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 18화
국제전화가 걸려왔다면 현지에서 급하게 연락했다는 의미였다.
혹시 나쁜 소식이면 어떻게 하지?
잔뜩 긴장한 안다미가 마른 침을 삼킬 때였다.
- 여보세요? 다미 씨?
잡음 묻은 저 건너편에서 강성태의 음성이 들렸다.
- 여보세요? 들리세요?
“들려요! 성태 씨! 저 다미예요!”
안다미를 지켜보던 안호상의 목이 불쑥 올라왔다.
“괜찮은 거예요? 어디에요? 다친 곳은 없어요? 키란 씨는요?”
숨 가쁘게 쏟아낸 안다미의 질문이 건너간 뒤였다.
- 나는 괜찮습니다. 키란은 좀 더 지켜봐야 한답니다. 걱정할까 봐 전화한 겁니다.
강성태가 전해주는 상황을 들은 안다미는 세상 전체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느낌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서야 안다미는 안절부절못하는 안호상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 성태 씨예요. 걱정할까 봐 전화했대요. 성태 씨는 괜찮은데 동료가 위험한가 봐요.”
“내가 간다고 그래. 내가 가서 봐준다고.”
안호상은 저렇게라도 해서 미안했던 마음을 갚고 싶은 모양이었다.
“성태 씨. 아빠가 가서 키란 씨를 살피시겠대요.”
- 그렇지 않아도 가능하다면 한국으로 데려갈 생각입니다. 그때 부탁드릴게요.
“언제 와요?”
- 봐서 전화 드릴게요. 다미 씨는 괜찮은 거죠?
어떤 일에도 냉정하던 안다미였는데 멕시코에 다녀오고 나서는 이상하리만치 자주 눈물을 보였다.
“여기는 다 괜찮아요. 그리고 아빠가 정말 많이 미안해하세요.”
- 아버님 잘못이 아닌데요. 그런 생각하지 마시라고 전해주세요.
전화를 마치는 느낌이 들자 안다미는 마음이 급해졌다.
“성태 씨? 정말 괜찮은 거죠? 돌아올 때까지 아무 일 없는 거 맞죠? 아니면 아빠랑 내가 갈게요. 우리가 특급 호텔 예약해서 가면 되잖아요?”
- 그랬다가 잘못되면 아버님 앞에서 총을 쏘게 될지도 모릅니다. 금방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또 전화 드릴게요.
길지 않은 통화가 끝났다.
스마트폰을 내린 안다미는 자석에 끌린 것처럼 움직여 안호상의 품에 안겼다.
“잘됐다. 정말 잘됐어. 고맙다.”
안호상 역시 기쁨은 안다미와 다르지 않은 눈치였다.
그는 안다미에게 빤한 통화 내용을 다시 들었고, 이어 강성태의 목소리에 기운은 담겨 있었는지, 혹시 위협받아서 전화한 느낌이 아닌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빠. 성태 씨는 위협당할 남자는 아니에요.”
반쯤 여유가 생긴 안다미의 대꾸를 들은 안호상이 눈꼬리를 늘이며 웃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안다미는 상체를 기울여 주방을 들여다보았다.
“냄비 타요!”
라면을 끓이기 위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냄비가 노린내를 피워내고 있었다.
**
김진용은 의식을 찾았다.
이병렬은 강성태가 나간 병실을 서달수와 함께 사용했고, 최치곤은 김진용의 옆자리로 옮겼다.
한번 외출해서 그런가, 이병렬은 병원 생활이 갑갑해 자꾸만 몸을 뒤틀었고, 최치곤은 강성태를 염려하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샌드위치를 먹어댔다.
“너는 미친 거 아니냐? 네가 샌드위치를 먹는 거랑 성태가 무사히 돌아오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걸 그렇게 처먹어?”
“기도하는 심정입니다, 형님. 정말 힘들 때나 배고플 때 제가 먹는 샌드위치의 영양가가 전해졌으면 싶어서 그렇습니다.”
이병렬이 한숨을 내쉬게 한 최치곤의 답이었다.
샌드위치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병렬은 병원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밀어낸 채 세끼를 모두 주문해서 해결했다.
서달수와 함께 아침을 해결한 이병렬이 휠체어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였다.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김정훈이 들어섰다.
“식사하셨습니까, 형님?”
“됐으니까 앉아.”
고개를 숙여 인사한 김정훈이 이병렬의 맞은편에 앉자 서달수가 믹스커피를 담은 종이컵을 놓아주었다.
“무슨 일이야?”
“호남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형님.”
종이컵을 들던 이병렬은 답답한 모양으로 입맛을 다셨다.
“성태 형님이 병원에 안 계시다는 말이 돌고, 전하기는 죄송한데…….”
“그냥 해. 뭐라는데?”
