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 - 5화 (216/513)

11권 - 5화

박노익이 나간 뒤로 정영권이 가드와 덩치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문 앞을 막는 과정에서 다쳤는지 눈 주변과 입술이 터져 있었다.

박살 난 샴페인 병과 안주 접시, 널브러진 이광준과 김종수를 보며 정영권은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가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평소 김종수를 잘 따랐고, 강단마저 부족했던 정영권이 이광준의 지시를 어기기는 어려웠을 거다.

“죄송합니다, 형님.”

“업장 관리하는데 광준이 형님이 오겠다는 걸 네가 막기 어려웠겠지. 장례식 날에 영업하는 게 마음이 편했을 리도 없고. 앞으로도 나는 병렬이, 달수, 너, 이렇게 노력하는 걸 누군가 날로 처먹는 일은 없게 할 테니까 계속 부탁한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형님.”

강성태의 말에 감동한 모양으로 정영권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여기 둘은 숙소에 데리고 있어. 대접할 필요 없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형님.”

답을 들은 강성태는 몸을 돌려 룸을 나섰다.

“너희 둘은 여기서 뒤 정리해.”

덩치 둘에게 룸을 가리킨 정영권이 뒤따랐다.

요란한 조명과 강렬한 음악이 안에서 물결치는 손님들을 절정으로 이끌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서는 강성태를 향해 시선들이 달려왔다가 냉정한 표정과 뒤따르는 가드들을 살피고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돌아갔다.

클럽을 나선 강성태는 아르윈이 기다리는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형님.”

정영권을 시작으로 줄줄이 고개 숙이는 덩치들을 뒤로 한 채 아르윈이 도로에 합류했다.

“장례식장으로 가자.”

“예, 형님.”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강남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밀린 일들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이광준을 두들겨서 그런지, 운전석에 아르윈이 있는 데도 외로웠다. 홀로 다니며 김종수와 대전 선배들 해결할 때 이병렬도 이랬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워낙 거대해서 더 커 보이는 빈자리를 바라보던 강성태는 남은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었다.

번호를 누른 뒤였다.

- 유섭우입니다, 형님.

긴장한 유섭우의 음성이 들렸다.

“너 지금 어디야?”

- 강서구 호텔 나이트에 있습니다, 형님.

“광준이 형님이 뒤통수치려다가 나한테 걸렸다. 알고 있었어?”

- 죄송합니다, 형님.

멈칫한 뒤에 유섭우의 답이 건너왔다.

“알고 있었냐고 물었다.”

- 종수 형님을 만나신다고 해서 말리기는 했는데 모사치는 줄은 몰랐습니다, 형님.

“강서구에서 달수 장례식에 한 놈도 안 왔어. 그건 어떻게 된 거야?”

- 광준이 형님이 비상 걸어두셨습니다, 형님.

유섭우의 음성에 차라리 잘됐다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감출 것 없이 시원하게 답하는 모양이었다.

“숙소 식구들 비상 풀고, 나이트 영업에 필요한 인원 뺀 나머지 전부 데리고 장례식장으로 와.”

- 예, 형님.

답을 들은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내렸을 때 승용차는 장례식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파이어 볼의 정영권에게서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김정훈, 이종환,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들이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

“고문님 병실은 어떻게 하고 왔어?”

“형님이 사용하시던 특실에 태완이 형님이 와 계십니다.”

차에서 내린 강성태의 질문에 김정훈이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장례식장을 올려다본 강성태는 다른 말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걷는 도중이었다.

김정훈과 이종환의 표정에 올라온 후련함을 강성태는 분명하게 보았다.

이광준이 설치는 걸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혹시 고자질이 될까 봐,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참고 있었지만, 장례식을 외면한 채 박노익을 만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게 틀림없었다.

2층으로 올라간 강성태는 비워두었던 특실로 움직였다.

테이블을 앞에 두고 휠체어에 앉은 조태완이 강성태를 보며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불편한데 굳이 오셨습니까?”

“박노익이 만났다면서?”

“예.”

강성태가 맞은편에 앉자 이종환이 음료와 커피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항상 보스가 이렇게 나서 주길 기다렸는데 너무 갑자기 변하니까 무섭다. 이렇게 내부 싹 정리해놓고 여의사와 이민 간다고 하려는 건 아니지?”

“병렬이한테 너무 많은 짐을 지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병렬이가 깨어났을 때, 덜 미안하려고 이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정도면 만족한다는 투로 조태완이 입술을 늘였다.

“박노익이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하더군. 그러면서 절대 업장 열 생각 없으니까 말 잘해달라고 하고. 거만하던 놈이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라서 속으로 통쾌했었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서 강성태는 앞에 놓인 음료를 마셨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강성태의 시선을 본 조태완이 옆의 특실을 고개로 가리켰다.

