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 14화
전화를 거는 최치곤을 돌아본 놈이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가져왔다.
“끄응.”
그 순간에 엎어져 있던 한 놈이 고개를 들었다.
귀찮지만, 괜히 일어나서 연장을 휘두르면 일이 커진다.
게다가 한국에서 가디언스파라는 이름을 들먹이며 눈알을 희번덕거리는 꼴도 보기 싫어서 강성태는 단호하게 걸음을 옮겼다.
휘익! 콰작!
거침없는 발길질에 고개가 번쩍 젖혀졌던 놈이 바닥에 얼굴을 처박으며 의식을 잃었다.
“누구십니까?”
“그것도 모르고 까불었어, 이 씨발놈아? 저 분이 신강남파 보스 강성태 형님이시다.”
놈의 질문에 뒤쪽에서 최치곤이 답을 내놓았다.
엎어진 놈을 내려다보던 강성태는 고개를 돌려 혼자 서 있는 놈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이제야 놈의 눈에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감정이 올라와 있었다.
“몰라봤습니다. 이제 알았으니 그냥 가겠습니다.”
“그럼 계산이 안 맞지. 안 그래?”
“그냥 가겠다는 말입니다.”
마치 선심을 쓴다는 투로 놈이 재차 가겠다는 의사를 내놓았다.
“지랄들 하네, 진짜!”
듣고 있던 최치곤이 차 틈에 쓰러져 있던 놈의 얼굴을 향해 거칠게 발을 휘둘렀다.
퍼걱! 쿵.
바싹 붙어 있던 승용차의 범퍼에 머리를 부딪친 놈이 아스팔트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렇게 나오면 좋지 않습니다.”
뭘 믿고 그런지는 모르지만, 혼자 남은 놈의 눈에 감추지 못한 독기가 잔뜩 올라왔다.
이 정도였나?
광룡이라는 중국 조직과 야쿠자로 불리는 일본 폭력 조직이 설치는 거야 알았지만, 대한민국에 필리핀 조직원들이 이 정도로 설치는 줄 몰랐던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두들겨 주마.
좋지 않은 게 뭔지 보자.
강성태가 독한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자동차의 라이트 불빛이 도로를 타고 빠르게 다가왔다.
“여기!”
최치곤이 손을 들어 흔들자 홀로 서 있던 놈이 입술을 씰룩였다.
“후회한다.”
놈이 던진 경고였다.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누른 강성태는 놈을 보며 픽 웃었다.
“누가 후회하는지 한번 보자.”
끼이익.
강성태의 말이 끝난 직후에 승용차 세 대와 승합차 두 대가 멈추면서 덩치들이 우르르 내렸다.
“형님.”
숙소의 대가리가 강성태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놈들 전부 차에 실어. 어디 조용한 곳 있어?”
“근처에 공장이 있습니다. 그리 데려가겠습니다, 형님.”
강성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체를 깊게 숙인 놈이 뒤를 돌아보았다.
“들었지? 전부 실어서 공장으로 간다! 움직여!”
“예, 형님!”
쇠파이프를 든 대가리는 차 틈에 서 있는 놈을 향해 곧바로 달려갔다.
부응! 캉! 부응! 퍽! 퍼억!
처음 휘두른 쇠파이프를 막기는 했으나 필리핀 놈은 이어진 쇠파이프에 목덜미를 얻어맞았고, 이어 우르르 달려든 덩치들의 매질을 견디지 못해 이리저리 몸을 구부렸다.
쓰러져 꿈틀대는 놈들에게도 쇠파이프를 거칠게 휘두른 덩치들이 쌀자루 싣는 것처럼 놈들을 잡아 승합차에 집어넣었다.
“모두 태웠습니다, 형님.”
“가 있어. 치곤이랑 갈게.”
“뒤에 뵙겠습니다, 형님.”
고개를 숙이는 대가리의 눈과 표정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이런 게 자부심을 지닐 일이라니, 한숨이 푹 나왔으나 강성태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경찰이다. 서둘러!”
