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 17화
제7장.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아침 일찍 받기에는 부담스러운 전화였다. 그러나 혹시 급한 일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깡패? 일어났냐?
“무슨 일인데?”
- 나 지금 출근하거든. 어제 일 물어보면 뭐라고 하면 좋겠냐?
강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검사가 출근해서 해야 할 대답을 물어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대답을 고민할 필요 있어? 뭐라고 하면 약물 검사받겠다고 해. 강제투약, 추행, 폭행으로 사건 만든다고.”
택시기사가 룸미러로 강성태를 보았다가 얼른 시선을 앞으로 가져갔다.
- 네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사촌동생 불렀다고 해. 강선영, 강성태, 적당하잖아.”
- 생각 좀 하고 말해. 가뜩이나 감찰받는 중인데 깡패 두목하고 사촌 간이라고 하면 나를 가만두겠어?
투정에 가까운 질문에 강성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다 보면 함정에 빠질 때가 있거든. 여동생 문제로 감찰 결정됐을 때, 넌 이미 함정에 빠진 거야. 동생 복수를 해달라며? 복수를 할 거야, 아니면 자리를 지킬 거야? 하나만 택해.”
당장 대꾸가 넘어오지 않았다.
선택이 어려워서인지, 아니면 감정적인 만큼 주변을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해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두 가지 중 하나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점, 하나는 분명했다.
“자리를 지키고 싶은 생각도 있나본 데, 그럴 거면 얌전히 고개 숙이고, 술자리에 부르면 무슨 짓을 하든 참아. 다시는 내게 전화하지 말고. 네 말대로 나와 엮이면 자리 지키기 어렵다.”
잔인한 조언이 건너간 뒤였다.
좀 아팠겠구나 싶은 순간에,
- 내가 주점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받아치듯 침묵의 끝에서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건너왔다.
아차 싶었는데 강성태는 바로 입을 열었다.
“거기 강남이다. 그 정도면 알아듣지?”
- 그래서 종업원들이 쩔쩔맸구나. CCTV 영상은 가지고 있어?
“지금 받으러 가니까 나중에 통화해.”
- 알았어. 일단 출근해서 분위기 보고 전화할게.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통화가 끊겼다.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뒤를 힐끔대던 택시기사가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20분이면 병원에 도착하겠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강성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
원자춘은 완벽하게 궁지에 몰렸다.
하필이면 총재와 부총재, 임원단, 각 도시를 대표하는 덩어리들이 모인 전체 간부회의 자리에 아픈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빼빼하고 마른 체형에 삭발을 즐기는 섭충명은 원자춘보다 더 잔인하고 급한 성격이었다.
“원자춘.”
“예, 대형.”
그가 50명이 넘게 둘러앉은 회의 탁자에 팔을 올리고 마이크를 통해 원자춘을 불렀다.
“한국을 정리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건가?”
“아닙니다, 대형.”
벽을 타고 쭉 서 있는 조직원들이 모두 섭충명의 심복이었다.
섭충명이 “죽여.”라는 한마디만 던져도 원자춘은 바로 죽고, 한 시간 뒤에는 손가락 하나 찾지 못한다.
그런데도 원자춘은 비굴하지 않겠다는 듯 당당한 태도로 섭충명을 대했다.
“내가 아끼던 삼룡을 멕시코에 보내 죽여 놓고, 고작 내놓은 조건이 한국과의 합의였다. 나흘 뒤 출국이라고 들었는데 어젯밤에 광룡이 또 당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셈이냐?”
“대형. 광룡이 허락하지 않은 약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하는 사업 두 가지가 마약과 비자다!”
헛소리를 늘어놓으면 바로 죽여주마.
쨍, 하는 고함을 지른 섭충량이 원자춘을 노려보며 답을 기다렸다.
“지금 가장 급한 건 동남아 자금의 확보입니다. 아시겠지만, 동남아 거부들이 한국 시장을 원하는데 조태완이 급격하게 힘을 잃는 바람에 루트를 잃었습니다.”
“요점만 말해.”
“잠시 고개 숙이겠습니다. 손을 잡고 나면 한국에 다른 조직에 힘을 실어줘서 그들이 강성태와 신강남파를 잡아먹게 지원할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당하고만 있으면 네가 말하는 동남아 돈줄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나?”
“광룡에게 근거만 준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내 지시를 듣지 않고 약을 돌려서 일을 만들었으니 이 건은 오히려 광룡 책임자 놈의 목을 쳐야 합니다.”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주장에 섭충명은 기가 막힌 듯한 웃음을 흘려냈다.
이런 순간에 나오는 섭충명의 웃음은 원자춘의 사망을 의미한다.
