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 15화
쥐가 굴을 파고 나오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검지의 끝을 슬쩍 끼워서 흙을 떨군 강성태는 넓어진 숨구멍에 검지와 중지를 넣어 조금씩 흙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재수 없으면 뱀이나 부엉이가 달려들 정도로 들쥐와 비슷한 행동이어서 적이 알아차리기도 그만큼 어려웠다.
조금씩 아슬아슬하게 구덩이를 넓히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무리 밤이라 해도 두더지처럼 빛이 거의 없는 곳에 있다가 밖으로 나서면 시야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대략 40분에 걸쳐 입구를 넓힌 강성태는 마침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맑은 공기와 습기, 흔들리는 잎사귀, 벌레 울음,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부스럭대는 소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머리를 내민 강성태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선가 ‘왜 때려요?’ 하는 기계음이 터지며 거대한 망치가 머리를 때릴 듯한 착각도 들었다.
게임에서 머리를 얻어맞은 두더지는 다시 고개를 쳐들겠지만, 적에게 당한 강성태는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점이 달랐다.
소총을 꺼내 범위 안에 내려놓은 강성태는 바깥을 짚은 팔에 의지해 천천히 몸을 들어 올렸다.
빠르게 주변을 살폈으나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음은 키란의 차례였다.
그의 소총을 받아 옆에 내려놓은 강성태는 왼팔을 구덩이 아래로 내렸다.
부스럭.
구덩이에 넣은 왼손으로 주먹을 움켜쥔 강성태가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작은 소음이었으나 어떤 경우라도 확신이 들 때까지 경계하는 게 현명한 행동이었다.
정말 들쥐였을까?
주변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강성태가 구덩이 속에 쥐고 있던 주먹을 펴자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처럼 키란이 팔을 타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키란이 어깨를 붙드는 순간, 강성태는 허리를 쭉 펴서 단번에 구덩이 바깥으로 끌어냈다.
강성태의 옆에 쭈그린 키란은 한 마리 사슴이 된 모양으로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 옆에서 강성태는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날카롭게 의심되는 방향을 살폈다.
적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숨었다.
만약 시에라 마드레 산맥이 좁았다면 적의 매복을 염려해야 하지만, 이렇게 넓은 지역을 한정된 인원으로 수색하려면 길목을 지키는 방식을 택하기 마련이었다.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에 매복을 두고 그 위쪽 능선에 저격수를 배치하기 좋았다.
‘가자.’
강성태는 주먹을 쥔 왼손을 들어서 목표를 향해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
짙게 내린 어둠에 의지해 움직여야 할 때였다.
강성태가 몸을 돌리자 소총을 오른쪽으로 내린 키란이 목을 감싸며 등에 매달렸다.
부스럭.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 소리가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양쪽 팔을 돌려 키란의 다리를 옆구리에 끼운 강성태는 소총의 총구를 아래로 향한 채 걸음을 옮겼다.
소리가 나지 않게 걷는 건 강성태의 몫, 주변을 경계하는 건 키란의 책임이었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강성태는 시날로 후아스와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달려왔던 길을 거슬러 가듯 곧장 능선의 위를 향해 움직였다.
악착같이 숨소리를 줄여야 했고, 혹여 소리가 나거나 미끄러지는 일을 막기 위해 느릿하게 걸어야 했다.
경사가 심한 길은 지그재그로 돌아야 해서 힘은 힘대로 더 들었고, 진행은 그만큼 더뎠다.
강성태가 아래에 집중했다면, 키란은 연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소리와 움직임에 집중했다.
“흐으. 흐으.”
거칠게 나오는 숨소리를 삼키며 강성태가 능선을 올랐을 때였다.
툭툭.
키란의 손이 강성태의 목덜미를 두들겼다.
그대로 내려앉은 강성태는 숨을 죽인 채 키란의 총구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지?
어둠을 덮어서 검은색으로 보이는 잎사귀 틈을 살피던 강성태는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염병할 사슴 새끼!
하기는, 숨소리, 발자국, 그리고 땀과 화약 냄새에 잠이 깬 사슴 역시 강성태와 키란을 욕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놈이 괴팍한 소리로 울부짖으면 근처에 있던 적들이 몰려온다.
‘가라. 제발 조용하게 가.’
자세를 낮춘 탓에 허리와 허벅지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달려들었지만, 강성태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슴은 정말 감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검은색으로 보이는 잎사귀 사이로 보일 강성태와 키란의 정체가 궁금했거나.
