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 - 10화 (221/513)

11권 - 10화

제4장.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다가서는 강성태를 본 최치곤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냐?”

가볍게 질문을 던진 강성태는 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쁜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었다.

이병렬은 힘겨운 얼굴로 잠에 빠져 있었다.

“잠깐 인사드렸다. 약 기운을 이기기 어렵다고 바로 잠드시더라.”

중간에 잠시 짬을 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뭐라 해도 커피알리고에 집중해야 할 최치곤이 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잠깐 시간 되냐?”

표정도 그렇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여서 강성태는 고갯짓을 한 뒤에 몸을 돌렸다.

“병원 근처에 있을 테니까 이병렬 환자 깨어나면 알려주시겠어요?”

“그러세요.”

카운터에 앉은 간호사에게 당부를 전한 강성태는 최치곤과 함께 응급실을 나섰다.

외래 손님이 있는 시간이라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는 곤란했다. 비어 있는 병실이 있기는 한데 거기까지 올라가느니 근처 커피전문점으로 향하는 게 좋았다.

병원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커피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받은 강성태는 가게 앞에 내놓은 테이블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뭐가?”

“이마에 커다랗게 하고 싶은 말 있음, 이렇게 써놨잖아. 무슨 일인데 이렇게 뜸을 들여?”

잠시 망설이던 최치곤은 머그잔과 대화하는 사람처럼 시선을 떨군 상태로 입을 열었다.

“어제 낮에 내가 좀 힘들었거든. 달수 형님, 병렬이 형님, 진용이 형님도 안됐고, 혼자 애쓸 너도 안쓰럽고. 주차장에서 울음이 터졌는데 은주가 와서 달래주더라.”

유난히 길이가 짧은 손톱으로 머그잔을 긁으며 최치곤이 말을 이었다.

“전국 조직에서 문상 올 텐데 다른 조직 앞에서 너 곤란하게 할까 봐 장례식에도 못 갔다. 카페 문 닫고 바로 포장마차로 가는데 사고 칠 것처럼 보였는지 따라와서 소주 한 병 마셨으면 됐다고 손을 잡아끌더라. 집에 들어가는 거 보겠다고.”

테이블이 무너지도록 한숨을 내쉰 최치곤이 말을 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자라고 다독여주는 은주한테 입술 들이댔다가 시원하게 따귀 얻어맞았어.”

설마 했던 고백이 나오는 순간, 강성태는 눈매를 매섭게 바꾸었다.

“정말 면목 없다. 하지만, 절대 가볍게 생각한 거 아니다. 사람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종일 생각나고 얼굴이 떠오르면 숨이 턱턱 막혀.”

침묵하는 강성태를 향해 최치곤이 시선을 들었다.

“깡패 그만둘 수 있냐고 묻는데 너나 병렬이 형님에게서 연락 왔을 때 모른 척할 자신이 없어서….”

거짓으로라도 약속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평생을 함께하자는 건데 거짓말로 시작할 수는 없잖아.”

강성태는 갑갑한 속을 긴 숨으로 토해냈다.

조마조마하기는 했지만, 이런 순간에 사고를 칠 거라 예상하지 못했고, 또 저렇게 말할 정도로 깊게 빠져 있는 줄도 이제 알았다.

“은주 씨를 진짜로 마음에 품었다면 생활 접어.”

“야! 네가 그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생활을 접어? 막말로 심부름센터 한다는 명분 때문에 카페 지키는 거지, 아니었으면 나도 안산에 달려갔어야 하는 거잖아.”

“은주 씨 잊을 수 있냐? 이대로 포기할 수 있어?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입술 들이댔다면 아무리 내 친구여도 넌 그냥 개새끼인 거야.”

고개를 든 최치곤이 독한 눈빛으로 강성태를 노려보았다.

“비겁하게 이거저거 재지 말고 지금은 솔직해지자. 나하고 병렬이가 걸려서 깡패 해야 한다고? 네가 은주 씨하고 행복한 가정 꾸리며 사는 게 나한테 보여주는 최고의 의리야.”

“그럼 너는 뭐야? 너는 존나리 잘나서 안다미 만나면서도 깡패 하는 거냐? 나는 너처럼 잘나지 못해서 생활 접어야 하는 거고?”

“야, 이 씨! 서달수가 나 때문에 죽었어! 병렬이는 지금 응급실에서 저러고 있고! 내가 좋아서 이 짓 하는 거로 보여? 보스니 두목이니 지금 신나서 돌아다니는 거 같냐고?”

아차 했던 최치곤이 미안한 얼굴로 시선을 떨궜다.

“오후에 들렀을 때 옆방에서 나온 달수 가족의 울음이 아직 귀에 쟁쟁해. 그런데 지금 내가 물러서면 조태완 고문, 병렬이, 진용이, 그 외에도 나를 믿고 나서 준 사람들이 모두 죽게 돼.”

뭔가 말하려던 최치곤이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러는 건지.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너만큼은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짧은 정적이 흐른 뒤였다.

“미안하다.”

