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 13화
논현동의 주점에서 방지병원은 멀지 않았다.
주차장에 도착한 강성태는 뒷좌석의 강선영을 번쩍 들어서 응급실로 들어갔다.
“원장님!”
“뭡니까? 베드 준비하고 기다렸는데.”
유헌우가 응급실 한쪽의 커튼을 열고 침대를 가리켰다.
강성태는 강선영을 침대에 눕혔다.
“마약 종류를 술에 타서 먹인 모양입니다.”
“나가 계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강선영이 당황할 정도로 강성태와 유헌우는 손발이 척척 맞았다.
응급실을 나선 강성태는 기본 조명만 켜놓은 병원 로비에 앉아 어둠이 보여주었던 영상을 떠올렸다.
강선영을 구했으니 남은 건 이병렬을 노린다는 세 놈과 대림동에 있으라는 두 놈이었다.
또 하나, 강성태를 맡기 위해 들어온다는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놈들도 알아봐야 했다.
강성태는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우리 영웅이 또 뭐가 궁금한가?
화이트 테일, 바르지오 만시니의 능글맞은 음성이 바로 들렸다.
“특수부대 출신으로 최근 한국에 입국한 놈들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
- 뭐야? 혹시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을 노리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 그런 게 아니라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을 노리는 거라면 분명하게 말해줘. 가뜩이나 이쪽도 비상사태거든.
이건 또 뭐지?
잘 묶은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치우려다가 떨어트려 터트린 것처럼 또 다른 사건에 말려드는 느낌이었다.
- 자네가 멕시코를 정리해 준 덕분에 그쪽은 잘 진행되는데 대신 남은 잔당들이 이두안 회장과 로라를 노린다는 정보가 있거든. 그것 때문에 그쪽 경호 책임자, 존 보스만이 혼이 반쯤 빠져나갈 정도로 곤두서있어.
“처음 듣는데?”
- 그렇지 않아도 존 보스만이 여러 차례 건의했는데 지난번 일로 충분하다며 더는 자네에게 손을 내밀지 말라고 했다더군.
“이두안 회장이?”
- 그럼 그런 지시를 누가 내리겠나.
로비의 입구를 통해 달려드는 불빛을 보며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 곤잘레스 회장에게 말할 필요 없는 건 확실하지?
“나와 관련된 일이니까 그건 아니다.”
- 그렇다면 다행이네. 혹시 특수부대에 관한 정보는 없나?
“중국이나 동남아 출신이 아닐까 싶은데 추측뿐이다. 다음 주 화요일 전에는 입국할 거라는 정도가 현재 짐작하는 전부다.”
- 최선을 다해 알아보고 연락하지.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을 때였다.
로비와 연결된 응급실 통로에서 유헌우가 나왔다.
“어떻습니까?”
“전형적인 약물 중독이네요. 그런데 환자가 검사 같던데 맞아요?”
“예.”
강성태의 대답에 유헌우가 곤란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환자를 몰아주는 건 고마운데 불편한 일이 생기는 건 사양하고 싶네요. 아시죠, 무슨 말인지?”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금 링거 들어갔으니까 두 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참고로 앞으로 6개월 정도는 약물 검사에서 걸릴 수 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강성태의 인사를 받은 유헌우가 오른손을 들어서 엄지와 검지를 빠르게 비볐다.
이토록 한결같을 수가 있을까.
현찰로 계산하라는 요구를 받은 강성태는 픽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원장님은 건물 서너 개쯤 가지고 계세요?”
“무슨 소리입니까?”
“병원비를 전부 현찰로 받으시니까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투로 유헌우가 웃었다.
“안호상 선생님을 보며 배운 게 있기는 한데, 친동생을 잃고 나서 이런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게 있지요.”
더 듣고 싶으면 돈이 되는 환자를 좀 더 데려오라는 뜻인가 싶을 정도로, 사연을 늘어놓던 유헌우가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급하게 뛰어든 화장실에서 위기를 넘기긴 했는데 텅 빈 화장지 케이스를 본 것처럼 찜찜한 설명이었다. 그렇다고 유헌우를 붙들고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조르기도 어려웠다.
강성태는 통로를 통해 응급실로 들어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스태프들과 눈인사를 전한 강성태는 강선영의 침대 쪽으로 움직였다.
링거 두 가지를 팔에 연결한 강선영이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좀 어때?”
“여기 의사 돌팔이지?”
“개성이 강해서 그렇지, 실력만큼은 믿어도 돼.”
강성태가 보기에 어느 정도는 정신을 차린 눈치였다.
“너, 나 미행했니?”
이어서 강선영은 상황을 되짚었던 모양으로 날카로운 질문을 건넸다.
“그 두 인간을 살피다가 우연히 알게 됐지. 그 정도면 괜찮을 거 같으니까 이만 간다.”
“밥 먹고 가.”
일어서려는 강성태를 강선영이 붙들었다.
“다른 건 아니고, 오늘 일 좀 의논하려고.”
강선영은 변명처럼 들리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내일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들을 겸해서 그런 거니까 오해하지 말고.”
