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권 - 19화 (189/513)

9권 - 19화

신월동 숙소의 덩치들이 필리핀 조직원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무릎 꿇는 데 익숙하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놈들이 반, 김정훈이 발목, 혹은 복숭아뼈를 박살내서 다리를 폈는데도 오만상을 찡그린 놈들이 절반이었다.

그 외에 신월동에서 택시 기사를 노리던 여덟 명도 데려다 놓았는데 부상이 심한 덩치들은 죽지 않을 정도만 치료한 상태였다.

강성태는 공장의 중간에서 이병렬과 함께 앉았다.

왼팔을 적당하게 닦아낸 뒤에 붕대를 감았고, 다시 겉옷을 갈아입어서 피에 젖은 머리칼만 아니라면 싸운 흔적이 보이지는 않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어?”

이병렬은 확실히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필리핀이나 태국에 우리나라 조직 애들이 많이 건너가 있거든. 도박장도 하고, KTV도 운영해. 막말로 하는 일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적당하게 인정하고 지내.”

강성태의 옆에 앉은 이병렬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신조를 경찰에 보낸 것도 그래. 태완이 형님하고 먼저 의논하면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거 같은데?”

강성태를 살핀 이병렬이 재미있다는 투로 웃었다.

“뭔가 생각이 있을 텐데 이제는 털어놔 봐.”

“처음에는 그저 택시 기사를 도우려고 시작했던 일인데.”

이병렬이 기대하는 시선으로 강성태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드리고 보니까 규모가 제법 있더라고. 그래서 삼합회를 상대하기 전에 정리하기로 했다.”

“필리핀 놈들하고 삼합회가 어떤 관계인데?”

“가디언스파가 기댄 안산 식구들까지 손댔으니까 이 소문은 반드시 돈다. 우리가 삼합회와 붙게 된다면 광룡과 손잡았던 국내 조직들이 한 번은 고민하겠지.”

“전국의 조직을 모두 손에 넣겠다는 건 아니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이병렬이 건넨 질문이었다.

“우리나라 조직이 필리핀에 많이 건너갔다고 했었지? 만약 우리나라 조직원들이 현지인들을 협박하거나 돈을 뺏으면 어떻게 될 거 같으냐?”

이병렬은 고개만 갸웃했다.

“돈을 빌려줬던 것도 아냐. 그저 필리핀에 가서 여자들을 만났다는 이유로 협박해서 돈을 뜯었다. 거부한다고 망치를 휘둘렀고.”

이병렬은 대답 대신 어깨를 들썩였다.

택시 기사 박용진이 젊은 시절에 필리핀에 가서 여자를 건드렸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택시 기사가 잘했다는 게 아냐. 나쁜 짓을 했다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하지만 필리핀 폭력조직이 그걸 핑계로 설치면 안 되는 거지.”

“흠.”

창으로 들어오는 빛줄기가 반대편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붙들려 있는 필리핀 놈들을 비추고 있었다.

강성태의 부연설명을 이병렬은 억지로 삼키는 눈치였다.

아직 말하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말 나온 김에 모두 들려주려는 찰나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신월동 덩치 하나가 안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필리핀 조직원 셋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앞에서 인간이 가디언스파의 한국 대가리 아르윈으로 보였다.

구불거리는 머리칼, 검은 피부, 쌍꺼풀 짙은 눈, 주먹코, 얼굴 전반에 얽은 자국이 있는 마흔 초반의 남자였는데 체격에 비해 목이 기형적으로 두꺼웠다.

안쪽에 들어선 놈은 고개를 돌려 구석에 잡혀 있는 조직원들을 눈에 담았다.

턱을 시작으로 두꺼운 목덜미에 해적 문신을 커다랗게 새긴 대가리가 볼을 씰룩인 뒤에 강성태와 이병렬의 앞으로 다가왔다.

“앉아.”

강성태는 우리말로 권했다.

이병렬과 강성태를 돌아본 놈이 ‘어디 한번 보자.’ 하는 느낌으로 하나뿐인 자리에 앉았다.

놈이 데려온 두 놈이 뒤편에 서서 강성태와 이병렬을 내려다보았다.

“원하는 게 뭔가?”

잔인한 느낌의 음성이었다.

우리말을 모르는지, 아니면 일부러 안 하는지는 몰라도 놈은 영어로 질문을 건넸다.

“필리핀으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밑으로 들어오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

강성태의 답을 들은 아르윈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느낌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공장 구석에서 서 있던 신월동 덩치들이 영어를 능숙하게 내놓는 강성태를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원하는 게 뭐냐?”

“필리핀으로 돌아가든가, 우리 밑으로 들어오든가. 둘 중 하나라니까.”

강성태의 대꾸가 건너간 직후였다.

끄드등.

아르윈이 몸을 일으켰고, 반사적으로 이병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성태는 천천히 몸을 세웠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달려들어 끝을 볼까, 아니면 참고 돌아설까.

