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 21화
뜻밖의 발신자였다.
어쩐지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느낌에 강성태는 마음을 굳게 먹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지금 어디야?
“안중 정리하고 방지병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답을 들은 조태완이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 지금 방지병원에 도착했으니까 와서 이야기하지.
“병렬이는 어떻습니까?”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
도착할 때까지 차라리 모른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큼 덮어둘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긴장된 심정으로 답을 기다릴 때였다.
- 지금 수술 중이라 결과가 아직 안 나왔다.
최악은 아닌 답이 건너왔다.
아직 버티고 있구나.
고맙다, 병렬아.
강성태가 짧게 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 서달수가 사망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식을 조태완이 알려주었다.
- 병렬이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럭저럭 넘어갈 거 같아.
“가서 뵙겠습니다.”
- 그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프리 스테이션에서 처음 만났던 서달수가 떠올랐고, 그 뒤에 함께했던 장면들이 창가를 스치는 건물과 가로등, 표지판처럼 훅훅 스쳤다.
전쟁터에 사는 것도 아닌데, 중국놈들이 쳐들어와 대놓고 목숨을 노리더니 결국 서달수가 목숨을 잃었다.
만약에 강성태가 중국으로 건너가 원자춘의 목을 가르면 뭐라고 할까?
승합차의 유리창이 바깥 풍경 위로 강성태의 얼굴을 담았다.
염병할.
미안하다.
너무 늦게 나선 거, 이병렬과 앞에 세워두고 빠져나갈 궁리만 한 거, 모두 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이라 승합차는 막힘없이 달려서 강남에 들어섰다.
“형님.”
내내 눈치를 살피며 침묵하던 이종환이 승합차의 뒤에 걸어두었던 옷걸이를 가져와 강성태에게 내밀었다.
짙은 감색 정장이 걸려 있었다.
“바지에 피도 그렇고, 재킷이 너무 찢어졌습니다.”
시선을 내린 바지의 허리 아래가 이미 굳어버린 피로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워낙 흉한 몰골이라 강성태는 달리는 승합차 안에서 재킷과 바지를 갈아입었다.
“안중은 어떻게 하지?”
“신월동 숙소와 대림동 동생들 보내겠습니다. 내일까지 시간을 주셨으니까 오늘 밤은 지켜보겠습니다.”
“광룡이 작업하면?”
“형님이 정리하셔서 남은 인원이 많지 않을 겁니다. 필요하면 안산 식구들을 추가로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머릿수로도 밀리지 않을 겁니다, 형님.”
이종환의 답을 들었을 때, 앞쪽으로 방지병원이 모습을 보였다.
“달수가 사망했다.”
강성태의 말에 이종환이 놀란 모양으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안중이 시작이다. 지금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중국 조직은 전부 깨부술 거니까, 그쪽 정보 좀 모아.”
“예, 형님.”
대화를 끝으로 승합차가 방지병원 주차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가 워낙 많았다.
그 바람에 승합차는 위기를 만난 꿩처럼 입구에 운전석까지만 겨우 넣었다.
문을 연 이종환이 먼저 내렸고, 그 뒤로 강성태가 승합차 밖으로 나섰다.
“오셨습니까, 형님?”
주차장을 지키던 다섯 명이 고개를 숙이는 사이, 승용차와 승합차에서 우르르 내린 강남 숙소 덩치들이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유헌우가 덩치들이 보이지 않도록 해달라는 당부를 했을 테고, 또 사건이 있다 보니 가능하면 모여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던 눈치였다.
“고문님은?”
“병실에 계십니다, 형님.”
답을 들은 강성태는 응급실을 잠시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로비 현관에 도착했을 때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안쪽에서 달려온 아르윈이 깊게 상체를 숙였다.
“고문님께 가는 길이다. 같이 가자.”
“예, 형님.”
강남 숙소 덩치가 앞섰고, 이종환과 아르윈이 뒤따랐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올라간 강성태는 이병렬이 있던 병실로 향했다.
긴장한 태도로 강성태에게 고개 숙이는 덩치들을 지난 강성태는 이병렬이 사용하던 병실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았던 조태완이 고개를 돌렸고, 뒤에 있던 김정훈이 무거운 얼굴로 상체를 숙였다.
“앉아. 다친 곳은?”
“없습니다.”
강성태는 이병렬, 서달수와 육개장을 먹던 바로 그 테이블에 조태완과 마주 앉았다.
함께 들어온 이종환과 아르윈이 손을 앞으로 잡은 자세로 강성태의 뒤를 지켰다.
“안중은 어떻게 했어?”
“도서웅이라는 대가리를 정리했고, 내일까지 근거지 비우라고 했습니다.”
짧게 답한 강성태는 시선을 돌려 이종환을 보았다.
남은 일들을 설명하라는 눈빛이었다.
“신월동과 대림동 숙소 동생들과 안산 식구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내일까지는 일단 지켜볼 생각입니다.”
갑갑한 반면에 후련한 구석도 있고.
검지와 중지를 든 조태완이 고개를 살짝 들고는 턱을 긁었다.
