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권 - 20화 (169/513)

8권 - 20화

조태완의 엉뚱한 대꾸로 틈이 있었다.

“광룡을 제대로 밀어내려면 그쪽과 손잡은 인간들을 확실히 정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문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침묵의 끝에서 강성태는 빛나는 눈으로 잔잔하게 요청을 건넸다.

조태완은 강성태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정치인과 재벌, 검찰, 경찰, 연예계까지, 마약과 관련된 인간들을 조용하게 찾아가 두들길 생각입니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모양으로 조태완은 눈만 껌벅일 뿐, 여전히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알아듣게 다시 말해 봐.”

“법망을 빠져나가는 높은 자리의 마약범들을 내 방식대로 처리하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지?”

“제대로 들은 거 같습니다.”

“아냐! 난 아예 못 들었어.”

조태완은 고개까지 흔들어가며 거세게 부정했다.

“광룡을 밀어내겠다는 말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에는 정신이 몽롱해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

“정치인과 재벌, 검찰, 경찰, 연예계까지 다 말했습니다.”

“후아-.”

조태완은 뜨거운 김을 푹 쏟아냈다.

“나한테 왜 이러냐? 조직에서 밀려나 찌그러진 것도 억울한데 꼭 감방에서 죽게 해야 속이 후련하겠어? 혹시 나한테 앙금이 남았다면 그 주먹으로 속이 풀릴 때까지 때려. 대신 그 잣 같은 계획에서 나는 빼주라.”

냉정하게 바라보는 강성태를 향해 조태완이 볼을 씰룩였다.

“차라리 대통령을 암살해. 아니면 검찰청에 뛰어가서 화염병을 던지든가. 그럼 내가 싸게 받을 수 있게 진짜 최선을 다하마.”

혹여 강성태가 다른 말을 할까 염려하는 사람처럼 조태완은 말이 급했다.

“우리나라에서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부류 순서를 알려줄까? 첫 번째가 재벌, 두 번째가 검찰, 세 번째가 국회의원이다. 그걸 건드리면 너는 그냥 죽은 목숨이야.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조태완은 고개를 돌려 오세아가 들어간 방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내가 이 나이에 애를 하나 만들어볼까 고민했다. 너 닮은 아들 하나 생기면 어떨까 싶었는데 그 생각도 딱 그만뒀다. 너 같은 아들 뒀다가는 집안 다 말아먹을 게 빤하니까. 뭘 하든 말리지 않겠는데 나는 그냥 빼주라.”

다급하게 말을 쏟아내고도 조태완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눈치였다.

“내가 가진 게 탐나는 거라면 돈도 가져가. 또 뭐? 뭐가 필요해? 마누라를 달라는 건 아니지?”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 씨발…, 도움을 왜 나한테 말하냐고? 병렬이랑…?”

뒷말을 삼킨 조태완의 얼굴이 순간순간 극적으로 바뀌었다.

“뒤탈이 있을 걸 짐작해서 병렬이는 빼놓고 나한테 이러는 거냐? 죽어도 나하고 죽으려고?”

“돕겠다고 나서도 병렬이는 그쪽 바닥을 잘 모릅니다.”

“허!”

“문제가 생기면 내 선에서 끝냅니다. 절대 고문님한테 불똥이 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네가 검사야? 경찰이야? 그런 게 네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아? 작정하고 달려드는 검사와 경찰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안다면 절대 그런 소리 못 한다.”

분노를 꾸역꾸역 누른 얼굴로 조태완은 강성태를 노려보았다.

“진짜 궁금해서 그런다. 왜 나냐?”

“깡패들이야 두들기든, 파묻든, 그건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를 누리기 위해 짓밟은 선량한 사람들에 대한 죄를 조금이라도 갚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멍하니 말을 듣던 조태완의 볼과 눈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야, 이 새끼야! 그래, 나 깡패로 살았다! 믿었던 놈한테 칼질당해서 죽다 살았고! 오냐! 그거 살려준 게 너다! 인정한다! 그래서? 그래서 이런 거냐? 마지막은 비참하게 뒈지라고?”

“내가 몸담은 조직의 고문이라면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았으면 해서 부탁한 겁니다. 거절하겠다면 혼자 하면 됩니다.”

말을 마친 강성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클럽에서 나오는 수익, 지금까지 모아둔 돈, 죽어서 가져갈 겁니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짓밟아가며 긁은 핏값입니다. 나를 돕지 않겠다는 건 말하지 않겠지만, 최소한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쓰십시오.”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한 번쯤 새 인생을 살 기회를 갖자고 찾아온 겁니다. 부탁하러 와서 지금까지 참았지만, 내 앞에서 욕하던 인간들이 어떻게 됐는지 생각하십시오.”

“오냐! 쳐라! 차라리 치라고, 이 새끼야!”