최치곤이 짧은 사과를 내놓았다.

“은주 씨에게 매달릴 자신 없으면 당분간 엔터테인먼트에 나가.”

“거길 내가 왜 가?”

“이광준하고 김종수 완전히 은퇴했다. 거길 진용이한테 맡길 생각인데 곁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어차피 은주 씨에게 그런 짓까지 해놓고 다시 카페 나갈 수도 없잖아.”

속이 타는 모양인지 최치곤은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씨발. 커피 존나리 못 만들었네. 깊은 맛이 없어, 씨발.”

괜한 커피를 탓했던 최치곤이 시선을 들었다.

“비겁한 부탁 하나 해도 되냐?”

“말해.”

“조금만 고민할 시간을 주라.”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며칠이라도 쉬면서 어느 길을 갈지 정하게 해달라고. 물론 내가 아무리 생활 접는다고 해도 은주가 안 받아들이면 말짱 꽝이지만, 지금 결정하면 어느 쪽이든 아쉬움이 남을 거 같아서 그렇다.”

강성태를 살핀 최치곤이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탁이다. 그렇게 해주라.”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알아서 해.”

“고맙다.”

머그잔을 내려보던 최치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진짜 꿈이 뭐냐?”

“내 카페 운영하는 거.”

최치곤이 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진지한 질문이어서 강성태 역시 솔직하게 답을 내놓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치곤은 알아볼 거라 믿었다.

진심이 담긴 강성태의 눈빛을.

“달수 형님께 들렀다가 가도 되지?”

“그래야지.”

조금은 후련한 얼굴로 최치곤이 몸을 돌렸다.

**

조태완의 병실로 들어간 유섭우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김정훈이 있는 건 당연한데 침대 옆에 있던 이세종이 왼팔을 들어 아는 척을 할 줄은 몰랐다.

“미아리 장태섭이 하는 시행을 보스가 알아보라고 했어?”

“예, 형님.”

척 봐도 이세종이 모두 나불거린 상황이라 유섭우는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하아, 진짜! 박노익과 잘 넘어가길래 어쩐 일인가 했다. 강남 정리도 아직 안 끝난 마당에 이제는 강북 대장하고 붙게 생겼네.”

말끝에 이세종을 노려본 조태완이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보스가 지시한 일이니까 밀고 들어가긴 해야 할 텐데 뭐 그럴듯한 명분이 있냐?”

“예? 형님?”

미아리 장태섭의 밥상을 빼앗아오는 일이라 말릴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적극적으로 나서는 조태완의 질문에 유섭우는 멍한 반문을 내놓고 말았다.

“보스가 알아보라고 했다며? 뭔가 꼬투리가 있어야 지지고 들어갈 거 아냐? 생각해 놓은 게 없어?”

“그게 말입니다, 형님.”

물론 생각한 건 있었다.

어쩌면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마친 유섭우가 입을 열었다.

“점심 전에 사우나에서 말입니다, 형님.”

유섭우는 사우나에서 따귀를 갈겨줬던 도화지 다섯 놈에 관해 먼저 설명했다.

“누구?”

“미아리 성경일이라고 두 다리 동생 또래입니다, 형님.”

“그 양아치 새끼들은 또 뭐고?”

“성경일이 보상금 합의할 때 데리고 다니는 병풍들인 거 같습니다, 형님.”

유섭우가 한 말을 단박에 알아들은 조태완이 비릿한 웃음을 눈과 입술에 달았다.

뭐지?

이세종이 눈치를 살피며 조태완과 유섭우를 번갈아 볼 때였다.

“보스에게 말하면 허락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움직인 거로 하자.”

“어느 정도까지 합니까, 형님?”

“장태섭이 눈알 뒤집혀야 하니까 성경일이란 놈을 달아야지. 칼까지는 주지 말고 적당히 두들겨.”

이 생활에 빠삭한 조태완의 지시에 유섭우는 바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조태완의 눈꼬리가 비틀리는 순간이었다.

“죄송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고 보스 모르게 움직이지 않겠다고 두 번이나 약속드렸습니다, 형님. 이미 보스께서 지시한 일이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작업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형님.”

누가 뭐래도 조직을 운영하는 권한이 강성태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더구나 강성태에게 제대로 하라며 욕을 퍼부었던 사람이 바로 조태완이었다.

혀를 내밀며 입맛을 다신 조태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병풍들이 우리 보스를 씹어놓고 사과가 없어서 나선 거다. 시간 끌 거 없이 보스 찾아가 보고하고 바로 작업해.”

“예, 형님.”

뭔가 있다.

조태완이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나서고, 거기에 서두르는 이유가.

공손하게 답한 유섭우가 상체를 세웠을 때였다.

“세종이 너는 월요일에 보스가 원하는 보도 제대로 때려. 아니면 미아리 장태섭에게 너 던져줘서 이번 건 무마할 테니까 알아서 해.”

조태완이 다부지게 이세종을 눌렀다.

**

최치곤이 급하게 달려간 뒤였다.

