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 16화
날이 밝은 병실이었다.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신 이병렬이 히죽 웃었다.
“성태 형님 때문에 그러십니까, 형님?”
서달수의 질문을 받은 이병렬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형님이 왜 그렇게 기뻐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
“우리나라에 가디언스파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거기에 하노이파라고 베트남 놈들도 설치고 있는데 그걸 휘젓기 시작했다는 거 아니냐? 우리 보스가 확실하게 자리 잡은 거다.”
아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서달수를 향해 이병렬이 설명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가디언스파와 하노이파는 현지 여자애들을 데려와 매춘을 시키거든. 한동안은 조심하더니 최근에 노래방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남자들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그런 루트가 한번 굳어지면 절대 못 돌린다는 거, 너도 알지?”
“예, 형님.”
“그쪽이 사실은 마약 밀매 루트의 가장 바닥이거든. 원했든, 우연히든 간에 보스가 그걸 붙든 거다.”
“그게 그렇게 됩니까, 형님?”
“어지간한 애들은 손도 못 대는 광룡을 대놓고 두들겼던 보스가 이번에는 필리핀 애들을 붙잡았잖냐. 우리 애들 자부심이 얼마나 올라가겠냐.”
뒤늦게 깨달은 모양인지 서달수가 ‘아!’ 하는 얼굴로 이병렬의 말을 받아들였다.
“어제 애들 앞에서 죽여주는 연설을 했나 보더라. 진용도가 침을 튀기더라고. 내가 보기에 신월동 숙소 애들은 진짜 보스의 친위부대가 된 거다. 말이 쉽지, 애들이 진심으로 굴복하는 게 어디 말처럼 되는 일이냐?”
“필리핀 애들을 혼자 상대하신 것도 큰 거 같습니다.”
“그렇지!”
흡족하게 서달수의 의견을 받은 이병렬이 종이컵을 들어서 남은 커피를 기분 좋게 털어 넣었다.
“어차피 조직이란 거 안 없어진다. 형님이라고 혼자 다 독차지해서 동생들 쫄쫄 굶는데 말밥 주고, 노름판 돌아다니는 그런 양아치들 말고, 언제고 내가 모셔봤으면 싶었던 보스의 모습이지.”
종이컵을 내려놓은 이병렬이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씨발. 그런 세상에서도 내가 보스 옆에 있어야 하는데 어쩐지 그게 너무 욕심내는 거처럼 느껴진다.”
“성태 형님은 형님을 내치실 분이 아니잖습니까, 형님?”
“그냥 인마. 그런 세상이 왔을 때 내가 보스 곁에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혹시 아냐? 너랑 나는 그냥 조용하게 프리 스테이션 운영하고 있을지? 그게 서운해?”
“아닙니다, 형님.”
“그래. 우리는 그냥 다리라고 생각하자. 보스가 저 높은 곳까지 가는 데 필요했던 다리. 그게 좋아.”
“예, 형님.”
“씨발. 또 보고 싶네. 이상해. 내가 씨발, 남자를 좋아하게 됐나?”
픽 웃은 이병렬이 뜻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
모처럼 빌라에 함께 들어선 최치곤은 술을 안 마셔서 그런지 쉽게 잠이 들지 못한 채 떠들다가 새벽녘에서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난 강성태는 방을 나서 최치곤을 살폈다.
상처가 염려돼서 보일러를 세게 틀었더니 더웠을까?
베개를 세로로 세운 최치곤은 옆으로 기어서 올라간 모양으로 거실 창에 머리가 거의 닿아있었다. 거기에 또, 이불은 보기에도 갑갑할 정도로 다리에 휘감았다.
침대에서 자라고 권했는데 잠은 같은 자리에서 자야 한다고 우긴 결과는 거실 창에 붙어 자는 몰골이었다.
최치곤을 내려다보며 강성태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놈은 이은주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들이대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은데 삼겹살을 함께 먹으며 아직 이르다는 결론을 얻는 눈치였다.
