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 - 3화 (214/513)

11권 - 3화

신호음이 짧게 울린 뒤에 바로 응답이 있었다.

- 존입니다, 미스터 강.

“러시아 입국자에 관한 정보를 들었을 테니까 설명은 나중에 하자. 로라의 위치를 알려줘.”

- 로라가 타깃입니까?

“설명보다 로라의 위치가 급해. 로라의 현 위치, 사용하는 이동전화 번호, 경호 상태를 알려주고, 그쪽 경호원에게 내가 간다고 알려줘. 신원 확인 암호는 쿠크리. 서둘러.”

- 문자로 넣겠습니다.

강성태의 동선을 따라 이종환과 오십여 명에 달하는 신월동, 강남 덩치들이 앞뒤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 강성태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종환. 이곳에 온 숫자 때문에 안중을 지키는 인원이 부족하지 않게 살펴. 만약 숫자가 부족하면 일단 광룡을 지키는 인원들 철수시키고.”

“그쪽은 안산 식구들이 합류해서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형님.”

“안산 식구들이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는데 괜찮겠어?”

“아르윈 형님의 근거가 안산인 데다, 신강남파에 소속됐다고 오히려 반가워합니다. 안산식구들은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형님.”

밤이었다.

적당히 했으면 좋은데 조태완과 김정훈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썼는지, 화려하지 않은 조명 아래의 주차장에 나서자 마이바흐라는 최고급 독일제 승용차가 강성태의 앞으로 와 멈췄다.

운전석에서 내린 아르윈이 손을 마주 잡고 강성태가 타기를 기다렸다.

“잠깐 가까이 와 봐.”

강성태는 다른 덩치들이 입 모양을 읽지 못하도록 승용차를 향해 몸을 돌린 뒤에 이종환을 불렀다.

“강서구에서 아무도 안 오는데 이게 첫날이라 이해할 수준인 거냐, 아니면 광준이 형님이 실수하는 거냐?”

이종환이 놀란 기색을 얼른 감췄다.

이광준의 이름 뒤에 형님이라는 호칭을 붙인 일과 장례식장의 흐름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눈치였다.

“실수하는 겁니다, 형님.”

강성태는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주면 신뢰로 갚아야 하는데 틈만 나면 이런 식으로 삐딱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광준의 인간성이 이렇다는 의미로 봐야 했다.

이병렬이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서 연예계에 올린 숟가락 확실히 하겠다고 서달수의 장례식에 안 와?

이광준, 당신 진짜 실수하는 거다.

강성태가 독한 결심을 품을 때였다.

우우웅.

짧은 진동과 함께 스마트폰에 주소와 전화번호, 그 외에 몇 가지 내용이 영어로 올라와 있었다.

“아르윈. 올림픽 클래스 빌라 입력해. 그리 갈 거다.”

“예, 형님.”

아르윈에게 목적지를 알려준 강성태는 다시 이종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 위급하지 않으면 여기 인원은 줄이지 마라. 그리고 조용히 광준이 형님의 오늘 일정 알아봐. 저쪽에 말이 들어갈 거 같으면 차라리 그냥 두고. 알았어?”

“예, 형님.”

답을 내놓은 이종환이 강성태를 위해 뒷문을 열었다.

아르윈이 운전석에 앉을 때, 강성태가 뒷좌석에 몸을 실었고, 문을 닫은 이종환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거대한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움직이자 오십여 명의 덩치들이 서열에 따라 깊숙하게 상체를 숙였다.

“시간이 얼마나 걸려?”

“35분으로 나옵니다, 형님.”

아르윈은 갑자기 덩치가 너무 큰 승용차를 운전하는 게 영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러나 지금 함께하기에는 아르윈이 가장 적격이어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 문자 내용을 살폈다. 그런 뒤에 문자에 적힌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 Let it go(그만 좀 해), Let it go.

영화 겨울왕국의 여자 캐릭터가 목청껏 부르는 노래가 흐른 뒤였다.

