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 21화
점퍼 차림에 맨투맨 티, 편한 복장의 강성태는 길을 건너 바로 택시를 잡았다.
아직 오후의 중간이라 빈 택시들이 많았고, 길 역시 한가했다.
“기사님. 오목교 넘어가서 영등포 로터리에서 노들길로 가주세요.”
“예.”
그냥 강남으로 가자고 했다가는 서라대학병원으로 향하는 지하차도를 지날 확률이 높아서 강성태는 가는 길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달리는 택시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강성태는 먼저 이병렬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난데 김정훈이 전화했었다.”
- 나도 들었어. 안 그래도 지금 옷 갈아입고 있다.
“그럴 것 같아서 전화한 거야. 그냥 있어.”
- 팔 부러진 상태에서 여럿을 어떻게 감당해? 옷 다 갈아입었으니까 20분이면 도착해. 너는 어디야?
이병렬은 말린다고 해서 들어먹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 깡패들이 제일 무서울 때가 돈에 눈이 뒤집혔을 때다. 욕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상태라 어설프게 상대하면 뒤만 귀찮아져. 대신, 이렇게 몰려있을 때 바로 잡으면 확실히 정리된다.
“진짜 괜찮겠냐?”
- 누가 누굴 걱정해? 그리고 그 인간들 밖에 애들 대기시켰다더라. 여차하면 여럿이 달려들어서 태완이 형님을 창밖으로 던질지도 모른다. 그런 뒤에 우리를 밀어내려고 하겠지.
“병원 유리창은 그 정도로 안 열려.”
- 깨부수면 되지? 말다툼이 일어났는데 겁에 질려서 혼자 유리를 깨고 뛰어내렸다고 하면 끝나잖아. 한두 놈 총대 메고 들어가면 얼마나 깔끔하냐.
바쁘게 설명하던 이병렬이 “아이, 씨.” 하는 욕을 끝에 달았다.
통화하면서 옷을 입다가 상처가 울린 모양이었다.
“지금 출발할 테니까 병원 앞에서 보자.”
- 그래.
강성태의 답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어쩐지 이병렬이 살짝 흥분한 느낌이어서 강성태는 피식 웃었다.
전에 최치곤이 이랬다.
어떤 일이든 강성태와 함께 움직이게 되면 꼭 지금의 이병렬 같이 들뜬 음성으로 나서곤 했었다.
택시는 특별하게 막히는 일 없이 강남 외곽의 병원에 도착했다.
“높은 분이 입원했나?”
입구로 들어서던 택시 기사가 내놓은 혼잣말이었다.
검은색 대형 승용차가 줄줄이 늘어섰고, 정장 차림의 덩치들이 빽빽하게 입구를 둘러싸고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깡패들이 저렇게 설치는지. 경찰들은 뭐 하는 거야? 저런 것들 싹 잡아 처넣지 않고.”
뒤늦게 덩치들의 정체를 짐작한 기사가 넌덜머리를 내며 차를 세웠다.
“저것들이 어디에서 돈이 나서 저런 고급 차를 끌고 다니겠어요? 다 잡아 처넣어야 하는데.”
요금을 건넨 강성태가 택시 문을 열자 이쪽을 바라보던 덩치들이 우르르 달려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기사는 핸들을 양손으로 곱게 잡고 앞만 보고 있었다.
저 양반은 잘못한 거 없다.
실제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아프게 해서 먹고 사는 게 깡패들인 거고.
택시에서 내린 강성태에게 김정훈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저것들은 뭐야?”
“지방 선배들이 먼저 보낸 식구들입니다. 150명쯤 왔습니다.”
“병렬이도 온다고 했는데?”
“도착하실 때 됐습니다. 올라가십시오, 형님.”
김정훈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병원 입구를 둘러싼 덩어리들이 이쪽을 거칠게 노려보았다.
“우리는 몇 명이나 있냐?”
“전에 병렬이 형님과 의논해서 바깥에 깔아둔 동생들이 30명 있고, 조금 전에 숙소 애들이 도착해서 전부 80명쯤 됩니다.”
김정훈의 보고가 끝났을 때였다.
익숙한 검은색 승용차가 입구에 들어섰다.
