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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 6화 (176/513)

9권 - 6화

제3장. 영웅이 돼야 할 것 같은데?

30분쯤 시간을 보내는 동안 맹가네 가족은 확실히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저기, 이제 우리는 가볼까 합니다.”

“민재랑 동갑입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맹요선의 두 동생이 공손하게 부친을 대하는 강성태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뭐라 대꾸하기 곤란했는지 맹진섭이 의미가 모호한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성태는 승용차로 향하는 맹가네 식구들과 함께 걸었다.

“아저씨. 진짜 커피숍에 있어요?”

엄마와 바로 위의 언니가 눈치를 주는데도 열여섯 맹인선이 강성태에게 질문을 건넸다.

이 녀석, 위험한데?

커피알리고에 오는 여중생, 혹은 여고생과 비슷한 눈빛을 확인한 강성태는 그냥 고개만 끄덕여 답했다.

“저요. 놀러 가도 돼요?”

“인선아! 그만해.”

모친의 나직한 경고에 입술을 모은 맹인선이 아쉬운 얼굴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눈에 하트가 제대로 그려진 게 위험한 단계를 급속하게 지나서 아예 경계경보가 올라온 느낌이었다.

하긴, 열여섯 살짜리 여학생이 보기에는 깡패들을 말 한마디로 이리저리 다루는 강성태가 백마 탄 왕자님쯤 보일 수도 있겠다.

“강 선생님.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식사라도 모시고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맹진섭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어서 강성태는 또다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악수를 나눴다.

“오늘 정말 고마웠네. 자네도 따로 보세.”

“예.”

김민재에게 고마움을 표한 맹진섭과 부인이 차에 오르기 전에 강성태를 향해 또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세요.”

강성태가 인사를 건넬 때, 맹인선이 ‘히잉.’ 하는 표정으로 큰언니 맹요선을 바라보았다.

야식을 먹는 자리에 따라가고 싶은 눈치였는데 맹진섭의 헛기침과 부인의 날카로운 눈매에 붙들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승용차에 올랐다.

“먼저 들어가세요. 여기 자리 끝나는 대로 들어갈게요.”

차에 오른 가족을 향해 맹요선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꼭 그런 표정으로 맹요선의 인사를 받은 맹진섭과 부인이 회색 승용차를 끌고 고수부지를 빠져나갔다.

“이종환. 이제 그만 돌아가. 고생했다.”

“예, 형님. 그럼 편히 쉬십시오, 형님.”

상황이 끝난 것을 확인한 이종환과 유섭우가 상체를 깊게 숙인 뒤에 한쪽에 대기하던 승용차와 승합차를 불렀다.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려는 눈치였다.

“우리는 병원으로 가자.”

“그럴까?”

강성태는 김민재, 맹요선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앞 횡단보도 앞에서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맹요선은 막 피기 시작한 감정에 오늘 일의 고마움이 더해져 설레는 얼굴이었고, 그 옆의 김민재는 확실히 도움됐다는 뿌듯함을 태연한 표정 아래로 누르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왼팔을 목에 건 강성태와 김민재, 맹요선이 횡단보도를 건넜을 때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서른 중반의 여성 두 명과 이십 대 여성 한 명이 강성태를 아는 척하며 인사를 건넸다.

경호원 생활을 하다 보면 스치는 얼굴이라도 기억하는 게 오래 사는 길이고, 커피전문점 매니저는 한 번이라도 들른 손님의 얼굴을 알아보는 게 매상을 올리는 지름길이었다.

“응급실 간호사분들이죠?”

“기억하세요? 맞아요! 우리 퇴근하는 길이에요! 안 선생님 만나러 오셨어요?”

“예.”

“좋겠어요. 그럼 들어가세요.”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길이었다.

“가끔 샌드위치 사 오세요!”

장난처럼 요구사항을 전한 세 명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병원 본관으로 향하는 길에서 맹요선이 진짜 신기하다는 눈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최근식을 죽여서 묻어버리겠다는 말을 뱉었고, 인상 더럽게 생긴 고척동의 따귀를 거침없이 때렸던 강성태가 간호사들과 편안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이는 눈치였다.

**

원자춘은 앞에 놓인 일곱 장짜리 A4 용지를 천천히 넘기며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었다.

어깨에 건 소총을 가슴 앞으로 돌린 강성태가 총구를 왼쪽 아래로 내린 사진이었다.

동료 두 명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강성태는 방탄조끼에 권총과 대검을 지니고 있었는데 세 명 중 중앙에 서 있었다.

마지막 장을 확인하던 원자춘이 대각선으로 박힌 붉은색 글자를 보고는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코드 레드워터란 건 뭐냐?”

“CIA 기밀 자료로 분류된 이유가 그거 때문이었답니다. 알아본 결과로는 한 가지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데 공식 문서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길게 늘어지는 설명이 불편한 모양으로 원자춘이 눈알을 뒤틀자 수하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쉽게 말씀드려서 강성태에게 주어진 코드가 있는데 그걸 제시하면 CIA와 레드워터가 동시에 움직인답니다.”

“뭐어?”

