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 20화
강성태가 침대로 다가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은 다음이었다.
“인사드려. 조태완 고문님이시다.”
이병렬이 소개하자 아르윈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필리핀 가디언스파를 이끌고 있는 아르윈입니다. 오늘부터 성태 형님과 병렬이 형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침대의 위를 세워 앉은 조태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강성태와 이병렬을 번갈아 보았다.
“안산식구 진용도는?”
“신월동 숙소 동생들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병렬의 답에 조태완은 아예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잠깐 우리끼리 이야기 좀 하자.”
잠시 뒤에 조태완이 요구를 내놓았고,
“너는 좀 나가 있어.”
고개를 돌린 이병렬이 아르윈에게 지시를 전했다.
상체를 숙인 아르윈이 병실을 나선 뒤였다.
“보스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닌데 이런 식으로 무작정 덩치를 키워놓으면 뒷일을 수습하기 어려워. 당장 마약, 매춘, 사채까지 돌리지 말라면서 불어난 안산 식구들은 뭐로 먹여 살리나?”
갑갑한 심정을 토해낸 조태완이 질책하듯 이병렬과 김정훈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거기에 이신조란 놈 말이지. 그런 건을 무작정 방송에 태우면 우리를 감싸주던 검찰이나 경찰이 앙심을 품게 돼. 단속을 먼저 할 수 있게 배려해 줘야지.”
솔직히 깊게 배려하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조태완의 연륜을 인정한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안산 식구를 이끄는 진용도는 아래쪽 선배들과 친분이 깊어. 당분간 그쪽에서 우리를 벼를지 모르니까 병렬이랑 정훈이, 너희 두 사람이 좀 더 신경 써.”
“예, 형님.”
능숙하게 이병렬과 김정훈에게 뒷일을 지시한 조태완이 다시 강성태에게 시선을 가져왔다.
“자. 이제는 보스가 왜 필리핀 조직까지 끌어왔는지 한번 들어볼까? 무슨 의도인지를 알아야 거기에 맞춰 뒷수습을 할 거 아냐?”
“가볍게 시작했는데 필리핀 조직이 나왔고, 다음으로 안산 식구들이 달려들었습니다. 정리하면 삼합회를 상대할 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삼합회를 상대하는데 저런 허접한 놈들이 도움이 되겠어?”
조태완은 아무래도 아르윈과 필리핀 조직이 우스운 눈치였다.
“삼합회 본진이 들어온다고 들었습니다. 히트맨으로 쓸까 합니다.”
“히트맨? 그게 뭐야?”
“엉뚱한 짓을 하거나 헛소리를 지껄이면 제거해야죠.”
강성태의 답변이 예상외였던 모양이었다.
멍한 얼굴로 눈을 끔벅이며 조태완은 잠시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그러니까 삼합회 제거 작업을 저놈들에게 맡기겠다? 저런 놈들이 어떻게 삼합회를 감당해?”
“중국이라면 힘들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충분히 해볼 만합니다.”
“저놈들이 배신한다는 생각은 안 해?”
“아르윈이 배신한다면 그건 내가 일을 잘못했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흠.”
막힘없는 강성태의 대꾸에 조태완이 신음을 흘렸다.
못마땅한 구석이 있지만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이신조를 경찰에 넘긴 것도 이유가 있나? 그놈을 잡고 있으면 써먹을 곳이 많을 거 같은데?”
“이신조가 관리해주던 불법 도박 사이트와 매춘 사이트, 그리고 가짜 약품 사이트가 있었는데 모두 조직들이 운영하는 겁니다. 그대로 두면 그쪽 조직들과 돌아가면서 싸워야 해서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약품이라니? 그게 뭐야?”
조태완이 질문을 던진 뒤였다.
“가짜 비아그라나 씨알리스, 그런 겁니다, 형님.”
답은 이병렬이 내놓았다.
“중국에서 만든 골드 드래곤이라는 가짜 약도 취급하고, 요즘은 여성환각제라고 해서 물뽕을 아예 인터넷에서 판매합니다.”
“그게 혹시 삼합회랑 관련 있어?”
“약을 들여오는 쪽이 중국인 걸 보면 대강 그런 거 같습니다, 형님.”
이병렬의 답을 들은 조태완이 착잡한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물뽕을 그렇게 파는 줄은 몰랐다.”
“한 병에 4만 원밖에 안 합니다, 형님. 그런 걸 정말 흥분제로 생각하고 사는 일반인들도 많습니다, 형님.”
말문이 막힌 눈으로 조태완이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삼합회는 함부로 대하면 곤란해.”
“만나보겠지만, 마약, 인신매매, 납치, 그런 일들만 하지 않는다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까 합니다.”
“돈이 되는 걸 모두 틀어막으면 그놈들이 받아주겠어?”