놈의 번들거리는 눈과 떨리는 입술 끝이 그렇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봐. 필리핀에 한국 조직이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 몰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안산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곳 조직과 관계도 좋았다.”

“들었을 텐데? 안산 조직도 우리가 인수했다.”

담긴 것이 없는데도 무언가를 씹듯이 입을 움직인 아르윈이 강성태를 불만스럽게 노려보았다.

“싫다면?”

“협상은 이거로 끝이다.”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투로 아르윈이 픽 웃었다.

몸수색을 했을 텐데?

설마 달려드나?

놈의 웃음은 그렇게 보였다.

뭐지?

강성태가 눈가를 좁히는 순간이었다.

허리에 손을 얹은 놈이 거짓말처럼 권총을 꺼내 강성태를 향해 뻗었다.

한국은 권총에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실제로 총에 맞아 죽는 걸 제대로 목격한 적이 없어서 회칼만큼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면이 컸다.

강성태는 놈의 손에 들린 콜트 권총에서 시선을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총을 사용하면 일이 커.”

“조직이 박살났는데 필리핀에 돌아가려면 너라도 죽여야 체면이 서지.”

놈의 눈빛으로 봐서는 실제로 방아쇠를 당기고 남았다.

어차피 죽을 거, 차라리 강성태의 머리를 터트려서 조직의 체면이라도 지키겠다는 각오가 제대로 담겨 있었다.

강성태는 시선을 내려 다시 콜트 권총을 눈에 담았다.

권총을 쏴본 경험이 제법 보였다.

하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자세는 아니었다.

“여기에서 조용히 끝내겠다면 나도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아르윈이 마지막으로 건넨 제안이었다.

“흐음.”

가볍게 숨을 내쉰 강성태는 아르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놈의 눈이 강성태를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휙!

강성태는 번개같이 두 손을 위로 들었다.

콰득! 철컥.

왼손으로 놈의 손목을 꺾었고, 오른손으로는 당겨오듯 권총을 낚아챘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특수부대원들은 상대의 권총을 뺏는 훈련을 질리도록 받는다.

역시나 훈련받은 군인들을 상대로도 빼앗아내는데 깡패의 손에 들린 권총쯤 일도 아니었다.

아르윈의 뒤에서 움찔했던 놈 둘이 강성태가 총구를 겨누자 굳은 것처럼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두 놈을 겨눴던 강성태는 곧바로 아르윈의 미간을 똑바로 노렸다.

“뒤에 두 놈이 가진 권총도 내놔.”

강성태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버텨?

그럼 죽여주지.

멕시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왔는지 알게 된다면, 그런 반항 절대 못 할 거다.

강성태가 방아쇠에 걸린 검지에 힘을 주는 순간이었다.

“권총을 내놔.”

강성태의 눈빛을 확인한 아르윈이 고개를 반쯤 돌리고는 지시를 내놓았다.

쭈뼛거리며 허리춤에 손을 넣은 두 놈이 권총의 뒤를 붙들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병렬아.”

이런 상황이 처음일 이병렬이 황당한 표정으로 움직여 두 놈의 권총을 가져왔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우리나라에 필리핀이나 베트남의 폭력조직이 들어와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텐데 이놈들은 권총까지 지녔다.

강성태는 천천히 권총을 내렸다.

역시나 구입한 곳이 어디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방아쇠 위쪽의 총번을 긁어내 지워두었다.

“아르윈. 이제부터 가디언스파는 없다. 그러니 뒤에 있는 놈들 둘과 돌아가.”

아르윈이 시선을 들어 뒤에 주저앉은 놈들을 보았다.

“저놈들은 방송 탄 뒤에 경찰서에 가야지.”

“그렇게 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권총을 뺏기고 나서 아르윈의 독기도 절반 이상 부러진 느낌이었다.

“너를 돌려보내는 건 경고하기 위해서다. 자꾸 나를 자극하면 정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그러니까 얌전히 돌아가.”

아르윈이 시선을 내려 강성태의 손에 들린 권총을 확인했다.

총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묻는 듯한 느낌이었다.

“권총은 뒤에 있는 놈들과 함께 경찰에 넘길 테니까 그렇게 알아. 실탄을 포함한 권총까지 지녔다는 게 보도되면 당분간 필리핀의 불법 체류자까지 모조리 수색하게 될 거다. 나는 그 정도면 만족해.”

철컥. 철커덕.

권총의 탄창을 빼낸 강성태는 노리쇠를 당겨 안쪽을 확인했다.

능숙한 동작이 아르윈의 기를 더 부러트린 느낌이었다.

“우리가 밑으로 들어가면 조건은?”

여기까지였다.

뒤에 이루어지는 절차는 이병렬의 전문이지 강성태는 아직 어설픈 구석이 많았다.

“병렬아. 가디언스파가 우리 밑으로 들어오겠다는데 어떻게 하는 거야?”

“뭐?”

눈치 빠른 이병렬이었다. 하지만, 영어로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용을 파악하지 못해 당황한 눈치였다.

더 당황스러운 일이 그 뒤에 일어났다.

