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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 5화 (154/513)

8권 - 5화

덩치답게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존 보스만이 강성태를 똑바로 보았다. 유독 눈동자가 하얗게 보이는 흑인답게 존 보스만 역시 강렬한 느낌의 흰자위에 강성태를 담고 있었다.

레드워터 출신이라고 했으니 전투 경험도 많았을 인물이었다. 그런 존 보스만이 할 말이 있다고 마주 앉더니 시간을 끌고 있었다.

강성태의 시선에 담긴 감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존 보스만이 입을 열었다.

“이두안 회장은 공항에 미스터 강을 내려준 뒤에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 정도야 뭐.

강성태는 묵묵하게 존 보스만의 말에 집중했다.

“미스터 강을 대신해 버트 그레인이 멕시코의 책임자로 임명됐습니다. 그가 공항에 나와 무기를 전해줄 겁니다.”

“책임자가 직접?”

“미스터 강이 공항에서 살해될 확률이 높으니까요.”

도착하기 무섭게 한국의 의사들을 납치했던 조직이니까 충분히 예상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렇더라도 저렇게까지 정직하게 답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강성태는 쓴 입맛을 다셨다.

“세타스 카르텔의 시날로 후아스가 미스터 강을 벼르고 있었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미스터 강이 세타스 카르텔의 하부 조직을 궤멸시켰을 당시의 책임자였습니다. 가페 출신으로 레드워터 선발에 도전했다가 성격이 포악하다는 이유로 탈락했고, 이후에 바로 세타스 카르텔에 들어갔습니다.”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워터와 미스터 강에 대한 반감이 대단하다는 평가입니다.”

그것도 뭐.

강성태는 이제 본론을 내놓으라는 투로 존 보스만을 보았다.

“시에라 마드레 산맥을 아실 겁니다. 그곳에서 가장 위력적인 용병 역시 누구보다 잘 알 거라 믿습니다.”

결국, 이거였나?

잠들기 전에 강성태가 잠시 떠올렸던 이들을 존 보스만이 꺼내놓았다.

“버트 역시 같은 의견을 지니고 있어서 그들과 접촉했고, 미스터 강이 출국했다는 소식을 한 것으로 압니다.”

강성태는 냉정해진 표정으로 존 보스만을 바라보았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미스터 강을 조건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미스터 강이 멕시코에 입국한다는 말만 전했을 뿐입니다.”

“존. 나는 말장난 좋아하지 않아.”

“레드워터에서 나는 바트의 후임이었습니다. 그분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겁니다.”

강성태에게는 한국인 아저씨가 그렇듯이 용병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마음의 빚을 지는 사람이 하나쯤 생긴다.

아저씨가 위태롭다면 강성태 역시 지금의 존 보스만과 같이 나섰을 게 분명해서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공항에 나온다니까 만나기는 하겠지만, 형제들을 이 싸움에 끌어들일 마음은 없어.”

“부탁을 드렸으니 결정은 미스터 강의 몫입니다.”

어려운 임무를 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한 얼굴로 존 보스만이 몸을 일으켰다.

“필요한 게 있습니까?”

“지금은 괜찮아.”

“미스터 강. 바트를 위해 나선 건 전적으로 내 의지였습니다.”

마지막 말을 건넨 존 보스만이 아쉽고 후련한 듯 복잡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어렵다, 이 싸움은.

공항으로 나온다는 구르카 용병에게 손을 뻗으면 강성태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운명, 이 잔인한 새끼가 안다미를 한국으로 보내는 조건으로 강성태를 멕시코에 붙들어두겠다는 술수를 펼쳐놓은 모양새이기도 했다.

‘그런 거구나.’

한편으로 안다미의 출국을 서둘렀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강성태가 사랑하는 여자가 멕시코에 온다. 그러니 도와달라.

바트는 그런 이유로 구르카 용병을 불렀을 게 분명했다.

하루라도 먼저 그들을 데려오고 싶은 이두안과 바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안다미의 출국이었을 거고.

운명이란 놈이 서라대학병원에 손길을 뻗치면서 단숨에 여기까지 일이 달려오고 말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털어낸 강성태는 잠을 청했다.

조금이라도 더 회복해서 멕시코 시티에 내린다. 그래서 안다미를 구한다.