응급실에 들어간 강성태는 카운터 간호사를 통해 이병렬이 아직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소독하기도 번거롭고, 또 조금 남은 햇살이 아쉬워서 응급실을 나서 주차장 벤치에 앉았다.

기울어진 햇살을 타고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어둠에 물들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발을 들이는 순간, 어지간하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끈적한 세상, 만에 하나 빠져나오더라고 한번 묻은 오물을 절대 닦아내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그 속에서 무얼 찾으려고 이러지?

강성태가 픽 웃을 때였다.

택시가 멈추더니 작은 가방을 든 아르윈이 병원에 들어섰다.

강성태를 분명 보았는데도 그는 인사조차 없이 현관을 열고 들어섰다.

유헌우가 알면 현찰로 병원을 사 가라고 악을 바락바락 쓸 일인데 아르윈이 든 가방에 권총과 소음기, 탄알이 들어있는 게 확실했다.

혹시 강성태에게 문제가 번지지 않도록 외면하고 들어서는 걸 테고.

내일 오전에 들어오는 가페 출신 중국인 다섯을 해결할 무기였다.

다음 날인 월요일에는 마약파티를 덮쳐서 강선영의 한을 풀어주고, 더불어 신강남파 보도 특집을 막아야 하며, 화요일에는 삼합회의 원자춘을 두들겨야 했다.

순서대로 무난하게 해결한다고 해도, 러시아에서 들어왔다는 다섯 놈이 남는다.

강성태가 나직하게 숨을 내쉴 때였다.

이번에는 검은 승용차가 들어서더니 유섭우와 덩치 셋이 내렸다.

상체를 깊숙하게 숙인 유섭우는 곧바로 강성태에게 다가왔다.

“태완이 형님께서 부르셔서 다녀왔습니다, 형님.”

그는 병원에서 있었던 조태완의 지시를 그대로 강성태에게 전해주었다.

“우리가 이세종의 처남이 운영했다는 시행사를 인수하면 굳이 명분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거 아냐?”

“순서는 그런데, 형님. 그렇게 하면 신강남파가 양아치 짓을 했다고 소문납니다, 형님. 사우나 다섯 놈을 핑계로 밀고 들어가는 것도 명분이 부족하기는 한데, 그거라도 있어야 나중에 조직 간의 싸움이 붙었을 때, 다른 쪽에서 끼어들기 곤란합니다.”

어차피 힘으로 해결하는 인간들끼리 무슨 명분을 찾나 싶은데 이 바닥의 룰이 그런 거라면 일방적으로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강성태는 사우나에서 보았던 도화지 다섯을 떠올렸다.

“어제 우리가 마신 게 일곱 병이더라.”

“그 씨발 새끼, 주접떨다가 마지막에 대가리 처박고 벌벌 떠는 거 봤냐?”

“상무 말씀이십니까, 형님?”

놈들이 자랑스레 떠벌리던 대화를 기억해낸 강성태는 유섭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놈들이 미아리 성경일이 데리고 있던 놈들이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형님.”

“오늘 병원 근처 사우나에 들어온 거 보면 어젯밤에 강남에서 술 처먹었을 확률이 높아. 술집에서 상무를 협박했든, 때렸든 행패 부린 거 같으니까 한번 알아봐. 어지간한 룸살롱이나 나이트는 전부 걸려들잖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형님?”

강성태는 놈들이 떠벌리던 말을 유섭우에게 기억하는 대로 전해주었다.

“정영권이 내 눈치 보고 있을 테니까 그리 연락해서 알아봐 달라고 해. 혹시 걸리는 게 있으면 성경일 잡으러 가기 전에 나한테 알려주고.”

“알겠습니다, 형님.”

병원에 들어설 때보다 개운해진 얼굴로 유섭우가 고개를 숙였다.

유섭우가 왔던 승용차로 돌아간 다음이었다.

교대하는 것처럼 병원 건물에서 아르윈이 나왔다.

“갔던 일 잘 보고 왔습니다, 형님.”

“그렇게 말 돌려봐야 걸리면 빠져나갈 구멍도 없어. 그냥 편안하게 하자. 저녁은?”

“바로 왔습니다. 드셨습니까, 형님?”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근처 식당으로 향하며 강성태는 성북구 일을 들려주었다.

목덜미에서 턱 아래까지 해적 문신을 한 필리핀 남자와 연예인인가 싶은 강성태를 향해 정체를 알고 싶은 시선들이 연속해서 달려들었다가 빠르게 돌아갔다.

조심스럽게 살피는 시선들을 외면한 채 강성태는 내일 입국하는 중국 출신 다섯을 떠올렸다. 그들을 상대할 무기가 준비된 상황이라 반쯤 마음이 놓였다.

문제는 아직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러시아 출신 다섯이었다.

밤에 안다미의 퇴근을 챙겨야 하고, 다음으로 아직 호텔에 있는 로라의 안전도 살펴야 했다.

‘뭐 하냐?’

강성태가 먼 하늘을 보며 답답한 심정을 던졌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스마트폰이 울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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