많이 놀랐는지 원자춘의 짧은 질문이 늘어져서 나왔다.

“말이 안 되잖아! 그런 게 있었으면 멕시코에서 죽을 뻔했는데 왜 안 썼겠냐?”

눈매를 찌푸린 원자춘이 책상에 놓인 재떨이를 붙잡는 순간, 수하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멕시코의 카르텔과 전쟁 수준의 분쟁을 일으키기 어려워서 그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알아듣게 설명하라고!”

“곤잘레스 이두안이라는 멕시코 사업가가 의도적으로 강성태를 그곳에 밀어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코드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걸 때려, 말아?

재떨이를 붙든 원자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빠져나오기 직전에 강성태가 코드를 사용했더라도 레드워터와 CIA가 움직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차피 탈출하는 시간은 비슷했을 겁니다.”

“흐음.”

“혼자서는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고, 동료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코드를 사용해봐야 카르텔의 추적 속에서 기다려야 했을 테니 그냥 나온 게 아닌가 예상했습니다.”

적어놓은 내용을 읽는가 싶을 정도로 물 흐르듯 나온 답변이었다.

“후우.”

재떨이를 붙잡은 채 떨리던 원자춘의 손이 확실하게 안정을 찾고 있었다.

“권리는 그렇고, 책임은 뭐야?”

“CIA가 강성태를 호출할 권리가 있습니다.”

짧은 대답을 들은 원자춘의 손이 다시 재떨이 위에서 떨렸다.

“레드워터는 철저하게 CIA와 협조합니다. 그래서 CIA가 결정한 위험한 작전에 지원 인원이 부족할 때, 강성태를 부를 수 있습니다.”

수하의 보고가 끝났을 때, 원자춘이 상체를 세웠다.

움찔한 수하가 손을 들어 머리와 얼굴을 가렸는데 재떨이에서 팔을 내린 원자춘은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이해가 되네. 한마디로 한국처럼 총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는 인간이라는 거 아냐?”

“총기를 사용하는 멕시코에서 경호원으로 일하면서 카르텔의 하부 조직 하나를 궤멸시켰던 놈입니다.”

턱과 볼을 문지르던 원자춘이 심오한 표정으로 강성태의 모습이 담긴 A4 용지를 들었다.

“우리 중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문학이 있다. 제목은?”

“삼국지연의입니다.”

모처럼 흡족한 모양으로 원자춘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상대하기 힘겨운 적을 만나면 어떻게 해결했지?”

“예?”

수하의 반응이 못마땅한 원자춘의 눈이 하얗게 위로 솟아오르는 순간이었다.

“우리 편으로 만듭니다!”

급하게 나온 답에 원자춘의 눈이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세 치 혀를 이용해 우리 편으로 만들지. 강성태가 원하는 걸 찾아봐. 뭐를 해주면 좋을지. 돈을 베팅하려면 얼마가 적당할지를 고민해. 그래서 조건을 만들어 와.”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수하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이 자료를 뽑아낸 놈은 어떻게 됐지?”

수하의 뒤통수를 붙드는 듯한 원자춘의 질문이 있었다.

“양쪽 귀를 잘랐습니다.”

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손을 든 원자춘이 손등 방향으로 휘저어 나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

병실에 들어간 강성태는 김민재와 맹요선을 키란에게 소개했다.

어느 정도 의사 표현을 할 영어 회화 능력을 갖추었으나 혹여 실수할까를 염려하는지 김민재와 맹요선은 부끄럽고 쑥스러운 얼굴로 겨우 인사만 나눴다.

“닥터 안이 창밖을 보며 걱정하던데 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닙니까?”

“여기 두 사람 만나느라고 아래 있었던 거야. 나는 조금 뒤에 갔다가 내일 이두안 회장 만나보고 올 테니까 지루하더라도 참고 있어.”

“알겠습니다.”

안다미가 끝날 때까지 잠시 짬이 있었다.

병실에서 함께 기다리는 김민재와 맹요선을 배려하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좋았지만, 혼자 병실에 있을 키란을 생각해서 강성태는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정체가 뭐예요, 진짜?

영국식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모습도 그렇지만, 중간중간 키란과 네팔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강성태의 모습을 맹요선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눈치였다.

20분쯤 대화를 나누던 강성태와 키란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안다미가 들어섰다.

어색한 김민재, 더 어색한 맹요선이 강성태의 소개로 안다미와 인사했다.

“괜히 두 분 데이트하는데 우리가 방해한 건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불러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안다미의 질문을 김민재가 뻔뻔하게 받았다.

“키란 씨. 내일 올게요. 자정에 주사와 약이 있으니까 거르지 마세요.”

키란에게 당부를 전한 안다미가 “나가요, 우리.” 하는 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

조태완은 병실에 들어서는 보도국장 이세종을 향해 침대 옆 의자를 가리켰다.

“좀 어떠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연락이 되지 않아서 많이 걱정했습니다.”

들고 온 두유 상자를 보란 듯이 테이블에 올린 이세종이 질문과 함께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이세종을 상대해주던 김동팔이 없어졌다.