“네가 요구한 대로 해결사와 멕시코의 특수부대원을 파견했더니 이제 와서 하는 말이 광룡의 책임자를 날려달라?”
“강성태는 몰라도 그 아래 심복 중 하나를 제거하겠습니다.”
원자춘은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심복 누구?”
“이병렬이라는 놈으로 하겠습니다.”
섭충명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 있던 심복이 그의 귀에 몸을 기울였다.
“어젯밤에 광룡을 습격한 놈으로 강성태란 신강남파 두목이 가장 신뢰하는 놈입니다.”
눈알을 번득이며 심복의 말을 들은 섭충명은 이병렬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오냐. 네가 출국하기 전까지 이병렬이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와. 그렇지 못하면 네가 예약한 일등석 표를 쓸 일은 없을 거다.”
“감사합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병렬이나 원자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섭충명이 직접 주재하는 전체 간부회의에서 장담한 사안이어서 핑계나 변명으로 번복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섭충명이 검지를 들어 아래로 두 번 까딱이는 것을 보고서야 원자춘은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원자춘은 당당하고 태연했다. 그러나 테이블 아래 내려놓은 그의 손에서 손가락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
조태완은 완연한 회복기에 들어서 하루가 다르게 혈색이 좋아지고 있었다.
“보스를 위해 준비한 거 가져와.”
그냥 가져오라고 해도 될 텐데, 그는 굳이 ‘보스를 위해’서라는 말을 덧붙였다.
김정훈이 가져온 건 홍삼을 달인 물에 꿀을 탄 음료였다.
“마셔. 힘쓰는 데 도움 돼.”
아이를 원하는 조태완에게나 필요할까, 강성태에게는 오히려 부담스러운 음료였다. 그러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강성태는 시원하게 마시고 빈 잔을 돌려주었다.
“너는 이제 나가 있어.”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잔을 받은 김정훈이 상체를 숙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키워?”
“솔직하게 잘 모르겠습니다.”
강성태의 답에 맥이 빠진 모양으로 조태완은 허탈하게 웃었다.
“말씀드렸던 계획은 하나도 진행 못 했는데 계속 새로운 일이 생깁니다. 이번 강선영 검사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모른 척 눈 감고 넘어가지 그랬어?”
“그런 일에 눈감을 수 있었다면 조직 보스라며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강성태를 들여다본 조태완이 쓴 입맛을 다셨다.
김동팔에게서 구해주던 강성태의 모습을 떠올리는 눈치였다.
문을 힐끔 본 조태완이 시선을 가져왔다.
“폭력조직에 관한 보도를 준비한다는 말을 들었을 테니까 바로 이야기하자. 저쪽에서 아예 보스와 우리 전체를 죽이려고 독하게 마음먹은 거 같아.”
이야기가 뜬금없이 달려가는 바람에 강성태는 눈가를 좁히며 조태완에게 집중했다.
“이우섭 국회부의장이 직접 움직였어. 보스에게 아들이 두 번이나 당하고 보니까 아무래도 스캔들로 터질 수 있다고 느낀 모양이야. 거기에 JBC 소신영 회장이 협조하고.”
“우리를 구속시키겠다는 겁니까?”
조태완이 나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그들에게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야. 구속시킨 뒤에 얼마나 제대로 두들기느냐가 문제지. 거기에 자네가 형사부장 검사가 준비한 술자리까지 엎었으니 저쪽이 벼르는 건 당연하지.”
강성태는 조태완의 말뜻을 대강이나마 이해했다.
국회부의장, 방송국 회장, 부장 검사까지 나서서 강성태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몸이 어느 정도 괜찮으신 거 같으니까 병렬이, 정훈이와 외국으로 나가십시오.”
“보스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강성태를 빤히 보던 조태완이 한숨과 웃음을 동시에 내놓았다.
“보스가 제대로 엮이면 외국에 나간다고 해도 우리 모두 강제로 송환되지. 인터폴 수배가 가능할 죄목을 만들 테니까.”
“나가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러니 내가 보스를 안 믿을 수가 없지.”
허탈하게 웃은 조태완의 눈이 묘하게 번득였다.
“JBC 소신영 회장이 이우섭 국회부의장, 고강준 검사장, 선중일 부장판사와 파티를 열 거야. 여자를 넣을 건데 거기에서 약을 먹이고…, 뒤는 짐작하지? 거길 덮쳐.”
뭐를 먹이고, 어디를 덮쳐?
아무리 상류층이 썩었다고 해도 방송국 회장, 국회부의장, 검사장, 부장판사가 마약을 이용한 파티를 한다고?
갑자기 튀어나간 이야기에 강성태는 대꾸조차 내놓지 못했다.
“거길 제대로 덮치면 우리를 노리는 계획과 덤으로 강선영 검사 일, 보도를 완벽하게 막을 수 있어.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 거기에서 완벽하게 누르지 못하면 우리 모두 죽어.”