꽤 오래도록 이쪽을 바라보던 사슴이 흥미를 잃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는 숲으로 사라졌다.
발정기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키란의 무게까지 더해져 허리 쪽의 상처가 다시 찢어지는 모양이었다. 생살이 찢기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강성태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사슴이 사라지고도 다시 1분쯤 지난 뒤였다.
툭툭.
키란의 손짓이 움직여도 좋다는 신호를 목덜미에 보냈다.
‘끄응.’
허리와 다리를 펴는 그 짧은 순간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고, 코에서 단내가 올랐으며, 낮에 깨물었던 입안에서 비릿한 핏물이 쏟아졌다.
거의 다 왔다.
능선의 위쪽에 올라간 강성태는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의 10미터쯤 아래를 타고 걸었다.
**
비행기에 탑승한 직후에 안다미와 동료 두 명은 몸과 마음을 지탱하던 긴장이 탁 풀렸고, 활주로를 이륙해서 저 아래로 도시의 불빛이 보일 때는 마취제를 투여한 것처럼 의식이 흔들렸다.
적당한 온도, 몸을 덮어주는 담요, 뒤로 젖힌 의자, 음료, 물, 커피,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특히 열이 잡힌 이승수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입으로 음식을 밀어 넣는 인턴 시절의 모습마저 보였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사이, 안다미를 조심하는 모습으로 깔끔한 슈트 차림의 비서가 다가왔다. 세미 모히칸 스타일로 다듬은 머리와 미남형 얼굴이 제법 잘 어울렸다.
“이번 파견에서 당했던 고충에 대한 변제, 그리고 비밀유지약정서입니다.”
능숙한 우리말 설명에 졸던 이승수와 박재구가 계약서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뒤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한 사람당 10억 원을 준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대신 업무와 관련해 기밀을 누설하면 그에 따른 배상, 위약금을 지불해야 하는 조건이 달립니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들고 있던 펜으로 약정서의 중간에 동그라미를 치며 배상과 위약금을 강조했다.
“세 분은 도착과 동시에 현지 사정이 좋지 않아서 바로 귀국하신 겁니다. 숙소는 호텔에서 지내셨으며, 구타나 폭행을 비롯한 납치 등 위협적인 상황을 전혀 겪은 적 없었습니다.”
“실례지만, 변호사세요?”
“아!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안다미의 질문에 슈트 차림의 남자가 명함을 꺼내 세 사람 앞에 놓아주었다.
“나는 성태 씨와 키란 씨가 돌아오기 전에는 이 약정서에 사인할 수 없어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의 생사를 알지 못하면 외교부와 언론사를 찾아가서라도 이 일을 공론화시킬 거예요.”
“뜻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공론화되면 그 두 분이 정말 위험해집니다.”
“무슨 뜻이죠?”
“첫 번째로 멕시코 정부는 세 분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공론화되는 시점에 구조작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협박인가요?”
“협조요청입니다.”
미남형의 변호사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표현 그대로 냉정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안다미에게 답했다.
“한 분이라도 약정서에 사인하지 않으면 남은 두 분의 계약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여기 보이시죠? 연대 보증의 개념입니다.”
“이 약정서가 약점이 되리란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사인한 뒤에 약정서를 공개하면 뒷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죠?”
“훌륭한 지적입니다. 다만, 앞으로 이런 종류의 서류를 보시면 항목을 먼저 꼼꼼하게 검토하기를 권합니다. 여기, 파견 중 보고 들은 사항에 관해 비밀을 유지하며 파견업무에 관련해 비방하는 발언을 할 수 없다. 답이 됐습니까?”
냉랭한 안다미를 보며 변호사가 말을 이었다.
“멕시코 정부가 부인하고, 객관적인 증명을 할 수 없어서 여러분의 진술은 비방으로 간주됩니다.”
“그래도 계약을 안 하겠다면요?”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하는 순간, 구조대가 철수합니다.”
안다미와 변호사가 팽팽한 대화를 주고받은 뒤였다.
“우리끼리 잠시 의논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죠. 결정 나면 직원을 통해 알려주십시오.”
박재구의 요청을 받은 변호사가 세련된 태도로 몸을 일으키고는 앞쪽으로 움직였다.
“안 선생, 왜 이렇게 뾰족해?”
“우리를 구해준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 그걸 비밀로 하라는데 어떻게 사인을 해?”
“사인을 안 하면 구조대를 철수시킨다잖아.”
“돈이 그렇게 좋니?”
