도로 파고들어서 얻어낸 정보다. 이 이상 무리하다가는 내가 먼저 타깃이 돼서 중단하기는 했지만, 이걸 바탕으로 한국의 어느 곳에 있는지 파악해 볼 생각이다.
“존 보스만에게는 알려줬어?”
- 이제 전화해야지.
“화이트 테일.”
전화를 끊으려는 바르지오 만시니를 강성태는 나직하게 불렀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옅은 웃음소리가 건너온 뒤에 통화가 끊겼다.
영어로 오간 통화라 아르윈은 대강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런데도 모른 척 질문을 내놓지 않았다.
통화가 어떻든 간에 저녁을 먹으러 왔던 길이었다.
그와 함께 설렁탕집에 들어간 강성태는 메뉴판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왜 그러십니까?”
“육개장을 먹을까 하고.”
이병렬을 따라 지겹게 먹다 보니 어느새 몸에 익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육개장을 주문한 강성태는 주변을 돌아본 뒤에 입을 열었다.
“지난밤에 함께 움직였던 로라를 러시아의 스페츠나츠 암살팀이 노리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들이 로라의 아버지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을 노릴 수도 있고.”
수저를 놓던 아르윈이 귀를 쫑긋 세운 채 강성태에게 집중했다.
“당장 우리 조직에서 권총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로라를 한 번 봤으니까 급하게 당부할 일이 있을지 몰라.”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십니까?”
“아직은.”
강성태가 답을 했을 때, 육개장이 나왔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만든 메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스페츠나츠 암살팀이란 정보를 들은 탓인지는 몰라도 육개장은 입에서 따로 놀았다.
이렇게 되면 남은 건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먼저 하나는 터널을 통과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들어도 암살조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었고, 가장 최근에 보았던 미래가 뒤틀렸다는 데 있었다.
미래를 자주 들추지 말라는 경고처럼 말이다.
경고를 무시해서 받을 최고의 패널티는 역시 강성태의 죽음일 테니 어쩌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대강 배를 채우고 났을 때, 아르윈이 그릇을 기울여 남은 밥을 모두 입에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성태는 아르윈과 함께 병원으로 돌아왔다.
“잠시 병실에 들렀다가 오겠습니다.”
스페츠나츠 암살조란 말을 듣고 나더니 권총을 챙기러 움직이는 눈치였다.
강성태는 응급실로 향했다.
간호사에게 부탁해 간단하게 소독했고, 이어 좁은 통로를 걸어가 이병렬의 앞에 앉았다.
조금씩 안정된다는 의료진의 말대로 퉁퉁 부었던 얼굴이 가라앉았다. 대신 시커멓게 멍이 올라와서 당장 보기에는 어제보다 더 처참한 느낌이었다.
강성태가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차렸을 리 없다. 그런데 물끄러미 지켜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병렬이 힘겹게 눈을 떴다.
강성태를 본 이병렬이 억지로 입술 한쪽을 움직였다.
“내 잘못이니까….”
겨우 들리는 음성으로 말을 전한 이병렬이 힘겹게 침을 삼켰다.
“너무…, 자책하지 마.”
강성태는 이병렬을 향해 옅게 웃었다.
“어떡해서든 버티고는 있는데 혼자서는 힘들다.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서 더 가르쳐 주라.”
강성태를 향해 눈을 끔벅이던 이병렬이 버거운 듯 시선을 떨궜다.
“곁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강성태의 심정을 짐작하는 듯 들리는 이병렬의 당부였다. 겨우 그 말을 전한 이병렬이 잠을 이기지 못하는 모양으로 눈을 감았다.
이병렬을 바라보던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외래 진료가 끝난 방지병원은 한적했다.
조명을 반으로 줄인 로비는 어둑했고, 주차장은 좀 더 진한 어둠을 품고 있었다.
구석으로 움직인 강성태는 주차장 안쪽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삼합회가 가페와 손잡더니 결국 스페츠나츠 암살팀이 들어왔단다.
내일 오전에 들어온다는 다섯 명을 제외하더라도, 스페츠나츠 암살팀 다섯을 상대로 곤잘레스 이두안, 로라, 안다미, 어쩌면 조태완까지를 홀로 지키기는 어렵다.
혼자서 버둥거리다가 언제 안다미, 로라, 조태완의 장례식에 서 있을지 모르는 게 현실이었다.