“기가 막히네.”

이병렬의 반응을 확인한 아르윈이 억양까지 완벽한 우리말을 토해내서 강성태와 이병렬의 시선을 당겼다.

“그러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봐. 진짜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뭐냐?”

한번 우리말을 내놓았던 아르윈은 최치곤보다 정확하고 또렷한 억양으로 연달아 질문을 쏟아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협박한 게 가장 크지.”

“그것만 손 떼면 되나?”

이놈은 도대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었길래 이렇게 말이 능숙하지?

“자꾸 말을 돌리는데 필리핀 조직원이라고 해도 뒤에 있는 놈들이 전부 아니었나? 괜히 말 길게 늘어놓지 말고 둘 중 하나만 택해.”

“흐음.”

입술을 말아 들여 침을 묻힌 놈이 강성태의 뒤로 시선을 들었다.

“우리가 밑으로 들어가면 보호해줘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뒤를 살핀 아르윈이 슬며시 건방을 떠는 순간이었다.

“말부터 조심해, 이 새끼야.”

지켜보던 이병렬이 바로 나섰다.

“오다가 혀를 잘렸어? 어디에서 끝까지 반말로 지랄이야?”

확실히 이병렬의 저런 모습은 강성태가 흉내 내기 어려웠다.

아르윈이 불쾌하게 노려보았는데 그게 이병렬의 비위를 제대로 거슬린 모양이었다.

“이런 개새끼가?”

철컥.

이병렬이 들고 있던 권총을 앞으로 내밀어 아르윈을 겨눴다.

방아쇠를 당기면 나간다.

총이 지닌 위력을 모르는 이병렬이 화가 치밀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아르윈을 더 두렵게 하는 눈치였다.

아닌 게 아니라, 강성태도 입에 침이 고이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입술에 힘을 꾹 준 채 견디는 참이었다.

강성태가 말리면 이병렬은 물러설 거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 이병렬을 누르면 그의 체면이 망가진다.

안 되면 끝까지 가는 거지.

강성태는 어떤 일이 벌어지든 이병렬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조직원 40명으로 뭘 어쩌겠다고? 어차피 안산 식구파가 없으면 어느 쪽이든 붙어야 사는 놈들이 어디에서 잔머리를 굴려? 우리 보스가 좋게 대해주니까 계산서라도 내밀고 싶었어?”

끝까지 가는구나.

이병렬과 아르윈을 지켜보던 강성태가 독하게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이병렬의 눈빛과 태도에 눌린 아르윈이 한 걸음을 양보했다.

숨을 길게 내쉬며 분노를 삭인 이병렬이 권총을 내려놓을 때, 강성태는 공연히 뒤쪽을 살피는 척하며 입에 고였던 침을 삼켰다.

확실히 꿩 잡는 게 매라고, 조직 간의 일은 이병렬이 나서서 정리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이병렬은 아직 날 선 눈매를 풀지 않았다.

뭐가 더 남았어?

궁금해하는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아르윈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사과까지 하는 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신강남파 보스 강성태 형님이시다. 인사부터 드려. 보호니 지랄이니 그 뒤에 따르고.”

독기 남은 이병렬의 눈을 본 아르윈이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필리핀에 연락해서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내 의견…….”

이병렬을 힐끔 본 아르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의견을 받아줄 겁니다.”

이런 세세한 표현까지 완벽하게 구사할 정도라면 가족 혹은 부인이 한국인인가 싶을 정도였다.

“인사드리겠습니다, 형님. 아르윈입니다.”

완벽한 억양, 발음, 그리고 익숙하게 상체를 숙이는 동작까지, 이제야 강성태는 놈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아버지가 우리나라 사람이냐?”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너를 혼자 키웠고?”

“제가 11살까지 함께 살다가 한국에 다녀온다고 하고 연락이 끊겼습니다. 나이를 먹은 어머니가 술집에 나가지도 못한 바람에 그때부터 고생이 많았습니다.”

말을 하던 아르윈은 당시가 떠올랐는지 지금까지와 의미가 다른 독기를 눈에 올렸다.

더는 묻지 않았다.

묻고 싶지도 않았다.

“한국에 와서 조직을 정비한 뒤에 찾아갔더니 가족들 앞에서 저를 모른다고 길길이 날뛰는 걸 보며 이번 일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침묵하는 강성태를 향해 아르윈이 먼저 내용을 털어놓았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몸을 팔아서 가족을 부양하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결혼해서 아이까지 둔 후에 무책임하게 한국으로 도망가는 건 벌 받을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문이 턱 막히는 아르윈의 말이 끝난 뒤였다.

“그래서? 그 아버지란 작자는 어떻게 했어?”

“솔직히 죽이지는 않더라도 밟아버리려고 했는데 어릴 적 기억이 떠올라서 그냥 뒀습니다. 중학생인 여자 동생이 눈에 치이기도 해서…….”

질문을 던졌던 이병렬이 답을 듣기 무섭게 뜨거운 숨을 푹 내쉬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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