“그런 식이라면 협상할 생각 없습니다. 또 그런 걸 다 받아줄 거였으면 처음부터 광룡과 그렇게 붙지도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조태완이 한숨을 내쉬고는 표정을 바꾸었다.
“보스가 결정한 거니까 나 역시 따르는 게 당연하지. 그렇더라도 숨은 좀 고르고 가자. 대전 쪽과 아래 지역을 다독이는 중에 이렇게 마구잡이로 두들겨 버리면 반대로 저쪽 애들이 모두 뭉칠 명분을 주게 돼.”
차분하게 목소리를 낮춘 조태완이 설득하는 투로 강성태에게 말을 건넸다.
“병렬이가 그쪽 선배들 불러서 한 명씩 다독이던 참이었거든. 사소한 일로 다투는 거 하고, 전국 조직을 우리가 다 흡수할 거처럼 나서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다른 조직을 두들기게 되면 그 정도는 좀 고민해 주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삼합회에서 다음 주에 들어온다는데 시간 되겠어?”
“만나기 전에 고문님과 의논할 시간은 있도록 조율해 주세요.”
“다음 주가 괜찮다면, 가능한 날짜하고 시간은 보스에게 연락해서 결정할 거니까 그거야 걱정할 것 없지.”
대강 대화를 마친 조태완이 의미를 알기 어려운 시선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신강남파가 워낙 빠르게 크고는 있지만, 반대로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해서 보스만 쓰러트리면 된다고 생각할 놈들이 많아.”
잔잔하게 말하는 조태완이 어색해서 강성태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보스에게 당하고, 동팔이에게 치이면서 나는 부러졌어. 거기에 대전하고 아래쪽 선배들도 이 병실에서 보스에게 죄다 꺾였고. 그 바람에 이제 나나 병렬이, 정훈이보다 보스 눈치를 살피는 놈들도 생길 거다.”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조태완은 삼촌 같은 얼굴이었다.
“제발 혼자서 그러고 다니지 좀 마.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아주 간이 철렁철렁 내려앉아.”
그것도 이병렬과 김정훈을 대할 때는 매섭게 눈알을 부라렸으면서 말이다.
“아르윈인가 하는 놈 다독이는 거 잊지 말고.”
“알았습니다.”
“아효. 얼른 몸이 나아서 내가 따라다니든가 해야지, 원.”
“가볼 테니까 쉬세요.”
“진짜 혼자 다니지 말라고.”
“알았다고요.”
강성태가 편하게 말을 받자 조태완이 만족한 듯 웃었다. 마치 진짜 삼촌처럼 보였다.
**
최치곤은 새끼 새처럼 이은주를 졸졸 따라다녔다.
“여기 재료 보이죠? 이걸 매일 체크해서 필요한 품목을 주문해요. 그리고 날짜가 지난 건 무조건 폐기하고요. 특히 여기 날짜 따로 정해둔 거 꼭 확인하세요.”
“이게 뭔데?”
“재료에 적힌 유통기한보다 항상 사흘 정도 빠르게 폐기해요.”
“유통기한이잖아? 섭취 기간은 달라. 냉장고에 보관한 건 한 달이나 두 달쯤 지나도 괜찮고.”
뻔뻔하게 대꾸하는 최치곤을 향해 이은주가 몸을 세웠다.
점심과 저녁 사이라 문을 열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지금이 하루 중 가장 한가했다.
“그건 집에서나 할 수 있는 거고요. 어떤 이유에서든 유통기한 지난 재료를 사용하다 문제 생기면 카페 문 닫을 수 있어요. 특히, 매니저님은 그 부분에 민감하세요.”
강성태가 그렇다는데 다른 말을 하기 뭐해서 최치곤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안쪽에 앉은 중딩들하고, 저기 노트북 펴놓은 여학생은 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눈으로 힐끔대는 거야?”
“매니저님 보러 오는 손님들이에요.”
“아!”
안을 돌아본 최치곤이 알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갑하지 않아?”
“지루하면 위층 사무실에 다녀오세요.”
“혼자서?”
무슨 소리냐는 투로 돌아보는 이은주를 향해 최치곤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나만 쉬면 되겠냐, 뭐 그런 뜻이야.”
변명을 늘어놓은 최치곤은 지친 얼굴로 다용도실로 향했다.
**
서달수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움직이는 길이었다.
“그냥 나한테 맡기라니까.”
뒷좌석에 탄 이병렬이 독촉하듯 말을 던졌다.
“최소한 미안하다는 말은 들어야 할 거 아냐? 안산 애들처럼 무식하게 할 거 아니니까 내 말대로 해.”
이병렬의 권유에도 아르윈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얼굴이었다.
“뭐 하는 사람인데?”
“PGP라는 회사의 전무입니다.”
“PGP? 어디에서 들어봤는데?”
“기저귀하고 생리대 판매하는 회사입니다.”
