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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 9화 (179/513)

9권 - 9화

뒷덜미를 당긴 김정훈은 사정없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퍼억! 퍽!

“어이구!”

비명과 함께 얼굴을 감싼 이세종의 머리칼을 김정훈은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구석으로 끌고 가며 뺨을 연달아 올려쳤다.

짜악! 짝! 짜악! 짜악!

한눈에 보기에도 쌓인 게 많은 매질이었다.

고개를 숙여주는 김정훈을 하인 부리듯 했던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도 정도가 지나쳤다.

“그만해.”

강성태가 나직하게 말을 하자 뺨을 갈기기 위해 손을 들었던 김정훈이 재킷의 앞을 만지며 뒤로 물러났다.

자세를 바로 한 김정훈은 세상 후련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세종이 너, 이리 와 봐.”

“예.”

내내 지켜보던 조태완이 부르자 코와 입술이 터진 이세종이 급한 몸짓으로 다가왔다.

“동생들을 부리려면 너도 보스를 대접해 줘야지. 조직의 보스를 네 마음대로 동생이라고 부르면서 밑에 애들은 여전히 고개 숙이기를 바라면 되겠어?”

손으로 코와 입을 막은 이세종은 ‘이 사람이 그 정도였어?’ 하는 눈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에효, 이 불쌍한 인간아.

강성태는 침대 옆 탁자에서 티슈를 서너 장 뽑아 이세종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처음에 인사할 때와는 확실히 다른 태도였다.

“보스에게 인사해. 그래야 동생들도 너를 형님으로 모시지.”

“워낙 젊어 보이는 데다 이쪽 분이 아니신 거 같아서 실수했습니다. 이세종입니다.”

도대체 뭐가 방송국 보도국장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조태완이 주는 돈? 아니면 덩치들이 형님이라고 고개 숙여줄 때의 우월감? 공짜로 이용하는 클럽에서의 VIP 대우?

원인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이세종은 이미 환각을 제대로 맛본 약쟁이처럼 조태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의지를 잃어버린 인간이었다.

“부탁 하나 하자.”

강성태의 시선을 당긴 조태완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종이 데리고 클럽 한 바퀴 돌아. 그래서 세종이를 확실하게 자리 잡게 해줘.”

“오늘 말입니까?”

강성태의 질문에 조태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래줘야 뒤탈이 없다.’

설명을 대신한 그의 눈이 강성태를 향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스가 외면하는 동안 조직이 갈라지고 있다.”

피 묻은 티슈를 내려다보던 이세종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

“병렬이와 진용이, 달수, 치곤이만 심복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돌아. 종수 이야기 들었지? 아무리 정훈이가 꿋꿋하려 해도 아래에서 불만을 품은 놈들이 속닥이면 제2, 제3의 김종수가 나오게 돼.”

더럽게 어렵네.

옅게 웃는 강성태의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지난번 일도 그래. 신사동에 있는 평섭이네 식구를 정리할 거면 이쪽에 있는 정훈이를 시켰어야지. 그걸 신월동, 대림동, 강서구 숙소 애들만 불러서 해결하니까 정훈이가 밀려났다는 말이 돌지.”

강성태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다독이는 음성으로 조태완이 설명을 덧붙였다.

“정훈이는 고문님 모시라는 뜻으로 병렬이가 부르지 않았고, 저는 그렇게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말끝에 고개를 돌린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김정훈은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마음이야 알지. 그런데 병렬이 일도 아니고, 엔터 쪽 맡은 광준이 일도 아닌 보스의 일이잖냐. 당연하게 친위대가 움직이는 건데 영등포 식구들만 움직였잖아.”

“영등포 쪽이 친위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신사동은 정훈이가 갔어야지. 보스 생각이 진짜 그런 거면 강남에 일 하나 더 만들어. 그래서 정훈이 체면 좀 세워줘.”

진심인가?

시선을 돌린 강성태를 향해 조태완이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세종이도 마찬가지다. 생활하지 않아서 정훈이만 찾거든. 보스가 오늘 클럽에 데려가서 앞으로 보스 대하듯 하라고 애들한테 말해둬.”

조태완의 권유를 들은 이세종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이 인간은 아예 조폭식의 인사와 대우에 중독돼서 돌이키기 어려운 단계로 보였다.

“지난번 일은 들으셨을 거 아닙니까? 나 같으면 귀찮아서 싫을 일에 불려 나오는 게 정말 친위대니 뭐니 할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이 됩니까?”

“신 강남파에 묶였다고 해도 내가 관리하던 태완이파, 신호남파가 섞였다. 그것도 아직 제대로 섞이지 않았는데 보스는 영등포 식구들만 부른 거지. 무슨 생각이 들 거 같으냐?”

“참 복잡합니다.”

“보스는 뭐 거저 하는 건 줄 알았냐?”

기가 막힌 심정에 강성태는 픽 웃었다.

“세종이 동생부터 제대로 받아줘.”

강성태는 이세종을 돌아보았다.

