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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 8화 (157/513)

8권 - 8화

유헌우와 얼굴을 붉혀가며 언성을 높인 끝에서 이병렬은 환자복 상의의 한쪽을 거칠게 잡아챘다.

“퇴원하겠습니다.”

“이병렬 씨?”

“원장님. 우리가 사는 게 장난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무식한 깡패 새끼들이라고 생각해서 무슨 말을 하든 우김질로 들리는가 본데 강성태가 멕시코 간 거요. 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물러날 수 없다며 상의를 잡아챈 이병렬의 가슴 붕대에서 피가 벌겋게 올라오고 있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들이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칼질할 생각을 하고요. 그걸 꺾지 못하면 지금까지 싸운 게 말짱 꽝으로 돌아갑니다. 그나마 그건 다행이죠. 재수 없으면 성태가 왔을 때 나! 저기 침대에 누운 진용이! 달수! 치곤이, 다 죽어 있을 거라고요.”

고개를 비튼 이병렬이 몸을 세웠다.

“바지 가져와!”

서달수가 급하게 옷장으로 움직이는 옆에서 김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이병렬을 눈에 담고 있었다.

보는 눈이 많은 병실이었다. 그런데도 이병렬은 환자복 바지를 불쑥 내렸다. 그리고는 서달수가 가져온 바지를 잡아 악착같이 다리를 넣었다.

그 짧은 순간에 가슴의 붕대는 더 붉게 물들었고, 고통을 참느라 붉게 물든 얼굴에는 독기와 식은땀이 올라왔다.

“후.”

바지를 겨우 올린 이병렬은 서달수가 뒤에서 들고 있던 셔츠에 손을 넣었다.

“꼭 이병렬 씨가 가야 합니까?”

“강성태가 나한테 맡겼습니다. 그런 자리에 저기 정훈이만 보내면요. 시작부터 족보가 꼬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야 합니다. 내가 모시는 보스가 강성태고, 보스가 내게 맡긴 일입니다.”

억지로 셔츠에 팔을 넣은 이병렬이 볼을 씰룩이며 단추를 하나씩 잠갔다.

“후-.”

이번에는 유헌우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시간입니다.”

확인처럼 던진 유헌우의 다짐에 이병렬은 대꾸하지 않았다.

“신고하지 않고 치료하는 것과 지금 진통제를 사용하는 건 전혀 다른 일입니다. 더 큰 사고를 막으려 한다는 이병렬 씨의 말을 믿어보겠습니다.”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쉰 유헌우가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진통제와 항생제를 가져올 테니까 5분만 기다려요. 그건 그렇고…….”

이병렬의 바지 앞을 내려다본 유헌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힌 다음이었다.

“가만 보면 진짜 도라이야.”

이병렬의 혼잣말이 병실을 맴돌았다.

**

산을 하나 가로지른 뒤에 또다시 둥그렇게 말린 능선이 나타났다.

“키란!”

짧게 이름을 부른 것으로 의도를 전달한 강성태는 곧장 아래를 향해 뛰었다.

철컥.

숨이 턱에 찬 상황에서 소총을 앞으로 들면 아이 하나를 안고 달리는 듯한 무게감이 어깨와 팔에 매달린다.

달려드는 무게를 이겨내기 위해 강성태는 독한 눈으로 둥그렇게 말린 능선을 향해 달렸다.

아무리 세타스 카르텔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경비를 세우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말이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저격수를 무시한다면 당장 강성태와 키란의 머리가 조준경 안쪽에 가득 담길 수도 있었다.

촤악. 촥. 촤아악.

고작 능선을 십여 미터 내려서서 달리는 건데 얼굴과 몸을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허억. 허억.”

코로 들이마신 숨을 입으로 내쉰다.

장거리를 달릴 때 악착같이 지켜야 할 철칙이었다.

호흡이 엉기면 먼저 몸의 리듬이 깨지고 다음으로 집중력을 잃는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강성태는 의심되는 곳을 살폈다.

‘기다려!’

허리 부근의 상처에서 통증이 심하게 올라올 때 강성태는 악착같이 안다미를 떠올렸다.

남자 강성태를 인정해 달라며 사지로 달려간 여자, 고작 키스 몇 번과 따뜻하게 잡은 손을 믿고 3년을 변하지 않으리라 각오한 안다미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길이었다.

“허억! 허억!”

빙 돌아있는 능선을 타고 달린 강성태는 다시 곧게 뻗은 위쪽을 향해 뛰었다.

꾸르르륵.

키란이 내는 새소리가 시에라 마드레 산맥의 풍경에 젖어들었다.

**

이병렬은 서달수를 병원에 남겼다. 그리고는 김정훈과 함께 승용차의 뒷좌석에 올랐다.