“그거 외국계 회사지?”
“예, 형님.”
강성태도 의아하게 돌아볼 정도로 아르윈 부친의 직장과 직책은 뜻밖이었다.
“회사가 어디 있는데?”
“논현동입니다, 형님.”
이병렬이 억울한 눈빛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당장 가자고 하고 싶은데 강성태의 허락이 없어서 갑갑한 눈치였다.
“아르윈. 아버지에게 사과를 듣고 싶으면 병렬이 말대로 하고, 지금껏 하던 대로 묻어두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해.”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아르윈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어린 나이라 가난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습니다. 철들 무렵에 코피노라고 손가락질하는 놈들 두들긴 걸 계기로 조직에 들어와서 큰소리치고 살았으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시선을 떨궜던 아르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과는 듣고 싶었습니다.”
“지난번에 갔을 때 그 말 안 했어?”
듣고 있던 이병렬이 다시 끼어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저를 알아보고 쭈뼛댔습니다. 안에서 부인과 아이가 나오니까 그때부터 딱 잡아떼는데…. 사과만 했어도 정말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걸 가만뒀어?”
“말씀드렸듯이 밟아버릴까 했는데 놀라는 여학생을 보고 나자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나 하나로 만족하자. 그런 거였습니다.”
아르윈의 말이 끝나자 숙연한 감정이 승용차 안을 맴돌았다.
“어떻게 할래? 당장 결정하기 어려우면 더 생각해. 나중에라도 말하면 함께 가줄 테니까.”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꼭 듣고 싶습니다, 형님.”
강성태가 건넨 권유의 꼬리를 붙드는 것처럼 아르윈이 바람을 내놓았다.
“전화번호 알아? 회사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찾아가는 건 그렇잖아?”
“번호는 압니다, 형님.”
생각해보니 연락처를 알아낸 인간이 이신조여서 아르윈이 번호를 모를 리 없었다.
답을 한 아르윈이 스마트폰에서 번호를 찾았다.
“불러봐.”
역시나 스마트폰을 꺼낸 이병렬이 번호를 받았고, 이어서 이름을 물었다.
“이승현입니다.”
“너 이씨였어? 어디 이씨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
“달수야. 차 잠깐 세워봐.”
차를 세운 이병렬이 바로 스피커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서너 번 흐른 뒤였다.
- 여보세요?
아르윈과 비슷한 느낌의 억양과 음성이 스마트폰을 타고 승용차 안을 울렸다.
“여보세요? 이승현 전무님?”
-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아르윈이라고 알지? 당신 아들. 그 일로 잠깐 봤으면 싶은데?”
강성태가 돌아볼 정도로 이병렬은 거침없이 용건을 쏟아냈다.
-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짧은 한마디와 함께 통화는 바로 끊겼다.
운전석에서 몸을 돌린 서달수는 황당하다는 반응이었고, 이병렬은 뜨거운 숨을 푹 내쉬었다.
강성태는 씁쓸하고 허탈하게 웃는 아르윈을 보았다.
짐작했던 눈치였다.
이렇게 될 거라고 이미 예상했었던 반응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열한 살에 깨달은 아르윈이 저런 웃음을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힘들어했을지 강성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개새…….”
강성태는 욕을 토해내는 이병렬에게 눈짓을 건넨 뒤에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럴 때 제대로 힘을 쓸 인간은 따로 있었다.
강성태가 통화버튼을 누른 뒤였다.
- 이세종입니다, 형님.
무언가 기대하는 이세종의 음성이 들렸다.
강성태는 상황을 짧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아르윈이 이승현을 만났으면 한다는 뜻도 전했다.
- 번호 주십시오, 형님.
이병렬이 든 스마트폰 액정의 번호를 강성태가 불러주었다.
-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이런다고 달라질 게 있겠어?
앞을 바라보는 아르윈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는 듯 보였다.
본인은 괜찮지만, 적어도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듣고 싶다는 말속에는 결국, 자신을 알아봐 달라는 간절한 소망도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저녁이나 먹으면서 기다리지. 너 육개장 먹을 줄 아냐?”
침묵이 부담스러운 듯 이병렬이 질문을 건넸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취재 나간다니까 바로 만나겠답니다. 지금 어디십니까?
끝까지 양아치 같은 인간.
“여기 방지병원인데 여기에서 만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병실에서.”
-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저, 그런데 형님. 이번 일로 코피노 특집 한번 하면 어떨까 싶은데 혹시 그래도 되겠습니까? 관련자들만 소개해 주시면 알아서 깔끔하게 보도하겠습니다.
“그건 나중에 이쪽 의견 들어보고 정리하기로 하고, 우선 이승현 씨 답부터 들어서 알려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들었지? 병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용을 전한 직후였다.
아르윈이 마른침을 삼켰다.
강성태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던 아르윈이 긴장한 눈치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