“야, 안 선생?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박재구가 볼멘소리로 안다미에게 항변하면서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자! 자! 우리 12시간 가야 한다면서? 일단 자자. 자고 일어나서 의논해. 그동안 각자 생각도 하고.”
이승수가 다독이면서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실제로 이승수가 모포를 가슴까지 덮으며 눕자 서운한 표정이던 박재구도 모르겠다는 태도로 자리에 누웠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린 안다미는 의자를 눕히지 않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한 건지 모르겠어요, 성태 씨.’
안다미는 한국으로 향하는 이 순간이 강성태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
한 시간을 넘도록 걸은 강성태는 키란을 내려놓고 그 옆에 누웠다.
시에라 마드레 산맥 위로 쏟아질 듯 가득한 별이 다음 장면을 기대하는 관객들처럼 강성태와 키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가 뜨기 전에 나가야 한다.
그러니 이렇게 쉴 수 있는 여유가 길어야 5분 안쪽이라는 의미였다.
만약 동이 어슴푸레 밝을 때까지 출구에 도착하지 못하면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서 밤을 기다려야 했다.
마실 물, 배를 채워줄 음식, 그리고 태연한 척 버티지만, 점점 힘들어하는 키란의 치료가 급했다.
그러고 보면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자기네 말로 기도하는데 그걸 달과 별, 너희들은 어떻게 모두 알아 듣냐?
멕시코에서 한국말로 부탁해서 미안한데 빠져나갈 방법 좀 만들어주라.
하늘을 향해 픽 웃은 강성태는 소리 한 조각 없이 상체를 세웠다.
‘가자.’
신호를 보낸 강성태가 자세를 낮추자 키란이 등에 매달렸다.
‘끄응.’
강성태는 이를 악물며 몸을 세웠다.
키란이 지닌 삶의 무게가 등과 허리, 다리를 짓눌렀으나 강성태는 묵묵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차분하려고 해도 강성태는 자꾸만 조바심이 올라왔다.
등에 매달린 키란의 몸이 서늘하게 느껴졌고, 얼굴 옆으로 뿜어지는 숨결이 약했으며, 소총의 총구가 자꾸만 쳐졌기 때문이었다.
표시 내지 않지만, 키란은 점점 한계에 가까워지는 게 분명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임무인 줄 알면서도 달려와 공항의 기둥 뒤에서 기다렸던 동료, 안다미를 지키고자 뒤따르는 적을 향해 달려준 책임감 강한 남자였다.
끈덕지게 걸음을 옮기는 강성태와 키란을 타원형으로 이동한 별들이 갑갑한 느낌으로 내려다보았다.
또다시 한 시간 이상을 걸은 강성태는 완연하게 기울어진 달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아래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었다.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 아직 어둠을 덮어쓴 능선 아래를 돌아볼 때였다.
멀리서 엔진음과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강성태가 자세를 낮췄고, 말하지 않았으나 등에서 내린 키란이 소총을 앞으로 돌렸다.
걱정하던 것보다 키란은 더 힘겨운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성태보다 그가 먼저 소리를 알아챘어야 했다.
몸을 낮춘 강성태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키란을 돌아보았다.
‘위험합니다.’
눈빛을 알아본 키란이 고개를 저었다.
알지. 위험한 거.
이 어두운 밤에 달리는 차를 세우려면 방아쇠를 당겨야 하고, 그러면 매복한 놈들이 모두 달려든다는 것도.
엔진음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서 강성태는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습기를 머금은 어둠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동차 불빛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는 대략 3킬로미터쯤 됐다.
저쪽 어딘가에 세워두었던 차량이거나, 움막 근처에 집결했던 병력 일부가 입구를 향해 이동하는 걸 수도 있었다.
트럭이면 답 없고, 지프라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바닥에서부터 헤드라이트의 높이를 계산하면 다행히 지프일 확률이 높았다.
자세를 낮춘 강성태는 각오한 표정으로 키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함정일 수 있습니다.”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숨긴 저격수와 매복조가 지프를 노려보며 강성태가 튀어나오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얌전히 몸을 숨기면 출혈 탓인지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키란이 위험했다.
그사이 엔진 소리가 훨씬 더 가까이에서 들렸다.
“지프를 타고 간다. 달리는 동안, 사격 똑바로 해.”
엔진음에 기댄 강성태가 뜻을 전했고,
“알겠습니다.”
결정한 일이라고 여긴 키란이 힘이 부족한 음성으로 답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