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 12화
제5장. 너 조금 멋있다.
아르윈은 저녁 늦게 안산의 집에 들어섰다.
20평 중반의 아파트였는데 필리핀에서의 삶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르윈에게는 풍요로운 느낌이었다.
“왔어요? 얼른 손 씻고 와요.”
아르윈의 부인 이지숙이 아르윈을 맞아들이고는 주방으로 움직였다.
“먼저 먹으라니까.”
“이상하게 그게 잘 안 돼.”
멋쩍게 웃은 이지숙이 가스레인지의 불을 올렸다.
손을 씻고 나온 아르윈은 식탁을 살핀 뒤에 고개를 들었다.
“뭔데 이렇게 푸짐해?”
“당신이 출연시켜줬다는 가수들이 왔었어.”
“이런 거 받지 마라니까.”
“과일이랑 술은 전부 돌려보냈는데 삼겹살만은 꼭 받아달라고 매달려서 받았어요. 이건 진짜 정성이고 마음 같아서. 마음에 걸리면 내가 내일 새로 사서 돌려줄게.”
아르윈이 앉자 행주로 양쪽 끝을 잡은 이지숙이 찌개 냄비를 들어서 식탁 가운데 놓았다.
“얼른 들어요. 배고파.”
이지숙은 늘 아르윈이 한 번이라도 먹고 난 뒤에 숟가락을 들었다. 동남아시아 출신이라고 깔보는 시선을 받는 식당에서도 늘 이지숙은 아르윈을 그렇게 앞에 세웠다.
“얼른 먹어.”
찌개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은 아르윈이 권하자 이지숙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삼겹살, 맛있다!”
두 사람은 행복한 저녁을 들었다.
“요즘 당신 변한 거 알아요?”
“내가?”
“눈빛이 달라졌잖아. 얼굴도 행복해 보이고. 혹시 여자 생겼어?”
“미쳤냐?”
“나는 괜찮으니까 아이 낳을 수 있으면 아들이든, 딸이든 데려와.”
탁.
숟가락을 내려놓은 아르윈이 굳은 얼굴로 상체를 세웠다.
“미안해. 얼른 들어요.”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려고 얼마나 따라다녔냐?”
“그 이야기를 지금 왜 해?”
“말해 봐. 몇 년 따라다녔는지.”
“9년.”
“그래. 9년 따라다녔다. 그래서 지금도 하루하루가 소중해.”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이지숙은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용서해 줄 테니까 삼겹살 하나 얹어봐.”
아르윈은 이지숙의 표정을 못 본 척, 숟가락에 밥을 담뿍 올려서 내밀었다. 그런 뒤에 이지숙이 올려준 삼겹살과 함께 입에 욱여넣었다.
“좋은 일이 있기는 한 거지?”
입에 밥이 가득 담긴 아르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행복하면 나는 좋아. 가수들도 행복해하고.”
이지숙이 또 삼겹살을 집어 들자 아르윈이 밥을 듬뿍 떴다.
**
논현동에 있는 고급 주점이었다.
복도를 따라 좌우로 화려하게 꾸민 방들이 늘어섰는데 강선영은 웨이터가 안내해주는 대로 복도의 가장 끝방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선 강선영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왼편에 형사부장이 앉았고 맞은편에 이진기와 소영천이 뻔뻔한 눈으로 바라보며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울분이 터져 나왔지만, 일단 강선영은 형사부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인사해. 의장님 자제이신 이진기 대표님, 그리고 JBC 상무로 가시는 소영천 상무님.”
시선을 돌렸지만, 강선영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어허! 인사드리라니까.”
“억지로 그러실 거 없습니다. 더구나 오해하고 있을 텐데 인사가 나오겠습니까?”
형사부장을 말린 이진기가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봐요. 조서를 꾸밀 때도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본다고 하던데 검사분이니까 그 정도 시간은 주시겠지?”
오냐.
사표를 던질 때 던지더라도 일단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들어봐 주마.
강선영은 불편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형사부장의 곁에 앉았다.
사람이 참, 앞에 이진기와 소영천이 있어서 형사부장이 더러운 손동작을 하지 않으리라는 안심은 되었다.
“검사들은 폭탄주를 마신다던데 술 좀 하시나?”
“우리 강 검이 말술입니다.”
“그래요? 그럼 우리 폭탄주를 먼저 할까요?”
이진기가 양주와 맥주를 적당히 섞어 하나씩 돌렸다.
설마 형사부장이 있는 자리에서 약을 타지는 않겠지?
강선영은 잔을 들어 평소대로 마셨다.
“동생분 일에 화가 난 건 이해하지만, 우리도 억울한 건 마찬가지요. 분명 웨이터 놈들이 장난질 친 거 같은데 증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거든.”
“그런 말을 하려면 손을 대지 말았어야죠.”
