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 3화
제2장. 그냥 한 번 넘어가자.
기회를 잡았다고 여기는 최치곤, 함께 일한 첫날이니까 간단하게 야식 정도는 건 괜찮을 것 같다는 이은주, 두 사람을 보낸 강성태는 바로 택시를 잡았다.
나이트로 가는 길이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뭉쳐있다가 터지듯 한 번에 밀려들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런 느낌이었다.
“나이트 가세요?”
“예.”
“인물이 워낙 좋으니까 혼자 가도 되나 봅니다.”
10분쯤 부킹에 실패한 기사의 하소연을 듣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좋은 밤 보내세요.”
회칼과 쇠파이프를 안 보면 좋은 밤 아닐까.
기사에게 적당하게 인사를 건넨 강성태는 곧장 나이트로 향했다.
병원에서 갈아입은 복장이라 셔츠와 재킷에 진바지 차림이어서 복장은 적당했다.
밤 11시가 다 된 시간이어서 입구부터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여자 손님들과 몇몇 남자 손님들이 연예인인가 하는 눈으로 강성태의 위아래를 살폈다.
거기까지야 일상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그러나 입구에 있던 덩치들이 깊숙하게 상체를 숙이자 주변의 시선이 온통 강성태에게 다가왔다.
강성태는 바로 계단을 내려섰다.
심장을 때리는 듯한 리듬을 뚫고 내려간 덩치 하나가 강성태를 위해 문을 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체는 세상에 처음이었어, 섹시!]
한참 전에 유행했던 남자 듀엣의 노래가 흥겹게 달려들었고, 요란한 조명이 뒤따라 튀어나왔다.
홀에 들어서자 강성태를 알아본 웨이터들이 깊숙하게 고개를 숙이며 길을 열었다.
왼편으로 룸이 있고, 기둥, 그리고 홀이 펼쳐진 구조였다.
기둥을 따라 걸은 강성태는 바로 복도로 들어섰다.
좌우로 놓인 룸을 지나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앞을 지키던 두 명이 고개를 깊숙하게 숙이고서 문을 두드렸다.
강성태가 들어서자 이병렬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서달수와 이종환, 아르윈이 깊숙하게 상체를 숙였다.
“무슨 일이야?”
“우선 앉아.”
무대에서 울린 음악이 옅게 들어와 사무실을 울렸다.
“안 좋은 소식, 웃기는 사실, 기분 좋은 소식이 하나씩 있는데 골라.”
고민할 필요 없었다.
복잡하고 힘겨운 일을 먼저 처리해 놔야 뒤가 편하다는 평소의 선택 때문이었다.
“안 좋은 소식부터.”
“종환아.”
왼편의 긴 소파에 혼자 앉은 이병렬이 이름을 부르자 맞은편에 아르윈과 함께 앉았던 이종환이 입을 열었다.
“대림동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형님. 홍콩의 조주방이라는 조직에서 간부급 해결사들이 넘어온다는 정보입니다.”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한 이종환이 순서를 넘긴다는 투로 아르윈을 돌아보았다.
“필리핀 출신 연예인의 홍콩 내 활동을 관리하는 게 조주방입니다. 그쪽에 아는 선이 있어서 연락해 봤는데 다섯 명이 이쪽으로 출발한다는 답이 있었습니다.”
“연예인을 관리하는 조직이 넘어오는 게 문제가 돼?”
“조주방은 연예계뿐만 아니라 홍콩을 지배하는 폭력조직입니다, 형님. 삼합회와 긴밀한 관계에 있고, 실질적인 지배도 받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넘어오는 인원은 해결사입니다.”
강성태의 질문에 이종환이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연예계 일 때문에 방문하는 거라면 해결사들이 넘어올 리 없습니다. 거기에 잠잠하던 광룡 애들이 대림동, 구로동, 부천 쪽 화교 조직과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습니다.”
강성태는 왼손으로 눈썹을 매만지며 이종환의 말을 되새겼다.
“그렇지 않아도 삼합회와 다음 주 화요일에 만나기로 했는데 혹시 우리를 노리고 넘어온다면 조용하게 오지, 이렇게 요란하게 올까?”
“뭔가 대단한 걸 준비하는 눈치입니다, 형님. 막말로 아예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느낌도 듭니다.”
대림동을 관리하는 이종환이 저 정도로 느꼈다면 아무래도 신경 써야 할 문제였다.
강성태는 의견을 묻는다는 투로 이병렬을 돌아보았다.
“종환이가 대림동 장악한 뒤로 업장들 뒤를 제대로 봐주니까 지금은 하나라도 정보를 더 전해주려고 애쓰고 있거든. 사실 종환이가 아니었으면 알기 어려운 정보라고 봐야지.”
“말씀드리기 부끄러운데 형님. 병렬이 형님 말씀대로 주폭들 정리하고, 삥 뜯는 일 없게 하면서 대림동과 구로동 주변의 상인들은 다시 광룡이 손 뻗을까 염려하는 분위기입니다, 형님.”