- 여보세요?

커피알리고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 능숙한 우리말이 건너왔다.

“로라? 나 누군지 알겠어?”

- 옵빠!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며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지금 올림픽 클래스 빌라로 가는 길이거든. 도착하면 전화할 텐데 외출 준비되겠어?”

- 무슨 일인데? 나, 위험해?

“내가 있는 한국이잖아. 모처럼 심야 데이트라고 생각해 주세요, 공주님.”

- 솔직하게 말해줘. 그래야 거기에 맞게 준비하지.

납치라는 위험을 달고 살았던 로라의 경험이 여실히 드러나는 요구였다.

“아직 나를 신뢰하고 있어?”

- 나는 세상에서 두 사람만 믿어. 아빠하고 미스터 강.

오빠라는 호칭에서 미스터 강이라고 바뀐 것 역시 로라의 경험에서 나온 변화였다.

“30분쯤 걸려. 활동하기 편하게 입는 건 알 테고, 여차하면 호텔에서 지낼 수 있으니까 간단한 짐 싸두면 좋아. 그쪽 경호원은 내가 판단해서 함께 움직이거나 아니면 남겨둘 테니까 그렇게 알고. 됐지?”

- 알았어. 준비할게.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리고 운전석에 앉은 아르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영어에 능통해서 강성태가 건넨 말들을 모두 알아들었을 상황이었다.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이 있어. 곤잘레스 이두안이라는 정유 재벌이 마드레 산맥의 개발을 놓고 카르텔과 충돌하는 바람에 지금 딸과 함께 한국에 와 있다. 딸의 이름은 로라.”

달리는 차 안에서 강성태는 먼저 멕시코에서 안다미와 동료를 구해온 내용, 그곳에서 빠져나온 과정까지를 쭉 들려주었다.

“병원에서 본 키란은 그때 부상당한 거다.”

아르윈은 이제야 궁금했던 수수께끼의 답을 들은 사람처럼 어느 정도 후련한 얼굴이었다.

강성태는 이후 삼합회와의 일들, 러시아 국적의 가페 대원 다섯이 이미 입국했고, 일요일에 중국인 가페 대원 다섯이 입국할 예정이라는 일련의 일들을 쭉 설명해주었다.

“러시아 암살조의 목표가 아무래도 로라 같다. 그렇게 하면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가장 크게 흔들리거든. 이후에 중국인 암살조 다섯이 다른 목표를 노리겠지. 나? 아니면 곤잘레스 회장에게 중요한 다른 인물일 확률이 높다.”

강성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500미터 전방에 목적지가 있다는 안내가 나왔다.

“러시아 암살조는 총기를 지녔을 거다. 로라, 로라의 경호원, 필요하면 키란까지 부를 생각이다. 총기를 능숙하게 다를 수 있어야 하고, 영어를 구사할 사람이 필요했어. 그래서 오늘 함께 움직이자고 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운전대를 향해 고개 숙인 아르윈이 핸들을 천천히 꺾었다.

“소음기는 아직 구하지 못했는데 권총은 지니고 있습니다, 형님.”

“그걸 가지고 다녔어?”

“칼을 사용하는데 미숙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방지병원에 입원한 조직원들에게 세 자루 맡겨놨었습니다. 오늘 병원에 들렀을 때, 혹시 몰라 챙겼습니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가 경찰에 붙들리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는데 아르윈은 그 정도야 하는 눈치였다. 아니면 아예 단속에 걸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든가.

이면 도로의 한쪽에 차를 세운 아르윈이 유럽식 3층 건물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이곳이 올림픽 클래스 빌라입니다, 형님.”

이름이 그렇더니 위쪽에서 보면 올림픽 공원의 남문이 보이는 빌라였다.

차에서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강성태는 로라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 Let it go! Let it go!

- 여보세요?

“아래에 도착했는데 준비됐어?”

- 응. 그런데 내려가기 전에 이곳 경호원들이 통화해야 한대. 괜찮아?