계획한 일을 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할 인물이라는 의미였다. 이렇게라도 붙들어야 일을 하고 난 뒤에 탈이 나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오물을 치우려면 먼저 발을 담가야 하지 않을까?

“오해가 많았는데 앞으로 식구로 생각하고 대할 테니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나 저기 정훈이한테 말해. 기회 봐서 병렬이와 진용이, 영등포 쪽 식구도 소개해 줄게.”

강성태는 처음으로 조직의 보스인 양 이세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세종입니다, 혀엉님.”

나이 어린 강성태에게 형님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이세종의 말끝이 묘하게 끝났다. 그러나 보스와 직접 인사하고 챙겨준다는 말까지 들은 게 몹시도 흡족한 얼굴이었다.

이런 인간들이 얼마나 많을까?

공손하게 강성태의 손을 잡는 이세종을 조태완과 김정훈이 옅은 미소로 지켜보고 있었다.

불편하고 거북한 인사가 끝났다.

“정훈아. 사과드려.”

“예, 형님.”

강성태의 지시에 앞으로 움직인 김정훈이 이세종에게 상체를 깊숙하게 숙였다.

“실례 많았습니다, 형님. 용서하십시오, 형님.”

“앞으로 내가 몰라서 실수하는 일이 있으면 말로 좀 해라.”

“예, 형님.”

어지간히 뻔질대는 성격인 모양으로 코와 입을 씰룩이며 이세종이 서운한 감정을 토해냈다.

“저녁에 시간 돼?”

“물론입니다. 어느 클럽으로 갈까요?”

진짜 기막힌 웃음이 나오는 이세종의 대꾸였다.

클럽에서 얼마나 대우를 받았으면 이렇게 좋아할까.

김정훈과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 이세종이 병실을 나섰다.

“앙심을 품지 않겠습니까?”

“항상 조심해야지. 적당하게 돈 쥐여주고 클럽에서 마음껏 누리게 해줘. 그러다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올 때면 한 번씩 정훈이에게 맡겨. 이 짓이 싫어서 돌아섰다가도 밤이 되면 몸이 배배 꼬여서 먼저 전화하게 돼 있다.”

“우리 일을 봐주는 거 증거 모아뒀다가 나중에 협박하지는 않겠습니까?”

“죽으면 같이 죽는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줘. 그러면 돼.”

강성태의 염려를 단숨에 받아들인 조태완이 예방법까지 한번에 내놓았다.

이후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뒤에 강성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스. 이거 하나만 알고 가.”

몸을 돌리려는 강성태를 조태완이 나직한 음성으로 붙들었다.

“조직에서 빠져나가려는 모양인데 지금 보스가 없어지면 태완이파, 신호남파, 영등포, 이렇게 세 곳이 엄청나게 피를 흘릴 거다.”

마지막 경고라는 투로 조태완은 단호한 표정이었다.

“지방에서 여기저기 들쑤실 테니까 아마 전국 조직이 강남과 영등포로 다 몰리겠지. 그래도 영등포 보다는 강남이 먹을 게 많으니까 병렬이네 식구들이 가장 먼저 당할 거고, 다음은 신호남파 애들이 죽어 나간다.”

이병렬의 이름을 들은 강성태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태완이 잔인해 보이는 미소를 그려냈다.

“조직을 하나로 묶은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스가 없어진 조직은 그냥 개떼들 집합소 같아. 그래서 조직을 삼키려고 할 때, 대가리를 먼저 칠 계획을 짜는 거다.”

강성태의 속을 완전히 읽은 듯한 조언이었다.

“알아서 잘하리라고 믿는데 나와 내 어린 마누라, 병렬이네 식구, 저기 정훈이를 죽을 구덩이에 버리지는 마라. 보스를 믿고 따른 대가로는 너무 잔인하지 않냐?”

말을 마친 조태완은 가보라는 의미로 시선을 내려 허리에 덮은 모포를 매만졌다.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전한 강성태는 침대를 벗어나 문으로 향했다.

김정훈이 고개를 숙일 때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문님 지켜. 적어도 나를 따랐다는 이유로 칼 맞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강성태의 말이 뜻밖이었던 눈치였다.

시선을 들었던 김정훈이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숙였다.

강성태는 그렇게 병실을 나섰다.

“너무 잘났지 않냐?”

모포를 당겨 허리를 덮은 조태완이 닫힌 문을 보며 혼잣말처럼 질문을 던졌다.

감히 대꾸를 내놓지 못한 김정훈은 고개를 숙였다.

“뭐 해! 나와!”

그러거나 말거나, 조태완은 안쪽을 향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잠시 후였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오세아가 병실에 들어섰다.

그 직후에 교대하는 것처럼 인사를 짧게 전한 김정훈이 병실을 나섰다.

“안에서 다 들었지?”

“예.”

“이럴 땐 못 들었다는 거짓말이라도 해라.”

툴툴대는 조태완에게 다가온 오세아가 팔을 뻗어 다리를 주물렀다.

“너는 저런 남자 만나보고 싶은 마음 없냐?”