어젯밤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때 빛나던 최치곤의 눈빛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마음고생이 심한 눈치이기도 했다.
강성태의 기척을 느꼈을까?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던 최치곤이 퍼뜩 고개를 들고는 강성태를 멍하니 보았다.
“일어나. 밥 먹자.”
“벌써 그렇게 됐냐?”
비비적대다가 기지개를 켜는 최치곤을 두고 강성태는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 메뉴는 뭐냐?”
“김치 볶아서 국이랑 먹자.”
“그래. 그럼 나는 씻고 나올게. 뭐야? 왜 그래? 씻는다는 게 뭐가 웃겨?”
김치와 달걀을 꺼낸 강성태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고 몸을 돌렸다.
“카페에 함께 갈 거지?”
“그러려고.”
“그래서 웃었어. 얼른 씻어.”
큼큼거린 최치곤이 욕실로 들어갔다.
지금껏 빌라에서 숱하게 함께 지냈지만, 밥 먹기 전에, 그것도 강성태보다 먼저 씻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최치곤은 깨닫지 못한 눈치였다.
평소에는 강성태가 출근한 뒤에 거실에서 한숨 더 자고 나왔지, 함께 간 적도 별로 없었다.
밥을 준비하며 묘한 생각이 들어 강성태는 물소리가 요란하게 나오는 샤워실을 돌아보았다.
신강남파 보스가 아침에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담고, 계란국을 끓이는 걸 보면 이종환, 진용도, 김정훈이 펄쩍 뛰며 달려들 테고, 최치곤을 향해 욕을 한 바가지는 퍼붓고도 남을 일이었다.
어쩌면 최치곤은 어떤 자리를 맡든 간에 절대 교만해지지 말라는 하늘의 가르침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최치곤의 말이나 행동이 거슬려 조직의 권위로 누를 때가 온다면 그때가 바로 강성태가 변했다는 경고라고 봐야 했다.
전기밥솥의 스위치를 누른 강성태가 가스레인지를 켰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식탁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일어났죠?
“그럼요. 아침 먹을까 하는 중이에요.”
- 잘됐다. 내가 지금 샌드위치 샀거든요. 우리 아침 같이 먹어요.
샌드위치에 강성태가 알지 못하는 매력이 있을까?
최치곤이 잠잠해지니까 안다미가 아침마다 샌드위치를 먹는 습관이 생겼다.
“치곤이 있어서 밥하고 국 해놨어요. 그거 함께 먹죠. 얼마나 걸려요?”
- 와! 내가 진짜 색시를 잘 얻은 거죠? 15분 걸려요.
“알았어요. 얼른 오세요.”
전화를 마친 강성태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손안에 든 스마트폰이 다시 울었다.
번호를 확인한 강성태는 갸웃한 뒤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진용도입니다, 형님. 아침은 드셨습니까, 형님?
“어젯밤에 고생 많았지?”
- 그건 아니고요, 형님. 이 새끼들이 어지간히 독종이어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형님. 여권으로 주소 알았다는 거 모두 거짓말이고, 형님. 정보 파는 업자에게 한 사람당 5만 원씩 주고 주민번호부터 전화번호까지 모두 샀답니다, 형님.
강성태는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보업자 연락처는?”
- 받아뒀습니다, 형님.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
제법 일을 잘 처리했던 진용도가 뭔가 미적대는 음성으로 꼬리를 물었다.
- 정보업자들이 안산 식구파와 연결된 거 같습니다, 형님. 거기에 가디언스파에서 이 새끼들을 찾으려고 애들을 푼 거 같습니다, 형님.
“그걸 어떻게 알았어?”
- 안산 쪽의 또래들과 통화하는데 정보업자 물어보니까 바로 필리핀 애들 본 적 없냐며 물어보는 겁니다, 형님.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전화했었습니다, 형님.
잠시 창을 보았던 강성태는 바로 입을 열었다.
“오전에 내가 갈 테니까 그때까지 모른 척하고 있어.”