“바꿔줄 수 있어?”

- 잠시만.

전화를 받아보라는 로라의 말이 들린 뒤였다.

- 로라의 경호 책임자 데이빗 보우입니다.

“존 보스만에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현관까지 로라와 이동하고 이후에는 내가 준비한 승용차로 이동하겠습니다.”

- 연락받았습니다. 그전에 신원을 확인하겠습니다. 지정된 암호를 알려주십시오.

“쿠크리.”

- 확인했습니다, 미스터 강. 우리 쪽 경호 인원은 모두 세 명입니다. 입구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신원 확인, 이동하는 경호원의 숫자 통보, 동선 확인까지, 충분히 신뢰할 만한 경호였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빌라의 입구를 살폈다.

“계단에서 내려오면 바로 탈 수 있도록 입구에 뒷좌석을 맞춰 세워줘.”

강성태의 지시를 받은 아르윈이 승용차를 입구로 움직였다.

밤이 깊어질수록 계기판과 안쪽을 타고 흐르는 엠비언트 라이트가 아르윈과 강성태, 좌석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르윈. 내부에 켜져 있는 녹색 조명 꺼. 계기판도 가장 약하게 바꾸고. 내가 내리면 바로 트렁크 열어줘.”

지시를 마친 강성태는 문을 열고 내리자 트렁크가 부드럽게 위로 들렸다.

강성태는 문을 열어놓은 채 승용차의 뒷좌석 앞에서 기다렸다.

빌라의 맞은편은 뻥 뚫린 공원이라 그나마 안심이고, 좌우 건물은 창문이 모두 닫혔으니 됐고, 남은 위험 요소는 오토바이로 느닷없이 달려들거나 주변 건물의 옥상에서 저격하는 일이었다.

강성태가 시선을 들어 좌우의 옥상을 살피고 나자, 현관문이 열리며 정장 차림의 서양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암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쿠크리.”

강성태를 재차 확인한 그가 현관 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어 그가 움직이자 두 명의 경호원이 바싹 붙은 상태로 로라와 함께 현관을 나섰다.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선 경호원이 조수석 창문에 손을 걸고 앞을 막았고, 다른 요원은 뒤로 크게 돌아 반대편 뒷문에 손을 걸었으며, 나머지 한 명이 가방을 트렁크에 넣었다.

인사할 틈도 없이 강성태는 로라를 안다시피 해서 차 안으로 넣었다.

“곤잘레스 회장님이 묶고 있는 호텔로 가겠습니다.”

강성태의 말에 조수석 유리에 손을 대고 있는 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성태가 뒷좌석에 몸을 싣자, 조수석 유리에 손을 대고 있던 경호원이 팔을 뻗어 문을 닫아주었다.

“출발해.”

지시와 동시에 대형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천천히 승용차를 따라 걷던 경호원들이 속도가 올라가자 좌우로 벗어났다.

이면 도로를 달린 아르윈은 바로 큰 도로에 합류했다.

그제야 강성태는 몸을 돌려 로라를 돌아보았다.

멕시코에서의 경험이 밝게 웃어야 할 로라의 얼굴을 딱딱하게 만들고 그 위에 공포를 덧씌워 놓았다.

“뭐 이렇게 불쑥 컸어?”

“괜찮아?”

“뭐가?”

“이렇게 여유 보여도 돼?”

강성태는 일부러 과장한 웃음을 보였다.

“우선 인사부터 할까? 아르윈이라고 필리핀 출신 동료. 아르윈? 이쪽은 로라. 정식 이름은 로라 이두안 니에또. 맞지?”

강성태가 풀 네임을 불러주자 로라의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가 피어났다.

“로라예요. 미스터 아르윈?”

“편하게 아르윈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그럼 아르윈도 로라라고 불러줘요.”

통역하지 않아도 되는 소개가 끝났다.

깜박 잊었다.

강성태는 아르윈에게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이 묵고 있는 호텔을 알려주었다.

