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 12화
제5장. 어디 가?
등으로 돌린 코흐 G3 소총의 총구가 왼쪽 어깨 위로 불쑥 올라왔고, 앞으로는 MP5 소총을 안았다.
쩔걱. 쩔걱.
계곡처럼 흐르는 길을 좌우로 번갈아 밟으며 내려간 강성태는 훌쩍 몸을 날려 능선의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좌우로 상체가 흔들릴 만큼 힘껏 달리는 길이었다.
촤악. 촤아악.
얼굴과 어깨, 가슴으로 달려든 나뭇가지가 거칠게 뒤로 튀어나갔고, 발에 밟힌 작은 돌들이 자각거리며 비명을 토해냈다.
“허억. 헉. 허억. 헉.”
방탄조끼에 걸어둔 탄창, 허리에 달린 쿠크리와 권총, 발목에 고정한 권총이 적당히 하라고 외쳤으나 강성태는 또다시 불쑥 튀어나온 돌을 밟고 훌쩍 뛰었다.
내려서는 탄력을 이용해 앞으로 뛰어든 강성태는 뾰족하게 뻗은 가지들을 피해 자세를 바싹 낮춰 달렸다.
‘키란! 버텨! 내가 간다!’
독한 눈빛으로 달리는 길에서 강성태는 시날로 후아스를 떠올렸다.
포악하다는 설명에 걸맞는 인상이었다.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여본 인간은 평범하게 찌르거나 방아쇠를 당겨 죽이는 것에는 만족하지 못한다.
쩔걱. 쩔걱.
시날로 후아스는 강성태보다 대략 2킬로미터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가 먼저 키란과 안다미 일행을 따라잡으면 강성태는 처참하게 죽은 그들의 시체를 봐야 했다.
“헉. 헉.”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강성태의 걸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2킬로미터에 달하는 시날로 후아스와의 간극을 줄여야 했다.
능선을 따라 달리는 왼편은 오르막이었고, 아래쪽은 산맥의 경사가 그대로 드러난 낭떠러지였다. 한 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저 아래로 떨어져 어떤 꼴이 될지 모른다.
쩔걱. 쩔걱.
그런 길을 강성태는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오른편으로 솟아오른 태양이 비스듬하게 나무를 파고들어 강성태가 달리는 앞길에 조각 난 햇살을 뿌려 놓는 시간이었다.
**
길을 열던 키란이 멈칫하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의아해하던 그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며 안다미와 동료 두 사람은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앞 능선에 유난히 키가 큰 나무가 보이십니까?”
비장하게 보이는 눈매를 돌린 키란이 왼손 검지로 건너편 능선을 가리켰다.
키를 맞춘 듯 서 있는 나무 틈에서 실제로 불쑥 올라온 한 그루 나무가 안다미와 동료들의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못했다.
“저 나무까지 가십시오. 그곳을 지나 왼쪽으로 돌면 길이 나옵니다. 버트, 기억하세요. 버트 그레인.”
키란은 입고 있던 방탄조끼를 왼손을 들춰 보였다.
“이걸 입고, 캐주얼한 복장으로 서 있는 미국인 지휘자가 보이면 우리 편, 버트 그레인입니다. 그를 찾으시면 됩니다.”
말을 마친 키란은 자세를 낮춰 발목에 걸어두었던 권총을 뽑아 안다미에게 내밀었다.
“쏠 줄 몰라요.”
“여기 이 핀을 이렇게 돌리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갑니다.”
“왜 이러는 거예요?”
“추적팀이 전력질주로 따라오고 있습니다. 구조대가 입구까지 와 있어서 30분만 시간을 벌면 산맥을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차라리 서둘러 가면 어때요?”
뒤를 돌아보았던 키란이 고개를 저었다.
“가페 출신이라 15분이면 잡힙니다. 무슨 소리가 나든 저 나무를 향해 똑바로 가고, 그곳을 지나 왼편으로 돌아 나오는 길로 가십시오. 복장을 보면 압니다. 군복은 멕시코 카르텔, 캐주얼은 버트 그레인.”
안다미와 동료 의사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키란은 분명하게 듣는 눈치였다.
짧게 뒤를 돌아보았던 키란의 표정이 더욱 매섭게 바뀌었다.
“가십시오.”
“우리가 먼저 출발하게 되면 당신은 어떻게 해요? 성태 씨는요?”
“갇혀 있던 장소에 갈 때까지 여섯 시간을 달렸습니다. 형님과 만나면 길게 돌아서 그 길로 빠져나가면 됩니다.”
여섯 시간을 달려서 온 거라고?
시간을 들은 안다미는 손으로 입을 가렸고, 동료 두 사람은 혹시 시간을 잘못 들었나 싶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키란입니다. 햇살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출발하십시오.”
“키란. 반드시 돌아오세요. 성태 씨와 함께요.”