“가족들을 편하게 해주는 게 좋아. 병렬이가 일어났을 때, 덜 미안하려면 여기는 진용이하고 봉진이한테 맡겨. 정 뭐하면 내일 오후에 들여다보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엔터테인먼트는 누구에게 맡길 생각이야?”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습니다. 김종수가 그렇더니 이광준까지, 그 자리만 맡으면 욕심을 부리니까 누굴 앉힐지 벌써 걱정됩니다. 고문님이 정해 주십시오.”

“그런 거 같으면 보스가 직접 관리하지 그래?”

대화의 끝에서 조태완이 엉뚱한 제안을 내놓았다.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거리는 느낌에 강성태는 아예 대꾸조차 내놓지 않았다.

“아니면 진용이에게 맡겨. 지난번에 크게 다친 것도 있고, 달수까지 잃었으니까 보상 차원이라고 생각해. 그 정도면 숙소에서 반발도 없겠고, 촌스럽기는 하지만, 신월동 나이트 관리 경험도 있어서 적당할 거 같은데, 어때?”

“엔터테인먼트 운영은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됩니까?”

“업무야 실장급들이 거의 처리하지. 그렇더라도 눈썰미는 좀 있어야 하는데 진용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그럼 장례식 끝난 뒤에 그렇게 정리하겠습니다.”

대충 대화가 끝났을 때였다.

우르르, 덩치들이 올라온 뒤에 막아선 숙소 식구들 사이로 유섭우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강성태가 어떻게 하는지 직접 보겠다는 욕심이 올라온 눈으로 조태완이 지켜보고 있었다.

“유섭우. 너는 강서구 식구야, 아니면 신강남파 식구야?”

“죄송합니다, 형님.”

“후-.”

강성태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유섭우를 노려보았다.

“강서구를 맡을래, 아니면 끝까지 이광준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은퇴할래?”

고개를 떨군 유섭우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눈치로 말을 잇지 못했다.

“고민돼? 그럼 내가 정해주지. 이종환.”

“예, 형님.”

“이광준, 김종수 은퇴시키고, 내일 강서구 정리해.”

강성태가 이렇게나 단박에 상황을 정리할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유섭우, 너는 내일까지 강서구 떠나.”

“뭐 해, 이 새끼야?”

강성태가 마지막 지시를 내리는 순간에 지켜보던 조태완이 대뜸 욕을 뱉었다.

“신강남파로 묶어서 강남 수입까지 공평하게 내려주는데 강서구는 여태 따로 놀았던 거야? 이런 개새끼가 있나?”

강하게 밀어붙이는 강성태와 달리 조태완은 조폭 세상에서 강자로 살아남았던 경륜을 내뿜었다.

낮게 깔아서 내뱉는 욕설, 찢어진 눈, 휠체어 앉았어도 달려들 것처럼 뒤튼 어깨, 조태완은 오랜만에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독기를 드러냈다.

“너 진짜 이광준과 함께 모사쳤어?”

“아닙니다, 형님.”

“그런데 왜 이 개새끼야, 보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안 해?”

죄송하다는 말은 사실 들어서자마자 했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 끼어들어서 “아까 죄송하다고 했습니다.”라며 맥을 끊기는 어려웠다.

“이 새끼가 그래도 버텨?”

“성태 형님께서 많이 아껴주셨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죄송하고 염치가 없어서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리와 봐.”

겨우 입을 뗀 유섭우를 조태완이 불렀다.

유섭우가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선 순간이었다.

음료 컵을 집어 든 조태완이 유섭우의 얼굴을 향해 세차게 던졌다.

콰작.

반투명 플라스틱 잔이 유섭우의 얼굴에 맞은 뒤에 바닥에 떨어졌다.

“보스를 진심으로 모신다는 건, 죄송하다는 핑계로 입을 처닫는 게 아니라 잘못한 건 잘못했다, 사실은 이렇다,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하겠다, 분명하게 답하는 거다. 네가 지금 하는 건 건방 떠는 거고! 알았어, 이 개새끼야!”

옆 특실에 서달수의 가족이 있다는 점을 의식한 것처럼 조태완의 음성은 나직했다. 그런데도 고함을 지른 것 이상으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형님.”

조태완에게 인사한 유섭우가 강성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광준이 형님이 모사친 건 정말 몰랐습니다. 오늘 숙소 비상 거는 거 보면서 동생들과 함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강성태가 시선을 돌리는 곳에서 조태완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이 정도에서 정리해주라는 의미였다.

고문이자, 이 바닥 경험이 풍부한 조태완이 컵을 던지는 쇼를 하면서까지 이렇게 끌고 왔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게 현명했다.