강성태는 응급실을 바라보았다.
응급실 간판에서 쏟아진 환한 빛이 구석을 차지한 어둠에 밀려 강성태의 옆자리에 앉지 못했다.
결국, 최후의 방법을 써야 할까?
전화를 걸면 돌이키지 못한다.
원하는 걸 받고 나면 1년 안에 훈련을 다시 받아야 하고, 그 뒤에는 CIA가 지정하는 전장으로 나가야 한다.
거기에 강성태가 사라진 신강남파를 책임져야 할 이병렬은 겨우 죽음에서 돌아온 상태였다.
스페츠나츠를 해결한다고 해도 삼합회가 다시 밀고 들어와 국내조직과 손잡는다면 적어도 이병렬과 조태완은 죽은 목숨이었다.
강성태는 응급실을 보며 옅게 웃었다.
“곁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죽음에서 돌아온 이병렬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내가 지켜주면 되지.
강성태가 마음을 굳히는 순간이었다.
로비를 열고 아르윈이 주차장으로 나왔다.
“아르윈, 운전할 수 있지?”
“예, 형님.”
대답과 동시에 아르윈은 주차장에 세워둔 독일제 대형 승용차의 뒷문을 열었다.
강성태는 뒷문 앞에 서서 아르윈을 돌아보았다.
“지하터널을 지나야 해. 깔끔하게 포장된 곳 말고 연결 부위가 있어서 덜컹대는 소리가 연달아 나는 곳.”
“예? 형님?”
“근처에 그런 곳이 없으면 서라대학병원 앞으로 가자. 거기에서 신월동 쪽으로 있는 터널을 지나가.”
무슨 소리인가 눈가를 좁히던 아르윈이 생각난 게 있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양재동 넘어가는 길에 그런 터널이 있습니다, 형님.”
“그리로 가. 그리고 혹시 내가 뒤에서 고통스러워하더라도 멈추지 말고. 만약 터널을 지났는데 의식이 없으면 그때는 병원으로 달려.”
“형님?”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아르윈은 말리고 싶은 눈치였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설명한다고 알아들을 것도 아니어서 강성태는 단호한 표정으로 뒷좌석에 앉았다.
더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문을 닫은 아르윈이 운전석에 올라 승용차를 움직였다.
혹시 방음이 너무 잘돼서 효과가 떨어지는 건 아닐까?
고통만 무지하게 받고 아무것도 못 보면 억울한데?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강성태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고통을 잊게 해줄 죽음의 유혹을 이겨낼 각오가 필요했다.
**
병원을 나선 유섭우는 먼저 김정훈에게 전화했다. 그런 뒤에 알고 지내던 강북 깡패에게 전화했다.
- 자네 요즘 잘나간다더만 어쩐 일인가?
“미아리 장태섭이 시행사 한다는데 혹시 알아?”
- 티에스 개발이라고 태섭이란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만들었다고 하더만. 왜? 자네도 투자 좀 해보려고 그런가?
“성경일이 거기에서 일하지?”
- 티에스 상무인가 하는 명함 달고 다니는데 어깨에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가지 부러지겠더만. 아주 거만이 하늘을 찔러. 지난번에 행사에서 잠깐 봤는데 애새끼가 영 못쓰게 돼버렸어.
말을 늘어놓던 상대방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 혹시 성경일 때문에 마음 상한 일이 있으면 적당히 접으소. 그쪽 애들이 막무가내야.
“알았어. 고마워.”
통화를 마친 유섭우가 다른 깡패 이름을 찾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손에 든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정훈이 형님께서 연락하셔서 전화 드립니다, 형님. 논현동 스토리 라인 관리하는 김전동입니다, 형님.
김정훈이 시켜서 전화했고, 스토리 라인이라는 룸살롱에서 일한다면 통화할 내용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티에스 개발이라는 곳에서 일하는 돼지 다섯이 거기에서 술 마셨어?”
- 그렇습니다, 형님.
“깽판 친 거 같던데?”
- 말도 마십시오, 형님. 가게 운영하니까 참기는 했는데 밟아 죽일 뻔했습니다, 형님.