강성태와 김정훈 앞에 멈춘 승용차의 운전석에 서달수가 타고 있었다.
덩치 둘이 다가가 고개를 짧게 숙이고는 문을 열었다.
“차 좀 부탁하자.”
“예, 형님.”
덩치 하나가 급히 움직여 운전석에 있던 서달수와 교대했다.
이병렬은 노타이에 정장 차림이었다.
“느닷없이 이렇게 모이면 정보과하고 형사과 곰들이 추가로 달려와. 사진이야 이미 찍혔겠지만,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아.”
이병렬은 곧장 로비를 향해 걸었다.
강성태가 보기에는 어색했으나 그럭저럭 크게 다치지 않은 듯한 걸음이었다.
이병렬을 아는지 지방에서 왔다는 덩치들이 고개를 짧게 숙였고, 이쪽에서는 서달수가 그와 비슷한 동작으로 인사했다.
병원 입구에 들어선 일행은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위쪽으로 올라갔다.
“종수 꼬드기는 걸 내가 깨버렸고, 나를 협박하려던 성기 형님을 보스가 두들겨 버렸으니까 이제 남은 건 태완이 형님뿐인 거지. 지방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는 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병렬이 짧게 상황을 풀어주었다.
말뜻은 알았다. 그러나 머리를 굴린다는 놈들이 왜 조태완을 찾아오는 건지 강성태는 이해하지 못했다.
강성태의 의문을 짐작했는지 이병렬이 얼른 말을 이었다.
“삼합회가 10억을 주네, 마네 했으니까 태완이 형님에게 손 벌리려는 거다. 삼합회하고 손잡지 않을 테니까 작은 업소 하나씩 주든가, 아니면 현찰로 10억씩은 줘야 하지 않냐, 뭐 그런 개소리 지껄이겠지.”
픽 웃는 강성태를 향해 이병렬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깡패 새끼들이 그래. 누가 돈 백만 원을 받아달라고 부탁하면 그거 받아다 주고 처음엔 30만 원 정도 수고비로 받아가. 그래놓고 명절이라고 30, 동생이 빵에 가서 변호사비 도와달라고 50, 폭력 벌금 나왔다고 30, 이런 식으로 뜯고 또 뜯는 거지.”
“조태완 고문한테도 그런다는 거냐?”
“비슷할걸? 지금 돈을 주고 적당히 무마하면 영업이 안 된다고 1억, 업장 지키다가 싸움 나서 변호사비 필요하다고 1억, 명절인데 동생들 떡값 좀 도와달라고 1억. 그러니까 오늘 오는 건 고개 숙이고 은행 노릇하든가, 조직 넘기든가 하라는 협박이라고 봐.”
혹시 몰라 고개를 돌린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김정훈이 고개를 짧게 숙였다. 이병렬의 예상이 맞을 거라는 의사표시였다.
“병실에서 두들기면?”
“명분이 생긴 거니까 밑에 있는 놈들이 달려들거나 뒤에서 작업하겠지. 나, 너, 여기 정훈이, 달수, 언제 길 가다 연장질 당할지 모를 전쟁이 시작되는 거고.”
“서성기 두들긴 거로 대충 정리됐다며?”
“원래는 그게 맞아.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돈에 눈이 뒤집혔거나, 너랑 나를 잣밥으로 봤다는 거지.”
이병렬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복도에 있던 덩치들의 인사를 받으며 강성태와 이병렬은 병실로 향했다.
“안에 있던 분은?”
“아래쪽 식구들이 워낙 급하게 들이닥쳤습니다. 괜히 나가다가 얼굴 알려지면 더 곤란해질 거 같아서 그냥 병실에 계십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한 김정훈이 병실 문을 가볍게 두들겼다.
“달수, 너는 앞에 있어.”
“예, 형님.”
이병렬의 지시에 서달수는 병실 앞을 지키듯 몸을 세웠다.
강성태, 이병렬, 김정훈의 순서로 병실에 들어섰다.
병실에는 조태완 홀로 머리 쪽을 세운 침대에 기대앉아 있었다. 작은 방의 문이 닫힌 거로 봐서 함께 있던 부인은 그곳에 있는 눈치였다.