이병렬의 말을 무는 것처럼 이종환이 부연 설명을 더했다.
“저쪽에 말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좀 더 알아봐. 새로운 소식 있으면 나나 병렬이에게 직접 연락하고.”
이종환에게 지시한 강성태는 궁금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기분 좋은 소식은?”
“자정부터 아르윈이 부른 밴드가 공연하는데 이것들 물건이다.”
“아는 밴드야?”
“전에 우리가 출연시키려고 알아보던 팀인데 아르윈 밑에 있는 줄은 몰랐지.”
이게 기분 좋은 소식이라고 할 정도인가?
강성태의 표정을 본 이병렬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나이트라고 해서 우습게보면 곤란해. 오디션 철저하게 보는 이유도 밴드 수준에 따라 매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라 그래. 그런데 이번에 오는 밴드는 오디션조차 없이 무대에 올릴 정도의 수준이지.”
실감하기 어려운 이야기라 강성태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반응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클럽이 생기면서 이쪽이 찌그러지기는 했는데 예전 분위기에서 러키 세븐 정도면 강남의 나이트만 뛰어도 스케줄이 모자랄 정도라니까.”
“그런 애들이 왜 지금껏 출연을 못 해? 업소 사장이나 관리하는 놈들이 손대서 곤란했다며?”
“안산 식구들이 출연을 틀어쥐는 바람에 그렇게 됐습니다, 형님.”
아르윈의 답에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웃기는 사실이란 건 뭐야?”
강성태의 질문에 이병렬이 빙그레 웃었다.
“서라대학병원 의료팀이 회식을 오셨더라고. 홀에 가보면 아는 분이 있을 거 같은데?”
안다미가 나이트에 왔다는 건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강성태는 눈만 껌벅였다.
“혹시 알아? 그분도 왔을지?”
“봤어?”
이병렬은 어깨를 들어 보였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눈치였다.
성인이 회식 자리에 참석하는 게 흉이 되지도 않고, 술에 취해 만행이나 추태를 부리지 않았다면 문제 될 일도 없었다.
“확인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웨이터들이 중요한 손님은 미리 알려주거든. 원래는 진용이가 체크하는 건데 오늘은 달수가 확인했잖아.”
이병렬의 말대로 그저 웃기는 사실 정도로 넘어가는 게 적당한 일이었다.
실제로 안다미가 왔다 치더라도 직장 회식에 강성태가 괜히 나서는 것이 오히려 꼴불견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도 궁금하기는 하다. 달수야. 네가 가서 혹시 그분이 온 건지 확인해보고 와.”
“그냥 둬.”
강성태의 눈치를 살폈던 서달수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왜? 여차하면 서비스 안주라도 하나 넣어주고 좋지?”
“혹시 시비가 걸렸다거나 일이 생긴다면 모를까, 굳이 그럴 게 뭐 있어.”
강성태가 만류하자 이병렬도 더는 나서지 않았다.
“내일 오후에 조 고문과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 되겠어?”
“당연히 되지. 몇 시야?”
“오후로 했으니까 내가 점심 먹고 전화할게.”
이병렬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강 의논이 끝났다.
“이왕 왔는데 러키 세븐 연주라도 한두 곡 듣고 가. 다른 손님들이나 병원 식구들에게 걸리지 않게 룸에 자리 잡을 테니까.”
“그러다가 괜히 아는 간호사라도 마주치면 난처하기만 하지. 오늘은 이 정도가 좋아.”
몸을 일으킨 강성태를 따라 서달수가 문으로 움직였다.
“여기 있어.”
“바깥까지 모시겠습니다.”
이병렬의 체면을 봐서도 이것까지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이종환과 아르윈의 인사를 받으며 강성태는 서달수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끈끈한 음악과 함께 조명이 한껏 내려앉아서 당장 눈에 띄지 않아 좋았다.
복도를 걸어 홀로 나온 다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앞만 보고 걸었을 강성태는 어두운 조명을 타고 슬며시 홀을 돌아보았다.
원형 기구에서 나온 작은 불빛들이 어둠을 뚫고 홀을 빙빙 돌고 있었다.
몸을 밀착하고 움직이는 한 쌍을 본 강성태는 걸음을 멈췄다.
‘어?’
다시 남녀를 다시 확인한 강성태는 주변의 시선이 몰리는 것을 느끼고는 급하게 사무실로 몸을 돌렸다.
앞서가던 서달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강성태의 곁에 바싹 붙었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일단 사무실로 들어가.”
빠른 걸음으로 움직인 강성태는 서달수와 함께 조금 전에 나섰던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에 있던 세 사람이 몸을 일으키고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혹시 두고 간 물건이 있는지 자리를 살폈던 이병렬이 다시 시선을 들었다. 그런 뒤에 이유를 묻는 것처럼 서달수를 돌아보았다.
서달수는 못 본 모양이었다.
“이승현 씨다.”
“뭐? 누구?”
이병렬이 반문할 때 아르윈의 목이 쑥 나왔다.
“아르윈의 아버지, 이승현 씨.”
“그 인간이 왜 여기 있어?”