김전동은 맺힌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 애새끼들이 아가씨 신고식 받는다고 지랄해서 두 명이 울며 나왔는데 그거 가지고 웨이터 애들 때리고, 아주 진상이란 진상 짓은 다 했습니다, 형님.
김전동은 말을 시작하기 무섭게 울분을 쏟아냈다.
“너 정도면 이름 알려졌잖아?”
- 생활한 것도 아니고 그냥 양아치 새끼들이라서 생각이란 게 전혀 없는 놈들이었습니다, 형님. 그런 자리에는 제가 직접 나서지 않고 웨이터에서 잔뼈가 굵은 상무가 들어갑니다.
“술값은?”
- 법인 카드 긁었습니다. 그것도 끝까지 지랄해서 결국 아가씨들 티씨는 안 내고 갔습니다, 형님.
워낙 양아치 짓거리라 유섭우는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 그 새끼들이 무슨 사고 쳤습니까, 형님? 오늘도 올 거 같은데 봐서 밟아버릴까요, 형님?
“또 온다고?”
- 여기 아가씨 한 명 어떻게 못 해서 안달 난 눈치입니다. 아까도 상무에게 전화했었답니다, 형님.
“그래?”
창을 봤던 유섭우는 바로 입을 열었다.
“너는 나서지 말고 그 새끼들 혹시 오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
- 예, 형님.
통화를 마친 유섭우는 운전석에 앉은 덩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논현동에 스토리 라인이라는 룸살롱 있으니까 내비 찍어서 그 근처로 가자.”
“예, 형님.”
승용차가 움직이고 나자 유섭우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
퇴근 시간 근처라 승용차는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승차감이나 방음도 그렇고, 차라리 아르윈의 승용차로 길이 뚫릴 때 다시 올까?
강성태가 주변에 가득한 차량을 보며 고민할 때였다.
“형님.”
아르윈이 경고하듯 강성태를 불렀다.
서라대학병원 방향에 있는 터널보다 훨씬 크고 길어 보이는 지하차도가 앞에 있었다.
“다음 신호에 들어갑니다.”
“천천히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앞을 비워. 그리고 가능하면 일정하게 달려.”
“예, 형님.”
앞유리로 보이는 신호등이 파랗게 바뀌었다.
아르윈은 앞차와의 간격을 위해 천천히 움직였다.
신경질적으로 눌러대는 뒤차들의 클랙슨 소리가 요란할 때, 아르윈이 승용차의 속도를 높였다.
부으으응.
승용차는 곧바로 지하터널로 들어섰다.
더컹. 더컹.
숨이 턱 막히는 게 반가운 건 이번이 처음이지 싶었다.
이어서 달려드는 가슴과 심장이 터지는 듯한 고통에 강성태는 이를 악물며 상체를 기울였다.
“형님! 형님!”
아르윈이 부르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순간, 강성태는 수도 없이 괴롭히던 교통사고의 순간으로 돌아갔다.
다리를 지날 때 일정하게 들리는 덜컹 소리, 왼편에서 달려드는 거대한 차량, 충돌,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허공에 떠오르는 승용차.
‘끄윽.’
고통을 이기기 위해 이를 악무는 순간, 어둠이 달려들었고, 이어 천천히 앞을 열어주었다.
“엄마. 예쁘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여자의 음성이었다.
“너무 비싼 거 아니니?”
“성태 오빠를 위한 상견례잖아. 이 정도는 입어줘야지.”
“네가 무슨 돈을 얼마나 번다고?”
“엄마 지금 딸 무시해?”
화사하게 차려입은 장숙경을 보며 김민정이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이건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이 끔찍한 고통과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보고 싶었던 장면은 이게 아니었는데?
‘끄으윽.’
강성태를 비웃듯 펼쳐졌던 장면을 어둠이 서서히 덮었다.
심장을 불에 던져 놓은 듯한 후끈한 고통과 폐를 갈가리 찢어대는 통증이 머리로 솟구쳐 모든 것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였다.
어둠이 지겨울 정도로 서서히 열렸다.
“드미트리예프.”
은발과 백색 피부인 전형적인 러시아인이 불렀고, 한국인과 외모가 똑같은 남자가 시선을 주었다.
강성태는 어둠의 중앙에 펼쳐진 주변을 악착같이 눈에 담았다.
작은 창, 그 앞에 놓인 둥그런 테이블과 나무 의자, 평범한 호텔이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