“형님과 만난다면 저런 인간들 따위는 절대 길을 막지 못합니다.”
키란이 다부지게 뜻을 전한 뒤였다.
“고맙습니다.”
몸을 돌리는 그에게 이승수와 박재구가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키란,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두 사람의 뒤에서 안다미가 울컥한 눈으로 인사를 건넸을 때,
“성태 형님. 키란 동생. 함께.”
세 사람을 향해 키란이 우리말로 각오를 전하고는 지금까지 지나왔던 방향을 향해 달렸다.
쩔걱. 쩔걱.
그의 몸에 매달린 무기들이 울리는 소리가 벌써 저 위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안다미는 권총이 이렇게나 무겁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안전핀을 돌리고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라는 사실까지 실감하자 무게가 배로 늘어난 것처럼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안 선생. 그거 내가 들고 갈게.”
손을 내민 박재구에게 안다미는 순순히 권총을 건넸다.
“가자, 안 선생. 저렇게까지 나서주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퍼지거나 따라 잡히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박재구가 나섰고, 이승수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따르면서 안다미도 걸음을 옮겼다.
서두른다고 하지만, 키란이 사라지자 마치 어미를 잃은 어린 사슴처럼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공포가 세 사람을 휩쓸었다.
**
시날로 후아스는 볼을 지나 귓불과 목덜미까지 붉게 물든 채 대원들을 재촉했다.
“달려서 너희의 강인한 몸으로 계집년의 몸뚱이를 짓밟아!”
“후아!”
그가 잔인한 말을 으르렁거리자 함께 달리던 일곱 명이 탄성 같은 고함을 터트렸다.
“인질들의 눈알을 파내고 목을 나무에 걸어주자! 그런 뒤에 미쳐 날뛰는 강성태와 가난뱅이 네팔 놈의 목을 잘라서 돌아가자!”
“후아-아!”
코흐 G3와 중기관총 수준의 바렛을 들고 뛰면 죽고 싶다는 욕망이 생길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따른다.
시날로 후아스가 연달아 잔인한 말을 뱉어대는 목적은 단순했고, 결과는 분명해서, 대원들이 달리는 동안 견뎌야 하는 고통을 강성태와 키란, 인질들에 대한 증오로 바꾸고 있었다.
차각. 차각.
“인질들은 분명 이리로 갔다! 민간인의 걸음을 따라가지 못하면 우리는 가페가 아니다!”
“하흑. 하흑.”
시날로 후아스의 음성에 묻은 쇳소리가 거친 대원들의 숨소리를 누르며 능선을 따라 흘렀다.
“가자! 동양인 계집의 몸이 너희를 기다린다!”
“하흐-아!”
내려가는 길에 들어선 시날로 후아스가 속도를 높였고, 일곱 대원이 줄줄이 그 뒤를 따라 달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
키란은 미친 사람처럼 달렸다.
얼굴을 향해 달려드는 나뭇가지와 급하게 올라가는 경사도 그의 속도를 늦추지는 못했다.
쩔걱. 쩔걱.
상체를 좌우로 비틀어 커다란 가지를 빠져나간 키란은 왔던 방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MP5의 총소리를 들을 때만 해도 가페 대원들이 그쪽으로 향하리라 기대했었다.
아마 여섯 명쯤 잡은 느낌이었다.
강성태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다 좋았다. 그런데 가페 대원들이 달려오는 소리를 듣자 적의 지휘관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떠올렸고, 이어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키란이 시간을 버는 동안 강성태가 빙 돌아서 인질들을 인솔하면 임무 끝이다.
시날로 후아스?
‘성태 형님과 붙으면 넌 그냥 뒈진 목숨이야!’
입술을 꾹 다문 키란은 10미터라도 더 빠르게 달려가고자 악착같이 능선을 타고 올랐다.
한국 남자, 강성태는 머리를 감싸고 축복을 불어넣어 준 것에 감사하며 모친의 거친 발에 이마를 대고 인사한 남자였다.
“허억. 헉.”
키란의 용병 학교 수업료를 위해 몽땅 팔아치운 염소를 몰래 사서 모친에게 선물하고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남자, 선발 시험에서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도 키란을 이끌어주느라 중위권으로 통과한 남자였다.
영어가 아쉬운 키란을 위해 밤을 새우며 단어를 알려준 남자, Father(파더)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키란에게 본인도 그렇다며 웃어준 남자였다.
영국 특수부대에서 네팔 대원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쿠크리를 뽑아 들었던 남자, 열일곱 명의 영국 특수부대 덩치들을 고개 숙이게 한 진짜 남자였다.
‘형님! 키란이 막아냅니다! 돌아서 가세요!’
10미터, 아니 3미터라도 좀 더 빨리 달려가면 30초라도 일찍 적의 걸음을 막는다.
쩔걱. 쩔걱.
강성태는 멋진 여자를 만났다.
의사라고 들었다.