“성태 형님에 관한 소문이 사실은 우리끼리 지어낸 거라는 말도 돕니다. 입단속을 워낙 확실하게 시켜서 아무리 물어봐도 들은 게 없어서 더 그런 모양입니다. 그리고 형님께서 성태 형님을 숨긴 거란 말도 번지고 있습니다.”
“내가 보스를 왜 숨겨?”
“억지로 퍼트린 소문이 들통날까 봐 그랬답니다.”
웃음을 터트렸던 이병렬이 옆구리를 손으로 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앞마이냐?”
“그게 좀 이상합니다, 형님. 삼합회가 우리를 치는 식구들에게 10억씩 준다는 말이 돌아서 아래쪽 식구들이 들썩들썩하고, 저기….”
“이제 와서 못 할 말이 뭐가 있어?”
“성태 형님과 형님을 해결한 조직에게는 30억을 준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미친 새끼들.”
이병렬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투로 웃었다.
“내가 세 놈한테 칼 맞으면 90억이고, 열 놈한테 당하면 300억이네. 가서 한 백 명 모아서 오라고 해라. 그럼 얼마냐?”
기가 막힌 대꾸를 내놓은 이병렬이 커피를 마셨다.
김종수를 두들기며 생긴 상처 탓에 종이컵을 잡은 손바닥 안쪽에 꿰맨 자리가 여럿 보였다.
“태완이 형님은? 그 정도면 태완이 형님도 위험한 거 아니냐?”
“태완이 형님은 고문으로 물러나셨으니 성태 형님과 형님만 해결하면 다른 말씀 안 할 거라고 여기는 눈치입니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답이어서 이병렬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너는 그런 말을 어디에서 들었어?”
그런 뒤에 날카로운 눈으로 김정훈에게 질문을 건넸다.
“영권이한테 자꾸 입질이 들어옵니다, 형님. 종수 형님 해결하신 밤에 제가 영권이 만나서 다부지게 잡도리해두었더니 말이 들어오는 족족 제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형님.”
대꾸를 들은 이병렬은 픽 웃었다.
김종수를 처리한 게 정영권에게는 제법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영권이한테 가장 찝쩍대는 놈이 누구냐?”
“대전 조덕진 형님입니다.”
“병신. 또?”
“일단 덕진이 형님이 움직이는 거 같고, 다른 쪽은 영등포 식구들 뒤져서 성태 형님 뒤를 파는 눈치입니다.”
돌아가는 꼴을 대강 짐작한 이병렬은 생각을 정리하는 투로 종이컵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끌었다.
잠시 뒤였다.
“태완이 형님 다치시는 일 없게 애들 보강해. 다른 놈들이 눈치 못 채야 보강한 의미가 있으니까 바깥에 보이지 않게 깔아.”
“예, 형님.”
“영권이 잠깐 오라고 해라. 5시쯤.”
“알겠습니다, 형님.”
그 뒤로 클럽 운영과 김종수 회사의 관리에 관해 몇 가지를 의논한 뒤에 김정훈은 병실을 나섰다.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계속 이 지랄일 텐데, 뭔가 한 방이 필요하겠다.”
김정훈이 나간 병실에서 이병렬은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있던 이두안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이륙을 확인하고 공항을 빠져나온 길입니다. 미스터 강의 출국이 무사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고생했네.”
- 이번 일로 정부 파와 카르텔 파로 확실하게 나뉘면서 가페 내부에서 분쟁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이두안에게 버트의 보고가 이어졌다.
-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세타스 카르텔에서 농민들에게 쌀과 위로금, 의복을 지급하면서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페만 확실하게 우리 쪽으로 돌아온다면 반쯤 해결됐다고 봐야지.”
- 무엇보다 시날로 후아스가 죽은 후폭풍이 대단합니다.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는 데다 따르던 가페 대원들이 전부 죽는 바람에 세타스 카르텔이 급하게 대원을 보강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돈을 아끼지 마.”
- 미스터 강의 구출이라는 명분이 있어서 가페 내부도 회장님 편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기대하지 못했던 큰 수확입니다.
몇 가지 현지 상황을 더 점검한 이두안은 통화를 마친 뒤에 스마트폰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버트의 의견대로 기대하지 못했던 큰 수확이었다.
가장 큰 골칫거리인 시날로 후아스와 그의 대원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줄은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이두안은 몸을 돌려 버튼을 눌렀다.
비서는 책상에 걸터앉은 이두안의 모습에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미스터 강이 입국하는 데 번거로운 일이 없도록 다시 한 번 세부 사항을 점검해. 병원에도 확실하고 연락해 두고.”
“알겠습니다.”
“오늘 오후 일정은 전부 취소해.”
“예.”
책상에 걸터앉은 모습도 그렇지만,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라는 지시에 비서는 진짜로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그는 이두안의 냉정한 눈을 보고는 급하게 고개를 숙인 뒤에 집무실을 나섰다.
**
안다미가 출근하고 사흘이 지난 새벽 4시 10분쯤이었다.