대가리가 급하게 외치며 출발한 뒤였다.
거짓말처럼 경광등을 번쩍이는 순찰차가 도로에 들어섰다.
아까 숙소의 대가리는 어떻게 경찰이 오는 걸 알았지?
멍한 표정으로 순찰차를 바라보는 강성태의 곁으로 최치곤이 다가왔다.
“택시 기사 부를까?”
“그래.”
강성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치곤이 번호를 눌렀다.
그 뒤에 이은주가 승용차에서 내렸고, 순찰차가 강성태와 최치곤 옆에서 멈췄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본 뒤에 강성태와 최치곤을 향해 다가왔다.
“여기서 집단 싸움이 있었다는데 본 거 있어요?”
인물이 뛰어난 강성태, 누가 봐도 조폭인 최치곤, 얌전한 이은주, 무슨 조합이 이래? 하는 눈으로 경찰관은 다시 강성태 일행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오목교 앞에서 커피알리고라고 카페 하거든요. 오늘 회식하느라 늦어서 여직원 데려다주러 온 길입니다. 집단 싸움은 못 봤습니다.”
“그래요?”
고개를 돌린 경찰이 운전석 앞에 서 있는 동료를 찾았다.
“신고자에게 전화해 봐.”
“예.”
경찰이 스마트폰을 꺼낼 때였다.
커브 길에서 예순이 넘어 보이는 남자가 걸어왔다.
최치곤이 부른 박용진인 모양이었다.
경찰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하기 난처한 상황이라 강성태는 얼른 입을 열었다.
“치곤아. 기사님께 요금 드려.”
“그럴까?”
강성태의 지시를 들은 최치곤이 빠르게 박용진에게 움직였다.
“차 세우셨어? 어떻게 집이 여기래요, 그래?”
너스레를 떤 최치곤이 박용진에게 달라붙었다.
그 뒤였다.
“조금 전에 모두 빠져나갔답니다.”
신고자와 통화한 경찰이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럼 됐지 뭐. 커피알리고 사장님이라고 하셨죠?”
“예.”
“혹시 추가로 신고가 들어올지 몰라서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이름하고 연락처 좀 주세요.”
“사장님은 자리에 안 계실 때 많으니까 제 번호를 적어가세요. 그리고 커피 한번 드시러 오세요. 경찰분들하고, 소방관분들께는 무료로 제공하거든요.”
“그런 거 받으면 곤란해집니다.”
“3만 원 미만이잖아요. 고생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성의인데요. 제 이름이 이은주예요.”
강성태도 모르는 방침을 떠든 이은주가 능숙하게 경찰관들을 상대하며 이름과 번호를 적어주었다.
“사장님 여동생도 경찰이에요. 합정동 지구대에 근무하고요.”
“아! 어쩐지 커피를 제공한다고 하더니. 우리 경찰 가족이었네. 그럼 됐어요. 번호는 무슨? 갈 테니까 조심해서들 들어가요.”
손까지 흔든 경찰관 두 명이 흐뭇한 미소로 차에 올라 곧바로 출발했다.
“은주? 죽여주는데?”
슬며시 다가온 최치곤의 칭찬을 이은주는 쑥스러운 느낌의 미소로 받았다.
“이리와 보셔. 여기가 우리 성태 형님.”
“처음 뵙겠습니다. 박용진입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대강 본 모양인지 박용진의 얼굴에 겁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최치곤의 말대로 선량해 보이는 표정이었고, 죄를 짓고 감출 것 같지는 않은 인상이었다.
“기사님. 필리핀에서 사기 치는 바람에 오늘 왔던 놈의 어머니가 죽었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예에?”
강성태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박용진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이 양반 봐? 뭔가 있나 보네?”
확신에 찬 최치곤의 말을 박용진은 부인하지 못했다.