한숨을 쉰 강성태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옆의 대기실에서 오세아가 나왔다.

강성태도 예상하지 못했던 등장이었고, 조태완 또한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괜찮으시면 다음에 한 번 더 들러주시겠어요?”

“지금 뭐 하는 거야!”

쩌렁하는 조태완의 고함이 병실을 뒤흔들었다.

“통증 때문에 감정 기복이 심하세요.”

고개를 숙여 인사한 강성태가 밖으로 나선 뒤였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어디에서 함부로 나서? 왜? 잘생긴 놈 보니까 아랫도리가 근질근질해?”

여태 조태완은 이렇게 심한 말을 오세아에게 한 적이 없었다.

“저분이 오빠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게 고마워서 인사했어요. 혹시 오빠가 욕하신 거 때문에 저분까지 고개를 돌릴까 봐 무서워서요.”

겁먹은 얼굴에 눈물마저 그렁그렁한 채 오세아가 입을 열었다.

“오빠. 저 오빠를 진짜 위하는 분은 처음 봤어요.”

이상하게 조태완은 오세아의 저런 얼굴을 보면 힘이 쭉 빠지면서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서 독한 일이 있을 때는 한강이 보이는 빌라에서 따로 지냈었다.

“아무렴, 동팔이랑 같겠냐?”

“거절하더라도 오빠를 위하는 분에게 상처를 주지는 마세요. 저분이 오빠를 구해주었다면서요. 저분이 돌아섰다가 오빠가 또 다치면…….”

“왜 울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오세아를 손짓으로 부른 조태완이 어깨를 다독였다.

“울지 마. 그만!”

“네에.”

한숨을 길게 내쉰 조태완은 착잡한 표정으로 오세아를 바라보았다.

**

딸랑.

주문대 앞에 앉아 있던 이은주는 몸을 일으킨 뒤에 잠시 멍했다.

“매니저님!”

“잘 있었어요?”

반가움의 끝에서 왈칵 눈시울이 붉어진 이은주가 강성태의 얼굴과 몸, 마지막으로 목에 건 왼팔을 살폈다.

“아저씨!”

오후에는 늘 찾던 여중생들이 안쪽에서 심드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다쳤어요?”

“미끄러졌어.”

여중생들에게 대꾸한 강성태는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고생 많았죠?”

“아뇨.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다미는요?”

“병원에 출근했어요. 그동안 사정이 있어서 다른 곳에도 연락하지 못했던 거니까 나중에 한꺼번에 말할게요.”

짧게 대답한 강성태는 그리웠던 카페 안을 돌아보았다.

손자국 하나 없는 유리, 깨끗한 바닥, 테이블, 주방의 선반과 싱크대까지, 어느 곳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잘 관리했네요. 정말 고마워요.”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그러세요. 커피 드셔도 돼요?”

“그럼요. 우리 커피가 얼마나 그리웠는데요?”

이은주가 기쁜 얼굴로 움직여 강성태를 위한 커피를 만들었다.

원두를 분쇄하는 소리, 에스프레소 향을 맡자 정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여기요.”

강성태는 머그잔에 올라온 크레마를 보며 보기 좋게 웃었다. 이어 향을 맡았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입에 넣고 천천히 삼켰다.

표정만 봐도 강성태가 얼마나 만족하는지를 알아챈 이은주가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일은 없었어요?”

“부동산 사장님께서 두 번 오셨었어요. 지방에 가셨다고 하니까 오시는 대로 꼭 연락 달라고 하셨고요.”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급한 내용은 없었다.

강성태를 본 여중생이 말을 걸어볼 욕심에 다가와서 빵을 추가로 주문한 게 전부여서 주방이 바쁘지도 않았다.

“허니 브레드는 서비스로 할게.”

“왜요?”

“오랜만에 본 기념? 그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적당하게 5분쯤 말을 받아주었을 때 허니버터 브레드가 나왔다.

서비스로 제공한 빵을 받고도 오히려 서운한 표정을 지은 여중생이 쟁반을 붙들다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요….”

“뭔데?”

난처한 표정으로 여중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서비스라고 정한 거라 빵값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강성태의 눈을 본 여중생이 용기를 내듯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언니랑 썸타는 거, 그런 거예요?”

“매니저님하고 나랑? 아니!”

어렵게 건넨 여중생의 질문을 이은주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받아주었다.

뭐가 그렇게 안심될까.

다행이란 얼굴로 돌아서는 여중생을 이은주가 재미있다는 웃음으로 보았다.

“다미 이야기하면 실망이 클까요?”

어깨를 들썩인 것으로 답을 대신한 강성태는 커피를 들고 다용도실로 돌아섰다.

“문 열어드릴게요.”

강성태를 위해 문을 열어준 이은주는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닫았다.