“이제부터 미스터 강이 날 지켜주는 거야?”

금발에 어울리는 눈썹과 기다란 속눈썹을 지닌 멕시코 소녀가 강성태에게 건넨 질문이었다.

철이 들면서부터 납치의 위험 속에서 살아야 했던 이 소녀의 바람은 늘 믿을 수 있는 경호원이었다.

“나 이제 승진했어. 과거처럼 로라의 곁에 항상 있지는 못하겠지만, 한국에 있는 동안은 날 믿어도 돼.”

“한국에 있는 동안?”

“멕시코에 돌아가면 어쩔 수 없잖아.”

“그럼 나 미스터 강과 결혼할래.”

운전하던 아르윈이 룸미러로 뒤를 보았다가 바로 시선을 앞으로 가져갔다.

**

존 보스만의 보고를 받은 곤잘레스 이두안은 안도의 한숨을 쏟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정장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은 그가 책상을 벗어나 구석에 놓인 티 테이블로 움직였다.

“커피 좀 하겠나?”

“나중에 하겠습니다.”

존 보스만을 돌아보았던 곤잘레스가 준비해 놓은 컵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컵 안에 담겨 있던 망에서 커피가 우러나오면서 강렬한 향이 그의 집무실을 서서히 채워나갔다.

일회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사치스러운 커피잔을 든 곤잘레스 이두안이 다시 책상으로 걸어가 기대듯 걸터앉았다.

“내가 자네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었나?”

커다란 손을 앞으로 잡은 채 서 있는 존 보스만이 어깨를 들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경호원의 협조를 받게 해 준 점에 감사하네.”

“제 의견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신 곤잘레스 이두안이 찻잔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경호는 계속 자네가 지휘하는 거지?”

“필요하다면 미스터 강의 조언을 받을 테고, 위급한 순간에는 지휘권을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거야 경호 책임자인 자네가 결정할 몫이지.”

짧은 대화로 경호에 관련된 사항을 정리한 곤잘레스 이두안이 상체를 비틀어 책상에 놓인 파일을 집어 들었다.

“나를 노리는 곳이 좀 더 늘어난 모양일세.”

갈색의 손바닥을 내민 존 보스만이 파일을 받아들었다.

“세타스 카르텔이 중국과 동남아에 마약을 수출하기로 했던 모양일세. 중국에서 쓰촨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마약사범 검거가 시작되기도 했고, 전통적인 헤로인의 수요가 늘어난 점도 있는 모양이지.”

서류를 살피던 존 보스만이 긴장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조 공급은 세타스 카르텔, 유통은 중국의 삼합회가 맡기로 해서 대대적인 투자를 했더군. 그걸 물에 타서 마실 수 있도록 흥분제, 각성제로 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에 풀 계획인 모양일세.”

“필로폰이나 헤로인은 중국에서도 얼마든지 자체 생산이 가능합니다.”

존 보스만의 질문을 들은 곤잘레스 이두안이 다시 상체를 비틀어 또 다른 파일을 들었다.

“이것도 한 번 보게.”

그는 두 번째 파일도 존 보스만에게 건넸다.

“이번에 세타스 카르텔이 개발한 마약은 프로포폴과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하지. 마약을 사용했어도 다음 날 병원에 가서 링거와 프로포폴을 투여하면 검사에서는 프로포폴만 나오지.”

검은 얼굴에서 하얗게 빛나는 존 보스만의 눈에 놀란 감정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우리가 그들의 새로운 시장을 막아버린 거지. 이제 삼합회와 세타스 카르텔이 왜 그렇게 악착같이 달려들었는지 이해가 되나?”

“물론입니다. 이걸 미스터 강에게 전해줘도 되겠습니까?”

“그 또한 자네의 판단에 맡기겠네.”

자존심 강한 곤잘레스 이두안이 목적을 이뤘다는 듯한 얼굴로 책상의 자리로 움직였다.

이만 나가보라는 의미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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