이병렬을 향해 깊게 고개 숙인 덩치들이 뒤쪽에 세워둔 승용차와 승합차에 바쁘게 올라탄 다음이었다.

“출발해.”

김정훈의 지시와 동시에 승용차가 움직였다.

특별하게 길이 막히는 일이 없다면 방지병원에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만나기로 한 선배는?”

“대전 덕진이 형님입니다. 종수 형님이 연예인 관리를 하다 보니까 지방 식구들에게 베풀어주는 게 많아서 이런저런 인맥이 상당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병렬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앞을 보았다.

“여차하면 종수 끌어 내리고 강서구 광준이 형님을 세울 테니까 네가 뒤를 좀 봐 드려.”

“예, 형님.”

“영권이는?”

“영권이는 형님께서 직접 움직이셨다는 말 들으면 알아서 꺾어질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밤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때 단도리하겠습니다.”

몇 마디 나눈 이병렬이 앞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선릉역 방향으로 달리던 승용차가 유턴 신호를 받아 커다랗게 돌았다. 줄줄이 검은색 승용차가 뒤따랐고, 이어 신호가 잘렸는데도 승합차가 꼬리를 물고서 방향을 틀었다.

유턴과 동시에 오른쪽으로 빠져나간 승용차는 호텔 골목을 지나 골목 사거리에 멈췄다.

뒤따라 멈춘 승용차에서 우르르 덩치들이 내려 이병렬의 승용차를 둘러쌌고, 먼저 내린 김정훈이 트렁크 방향으로 돌아와서 문을 열었다.

이병렬이 내리자 둘러싼 덩치들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모시겠습니다, 형님.”

앞장선 김정훈을 본 룸살롱의 발렛 직원들이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비켜섰다.

룸살롱은 아치형 입구에서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는 구조였다.

김정훈이 앞장섰고, 이병렬이 그 뒤에서 걸었으며, 시커먼 양복을 입은 덩치들이 계단을 꽉 메우며 뒤따랐다.

“오셨습니까?”

“어디 계시냐?”

“이쪽으로 오십시오.”

김정훈에게 전화했다던 덩치인 모양이었다. 카운터에 있던 덩치 한 명이 고개를 깊게 숙인 뒤에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걸었다.

정장이나 원피스 차림의 아가씨들이 벽을 향해 몸을 돌리거나 고개를 숙이며 비켜선 복도를 걸어간 이병렬은 김정훈이 가리키는 문 앞에 섰다.

“열어.”

“예, 형님.”

김정훈이 문을 열기 무섭게 이병렬이 안으로 들어섰다.

문의 정면 상석에 대전의 조덕진이 거만하게 앉았다가 눈알을 굴렸고, 왼편에 있던 대전 덩치들이 몸을 세웠다.

오른쪽에 앉은 김종수 역시 당황한 얼굴로 몸을 세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그래. 병렬이 오랜만이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조덕진에게 짧게 고개 숙인 이병렬은 바로 김종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병렬아?”

김종수가 어색한 얼굴로 부른 직후였다.

쫘아악!

이병렬이 세차게 따귀를 갈겼고, 얻어맞은 김종수는 탁자를 잡으며 쓰러지는 몸을 버텼다.

“뭐야!”

대전 덩치들이 악을 쓰자 김정훈이 대번에 품에서 회칼을 꺼냈다.

조덕진이 손을 들어 말리면서 대전 덩치들이 더는 나서지 않았다.

“이리 나와.”

몸이 기운 김종수의 머리칼을 왼손으로 붙든 이병렬이 테이블 바깥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있던 맥주병을 집어 들었다.

퍼석! 털썩!

병이 산산이 깨지는 순간, 김종수는 힘이 빠진 모양으로 머리칼이 잡힌 채 무릎을 꿇었다.

술과 그새 흘러나온 피로 김종수의 머리와 볼, 재킷의 어깨가 축축한데 이병렬은 또다시 새로운 병을 집어 들었다.

퍼석!

섬뜩한 소리와 함께 병의 잔해와 술이 김종수의 주변으로 튀었다.

“이 개새끼야! 태완이 형님과 성태 형님이 기회를 주셨으면 고개 처박고 살아야지, 왜 모사를 쳐? 씨발놈아!”

쫘아아악. 쫘아아악. 쫘아아악. 쫘아아악.

맥주병 조각이 붙어 있어서 따귀를 네 번 때리고 났을 때 김종수의 왼쪽 뺨과 이병렬의 손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 새끼 데려가서 차에 실어.”

“예, 형님.”

김정훈이 고개로 지시하자 밖에서 기다리던 덩치들이 들어와 축 늘어진 김종수를 들고서 나갔다.

이병렬은 테이블에 있던 물수건을 집어서 손을 닦았다.