우선 목표는 거기까지였다.

**

술을 마시고 난 원자춘은 습관대로 향이 진한 돼지고기 요리 두 가지와 해물 요리 한 가지를 앞에 두었다.

이렇게 속을 채워야만 몸이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생긴 버릇이었다. 또한, 그는 이렇게 요리의 중간에 반드시 진품 죽엽청주 석 잔을 마셨다.

오래 묵은 중국술은 약과 같다는 믿음에서 나온 습관이었는데 그 끝에서 보이차를 마시고서야 그는 잠자리에 들었다.

요리와 죽엽청 석 잔을 즐긴 원자춘이 보이차를 앞에 두었을 때였다.

조직원 한 명이 들어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국에서 멕시코에 파견한 의사 세 명이 세타스 카르텔에게 납치됐습니다. 그중 강성태가 마음에 둔 여자가 있답니다.”

“여자를 구하러 멕시코에 간다고?”

술기운이 오른 원자춘이 과장된 표정으로 조직원을 돌아보았다.

“강성태는 구르카 용병 출신으로 레드워터에서 근무한 경력자입니다.”

“가오리빵즈가 어떻게 구르카 용병이 됐지?”

“네팔에서 주민등록번호를 구입했습니다. 용병으로 선발된 이후 문제가 될 순간에 레드워터에서 모종의 협상을 벌여 데려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가 해킹에서 얻어낸 정보입니다.”

“더 있나?”

“이중으로 보안이 걸려 있어서 확인하지 못했다는 보고입니다.”

“거물이었구나!”

탄성을 터트린 원자춘은 오히려 만족한다는 눈으로 보이차를 들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다니. 확실히 하는 짓이 특이해. 아주 이상한 놈이야! 흐하하하하!”

유쾌하게 웃은 원자춘은 차를 마신 뒤에 잔을 내려놓았다.

“좋아! 그 정도는 돼야 우리 체면이 서지. 계집애를 인계받고 싶다고 멕시코에 연락해. 필요하면 돈을 지불하든가.”

“알겠습니다.”

“삼룡을 멕시코로 보내서 계집을 인계받고, 여차하면 그쪽에서 강성태란 놈을 해결해. 가능하면 계집애가 보는 앞에서 사지를 잘라주든가 하는 이벤트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계집애는 삼룡에게 던져주고.”

“예.”

지시를 마친 원자춘은 손을 가볍게 휘저어 조직원을 내보냈다.

“아! 계집애가 의사라고 했었지?”

몸을 돌려 나가는 조직원에게 원자춘이 생각난 듯 던진 질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취향도 참 고상해.”

고개를 끄덕인 원자춘이 짧게 손을 휘저었다.

**

잠에서 깬 강성태가 의자를 세운 다음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났을 때 이두안이 다가왔다.

정장 바지에 셔츠, 카디건을 걸친 그는 마치 집무실에서 강성태를 마주하는 듯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서울은 오후 1시 50분, 멕시코는 밤 10시 50분이네. 도착하면 바로 호텔로 가겠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게 좋지 않겠나?”

“감사합니다.”

강성태의 대꾸를 들은 이두안이 손을 들었다.

손짓 한 번에 두 명의 직원이 바쁘게 움직여 넓은 접시에 담긴 음식을 앞에 놓아 주었다.

토스트, 우유, 베이컨 등이 있는 미국식 조찬부터 스테이크까지 모두 2인분으로 준비돼서 원하는 걸 먹으면 되는 식사였다.

돈은 이런 힘이 있다고 보여주는 느낌이었는데 그렇다고 눈앞의 이두안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짧은 기도를 마친 이두안이 성호를 긋고서 포크와 나이프를 집었고, 강성태는 스푼을 들어 수프를 입에 넣었다.

침묵 속에서 이뤄지는 식사였다.

스테이크를 잘라 먹는 이두안과 빵을 찢어서 입에 넣는 강성태 모두 먹는 데 집중할 뿐,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달칵.

“그 몸으로 정말 괜찮겠나?”

먼저 입을 연 건 이두안이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그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급하게 진행된 건 유감이지만, 자네가 끝까지 도움을 거절한다면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함께 한국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네.”

들고 있던 빵을 내려놓은 강성태는 냅킨을 들어 입과 손을 닦았다.