“뭔데 그래요? 말해봐요. 평생 택시 운전만 했다는 양반이 어떻게 필리핀까지 가서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이어진 최치곤의 추궁에 박용진은 먼저 이은주의 눈치를 살폈다.
“치곤아. 너무 늦었다. 은주 씨부터 데려다주고 와.”
실제로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거기에 박용진의 시선에 담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강성태는 나름 적당한 요구를 최치곤과 이은주에게 전했다.
“매니저님. 그럼 전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같이 가. 내가 데려다줄게.”
고개 숙여 인사한 이은주를 최치곤이 따라붙으며 도로에는 강성태와 박용진만 남았다.
“필리핀 폭력 조직 가디언스파라고 했습니다. 쇠파이프와 망치까지 들고 있어서 막아드렸고, 반항이 심해서 조용한 곳에 끌고 갔습니다.”
강성태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던 박용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다시 말하지만, 기사님 때문에 어머니를 잃은 놈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가서 들어보면 내막을 알게 될 거 같은데 그 전에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강성태의 거듭된 요구에도 박용진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말씀 못 하실 거 같으면 가서 들어보죠. 하지만 기사님이 정말 사람이 죽을 정도로 사기 친 일이 있다면 그 뒤에는 나를 피해야 할 겁니다. 됐으니까 들어가세요.”
입을 다문 사람에게 매달리는 것도 우스워서 강성태는 아예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라는 말에도 박용진은 계속 머뭇거렸다.
그의 망설임이 짜증났지만, 강성태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도로의 불빛마저 눈치를 살필 정도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치곤이 어슬렁거리는 특유의 걸음으로 빌라에서 빠져나왔다.
필리핀 놈들을 만나보면 알게 될 거다. 무슨 일인지.
누가 잘못한 건지도 알 수 있을 테고.
최치곤이 반쯤 다가왔을 때였다.
“저기, 제가 젊었을 때 필리핀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손을 목에 넣어서 억지로 끄집어낸 듯 힘겨운 음성으로 박용진이 강성태의 시선을 당겼다.
“거기에서…, 데니카라는 여자를 만났는데…….”
최치곤이 다가오자 그나마 머뭇거리며 나오던 박용진의 고백이 잠시 잘렸다.
‘가만있어 봐.’
뭔가 하고 물어보려는 최치곤을 강성태는 짧은 눈짓으로 말렸다.
“한 달 있었습니다. 가서 일주일 만에 만났는데.”
“누굴 만나요?”
참지 못한 최치곤이 불쑥 끼어들었다가 강성태의 눈치를 살피며 목을 움츠렸다.
“필리핀 여자였습니다. 스물세 살이라고 했고, 이름은 데니카라고 했습니다.”
이게 뭐야?
강성태를 돌아보았던 최치곤이 이제는 잠자코 있겠다는 의미로 입을 오므렸다.
“선생님. 정말 함께 있었던 건 3주가 전부였습니다. 올 때 가지고 있던 달러도 전부 줬습니다. 그런데 이십 년이 훌쩍 지나서 아들을 혼자 키우느라 고생하다 죽었다고 보상을 하라니까…….”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아무것도 짚이는 일 없다며?”
“설마 필리핀 사람이 한국에 와서 목숨을 노리겠나 싶어서…. 그리고 그거 거짓말입니다. 부끄럽지만, 그때 콘돔도 썼고, 임신하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강성태는 답답한 심정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데니카(Danica)는 아침이란 뜻이었다.
아름다워야 할 필리핀의 여성이 한국인 남자의 아이를 홀로 키우다가 죽었든가, 아니면 필리핀 조직이 그런 여자들에게서 들은 정보를 가지고 돈을 뜯든가 둘 중 하나였다.
“그때 여권이나 주소, 혹은 기사님을 찾을 수 있는 신분증 보여준 거 있으세요?”
“보려고 했으면 여권은 얼마든지 봤을 겁니다.”
“언제 갔었는데요?”
“서른다섯에 갔었으니까 25년 전입니다.”