오세아는 대답 없이 조태완의 다리만 주물렀다.

“거짓말을 못 해서 대답도 못 하는 거냐? 만나보고 싶어서?”

“세상에서 남자는 오빠 한 분이에요. 저한테는 오빠가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예요.”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어서 그런지 조태완은 입술만 씰룩이며 당장 말을 내놓지 못했다.

“이렇게 다치고 나니까 오빠가 없는 세상이 덜컥 무서웠어요. 돈 때문이 아니라 혼자 살아가야 하는 세월이요. 그래서 아기도 갖고 싶었던 거고요.”

“책을 많이 읽어 그런가, 말은 정말 잘해.”

“좋은 분 같아요. 진짜 선한 사람은 주변 사람을 선하게 만든대요.”

“그럼 나는 악당이냐?”

“오빠는 제게 전부인 분이요.”

시선을 모로 튼 조태완이 “큼.” 하는 소리를 내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세아를 보고도 미모에 놀란 눈을 하거나, 돌아보지 않은 남자는 강성태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조태완이 강성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오세아 때문이었다.

**

김정훈이 먼저 이세종과 만나 저녁을 먹은 뒤에 강성태와 합류하기로 했다.

아직 오후 3시밖에 안 된 터라 강성태는 커피알리고로 향했다.

이상하게 적당히 빠져나오려고만 하면 운명이란 놈이 강성태를 옭아매는 느낌이었다.

깡패들이니까 죽든 말든 그만두면 되지, 라는 이기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황이 반복될 거란 생각도 들었다.

길이 막히지 않아 택시는 예상보다 빠르게 커피알리고에 도착했다.

“오셨어요?”

“별일 없죠?”

“그럼요. 대신 기다리는 분이 계세요.”

대답하는 이은주가 눈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강성태는 창가에 있는 여학생을 보며 눈을 끔벅였다.

“아저씨!”

테이블에서 일어선 맹인선이 강성태에게 다가왔다.

길게 기른 머리, 아이돌이 되겠다는 꿈을 품을 정도의 미모, 그리고 작지 않은 키가 손님들의 시선을 당겼다.

그 외에도 안쪽에 있던 단골 여학생들이 불만 가득한 눈으로 맹인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왔어?”

“커피 마시러요.”

“학교는?”

“저는 검정고시 봐야 해요.”

학교를 그만뒀었던 건가?

하기는 어린 나이에 숙소 생활하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정말 아저씨가 커피 만들어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맹인선이 질문을 건넸을 때였다.

딸랑.

문이 열리며 김민정이 들어왔다.

무척이나 지친 얼굴이었는데 눈빛만은 이모를 떠올릴 정도로 살아있었다.

“왔어?”

강성태는 보기 좋은 얼굴로 김민정을 맞았다.

“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이은주와 김민정이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에 강성태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무엇보다 맹인선이 엉뚱한 소리를 떠들면 일이 복잡해진다.

“사촌동생이 와서 할 이야기가 있거든. 나중에 또 보자.”

맹인선에게 인사를 건넨 강성태는 김민정을 향해 돌아섰다.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이상하게 일이 많아. 인계하기도 그렇고 해서 마치고 오는 길이야.”

“가서 좀 자야겠다. 커피는 그렇고 유자차 마실래?”

“그럼 나 자몽차 마실게.”

김민정이 메뉴를 정하자 이은주가 바로 움직였다.

‘누구?’

그 직후에 김민정이 시선으로 강성태의 뒤를 가리켰다.

돌아본 강성태는 마른침을 삼켰다.

맹인선은 아직 강성태의 뒤에 서 있었다.

김민재가 맹요선과 교제를 계속하면 김민정이 맹인선을 알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지금 소개하자니 만나게 된 과정을 설명하기 곤란했다.

어쩌지?

강성태의 난처한 표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아저씨. 그럼 저는 나중에 주문할게요.”

생긋 웃는 얼굴로 재치를 부린 맹인선이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돌 지망생 생활의 내공이 있는지 안쪽에 앉은 여학생들의 눈빛을 간단하게 무시하는 강단도 보였다.

“앉자.”

강성태는 김민정을 데리고 앞쪽 테이블에 앉았다.

“오빠. 요즘 우리 관내에 이상한 일이 자꾸 일어나. 그런데 하나같이 민재 오빠 이름을 대거든. 혹시 민재 오빠가 치곤이 오빠 따라서 깡패들 만나고 다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왜 그러는 건데?”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김민정이 호프집 사건을 강성태에게 설명해주었다.

“자몽차 나왔습니다.”

김민정의 날카로운 시선을 자연스럽게 피해 주문대로 움직인 강성태는 쟁반을 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고 알게 될 텐데 차라리 지금 말해 버려?

마음을 정하지 못한 강성태가 쟁반을 들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딸랑.

문이 열리며 커피알리고에서 보이면 안 되는 인간이 들어섰다.

“어머? 어서 오세요.”

“여!”

심지어 최치곤은 왼팔을 들어 이은주에게 인사하는 여유마저 보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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