“저 왔습니다, 형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너는 또 왜 설쳐?”
상황을 익히 알고 있을 텐데도 조태완은 조금도 눌리지 않은 눈빛이었다.
“성기 형님 일이 있고 나서 바로 형님을 찾아온다니까 혹시 몰라 왔습니다.”
“병신 새끼들.”
지방에서 온다는 대가리들을 가볍게 평가한 조태완이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기에서는 그 주먹 휘두르지 마. 괜히 명분 주면 일 커진다.”
“고문님이나 병렬이, 여기 정훈이에게 손대는 꼴은 못 봅니다.”
“알았다. 그건 뭐라고 안 하겠는데 대신 욕 좀 했다고 때리지는 마라. 깡패한테 욕은 그냥 조사나 감탄사 같은 거야.”
조태완이 돌린 시선 앞에서 이병렬은 웃음을 삼키는 얼굴이었다.
“웃기는? 야, 이병렬. 네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
“지랄한다. 이 새끼들은 언제 온다는 거야?”
처음에 병실에 들어섰을 때는 몰랐다. 그러나 이병렬과 농담 비슷한 대화를 나누는 조태완의 얼굴에 안도와 자신감이 올라오는 건 분명하게 보았다.
병실은 방지병원보다 훨씬 넓고 고급스러웠다.
“앉아.”
조태완이 자리를 권할 때였다.
띠루루루. 띠루루루.
김정훈의 바지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려 나왔다.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김정훈은 스마트폰을 꺼내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뭐야? 지금 내려갈 테니까 잠깐 기다리시라고 해.”
통화를 마친 김정훈이 조태완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래에 도착하셨답니다. 제가 내려가서 모셔오겠습니다.”
“도대체 몇 놈이나 왔다는 거냐?”
“덕진이 형님이 선배분들 모셔온다는 말만 했지, 정확하게 몇 분인지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한숨을 내쉬는 조태완에게 고개 숙인 김정훈이 병실을 나섰다.
“내가 다른 때는 말 않겠는데 이런 자리에 올 때는 가능하면 정장을 입어. 깡패들이란 게 그래. 우리가 계급장이 있냐, 명함이 있냐. 병렬이 봐라. 저렇게 깔끔하게 입으니까 얼마나 좋아.”
이병렬을 잠깐 돌아본 조태완이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너를 보스로 모시는 병렬이와 정훈이 체면도 생각해 줘. 중요한 자리에 함께 가는데 병렬이가 트레이닝 바지에 슬리퍼 찍찍 끌고 오면 좋겠냐?”
예상하지 못했던 지적이었다.
그렇게까지 정장을 입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은 반면에 이병렬과 김정훈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바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런 걸 입으면 양아치처럼 보여야 하는데 인물은 왜 저렇게 잘 빠져서 사람 속을 긁냐고!”
강성태를 보며 조태완이 투덜거린 다음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린 뒤에 문이 열렸다.
먼저 김정훈이 들어섰고, 이어 마흔 중반 위아래로 보이는 남자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마지막에 들어선 조덕진의 뒤를 따라 병실로 들어온 서달수가 안쪽에서 문을 닫았다.
재킷을 잡는 공손한 자세로 이병렬을 향해 고개 숙이는 서달수의 눈이 빠르게 덩치들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재킷을 잡았던 손을 두어 번 두들겼다.
몸수색을 못 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로 보였다.
들어선 중년 남자들은 조덕진을 포함해서 모두 여섯 명이었다.
조태완이 고개를 짧게 숙였고, 맞은편에서는 세 놈이 고개를 숙였다. 순서를 기다린 것처럼 그 뒤에 이병렬이 여섯 명을 향해 좀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조태완이 기대앉아 있는 침대의 무릎쯤이었다.
오른쪽에 이병렬, 침대를 건너 왼편에 강성태가 있었다.
“앉으십시오. 앉아들.”
조태완이 권하자 김정훈과 서달수가 벽에 있던 의자들을 가져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조덕진을 제외한 여섯 명의 시선은 강성태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 보는데 인사나 하고 앉아야 하지 않겠나, 동생?”