“다들 잠깐 나가 있어.”
이어 그가 지시하자 김정훈, 이종환, 아르윈이 고개를 숙인 뒤에 조용하게 병실을 나섰다.
“미안하다. 원자춘이 이렇게까지 뒤통수를 칠 줄 몰랐다.”
조태완의 첫 마디는 사과였다.
“사건 수습은 내가 알아서 할 텐데 문제는 앞으로의 일이다. 병렬이가 저렇게 된 걸 알면 아래쪽 조직에서 기회를 노리는 놈들이 나올 수 있거든. 그래서 말인데.”
“고문님.”
강성태는 나직하게 조태완을 불러 그의 말을 잘랐다.
“안중을 접수한 거로 시작입니다. 지금부터 신강남파 보스 역할을 제대로 하겠습니다.”
꿈틀하는 느낌으로 움직인 조태완의 눈이 강성태를 향해 강렬하게 빛났다.
“아래쪽 조직 선배들 술대접도 하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는 막지 마십시오.”
입을 열지 않은 조태완이 여전히 번들거리는 눈으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신강남파 보스를 하는 동안, 우리나라에 중국 조직은 발붙이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원자춘이 들어온다면 죽어서 나가게 됩니다.”
“한 가지라면서?”
웃기려던 게 아니라 당황해서 튀어나온 질문처럼 들렸다.
“병렬이와 내가 만나는 사람을 대놓고 노렸습니다. 이런 일에 참으면 조직이 밀린다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잘못해서 병렬이가 그냥 당했으면 다음 목표는 고문님이었습니다.”
“원자춘은 외국인이야. 거기에 삼합회는 공산당과도 연결돼서 덮기도 쉽지 않아. 그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방송국 회장하고, 국회부의장, 형사부장 검사를 두들겨서 사건을 무마하게 하겠습니다.”
“그게 돼?”
“안 되면 그냥 넘어갑니까? 광룡이 또 대림동에 밀고 오는 꼴을 보라고요?”
“일단 좀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하자.”
조태완이 급한 말로 강성태를 다독였다.
“월요일 마약 파티만 해도 그래. 처음에야 보스에게 약점 잡힌 게 있어서 말을 듣는 척하겠지만, 그쪽도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괴물들이야.”
강성태의 독기를 들여다본 조태완이 조카를 달래는 삼촌처럼 상체마저 기울이며 매달렸다.
“우리는 어둠에서만 힘을 쓸 수 있는 조직이야. 밝은 곳에서 설치는 놈들하고 싸우면 무조건 지는 그림자라고. 그 양반들이 원자춘을 핑계로 내세워 작업하면 우리는 한 방에 날아가.”
강성태는 숨을 길게 내쉬며 상체를 세웠다.
“말씀대로 상황을 보겠습니다.”
“진짜지?”
단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강성태를 조태완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여차하면 중국에 가서 제거한다. 그러나 생각을 굳이 털어놓을 필요는 없어서 강성태는 다른 말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삼합회와 손잡는 일은 없습니다.”
“그거야 보스가 결정할 문제니까.”
강성태가 양보했다고 판단했는지 조태완도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원자춘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롤러코스터에 올라앉은 느낌이었다.
결과가 급했다. 결과가.
조바심 내며 기다리는 그의 집무실로 기다렸던 수하가 들어섰다.
“뭐야?”
“이병렬의 심복인 서달수란 놈이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이…! 내가 허접스러운 놈이 죽었다는 소식까지 들어야 해? 이병렬이 어떻게 됐냐고? 이병렬!”
수하는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속이 시커멓게 타기는 했으나 원자춘도 더 다그치지 못했다.
희한한 병원에 처박혔는데 의료기록을 포함해 어떤 내용도 전산에 올라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산에 입력해야 해킹을 하든, 정보를 빼내든 할 텐데 어떻게 된 병원이 이병렬을 비롯한 환자들의 기록을 하나도 올리지 않았다.
“쓸데없는 놈 소식 말고 이병렬에 대해 알아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 강성태가 병원에 도착했다는 소식입니다.”
짜증을 잔뜩 올렸던 원자춘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조태완도 병원에 있다고 하지 않았냐?”
“그렇습니다. 조태완이 한 시간 먼저 도착했습니다.”
“젠장!”
인상을 찌푸린 원자춘이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천하의 능구렁이 조태완과 미쳐 날뛰는 강성태가 함께 있다는 말을 듣자 골이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일요일에 입국 예정인 다섯 명이 지금 한국에 있다면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방지병원을 덮치라는 지시를 내리고도 남았다.
물론, 섭충명의 허락이 전제되어야 하는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짜증이 있는 대로 올라온 원자춘의 책상 한쪽에서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호랑이도 아닌데 생각을 하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에 올라온 번호를 확인한 원자춘은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원자춘입니다.”
- 엄청난 짓을 했더군.
이죽거리는 음성의 주인공은 섭충명이었다.
- 이병렬을 죽이겠다고 큰소리치더니 엉뚱하게 광룡이 박살났다. 그것도 신강남파 강성태 한 명에게. 이걸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지?