맥주병 잔해가 박혀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는데 전혀 상관없다는 투였다.

“야, 이병렬? 올라온 김에 술 한 잔 먹는 것뿐인데 이거 좀 심한 거 아니냐?”

이병렬은 밀리지 않는 눈빛으로 조덕진을 마주 보았다.

“아무리 대한민국 깡패가 한 식구라며 인사, 소개해도 밥그릇 건드리는 건 다릅니다. 종수가 모사친 걸 몰랐다면 형님이 멍청한 거고, 알고 그랬다면 칼 맞을 일입니다.”

“야, 이 새끼야?”

“아니 그런데 이 씨발? 어떻게? 대전하고 한번 해? 거기 나이트 싹 엎어드릴까? 아니면 씨발. 출연자 막아드려? 그것도 아니면 여기서 다이다이 한번 할까? 뭐? 뭐로 할 건데?”

“아 나, 씨발! 이거 완전 도라이네.”

조덕진이 밀리지 않고 말을 뱉은 다음이었다.

“말을 좀 가려 하십시오, 형님.”

김정훈이 도전적으로 대꾸를 뱉은 뒤에 회칼의 끝으로 조덕진을 가리켰다.

“너는 이 새끼야. 형님하고 이야기하는데 왜 끼어들고 지랄이야?”

“죄송합니다, 형님.”

이병렬이 나무라자 김정훈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눈을 하얗게 치켜뜨고 대전 덩치들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종수랑 모사친 거 사과하고 끝내실랍니까, 아니면 끝을 보시겠습니까?”

이병렬이 고개를 비틀며 던진 시선을 조덕진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꼬우면 제대로 한 번 하고.’

의미가 분명한 눈빛으로 이병렬이 픽 웃는 순간이었다.

“야, 오해다, 오해. 종수가 꼬드긴 건 있는데 나는 욕심 없었고, 그냥 서울 아가씨 끼고서 술 마신 뒤에 빠구리나 한번 시원하게 뜰까 하고 왔었던 거야.”

조덕진이 한결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을 뱉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강남 손에 넣은 거 들었는데 병원에 있다고 해서 연락 안 했거든. 이렇게 볼 줄 알았으면 내가 찾아가든가 했지. 강남 손에 넣은 거 축하한다.”

조덕진이 내민 손을 이병렬은 피가 흘러나오는 손을 내밀어 마주 잡았다.

“실례 많았습니다, 형님.”

“눈치 없이 종수랑 술 마신 내가 미안하지. 나중에 대전 한 번 와.”

악수를 마친 조덕진이 손을 슬쩍 내려다보았으나 차마 피를 닦지 못했다.

“가보겠습니다, 형님.”

“대전에 오해 없지?”

씨익 웃은 이병렬이 몸을 돌리자 고개를 가볍게 숙인 김정훈이 바로 뒤를 따랐다.

복도를 지난 이병렬은 계단을 올라 룸살롱의 입구에 섰다.

“담배 있냐?”

질문을 받은 김정훈이 담배를 꺼내 전하고는 곧바로 라이터를 켰다.

“후-.”

연기를 길게 뿜어낸 이병렬이 하늘을 돌아보며 픽 웃었다.

“씨발! 진짜 졸라리 보고 싶네!”

“누구 말씀이십니까, 형님?”

“우리 보스.”

시선을 내린 이병렬이 혼잣말처럼 던진 답이었다.

**

달리는 것을 멈춘 강성태와 키란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개처럼 헐떡였다.

머리칼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과 목덜미까지 땀범벅인 데다 기침을 토해낼 때마다 끈적한 침이 흘러나왔다.

강성태는 배와 허리 부근을 살폈다.

땀에 젖어 옅게 배어난 피로 허리둘레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곳을 키란과 함께 달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선을 든 강성태는 키란과 시선이 마주치자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키란도 감정은 비슷했던 모양이었다.

둘이서 바보처럼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킬킬댄 뒤였다.

강성태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사진과 지도를 꺼내 키란과의 중간에 펼쳤다.

“내가 이쪽으로 간다. 너는 아래에서 올라와.”

검지로 선을 긋자 키란이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아래쪽이 깨끗하게 끝나면 새소리를 울려. 나도 그렇게 할 테니까. 총소리가 나면 알아서 판단하고.”

믿음직하게 고개를 끄덕인 키란을 향해 강성태는 다시 입을 열었다.

“키란. 고맙다.”

“키란 동생. 함께.”

우리말을 들은 강성태는 픽 웃은 뒤에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른 끝내고 갈 테니까 무리하지 말고 있어.’

하늘 저편에서 최치곤, 김진용, 서달수를 세운 이병렬이 웃고 있었다.

씨익, 웃은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몸을 일으킨 키란의 눈빛이 상황을 이해한 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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