강성태의 질문에 박용진은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결혼하고 가셨던 거네?”
“아닙니다. 결혼은 거기 다녀오고 다음 해에 했습니다.”
어차피 모든 걸 털어놓은 참이라 그런지 박용진은 최치곤이 불쑥 던진 질문에도 바로 답을 내놓았다.
“일단 들어가세요.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저 선생님. 죄송하지만, 식구들하고 부동산 사장은 모르게……. 죄송합니다.”
차가운 강성태의 눈을 본 박용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풀 죽은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야, 이게?”
박용진의 뒷모습을 보던 최치곤이 못 믿겠다는 투로 불평을 뱉어냈다.
“일단 가보자.”
강성태가 움직이자 최치곤이 얼른 걸음을 옮겨 운전석으로 향했다.
“너는 진짜 몸 괜찮냐?”
“어허! 보시다시피 멀쩡해. 마음 같으면 안주 서너 개 깔아놓고 쓰러질 때까지 폭탄주를 마셨으면 싶은데 빨리 나으려고 삼겹살에도 콜라만 마셨다는 거 아니냐.”
조수석에 앉은 강성태가 슬쩍 보았을 때, 시동을 걸기 위해 손을 뻗은 최치곤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박용진이 한심해서?
아니면 이은주에 대한 아쉬움?
어느 쪽인지 알기 어려웠는데 강성태는 묻지 않았다.
최치곤이 앞뒤로 움직여 끼어있는 틈에서 차를 빼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 우리 보스께서 필리핀 애들을 잡았어?
자정쯤 지친 얼굴로 헤어졌던 이병렬이 다시금 활력을 찾은 듯한 음성으로 질문을 건넸다.
- 어떻게? 내가 가?
“별거 아니니까 일단 있어.”
강성태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투로 가벼운 웃음이 넘어왔다.
- 자꾸 선생질하는 거 같아서 미안한데 잡두리를 하려면 제대로 해. 어설프게 대하면 그놈들 반드시 대가리 다시 든다.
누군가 하는 의미로 최치곤이 눈을 크게 떠 보였다.
“필리핀 애들이 우리나라에 있는 거 알았어?”
- 그놈들만 있는 게 아냐. 베트남에서 온 하노이파 애들은 규모도 대단해서 우리 중소 조직은 함부로 부딪치지도 못해.
“또 뭐가 있는데?”
- 중국, 일본 빼면 그 두 곳이 가장 크지. 전에는 파키스탄이나 인도네시아 조직도 있었는데 하노이파하고 가디언스파가 다 잡아먹었다고 보면 돼.
“이놈들은 뭐 해서 먹고 사는데?”
- 빤하지. 들어온 여자애들 앞마이 세워서 도우미나 윤락시키고, 불법 체류자 보호비 뜯는 거지. 한 사람당 한 달에 20만 원에서 30만 원 받으니까 덩어리가 제법 커.
“그걸 그냥 둬?”
- 우리는 말도 안 통하고 불법 체류자를 알아보기도 어려워서 그런 쪽에 달려들기 어려워. 코 묻은 돈 뜯는 거 같아서 그렇기도 하고. 그나마 대림동 종환이가 그쪽은 좀 알지.
새벽이었다.
통화하는 사이 빠르게 달린 승용차가 영등포 공장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정말 내가 안 가도 되겠어?
편안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려면 진정한 보스가 되어야 한다는 경고처럼 들렸다.
강성태는 공장 골목에 차를 세우고 서 있는 숙소 덩치들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무리 빠져나가려 해도 이런 식으로 엮인다면 비겁한 모습만 계속 보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거구나.
중국, 필리핀, 베트남?
해야 한다면 해주지.
차를 세운 최치곤이 어떻게 할 거냐는 투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
- 진짜 시작이네.
강성태의 말뜻을 알아챈 이병렬이 의미심장한 답을 건넨 직후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고개를 숙인 덩치들이 뒷문을 열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