다용도실 내부 역시 깨끗해서 강성태가 자리를 비웠다는 표시가 전혀 없었다.

바깥일을 대강 정리했으니까 이제는 밀린 연락을 마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매를 맞을 시간이었다.

장숙경을 떠올린 강성태가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진동이 있었다.

“여보세요?”

-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혹시 잊어버린 건 아닌가 싶어서 먼저 했네.

“밀린 일들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전화하려던 참입니다.”

- 괜찮다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네.

“오늘은 그렇고, 내일쯤 시간이 어떠십니까?”

- 편한 시간을 정해주게.

이두안이 무조건 일정에 맞추겠다는 제안을 하는 날이 있다니, 가볍게 웃은 강성태는 방지병원에 들를 시간을 얼추 계산해 보았다.

“오전에 일찍 뵙는 건 어떻습니까?”

- 그렇다면 조식을 함께하지. 7시 어떤가?

“그 시간에 호텔로 가면 됩니까?”

- 차를 보낼 테니 그걸 이용해. 6시 20분까지 카페 앞에 도착할 수 있게 하지.

“내일 뵙겠습니다.”

이두안과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장숙경의 번호를 찾아 놓고 숨을 두 번쯤 골랐다.

국제전화 요금이 비싸서 전화를 못 했다는 거짓말로 버틸 셈이었다.

각오를 마친 강성태가 통화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울렸다.

- 여보세요?

“이모, 저 성태요.”

- 그래, 성태야. 어디야?

얼마나 독이 올랐으면 이럴까?

태어나 처음이지 싶을 정도로 나긋나긋한 장숙경의 음성이 들려와서 강성태는 오히려 겁이 덜컥 올라왔다.

“이모, 저…….”

- 지금 어디니?

“지금 카페요. 그러니까….”

- 피곤할 텐데 좀 쉬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장숙경의 응대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여자친구에게 이야기 다 들었어. 안호상 원장님과도 통화해서 점심 함께 먹기로 했고.

“예?”

- 통화했다는 말 못 들었어?

“예.”

아예 얼이 빠진 강성태가 멍한 대답을 내놓았을 때였다.

통화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는 문자가 울리면서 액정에 안다미의 이름이 올라왔다.

- 성태야. 이모 이제 아무 걱정 안 해. 그러니까 이모한테 전화할 시간 있으면 병원에 있는 의사 선생한테 해. 알았지? 끊는다.

세상 행복한 장숙경의 음성을 끝으로 실제로 통화가 끝났다.

강성태는 곧바로 안다미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성태 씨?

“네. 혹시 이모랑 통화하셨어요?”

- 그게 아니라 민정 씨가 응급실에 왔었어요. 이모님이 병원에 알아보라고 하셨었나 봐요.

“미안합니다.”

- 아니에요. 그 덕분에 연락처 받았고, 아빠가 전화 직접 하셨어요. 점심 함께하기로 했다던데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됩니다.”

- 뭐예요, 서운하게? 아빠랑 나랑 얼마나 기대하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아빠가 성태 씨 통해서 이모님 전화번호 좀 알아보든가, 아니면 약속을 잡으라고 그러셨었거든요. 점심 먹는 거 부담스러워요? 너무 이른가?

“그런 건 아닙니다.”

기분 좋게 웃는 안다미의 웃음이 수화기를 타고 건너왔다.

- 키란 씨는 점심부터 죽 먹기 시작했어요. 언제 와요?

“이따 밤에 갈까 합니다.”

- 끝나고 같이 나가면 되겠다. 야식 먹어요, 우리.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기가 막힌 얼굴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최치곤에게도 전화를 하지 않는다 싶었더니 아예 김민정을 병원에 보내서 실제로 멕시코로 출장 간 적이 있는지를 확인했던 모양이었다.

‘집요해.’

네팔에서 잠적한 죄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안다미를 찾아갈 줄은 몰랐다.

게다가 상처가 대강 나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멕시코로 출국할 때처럼 몸이 엉망이었으면 진짜 답이 없을 뻔했다.

하나씩 주변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듯싶어서 강성태가 옅게 웃을 때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다시 손안에서 울었다.

“여보세요?”

- 김정훈입니다, 형님. 지금 어디십니까?

느긋하게 받은 전화의 너머에서 급한 김정훈의 음성이 달려들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 조덕진 형님이 지방 형님들하고 태완이 형님 병문안을 오겠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형님?

잠시 다용도실의 문을 보았던 강성태는 각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갈 테니까 그때까지 병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그건 할 수 있어?”

- 예, 형님.

“30분이면 갈 거다.”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바로 다용도실을 나섰다.

서성기로 부족하다면 대가리가 꺾일 때까지 얼마든지 두들겨 주마.

홀로 나선 강성태가 문을 닫자 통화 내용에 긴장한 다용도실이 무거운 침묵을 품은 채 숨죽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