강성태는 조태완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전에 연예계를 완벽하게 장악했다는 말 못 들었어? 여자를 들이는 일도 내 일이었지.”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어?”
조태완의 질문대로 당장 다른 방법은 없었다.
“언제입니까?”
“다음 주 월요일.”
이번에는 강성태가 답답한 숨을 토해냈다.
“검사와 국회의원도 두들기겠다더니 왜 그래? 이제 와서 겁낼 사람도 아니고, 뭐가 문제야?”
“삼합회에서 이병렬을 노리고 세 명, 제가 만나는 사람을 노린 두 명을 불러들여서 현재 다섯 명이 들어와 있습니다. 어제 그놈들을 잡으려고 광룡이 만든 숙소를 덮쳤는데 엉뚱한 마약만 잡아냈습니다.”
“원자춘…. 이 비겁한 인간이. 그렇다면 화요일까지 애들 좀 더 세우고 머리 감추고 있어야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멕시코 특수부대 출신 다섯이 이번 주 일요일에 들어옵니다.”
“뭐? 무슨 부대?”
“가페라고 멕시코 특수부대입니다. 암살 전문 대원이라면 여기 숙소 인원으로는 절대 막기 어렵습니다.”
“특수부대를 부른다고?”
강성태는 말 대신 그보다 강한 눈빛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무렴 병원에 몇 십 명 늘어놓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어? 병렬이도 일단 숙소 동생들 깔아놓으면 되지.”
“언짢게 듣지 마십시오. 만약 내가 암살을 위해 나서면 그렇게 숙소 인원 깔아도 성공할 자신 있습니다.”
강성태의 말에 조태완의 눈이 꿈틀했다. 한편으로 ‘설마’하는 감정이 그의 눈가를 스쳤다.
“한 명도 위험한데 다섯 명이 동시에 들어옵니다. 암살조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립니다. 죽어도 성공해야 하는 일이고, 가페 대원 정도 되면 소위 독침을 소지할 수도 있습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신 조태완이 단숨에 “후!” 하며 쏟아냈다.
“보스는 그런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대답하기 뭐해서 강성태는 옅게 웃고 말았다.
그 직후였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게 생긴 거네. 그렇다고 가만 앉아서 죽자는 건 아니잖아?”
태완이파를 혼자 일으킨 독기가 살아난 눈으로 조태완이 강성태를 일깨웠다.
“방법을 세워야죠. 월요일 파티는 몇 시입니까?”
“오후 2시.”
“그렇게 일찍 합니까?”
“점심 먹고 실컷 즐긴 뒤에 씻고 자정 전에는 집에 들어가야 하니까. 모르나 본데 낮에 하는 룸살롱이 따로 있어. 오후 내내 놀다가 저녁쯤 2차까지 다 뛰고, 씻고 8시쯤 퇴근하는 척하며 집에 들어가는 거지.”
강성태는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냈다.
더러운 짓을 참 열심히, 부지런히, 그리고 악착같이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서 계획을 세워보고 결정되는 대로 다시 오겠습니다. 정훈이에게 말해두겠지만, 당분간 병원에 인원을 늘리고, 화요일까지는 절대 밖에 나가지 마십시오.”
조태완이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회의를 마친 원자춘은 본인의 집무실에 들어오기 무섭게 책장에 있는 장식용 항아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뒤따라 들어온 수하의 머리에 세차게 내리쳤다.
콰자작!
수하가 “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넘어졌을 때, 원자춘은 구석으로 움직여 7번 아이언을 뽑아 들었다.
부응, 퍽! 부응! 퍽! 퍽! 퍽! 퍽!
아이언에 얻어맞은 부하의 머리가 터질 때마다 피가 쭉쭉 뿜어져 나왔는데도 원자춘은 매질을 그치지 않았다.
콰작! 콰악! 콱!
머리와 목, 가슴을 지칠 정도로 짓밟고 나서야 몸을 세운 원자춘은 가쁜 숨을 내쉬며 아이언을 집어 던졌다.
“이런 개새끼. 회의 중에 그런 보고를 올려? 아무렴 내가 그 자리에서 죽어나올 거 같더냐?”
피범벅이 돼서 쓰러져 있는 수하를 내려다보던 원자춘이 독기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국과 멕시코에 연락해서 강성태고, 계집이고, 다 집어치우고, 이병렬만 정리하라고 전해. 아! 광룡에도 연락해. 내 허락받지 않고 마약 돌린 거, 이병렬을 죽이면 용서한다고. 이 원자춘이 용서라는 걸 한다고, 꼭 그렇게 전해.”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수하가 빠르게 집무실을 뛰어나갔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