“그러시겠습니까? 여기가 강성태라고 이번에 통합한 조직을 이끌 보스입니다.”
뱁새 눈을 가진 남자의 요구에 조태완이 강성태를 소개했다.
“강성태입니다.”
강성태는 고개만 살짝 숙였다.
“네가 성기한테 주먹질했어?”
씨름 선수 출신인가 싶을 정도로 뱁새 눈은 덩치가 컸다. 키도 대단해서 강성태보다 머리 반개가 위에 있을 정도였다.
“그랬습니다.”
“야, 인마! 생활도 안 했다는 새끼가…….”
“욕하다 맞았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까?”
강성태는 뱁새 눈의 말을 뚝 자르고 질문을 던졌다.
“아니 그런데 이 개새끼가…….”
강성태가 픽 웃는 순간이었다.
“좋네, 씨발! 찌그러지니까 내 앞에서 시비를 거는 꼴도 보고. 선배고 지랄이고 지금부터 해보자는 걸로 알 테니까 나가. 졸라리 어려울 때 챙겨줬더니 병실에 와서 시비를 털어? 잣 까고 있네.”
쇠판을 벅벅 긁는 조태완의 음성이 앞에 선 여섯 명을 향해 달려갔다.
“조덕진. 너, 이 개새끼야. 종수한테 작업한 거 알고 내가 너 씨발 아주 울대를 끊어버리려고 했었는데, 여기 병렬이가 나서서 막은 거야. 대전? 잣까라 그래, 이 씨발 새끼야.”
“동생?”
“동생? 찌그러진 거 같으니까 고름 죽이러 와 놓고 동생은 왜 찾아?”
“그게 아니라, 저기 생활도 안 했던 새파란 새끼가 말을 함부로 하니까 그런 거 아냐? 우리 바닥이 위아래는 분명하잖아? 동생까지 왜 이렇게 나와?”
“조덕진이가 종수 꼬드겨서 모사치려던 거 몰랐어?”
조태완의 거친 질문에 뱁새 눈은 답을 내놓지 못했다.
“내가 형님 아쉬울 때 여러 가지로 참 많이 도와드린 거 같은데 여기까지요. 나가쇼. 내가 조태완이요, 조태완. 다른 건 모르겠고, 조덕진이 저 개새끼하고 대전은 아예 쓸어버릴 거니까 거기 발 디디면 진짜 끝장 보는 거로 생각하쇼.”
뱁새눈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 핑계로 밀어붙여, 아니면 오늘은 얌전히 물러나?
거칠게 나오는 조태완을 보며 망설이는 게 분명했다.
“나가라니까 뭐 해?”
망설이는 뱁새 눈을 향해 쇠판을 긁는 듯한 조태완의 고함이 다시 달려갔다.
병실에서 일이 벌어지면 숫자로는 밀린다.
아까 보았던 서달수의 눈빛을 생각하면 이 인간들은 연장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눈치 빠른 조태완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세게 나오는 건 강성태와 이병렬을 믿고 명분을 쥐기 위해 나섰다는 의미였다.
생활하던 이병렬이 나설 수 없으니까.
강성태는 픽 웃으며 뱁새 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고문님이 나가라고 하시잖아? 나가.”
“너 이 새끼, 진짜 죽고 싶어?”
“고문님이 말씀하신 게 있어서 두 번 참는다. 나가.”
“그런데 이 씨발 새끼가……!”
조태완은 분명 강성태와 뱁새가 붙기 직전부터 거칠게 나섰다.
깡패 바닥에서 생활한 적이 없다는 약점, 존댓말을 쓰기는 했지만, 아까 상황에서 일이 벌어지면 명분을 빼앗긴다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여기쯤에서 나와줘야 한다.
안 나와도 할 수 없고.
강성태가 독하게 마음먹는 순간이었다.
“강성태! 뒤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저것들 내보내!”
속을 읽은 듯한 조태완의 지시가 날아들었다.
“이 씨발 것들이!”
그 직후에 뱁새 눈이 등 뒤로 손을 돌리며 회칼을 꺼내 들었고, 신호라도 되는 양, 곁에 있던 놈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 들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