“회장님. 급하게 한국 의사들을 출국시킨 일까지는 의도하지 않은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졌다고 이해하겠습니다. 또 회장님의 방식에 대해 말할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더는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회장님의 경호원이 아닙니다.”

“대단하군.”

“어쩌면 마지막 치기일지 모릅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이유가 뭔가?”

“회장님.”

대답 대신 강성태는 나직하게 이두안을 불렀다.

“진심으로 회장님 곁을 지킬 구르커스가 필요했다면 처음부터 고개를 숙이고 부탁했어야지, 지금처럼 빠져나가지 못할 계획을 세워두고 몰아대서 얻어내는 게 아닙니다.”

“나더러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

“그 정도도 못 하면서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십니까?”

“한 달에 300불이면 구르커스는 얼마든지 구해.”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시에라 마드레 산맥을 장악한 세타스 카르텔은 구르카 용병을 구한다고 해서 단숨에 처리되지 않는다. 그리 쉬웠다면 미국 마약단속반과 멕시코 군대가 벌써 정리하고 끝냈을 일이라는 건 이두안과 강성태 모두 아는 현실이었다.

주변에 서 있던 직원들이 비행기 천장을 향해 시선을 들고 있을 정도로 뻑뻑한 분위기였다.

“멕시코에 내려주겠네. 필요한 게 있다면 바트에게 도움을 청하게.”

“감사합니다.”

“공항에서 정비를 마치는 대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걸세.”

“조심해서 가십시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이두안이 몸을 세웠고, 그렇게 앞쪽으로 움직였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어쩌면 멕시코에 내리는 순간, 그의 계획에서 강성태를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도 있었다.

솔직하게 강성태는 그걸 바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더는 안다미와 한국의 직원들을 이용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면 싶었다.

직원들이 다가와 접시들을 치우는 동안 강성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찬란하게 펼쳐진 별들을 배경으로 비행기의 날개 끝에서 깜박이는 붉은 등이 강성태의 시선을 붙들었다.

공항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시작이었다.

도로를 달리는 승용차에서 느닷없이 기관총이 튀어나올 수 있고,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길지 모르는 행인을 경계해야 했다.

시날로 후아스?

강성태는 양팔을 천천히 위로 들었다. 그리고는 이를 지그시 깨문 뒤에 천천히 뒤로 당겼다.

염병할!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던 직원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레드워터에서 탈락하고 세타스 카르텔에 들어갔다고?

“끄응.”

구부린 오른팔을 대각선 위로 들던 강성태는 끝내 신음을 토해냈다.

하부 조직을 깨부쉈다고 여태 앙심을 품고 있었다는 거지?

다시 왼팔을 대각선 위로 든 강성태의 이마에 식은땀이 올라왔다.

그렇게 사람을 처참하게 죽여대던 놈들이 하부 조직 깨진 건 못 참는다, 이거지?

“후!”

숨을 짧게 뱉어낸 강성태는 상체를 뒤로 젖히고 다시 한 번 구부린 양팔을 한껏 뒤로 젖혔다.

식은땀이 솟아나는 게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의 고통을 강성태는 악착같이 견뎠다.

유헌우가 무슨 주사를 놓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몸이 편해진 것만은 분명했다.

몸을 푼 강성태는 모포 아래에 넣어두었던 쿠크리를 쓰다듬었다.

공항에 키란(Kiran)이 나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키란은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외모였다.

자신의 이름이 ‘햇살’을 의미한다고 말하고는 계면쩍게 웃던 모습도 분명하게 기억한다.

지금 매만지는 쿠크리도 형제가 되었다는 의미로 그와 바꾼 것이었다.

그의 모친 우르미라가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자 바닥에 몸을 구부린 키란이 그녀의 발에 이마를 대던 장면도 생생했다.

어떻게 변했을까?

쿠크리가 전해주는 감촉을 매만지며 쿠란을 떠올릴 때였다.

띵. 띵. 띵. 띵.

착륙을 알리는 벨소리가 강성태의 시선을 당겼다.

‘다미 씨. 이제 도착했거든요. 조금만 더 기다려요.’

창을 향해 고개를 돌린 강성태는 어둠에 싸인 멕시코 땅을 내려다보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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