섭충명의 비아냥을 들으며 원자춘은 그의 번들거리는 머리통에 권총을 바싹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상상을 떠올렸다.
- 원자춘?
“듣고 있습니다, 형님.”
끓어오르는 분노를 숨기느라 원자춘은 손으로 재킷을 쓸어내렸다.
뭐라고 해도 아직 이병렬의 사망 소식을 전하지 못했고, 다음으로 섭충명이 독하게 마음먹으면 원자춘이 죽는다는 사실 또한 변함없기 때문이었다.
“이병렬의 심복이 죽었다는 소식을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이병렬이 수술 중이기는 한데 조만간 기쁜 소식을 드릴 거라 확신합니다.”
- 원자춘. 우리 중국이 왜 대국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질문은 내가 내 부하 놈들에게 하는 거라고!’
고함을 버럭 지르고 싶은 욕망을 억지로 누른 원자춘의 눈이 하얗게 번들거렸다.
- 빵즈들이 재벌이라고 평가하는 수준의 부자가 우리 중국에는 한국놈들 머릿수보다 많아. 그것만이 아니지. 출생 신고조차 안 된 해결사들의 숫자가 또 한국의 머릿수보다 많아. 그게 우리 중국이다.
느물거리며 엉뚱한 설명을 늘어놓던 섭충명이 갑자기 말을 중단하고 침묵했다.
느닷없이 달려든 긴장에 원자춘이 슬쩍 문을 돌아보았다.
혹시 한국의 머릿수보다 많다는 해결사가 뛰어들어오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 원자춘?
“예, 형님.”
섭충명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불러서 원자춘은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 일요일에 내가 공들여 키운 다섯 명이 한국에 입국한다. 그들을 부릴 권한을 주겠다. 대신, 돌아올 때는 강성태의 사망 소식을 들고 와. 이게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알겠습니다.”
답을 건네기 무섭게 전화가 뚝 끊겼다.
콰앙!
원자춘은 스마트폰을 쥔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여태 내가 한국을 개척하느라 고생한 게 얼마인데!”
강성태를 해결하고 나면 섭충명은 그토록 바라던 한국을 홀랑 잡아먹는다. 그러나 강성태를 제거한 원자춘이 어떻게 될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은 지시였다.
이럴 거면 아예 섭충명을 노려?
원자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섭충명을 둘러싼 각 도시의 우두머리들도 무섭지만, 중국 특수부대 출신인 그의 심복들은 원자춘이 어쩌지 못할 수준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강성태가 지용호를 주저앉힐 때부터 어쩐지 찜찜했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차라리 해결사를 보내지 않고 강성태의 비위를 맞췄을 텐데 이미 서달수란 놈이 죽고, 이병렬이 사경을 헤매고 있어서 이제는 돌이킬 방법조차 없었다.
“강성태만 죽으면 끝난다.”
원자춘은 독한 각오를 세웠다.
**
조태완과 함께 응급실로 내려간 강성태는 파란 수술복을 입은 채 지쳐있는 안다미와 마주쳤다.
긴 시간 수술에 매달렸으니 지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긴 수술에서 오는 피곤함만이 아니라 오늘같이 죽고 죽이는 싸움에 절망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이쪽이에요.”
조태완과 김정훈, 아르윈을 확인한 안다미가 사무적인 태도로 응급실 안쪽의 공간을 향해 움직였다.
커튼으로 가린 안쪽에 복잡한 기계를 잔뜩 연결한 이병렬이 허리까지만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었다.
“흉부에 세 곳, 복부에 일곱 곳의 자상이 있었어요. 최선을 다하기는 했는데 장기 손상이 심해서…….”
강성태를 돌아본 안다미가 겨우 알아볼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어렵다는 의미였다.
강성태는 커튼 안으로 들어가 이병렬의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
안다미는 모른다.
그녀를 지키고 싶어서 무리하다가 이렇게 됐다는 사실을.
사실 알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강성태가 아니었다면 안다미가 그런 위험에 처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안 선생님!”
간호사가 급하게 달려와 부르자 강성태를 빠르게 바라보았던 안다미가 응급실 반대편으로 뛰었다.
급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 뒤였다.
“일어날 거라 믿는다.”
강성태는 상처가 가득한 이병렬의 얼굴을 향해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프리 스테이션에서 끝없이 일어나던 때처럼 툭툭 털고 일어나. 그래야 내가 마음 놓고 중국 조직을 깨부수지.”
조태완과 김정훈이 무거운 얼굴로 의식 없는 이병렬과 강성태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나한테 맡겨.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얼굴보다 상처가 더 많은 이병렬의 손을 내려다본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김정훈을 바라보았다.
“내가 사용할 승용차와 기사가 필요해.”
“준비하겠습니다, 형님.”
“내일 중으로 숙소 관리하는 간부들 위쪽으로 전부 소집해.”
“예, 형님.”
“여기 병원 지킬 인원도 늘려.”
“알겠습니다, 형님.”
연달아 지시를 내놓는 강성태를 조태완이 묘하게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