- 예, 형님.
“고생했다. 아침들 먹어.”
- 감사합니다, 형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창을 돌아보며 조금 전에 했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안산 식구파와 연관이 있다고 했었다.
정보업자를 잡으려면 놈들과 한번은 만나야 한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할까?
강성태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거즈와 붕대를 몸 곳곳에 붙인 최치곤이 젖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욕실을 나섰다.
“야! 보통은 아래를 가리지 않냐?”
“뭐래? 한두 번 봐? 그러지 말고 속옷 하나만 주라.”
“아, 진짜!”
“내가 꺼내 입는다?”
물을 뚝뚝 흘리며 최치곤이 방으로 들어간 뒤였다.
거실 안쪽에 붙은 오래된 벨이 오페라의 한 소절을 요란하게 울렸다.
“누구냐?”
“다미 씨가 아침 함께 먹기로 했어. 옷 다 입고 나와.”
“말을 하지!”
급하게 닫힌 문을 확인한 강성태는 현관으로 움직였다.
“누구세요?”
“아침 얻어먹으러 온 불쌍한 응급실 의사예요! 문 좀 열어주세요!”
웃음이 터진 강성태가 문을 열자 가방과 샌드위치 봉지를 양손에 든 안다미가 들어섰다.
가방과 봉지를 내려놓은 안다미가 강성태의 목을 안았다.
“치곤이 있어요.”
“그러니까 얼른요!”
강성태가 입을 맞추고서야 안다미는 거실로 들어왔다.
**
책상에 앉아 뉴스를 검토하던 이세종은 스마트폰을 들고는 액정에 올라온 이름을 확인했다.
받자니 불편하고, 안 받자니 뒤가 켕기는 이름, 강성태가 건 전화였다.
이 전화를 안 받으면 조태완이 만들어줄 미래, 고개 숙이는 신강남파 덩치들, 화끈한 클럽의 밤이 사라진다.
잠시 고민하던 이세종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세종입니다, 형님.”
고민했던 것과 달리 이세종의 음성은 공손했다.
- 보도를 하나 해줬으면 하는데 가능할까?
“형님이 관련되신 겁니까?”
질문을 던졌던 이세종은 강성태의 말을 하나씩 메모하며 점점 더 눈이 커졌다.
- 되겠어?
“이 정도면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 할 기사입니다, 형님! 다른 곳에 절대 말씀하지 마시고, 제게 주십시오, 형님. 커다랗게 터트리겠습니다.”
- 알았다. 연락할게.
강성태의 답을 들은 이세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형님.”
공손하게 인사한 이세종은 그제야 자신이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메모를 다시 확인한 그는 만족한 듯 온 얼굴에 웃음을 담았다.
강성태의 요구를 들어주는 거라서 조태완에게도 낯이 서는 데다, 잘하면 특종 타이틀 달만 한 사건을 얻었다.
“이런 거면 땡큐지! 그나저나 무슨 조직의 보스가 이런 건을 만들었지?”
고개를 갸웃했던 이세종은 표정을 바꾸고는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다. 그래. 사회부 회의 좀 하자. 다 모이려면 얼마나 걸려? 두 시간? 그럼 모이는 대로 내 방으로 와.”
지시를 마친 이세종은 뿌듯한 얼굴로 메모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
집중해서 뜨거운 물을 부은 최치곤은 머그잔을 쟁반에 올리고는 고개를 내밀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요.”
아차!
긴장한 바람에 건달 냄새가 잔뜩 묻은 말투가 나왔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가 나왔습니다.”
뭔가 이상했지만, 어쨌든 최치곤의 고함에 손님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쟁반을 붙들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진지한 표정의 최치곤은 무섭다.
잔인한 느낌도 있었다.
조심하는 태도로 쟁반을 든 손님이 자리로 돌아간 뒤였다.
“쟁반을 건넬 때, 웃든가 고개를 숙이면 더 좋아요.”