“오해라니까 그러네. 생각해 봐요. 술을 마신 뒤에 축 늘어져서 숨이 안 쉬어진다는데 어떻게 하겠어? 일단 몸을 주물러서 마비를 풀어보려는 게 도리 아니요?”
얼마나 이진기의 표정과 눈빛이 진지한지 강선영조차 정말 그랬나 싶을 정도였다.
“우리도 당황했었다니까.”
“맞아. 그때 좀 많이 놀랐지.”
폭탄주를 다시 만드는 이진기의 옆에서 소영천이 맞장구를 치며 나섰다.
이진기와 달라서 소영천은 강선영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형사부장에게 돌렸다.
‘개자식.’
강성태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저 뻔뻔한 태도와 직책에 눌려 믿었을지 모른다.
여자의 팔을 잡은 소영천, 다리에 올라타 주사기를 들던 이진기의 영상이 떠올라 강선영은 탁자 밑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음 같으면 저 더러운 낯짝에 잔을 던지고 싶지만, 그러려면 폭탄주를 열 잔 정도 마신 뒤에 취기를 핑계 대는 게 좋았다.
음주에 우발적이라는 변명을 만들기 위해 강선영은 잠자코 두 번째 잔도 비웠다.
두 번째 잔을 비운 이진기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고, 형사부장과 소영천이 과장된 태도와 표정으로 뒤를 받쳤다.
“이렇게 인사한 것도 있고 하니까 감찰이 잘 끝나도록 우리가 움직일 테니까 강 검도 그만 오해 풉시다.”
“두 분이 나서주면 강 검 일이야 바로 끝나지요. 고맙습니다.”
형사부장의 너스레가 나온 뒤였다.
“잠깐 손 좀 씻고 올게요.”
아무리 열 잔까지 참으려 해도 자꾸만 구역질이 올라오는 느낌이어서 강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이대로 돌아갈까?
아니면 좀 더 참을까.
화장실에 들어간 강선영은 손을 씻으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둘 중 하나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일단 중앙지검 검사 자리에서 버틴다. 그리고 증거를 착실하게 하나씩 모은다.
그게 아니라면 열 잔 정도 마시고 우발적으로 폭발한 것처럼 병으로 머리통을 한 대씩 제대로 갈겨주고 사표 쓰자.
숨을 나직하게 내쉰 강선영은 독한 마음을 먹고 방으로 들어섰다.
강선영의 옆자리에 있던 형사부장이 보이지 않았다.
“부장님은요?”
“잔을 먼저 비우고 화장실에 가신다던데 못 봤나? 방금 나갔는데?”
말을 하는 동안 폭탄주를 만든 이진기가 잔을 밀어주고는 건배라도 하자는 듯 잔을 내밀었다.
건배하기가 싫어서 강선영은 곧장 잔을 비웠다.
“술이 세시네.”
잔을 비운 이진기와 소영천이 비릿하게 웃으며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다시 폭탄주를 만드는 이진기의 앞에서 강선영은 형사부장의 빈자리를 보았다.
이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잠깐 실례할게요.”
강선영은 정신이 멀쩡했다.
‘어?’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강선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신은 멀쩡한데 거짓말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놀라서 그런가, 심장이 가쁘게 뛰면서 피가 머리로 몽땅 몰리는 것처럼 어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강 검은 또 왜 이래?”
강선영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이진기가 상체를 기울이며 질문을 던졌다.
“집안 내력인가? 왜 술만 마시면 이렇게 마비가 오지?”
입도 떼지 못하는 강선영의 왼쪽으로 이진기가 움직였고, 소영천이 오른쪽으로 돌아 옆에 앉았다.
여동생은 분명 고함을 질렀다고 했는데 강선영은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숨이 가빠? 블라우스가 너무 꽉 끼네.”
이진기가 손을 뻗어 강선영의 블라우스 단추를 붙들었다.
송충이가 목에 떨어져 가슴으로 내려가도 지금처럼 끔찍하지는 않을 거다.
‘너희 두 새끼는 진짜 죽인다! 죽일 거라고!’
목 아래 단추를 붙드는 이진기의 손을 느끼며 강선영은 독한 생각을 떠올렸다.
이진기가 두 번째 단추를 붙드는 순간이었다.
- I need a hero. I’m holding out for a hero ‘til the end of the night.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강선영의 스마트폰이 울리며, 허스키한 여성 가수의 노래가 곧바로 흘러나왔다.
나는 영웅이 필요해요.
이 밤이 끝날 때까지 영웅을 바라죠.
“시끄러운데?”
“놔둬. 좋구만.”
- He’s gotta be sure. And He’s gotta be soon, and he’s gotta be larger than life.
그는 확신에 차 있고, 곧바로 오며, 확실히 크게 보이죠.
몽롱한 상태에서 강선영은 강성태를 떠올렸다.