“그럼 링거 다 맞을 때쯤 올게. 아까 번호 찍혔으니까 일찍 끝나면 전화해.”
“어디 있을 건데?”
방지병원에 이병렬부터 쭉 입원해 있다는 말을 해서 뭐하겠나.
누워 있는 강선영의 블라우스 단추 사이가 벌어져 속살이 드러나 있어서 강성태는 침대 한쪽에 있는 담요를 펼쳐 강선영을 덮어주었다.
어울리지 않게 강선영은 얌전히 있었다.
“한숨 자.”
“깡패.”
몸을 돌리려는 강성태를 강선영이 다시 붙들었다.
“정말 이런 일이 많니? 우리나라에 마약이 이렇게 흔해?”
“네가 당한 약물은 2만 원이면 산다. 그 정도면 답이 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강선영을 향해 강성태는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강선영을 다독인 강성태는 응급실을 나섰다.
로비로 나서는 강성태의 어깨에 곤잘레스 이두안과 로라가 위험하다는 말이 삼합회의 더러운 계획만큼이나 커다란 부담으로 매달렸다.
한국에 온 이유가 강성태를 믿어서였다.
그래놓고 멕시코의 일이 미안해서 위험하다는 정보를 얻고도 연락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강성태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이병렬의 병실로 향했다.
복도에 있던 덩치들의 인사를 받으며 병실로 들어서자 서달수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뭐냐? 어떻게 왔어?”
휠체어 앉아 있던 이병렬이 반가운 얼굴로 강성태를 맞았다.
“환자 한 명 데려왔어.”
“누군데?”
“서울지검 검사.”
“염병!”
서달수가 타주는 커피를 마시며 강성태는 강선영과 관련된 일을 들려주었다.
“더럽게 꼬였네, 진짜.”
“그것 말고도 일이 더 있는데 내가 정보망 있는 건 알지?”
이어서 강성태는 서라대학병원에서 보았던 두 놈에 관해 풀어놓았다.
볼 안쪽을 깨물어가며 알았다는 말을 하기 어려워서 바르지오 만시니를 통해 알아봤다는 부연설명을 더했다.
“해외에서 그런 것도 알아볼 수 있냐?”
“대강 그렇지. 아무튼, 그놈들이 대림동에 갔을 테니까 여차하면 오늘 밤에 광룡이 마련했다는 숙소를 덮칠까 싶다.”
“씨발 새끼들. 보스가 믿는 정보라면 그렇게 해야지.”
“광룡은 내게 맡기고 병원에 있어.”
강성태의 권유를 들은 이병렬이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나를 노리는 놈들도 있다며? 그놈들 얼굴을 내가 분명히 봐뒀으니까 가서 확인은 해야지.”
“그놈들 말고 병원에 있던 두 놈만 있을 거라니까.”
“밤에 모여서 의논할지 모르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함께 가.”
이병렬은 당장 옷을 갈아입을 것처럼 설쳤다.
“지금 나서는 건 그렇고, 검사하고 저녁 먹기로 했으니까 그 뒤에 가자. 대신 종환이에게 연락해서 드나드는 놈들을 확실하게 체크하라고 말해 둬.”
“그건 그렇게 하고. 그나저나 괜찮겠냐?”
“뭐가?”
“누가 뭐래도 국회부의장 아들하고, 방송국 회장 아들을 두들긴 거 아냐? 더럽게 물리는 거 아닌지 걱정된다.”
“보면 알겠지.”
강성태는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듯 이병렬의 걱정을 적당하게 넘겼다.
**
조태완은 침대에서 전화를 받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클럽에 갈 거면 정훈이에게 연락해.”
- 그런 게 아니라 성태 형님이 우리 방송국 회장 아드님을 때려서 기절시켰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눈을 끔벅이는 조태완에게 이세종은 오늘 술자리가 생긴 과정과 결과를 아는 대로 풀어놓았다.
- 폭력조직에 관한 보도를 특집으로 준비하라는 오더가 내려왔습니다.
“아후.”
조태완은 왼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단 내가 보스를 만나볼 테니까 시간을 좀 만들 수는 있겠냐?”
- 일주일은 버티겠는데 그 뒤에는 방송 태워야 합니다.
“알았다.”
통화를 마친 조태완은 착잡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
이병렬과 시간을 보낸 강성태는 링거가 끝날 시간에 맞춰 응급실로 향했다.
로비를 걸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방금 헤어진 이병렬의 이름이 스마트폰에 올라왔다.
“여보세요?”
- 대림동에서 연락 왔는데 오후에 몇 놈이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단다. 이 새끼들이 눈치 깐 거 아닐까?
로비의 중간에 선 강성태는 잠시 현관을 보았다.
“우리 쪽 정보가 저쪽에 넘어갈 일은 절대 없어. 그러니 눈치챈 건 아닐 거다.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지켜보다가 들어오면 바로 연락달라고 하자.”
- 개새끼들이 어딜 빨빨거리고 다니는 건지. 알았다. 일단 그렇게 전할게.
통화를 마친 직후였다.