그 뒤로 몇 차례 클럽에 들렀던 이세종은 그때마다 조태완에게 연락을 부탁한다는 메모를 남겼었다.

“누가 형님을 이렇게 했습니까?”

“왜? 복수라도 해주려고?”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검찰, 경찰에 손써놓고 대대적으로 보도 때려서 아예 똘똘 말아 넣겠습니다.”

병실의 입구에 선 김정훈이 ‘상대가 누군지나 알고 저러나?’ 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세종은 사명감에 불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정훈아. 거기 쇼핑백 좀 가져와라.”

조태완의 지시를 받은 김정훈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쇼핑백을 가져왔다.

“이게 뭡니까?”

손은 이미 쇼핑백을 받았는데도 이세종은 마치 거절하겠다는 투의 질문을 내놓았다.

‘네 검은 속을 다 보고 있다.’

조태완은 질문을 싹 무시한 채 김정훈을 가리켰다.

“김정훈이라고 앞으로 클럽에 가면 저놈을 찾아. 나가기 전에 번호도 교환하고. 아! 그러지 말고 명함을 하나 줘라.”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낸 이세종이 김정훈에게 명함을 건넸다.

“김정훈입니다, 형님. 큰형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어, 반가워.”

클럽을 출입하면서 간이 부었고, 무엇보다 조태완을 믿어서 이세종은 절반쯤 깡패 흉내를 내면서 손을 내밀었다.

공손하게 상체를 숙인 김정훈이 악수를 나누고는 다시 병실 입구로 움직였다.

“쇼핑백 확인해 봐.”

이세종은 거부하지 않고 쇼핑백을 벌린 뒤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형님?”

놀라 고개를 드는 이세종을 향해 조태완이 묘한 미소를 그려냈다.

“너, 내 동생 맞지?”

“그럼요, 형님. 한번 형님은 평생 형님으로 모십니다. 제가 보도국장이 된 거에는 뛰어난 능력도 있지만, 한번 따르면 절대로 변치 않는 마음을 높은 분들이 알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꿀을 토해내나 싶을 정도로 번지르르하고 달콤한 말이 이세종의 입에서 연달아 쏟아졌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좀 더 높은 자리로 가자.”

“예? 형님?”

아예 반달이 된 것처럼 이세종은 깡패들이 쓰는 질문을 내놓았다.

“일단 5억 넣었다. 네 사람을 좀 더 만들어. 언제까지 보도국장만 할 거야? 국회에도 입성하고, 방송위도 맡아서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야지. 안 그래?”

“형님?”

감동이 울컥 올라온 음성으로 이세종이 조태완을 불렀다.

“필요하면 언제고 말해. 전부 현찰로 준비하는 거니까 아무리 털어도 안 나온다. 알지? 우리 방식?”

“그럼요, 형님. 형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조태완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틈을 두었다.

“우리 조직에 젊은 보스가 있다. 내가 그 친구도 좀 거물로 키워야겠거든. 그러니까 동생이 좀 애써줘야겠다.”

“누군데 그러십니까, 형님?”

“조만간 자리를 마련할 테니까 그때 보기로 하고, 일단 동생이 먼저 영웅이 돼야 할 것 같은데?”

“영웅이요?”

“그래. 남들은 생각도 못 하는 특종을 마구 터트리는 거지. 사건은 내가 알아서 다 잡아놓을 테니까 동생은 외압이 있더라도 강단 있게 팡팡 터트려. 그렇게 동생 이름을 알리게 되면 내가 공천 하나 제대로 받아오마.”

내내 자신에 차 있던 이세종이 쭈뼛거렸다.

“회장님 라인이 움직이는 건 제가 어떻게 못 합니다.”

“쇼핑백에 든 돈이 5억이다. 동생이 앞으로 받을 연봉하고, 퇴직금까지 내가 한 번에 마련해주마.”

이세종은 눈만 껌벅였다.

“당장 잘려도 평생 받을 연봉을 손에 쥔다. 거기에 명예 얻어서 국회의원 되는 길이 있고, 아니면 지금 그 돈까지만 받고 나하고 인연 정리하는 게 있지. 어떻게 할래?”

김정훈을 돌아보았다가 시선을 다시 가져온 이세종이 움찔했다.

양주병으로 머리를 내려치던 조태완의 눈빛이 침대 앞에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겁은 나고, 거기에 욕심은 또 달라붙고.

쇼핑백을 안은 이세종은 연신 입맛을 다실 뿐, 답을 내놓지 못했다.

“나는 이세종이 내 동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여기까지만 하자. 그건 내가 주는 작별 선물이니까 그렇게 알고 그만 일어나.”

조태완의 단호한 음성이 떨어진 직후였다.

공손하게 있던 김정환이 표정을 무겁게 바꾸고는 침대로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이세종을 끌어내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김정훈이 병실을 반쯤 가로질렀을 때였다.

“하겠습니다, 형님! 이세종이 형님 말씀대로 인생 걸겠습니다, 형님!”

몸을 세운 이세종이 깡패처럼 상체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고맙다, 동생.”

조태완이 내민 손을 이세종은 깡패보다 더욱 공손한 태도로 맞잡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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