두 번째 단추를 푼 이진기가 가슴 중앙에 있는 세 번째 단추를 붙들고는 볼을 핥을 것처럼 고개를 들이댔다.
“흐흡. 하아. 이거 모처럼 흥분되네.”
형사부장하고 너희 두 새끼는 정말 죽인다.
진짜 죽일 거라고!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강선영의 스마트폰이 들려주는 음악을 배경으로 강선영의 세 번째 단추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늘어진 강선영의 오른쪽에 있던 문이 열렸다.
복도에서 들어온 차가운 공기가 정신을 깨우는 듯한 느낌에 강선영은 눈만 돌렸다.
‘깡패 네가 여기에 어떻게?’
강성태였다.
스마트폰을 들고 들어온 강성태가 테이블 앞으로 움직여 상체를 기울이고는 강선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왜 전화를 안 받아?”
“깡패야. 나 몸이 말을 안 들어.”
입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놀랄 겨를도 없었다.
태어나서 남자를 보며 울먹인 적이 처음이라는 사실도 잊었다.
강선영은 눈앞에 있는 강성태가 사라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악착같이 시선으로 매달렸다.
“깡패야. 나 좀 데려가.”
대답 대신 강성태는 가볍게 웃었다.
어린 남자가 웃는 게 듬직할 수 있다는 사실도 강선영은 처음 알았다.
“가자.”
강성태는 손을 뻗어 강선영의 상체를 안다시피 붙들어서 함께 일어섰다.
“너 이 새……!”
양주병을 들었던 이진기가 강성태의 시선을 받고는 메두사를 본 지옥의 죄인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강성태는 먼저 강선영을 왼팔로 붙들어서 옆에 세웠다.
만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탓에 옆에 단단히 안았다.
“너희 둘은 아직 순서가 아니거든. 한 번 더 이런 짓을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순번을 당겨주는 특혜를 베풀 건데 그전에 경고 정도는 받는 게 좋겠다.”
엉거주춤하게 선 이진기가 설마 하는 순간이었다.
쩌어어억. 콰당.
강성태의 주먹을 얻어맞은 이진기가 테이블에 부딪혔다가 소파 아래로 스르륵 널브러졌다.
“나는 아냐! 그냥 옆에만 있었어! 그 여자한테 물어봐!”
“개새끼가 의리도 없어.”
쩌어어억. 퍼석.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소영천이 잠에 빠진 사람처럼 소파에 길게 늘어졌다.
시선을 돌린 강성태는 강선영을 보았다.
도저히 걸어서 나갈 형편이 아니었다. 이 상태에서 나가려면 아예 꼭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한데 이해해.”
강성태는 강선영을 옆으로 눕히듯 기울인 뒤에 오른팔을 무릎 뒤로 넣었다.
강선영을 누운 자세로 번쩍 든 강성태가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설 때, 강선영은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며 겁이 덜컥 났다.
형사부장과 이진기, 소영천이 부른 주점이었다.
직원들이 달려들면 강선영을 안은 상태에서 강성태 혼자 버티기 어렵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직원 몇이 급하게 강성태 앞으로 달려왔다.
어떻게 해?
강선영이 강성태를 올려다보는 순간이었다.
“입구에 차를 바싹 붙였습니다, 형님.”
뭐를 준비해?
정장 차림의 직원이 깍듯하게 강성태에게 고개 숙였다.
“다른 방에서 손님 못 나오게 하고,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CCTV 영상 찾아서 정훈이에게 보내.”
“예, 형님.”
짧게 지시한 강성태는 주점의 입구를 향해 움직였다.
계단을 오르는 앞에서 직원들이 앞을 살폈고, 뒤에서는 지배인과 웨이터들이 줄줄이 따랐다.
주점 바로 앞에 승용차가 있었다.
강성태는 자세를 낮춰 강선영을 뒷좌석에 태웠다.
혼자 가라고 할까 봐 강선영은 당장 그게 무서웠다.
“고맙다.”
“아닙니다, 형님. 들어가십시오, 형님.”
승용차의 뒷좌석에 앉은 강선영은 강성태를 향해 줄줄이 인사하는 덩치들과 직원들을 보았다.
같이 가.
지금은 네가 필요해.
강선영의 바람을 들었는지 트렁크를 돌아온 강성태가 옆자리에 오르자 승용차가 출발했다.
주점을 빠져나온 승용차가 도로에 합류한 다음이었다.
고개를 돌린 강성태가 상체를 기울여서 강선영을 살폈다.
“병원에 가는 거야. 조금만 참아.”
“깡패. 너 조금 멋있다.”
강선영의 대꾸에 강성태가 픽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강선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장이 찌릿하게 울렸다.
“왜 그래?”
“그냥.”
“금방 도착해. 괜찮지?”
강선영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독인 강성태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직후였다.
승용차가 오른쪽으로 도는 바람에 스르륵 기울어진 강선영의 머리가 강성태의 어깨에 기댔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