이은주가 낮은 목소리로 조언을 건네주었다.
“커피 한잔 팔면서 그렇게까지 해야 돼?”
“거보세요. 쉽지 않죠? 이제부터 그냥 제가 할게요.”
이은주의 말에 최치곤이 움찔했다.
어떤 일이든 이은주의 지시대로 따른다.
주방에 들어가는 대신 했던 약속이었다.
이은주가 이렇게 강한 성격이었나?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은주의 말 한마디면 최치곤은 주방에서 쫓겨난다.
그것 또한 강성태와 약속했던 일이었다.
“이제 라떼 하나 만들어보세요.”
“크흠.”
불편한 숨소리를 터트렸으나 최치곤은 얌전하게 커피 머신으로 움직였다.
“적어드린 거 보세요. 가장 먼저 뭘 해야 하죠?”
마음 같으면 입고 있는 티와 앞치마 벗어 던지고, 머그잔까지 냅다 던지고 싶었으나 최치곤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메모에 고개를 숙였다.
“은주 씨를 좋아한다면 다른 거 필요 없다. 카페에서 함께 일하며 변한 모습을 보여줘. 한다고 해도 걱정이긴 하다. 내가 볼 때 너는 사흘 못 견딘다.”
메모를 눈에 담으며 최치곤은 강성태의 말을 떠올렸다.
“진짜 깡패가 돼라, 치곤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너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 돼야 해. 이동재나 김성환 같은 양아치 모습으로는 은주 씨 마음 절대 못 잡아.”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최치곤은 메모에 적힌 대로 우유를 먼저 들었다.
“은주 씨 좋아하는 거 다 보여. 나한테 계속 거짓말할 거면 카페에는 당분간 오지 마라. 나한테까지 거짓말해가면서 눈 돌리는 꼴 보기 싫다.”
아침을 먹고 나서였다.
강성태의 한마디에 최치곤은 속을 털어놓았고, 그 결과, 커피알리고의 주방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못 하겠다고 생각되면 은주 씨에 대한 마음도 깨끗하게 접어. 고작 하루 이틀 힘겨운 거 싫어서 패대기칠 정도의 마음이라면 애초에 드러내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다.”
우유를 부으며 최치곤은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거절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은주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라는 사실만은 보여주고 싶었다.
‘그냥 성태를 따라갈 걸 그랬나?’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게 울컥 분통이 터지는 것만은 최치곤도 어쩌지 못했다.
**
강성태는 진용도, 김정훈과 함께 안산의 다방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오래된 것을 넘어서 낡은 소파, 퀴퀴한 바닥 냄새, 300원을 넣으면 운세가 나오는 동그란 기계까지, 다방이란 이미지에 딱 어울릴 만한 장소여서 시대를 20년쯤 훌쩍 거슬러간 느낌이었다.
잘생긴 청년 한 명에 깡패 두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조합인데 더 이상한 건 깡패가 분명한 두 사람이 강성태를 무척이나 조심하며 따른다는 점이었다.
강성태 혼자 왔으면 분명 말을 걸었을 아가씨가 진용도, 김정훈을 보고는 얌전히 주방으로 걸었다.
구석에 있던 덩치 셋이 이쪽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김정훈과 진용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걸 보면 조직에 속한 놈들이 아니라 그저 안산 식구파 누군가와 알아서 반쯤 조폭인 척하는 놈들로 보였다.
짧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가 쟁반을 들고 와 커피 세 잔을 내려놓았다.
“오빠? 설탕 타드려요?”
“가 있어.”
진용도의 짧은 대꾸에 흥미를 잃었다는 투로 아가씨가 돌아설 때였다.
다방 문이 열리며 덩치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숙인 김정훈과 진용도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씨발! 요즘 잘나간다고 너무 설치는 거 아냐? 여기 안산이야! 안산! 강남이고 지랄이고, 여기서는 안 먹힌다고!”
가장 앞에서 들어선 덩치가 김정훈과 진용도를 향해 거친 말을 뱉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