우우웅. 우우웅.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조태완의 이름이 액정에 떠올랐다.
이상하게 직감처럼 논현동 주점에서의 일로 전화했겠구나 싶었다.
강성태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저녁은 먹었어?
“조금 뒤에 먹을까 합니다. 혹시 논현동 일 때문에 전화하신 겁니까?”
- 세종이가 전화했더라고. 폭력조직에 관한 보도를 특별 편성하라고 했다는데 일단 일주일 정도 시간은 벌어놨어.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내일쯤 찾아뵐까 했습니다. 시간 되십니까?”
- 병원에 있으니까 아무 때나 괜찮지. 그렇더라도 오전이 좋겠는데 어때?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달아 걸려온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응급실로 향했다.
강선영은 응급실 침대에 앉아 오른손으로 왼쪽 팔뚝을 누르고 있었다.
“전화할까 했는데 마침 오네.”
몸을 틀어 침대에서 내려온 강선영이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집어 들었다.
당한 일이 있어서 그런지 기가 부러진 느낌이었다.
재킷을 걸친 강선영이 응급실 카운터로 움직였다.
“치료비는 어디에서 계산해요?”
“이미 계산하셨어요.”
“누가요?”
간호사가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들자 강선영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얼만데?”
“나가서 밥이나 사.”
간호사 눈치를 살핀 강선영이 굳이 따지기 싫다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주차장으로 통하는 출구를 이용해 걸은 강선영은 곧장 병원을 나섰다.
“술은 좀 하냐?”
강성태는 무슨 소리냐는 투로 시선만 주었다.
“담배 안 피우는 거 보니까 혹시 해서 묻는 거야. 못 마시면 나 혼자 마시면 되고.”
“밥이나 먹고 들어가지?”
“이대로 들어가면 못 견딜 거 같아서 그래. 밤새 버둥거려봐야 나만 손해니까 차라리 실컷 마시고 푹 자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기가 꺾인 상태에서 밤새워 뒤척이는 것보다는 현명한 생각이었다.
“편한 곳으로 가. 나는 밤에 일이 있을지 몰라서 곤란하니까 밥이나 먹을래.”
강성태를 힐끔 돌아본 강선영이 앞으로 걸었다.
아는 식당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적당한 곳을 찾는 느낌이었다.
“감자탕 어때?”
“그러지 뭐.”
감자탕 전문점을 선택한 강선영은 구석 자리에 앉기 무섭게 감자탕 중자와 소주, 맥주를 주문했다.
밑반찬과 술이 나오자 강선영은 폭탄주를 만들었다.
소주의 양을 적당히 부은 데다 맥주를 반쯤 채워서 한 번에 털어 넣기 좋은 수준이었다.
두 잔을 만든 강선영이 강성태의 앞에 잔을 밀었다.
“혼자 마시기 뭐해서 준 거니까 마시지 말고 앞에만 둬.”
강성태는 폭탄주 잔을 들어서 내용물을 본 뒤에 손을 내밀었다.
“한두 잔쯤은 괜찮지. 마시자.”
“술은 좀 하나 보네?”
갑자기 기분이 풀린 얼굴로 강선영이 손을 내밀어 틱, 소리가 나도록 잔을 부딪친 뒤에 단숨에 들이켰다.
강성태도 잔을 비웠는데 이런 폭탄주라면 어지간히 마셔도 문제없을 수준이었다.
잔을 가져간 강선영이 또다시 폭탄주를 만들었다.
저러다가는 소주보다 맥주가 먼저 동나겠지 싶었는데 강성태는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잔을 비웠을 때, 감자탕이 테이블의 가스레인지 위에 올라왔다.
“이상하게 정신이 멀쩡하네.”
식당에 와서 폭탄주를 마시고는 있지만, 강선영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검사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았는데 여동생 사건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감찰에 회부된 데다, 오히려 범인들에게 농락당했으니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강성태는 소주병을 들어서 반을 채웠다. 그리고는 나머지를 맥주로 메웠다.
강선영이 놀란 눈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나는 이렇게 마실 테니까 편한 대로 마셔.”
“나도 하나 만들어줘.”
달라고 요구할 거라 기대했었고, 이렇게 마시고라도 편히 자란 의미로 만든 술이었다.
강성태는 잠자코 똑같은 폭탄주를 만들어 강선영 앞에 놓아주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친 뒤에 한 번에 털어 넣었는데 술을 마신 이후 처음으로 강선영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소주와 맥주를 더 주문한 강성태는 같은 방식으로 석 잔을 연달아 만들어서 함께 마셨다.
대번에 소주 한 병이 사라져서 다시 소주와 맥주를 주문했을 때였다.
“욱.”
속이 불편한지 가슴을 들썩인 강선영이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 좀 자겠지.
픽 웃은 강성태는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마침 감자탕도 바글바글 끓고 있어서 마지막 잔을 마시기에도 좋았다.
강성태가 소주를 가득 채운 맥주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고 났을 때였다.
“에이 씨. 술은 왜 이렇게 잘 마셔?”
벌겋게 올라온 얼굴로 강선영이 투덜거렸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