이렇게 달려가 적의 앞을 막으면 강성태는 아까 보았던 여자 의사와 행복할 수 있다.
“허억. 헉. 허억. 헉.”
키란의 지금 모습을 본다면 모친은 분명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다.
“끄으.”
급하게 올라가는 경사를 뛰어오르며 키란은 튀어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
강성태는 결국 능선을 올라 도로를 가로질러 다시 아래로 내달렸다.
가슴 앞으로 든 소총의 총구, 어깨로 불쑥 올라온 총구 탓에 멀리서 보았다면 뿔 달린 사슴이 불쑥 올라왔다가 산 아래를 향해 튀어간 것으로 오해하기 좋은 모습이었다.
적어도 1킬로미터는 줄였다.
“허흑. 허흑.”
힘겨움을 토해내는 다리, 허리에서 다시 올라오는 통증을 무시한 채 강성태는 악착같이 숲을 내달렸다.
키란! 그냥 가!
제발 함께 버트를 향해 가!
귀가 밝은 구르카 용병답게 키란은 시날로 후아스의 추적을 알아차릴 거다.
촤아악. 촤악.
달려드는 나뭇가지를 피해 고개를 돌리면서도 강성태는 더욱 빠르게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누군가 남아서 속도를 늦추는 건 도주의 기본이었다.
키란이 그걸 모를 리 없다.
1킬로미터 안쪽이다. 키란.
내가 상대할 테니 그냥 가!
강성태가 내리막의 끝에서 다시 능선을 향해 방향을 틀 때였다.
푸슈슝! 푸슝! 타다다당!
섬뜩한 총소리가 능선을 타고 골짜기에서 맴돌았다.
타다다당! 타당! 푸슈슝!
이를 악문 강성태가 더욱 무섭게 달릴 때였다.
터응! 터응! 콰으으응!
염려했던 바렛의 발사음과 수류탄 폭발 소리가 능선을 타고 달려들었다.
‘키란? 그 정도에 쓰러지는 건 아니지?’
불안하게 MP5의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적이 발사하는 코흐 G3의 총성도 없었다.
백병전이 벌어질 리 없으니 이 침묵이 의미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끄으응.”
한계를 넘어선 강성태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귀를 스치는 나뭇가지, 눈과 입을 달려드는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았고, 강력한 진통제를 맞은 것처럼 통증마저도 아스라이 사라졌다.
“하윽. 하윽.”
교전이 벌어진 덕분에 적들도 걸음을 멈췄으니 달리는 만큼 따라잡는다.
‘시날로 후아스! 마약 조직의 지휘관이 대단한 건 줄 아나 본데 너는 내가 반드시 목을 갈라준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달리는 강성태가 독기를 잔뜩 품는 순간이었다.
푸슈슝! 푸슝! 푸슈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총성이라고 느껴지는 소리가 들렸고, 멀어졌던 바람과 통증이 삽시간에 강성태에게 달려들었다.
“키란, 이 개새끼!”
욕을 뱉어낸 강성태는 짧은 내리막을 향해 몸을 던졌다.
**
대원 둘을 잃은 시날로 후아스는 살인의 욕망이 펄펄 감도는 눈을 검지와 중지로 가리켰다. 그런 뒤에 그는 손가락 두 개로 왼쪽, 다시 검지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둘은 왼편으로 돌고, 너는 오른쪽.’
바렛에 이어 수류탄을 던지고 조심스럽게 수색하는 과정에서 총알이 날아와 대원 한 명을 또 잃었다.
놀라고 분할 상황인데도 시날로 후아스는 눈과 입가에 잔인한 기대감을 걸었다.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짐작하면 부상을 당한 게 분명했다.
기고 기어서 움직이기는 했지만, 저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다시 총을 발사했다는 건 그만큼 상대방도 급하다는 의미였다.
‘강성태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어.’
야구공을 잡은 것처럼 손을 둥글게 만든 시날로 후아스는 구르카 용병이 있다고 짐작하는 방향을 향해 손목을 까딱였다.
수류탄을 던지라는 지시였다.
시날로 후아스를 제외한 네 명이 짐작하는 방향으로 수류탄을 던지고 나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면 돼먹지 않은 구르카 용병을 잡는다.
조심스럽게 위치를 찾아가는 대원 셋이 자리만 잡으면 시작이었다.
구르카 용병이 아래에 있어서 저쪽은 수류탄을 던지기도 어렵다. 이미 시날로 후아스의 대원들이 넓게 퍼져 있어서 구르카 용병이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 그곳을 향해 일제히 방아쇠를 당기면 더욱 쉽게 끝난다.
숲으로 사라진 대원들을 지켜보던 시날로 후아스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을 때였다.
“어디가?”
처음 듣는 외국어가 왼편에서 들렸다.
등골을 타고 일어난 소름이 머리카락으로 뻗은 시날로 후아스가 고개를 퍼뜩 돌렸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