이병렬이 아르윈을 돌아보았다.
“집이 인공폭포 지나서 오른쪽에 있는 아파트입니다, 형님.”
“참, 씨발. 이래저래 더럽게 엉키네. 누구랑 왔는데?”
“젊은 여자를 안고 있던데?”
“안고 있다고?”
“블루스 타임입니다, 형님.”
대화의 끝에서 서달수가 전문 용어를 내놓았다.
“이건 뭐, 저녁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 여자랑 블루스를 땡긴다고? 혹시 새 부인이 젊은 여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형님.”
이병렬의 질문에 아르윈이 바로 답했다.
“가서 확인하고 와. 야! 모자랑 뭐 얼굴 가릴 거 적당히 준비해서 둘이 가 봐.”
“예, 형님.”
서달수가 아르윈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인간이 점잖은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지랄도 참.”
“아직 모르는 거잖냐. 일단 확인하고 온 뒤에 보자.”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낸 이병렬이 앞에 놓인 물병을 들었다.
평소 같으면 맥주를 마셨을 텐데 상처를 빨리 낫겠다는 의지가 강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아르윈과 서달수는 바로 들어왔다.
“부인이 아닙니다, 형님.”
아르윈이 먼저 아는 바를 들려주었고,
“웨이터에게 물어봤더니 둘이서 함께 들어왔는데 형님. 회사 여직원인 것 같답니다, 형님.”
이어 서달수가 주워들은 내용을 전했다.
“저 모습을 부인에게 보내도 되겠습니까, 형님?”
“사진을 찍었어? 플래시는?”
“플래시 끄고 동영상을 찍었습니다, 형님.”
“해. 재미있겠다.”
이병렬의 말을 들은 아르윈이 스마트폰을 꺼내 버튼을 여러 번 눌렀다.
“보냈습니다, 형님.”
“마누라 번호도 땄냐?”
“딸 번호랑 집 전화번호, 부인과 딸이 사용하는 이메일 주소까지 전부 받았습니다, 형님.”
“이게 씨발, 가만 보면 내 신상이 내게 아니야. 그렇게 따지면 내 번호랑 이거 저것들도 어딘가에 떠돈다는 거 아니냐?”
이병렬이 툴툴거릴 때였다.
지이잉.
아르윈의 스마트폰이 짧게 울었다.
“누구냐고 묻습니다, 형님.”
“알 거 없고, 신월동 나이트라고만 답해.”
“예, 형님.”
이병렬과 아르윈의 손발이 척척 맞아 떨어졌다.
“달수야. 나가서 그 테이블에 술 얼마나 들어갔는지 알아와.”
이병렬은 이어 서달수를 밖으로 내보냈다.
“아르윈 너는 얼굴 가리고 나가. 바깥에 있다가 부인이 오면 찍어줘. 나머지는 애들 시킬 테니까. 인공폭포에서 달리면 20분 안에 온다.”
다음으로 아르윈을 내보낸 이병렬이 오묘한 미소를 그렸다.
“어떻게 하려고?”
“여차하면 경찰서 한 번 가는 거지. 이런 거로는 끽해야 벌금이니까 겁날 것도 없어.”
강성태의 표정을 본 이병렬이 바로 말을 이었다.
“더러운 짓 하고도 뻔뻔한 거 봤잖아? 한 번쯤 당하기도 해야지. 다른 건 그냥 넘어가겠는데 아르윈 앞에서 하는 짓거리 생각하니까 그냥은 못 넘어가겠다.”
그래도 강성태가 표정을 풀지 않자 이병렬이 입맛을 다셨다.
“왜 그래? 이런 건 내 전문이니까 그냥 좀 넘어가.”
“문제 된다면서?”
“명예훼손? 아니면 사실직시 어쩌고 그런 거에 걸리겠지. 검사나 판사도 사람이라 이런 경우는 대충 넘어가. 아니면 대놓고 방송 태우는 거지 뭐.”
강성태의 표정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이, 그냥 한 번 넘어가자.”
이병렬이 최치곤의 흉내를 내듯 매달렸다.
“나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더라도 문제를 너무 키우지는 마.”
“알았어! 맡겨둬!”
강성태의 답을 들은 이병렬이 만족하게 상체를 세웠을 때였다.
서달수가 바쁘게 들어왔다.
“양주 들어갔는데 반병 조금 넘게 마셨답니다. 그리고 형님. 팁이 좋아서 웨이터 애들이 확실히 챙기는 단골인데 여자를 수시로 바꾼답니다.”
“개새끼가 완전히 개새끼네.”
뭔가 듣기 이상한 욕을 뱉어낸 이병렬이 고개를 들었다.
“아르윈이 밖에 있다. 부인이 오면 찍으라고 했으니까 네가 나가 봐. 부인은 룸으로 몰래 챙기고, 조금 뒤에 러키 세븐 오잖냐? 걔들한테 멘트 좀 부탁해.”
이병렬이 바쁘게 지시했다.
기대에 찬 표정으로 서달수가 나가자 이병렬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