서라대학병원 응급실 앞에 평소보다 훨씬 많은 의료진이 나와 있었다.
앰뷸런스가 도착한 건 4시 13분쯤이었다.
문이 열리자 의료진이 달려들어 환자를 이동용 침대에 옮겼고, 곧바로 응급실 안으로 달렸다.
의료팀이 응급실에 들어간 뒤였다.
암 스프린트를 감싼 왼팔을 목 끈에 걸친 강성태가 배낭을 메고 내렸다.
왈칵, 안다미가 달려들어 품에 안겼고, 입술에 힘을 꾹 준 채 눈시울이 붉어진 안호상이 그 뒤에서 강성태의 어깨를 다독였다.
“고맙네. 다미를 구해준 것도 고맙고, 이렇게 무사히 와 준 것도 고마워.”
“마음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그런 소리를 해? 무사히 돌아온 거 봤으니까 나는 환자에게 가보겠네. 좀 쉬고 나면 다미랑 해서 식사하세.”
그나마 짊어지고 있던 짐을 모두 털어낸 모양으로 안호상은 홀가분해진 얼굴이었다.
“먼저 들어가마. 피곤할 테니까 너무 귀찮게 하지 마.”
안다미에게 당부를 전한 안호상이 응급실로 들어갔다.
“어디 아픈 거 아니죠? 팔은 뭐래요?”
“부러졌다는데 이대로 두면 된답니다.”
“엑스레이랑 다시 찍어요. 그래야 안심할 거 같아요. 그 전에 잠깐만요.”
강성태의 손을 잡은 안다미는 응급실 건물 옆으로 움직여 중간의 문으로 들어섰다.
새벽이어서 아직 조명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복도는 어둠을 붙들고 있었다.
강성태는 안다미의 뜨거운 입술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혹시 다친 곳이 있을지 몰라서 조심하는 안다미를 오른팔로 힘껏 안았다.
**
밖으로 나갔던 서달수가 급한 동작으로 병실로 돌아왔다.
“덕진이 형님과 성기 형님이 뵙자고 오셨습니다. 몸수색해도 좋다고 하고, 또 두 분만 병실에 들어오겠답니다.”
“옷 좀 가져와라.”
“예, 형님.”
서달수가 가져온 셔츠와 정장을 입은 이병렬은 목을 천천히 좌우로 꺾었다.
“여차하면 받아버릴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예, 형님.”
들리던 소문이 한두 개가 아닌 상황에서 서성기와 조덕진이 찾아왔다면 전쟁을 하기 전에 담판을 짓자는 의미였다.
이병렬의 몸이 정상이 아닌 걸 알아서 하는 짓거리였다.
병실에서 주먹으로 붙어도 밀리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다는 뜻이고, 만남을 거절하면 몸수색까지 허용했는데 꼬리를 말았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이쪽 사기를 꺾을 게 틀림없었다.
“가서 모셔.”
고개를 숙인 뒤에 병실을 나서는 서달수를 보며 이병렬은 잠깐 강성태를 떠올렸다.
서달수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연장을 들지 않은 싸움이라면 시간은 벌어줄 수 있다.
악착같이 날뛰면 서성기와 조덕진 정도는 이병렬이 감당할 거다. 싸움을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보다 강성태가 지켜보고 있으면 좀 더 당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병실 문이 열리고 조덕진과 서성기가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많이 좋아졌네. 성기는 알지?”
룸살롱에서 보았던 모습과 달리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간 조덕진이 서성기를 가리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 앉자.”
마치 자신의 병실이라는 듯 서성기가 탁자를 가리켰다.
이병렬은 앉겠다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조덕진, 서성기와 함께 앉았다.
그 모습이 아니꼬운 모양으로 서성기가 야비한 웃음을 그리고 혀로 볼을 밀었는데 이병렬은 상관없다는 투로 고개를 돌렸다.
“커피 좀 주라.”
“됐고. 너는 좀 나가 있어.”
이병렬이 주문한 커피를 서성기가 막고는 서달수에게 엉뚱한 요구를 내놓았다.
“커피 줘.”
이병렬은 단번에 서성기의 요구를 밟았다.
픽 웃은 서성기는 대놓고 이병렬을 노려보았다.
“야, 이병렬. 운이 좋아서 강남 먹은 건 인정한다. 하늘이 도울 때가 있거든. 그런데 어쩌다 운이 돌아온 걸 믿고 너무 설치다가는 뒈지는 수가 있어. 알아?”
김진용이나 김정훈이 있었으면 말씀을 가려 하라며 대들었을 텐데 서달수는 그럴 정도는 아니었다.
“커피 드십시오, 형님.”
대신 종이컵을 가져와 서성기의 말을 뚝 잘랐다.
“그런데 이 새끼가?”
건수를 잡았다고 여긴 서성기가 서달수를 향해 눈알을 부라리는 순간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바깥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뭐지?
병실에 있던 네 사람은 동시에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