“달수 들여다보고, 가서 강서구 정리해.”

“감사합니다, 형님.”

고개를 숙였던 유섭우가 비장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광준이 형님 은퇴만큼은 제가 모실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형님.”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여 답을 주었다.

다시 고개를 깊숙하게 숙인 유섭우가 강서구의 덩치들을 데리고 옆에 있는 특실로 향했다.

“내가 왜 나섰는지 안 궁금해?”

이종환이 음료 컵을 치우는 사이에 조태완이 질문을 건넸다.

“들리는 말로 유섭우, 저 자식이 보스를 정말 좋아하고 따르더라고. 그래서 기회를 한번 주고 싶었다.”

하여간 어느 바닥이고, 경험과 연륜은 정말 무섭다.

병실에 누워 있었지만, 조태완은 틈틈이 각 숙소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서 나서봐야 병렬이에게 갈 거 같은데, 그건 안 말릴 테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그래야 나도 가지.”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조태완이 두 번 더 권하고 나서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강성태는 조태완의 휠체어를 직접 밀었다.

“박노익이 말이지. 그거 생각할수록 통쾌해.”

유섭우를 다그칠 때는 그토록 독해 보이던 조태완이 지금은 정년퇴직 후에 힘 빠진 가장 같은 표정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조태완을 위해 강성태와 김정훈, 이종환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고, 나머지 덩치들이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갔다.

“한 달만 고생해.”

“한 달 뒤에는 달라집니까?”

“우선 퇴원할 생각이거든.”

강성태는 의외란 얼굴로 조태완을 내려다보았다.

“보스에게 의논했던 계획을 실천해보려고.”

천하의 조태완이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강성태는 픽하는 웃음을 보이고 말았다.

“암살조 해결할 때까지는 불편하더라도 정훈이 숙소 식구들과 함께 다니십시오.”

고개를 끄덕여 답한 조태완이 김정훈의 도움을 받아 승합차에 올랐다.

줄줄이 출발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강성태는 몸을 돌렸다.

“진용이 아쉬운 거 없게 잘 살펴.”

“예, 형님.”

이종환에게 당부를 전한 강성태는 그제야 승용차에 올랐다.

방지병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우우웅.

짧은 진동과 함께 엄청나게 긴 문자가 들어왔다.

존 보스만이 보낸 내용으로 카르텔과 삼합회의 연합에 관련된 것이었다.

[회장님이 직접 주신 정보입니다.]

자존심 강한 사람다운 일 처리였다.

마지막에 적힌 문구를 본 강성태는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멕시코 마약 조직과 가페, 그리고 삼합회가 어떻게 연결됐는지는 대강 알았다.

이광준처럼 뒤에서 엉뚱한 짓을 하던 인간도 정리했고, 로라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남은 건 이병렬의 결과, 안다미의 안전, 월요일의 마약파티, 화요일의 삼합회 방문 정도였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라 길은 이전보다 더 한가했다.

병원에 도착한 강성태는 승용차에서 내렸다.

“오늘 고생 많았어. 이제 가서 쉬어.”

“옆에 있다가 피곤하면 병실에 가서 자겠습니다.”

“통화 하나 하고 응급실에 들러볼 거니까 로비에 가서 앉아 있기라도 해.”

“예, 형님.”

아르윈이 로비로 향하는 것을 본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서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어디냐?”

- 포장마차.

착 가라앉은 최치곤의 음성을 듣자 꾹 눌러두었던 아픔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울리는 느낌이었다.

- 미안하다.

“뭐가?”

- 힘들 텐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지랄! 빨리 끝내고 둘이 실컷 마시자.”

- 내일 오전에 달수 형님께 가보려는데 괜찮겠지?

“가봐야지.”

서달수의 이름을 말한 최치곤이 울음을 참는 듯 코를 훌쩍였다.

- 카페는 염려하지 마. 그리고 혹시 나 필요한 일이 있으면 꼭 불러주라.

“알았어.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빌딩 틈에 갇힌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씁쓸하게 웃은 강성태가 시선을 내렸을 때였다.

응급실 문을 통해 나서던 안다미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친 얼굴을 하고도 강성태를 보는 순간, 잔뜩 품었던 염려를 놓으며 힘겹게 웃었다.

비슷하게 웃은 강성태는 응급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피곤해서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저녁은요?”

“아까 간단하게 해결했어요. 성태 씨는요?”

“이제 배고픕니다.”

“여태 저녁을 못 먹었어요?”

헐거운 수술복 차림의 안다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안 선생님! 얼른요!”

응급실에서 상체만 내민 스태프가 안다미를 부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멈칫했던 안다미가 응급실로 달렸고, 강성태가 빠르게 뒤따랐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