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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 3화 (152/513)

8권 - 3화

제2장. 동시에 해결해야 할 문제일세.

이두안은 강성태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출발을 밤으로 당겼다. 그러면서 그는 공항에서 강성태를 기다리겠다는 뜻을 전했다.

당장 여권과 옷,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을 가져오는 게 급해서 강성태는 이병렬을 찾았다. 먼저 조봉진을 빌라로 보낸 강성태는 그 뒤에 멕시코에 가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이병렬은 말할 것 없고, 김진용과 서달수까지 나서서 말리는 바람에 안다미의 사정을 간략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준비를 서두르면서 시간이 번쩍번쩍 흘렀다.

유헌우는 두 시간에 한 번씩 병실을 찾아 주사를 놓았고, 휠체어를 바삐 움직인 최치곤은 비행기에서 먹으라며 샌드위치와 컵라면을 챙기는 정성을 보였다.

마침내 병실 시계가 8시 30분을 가리킬 때, 옷을 갈아입은 강성태는 휠체어에 앉았다.

이병렬이 있으면 최치곤이 편하게 말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강성태는 옷 갈아입는 걸 도와달라는 핑계로 최치곤과 단둘이 병실에서 마주 앉았다.

휠체어에 앉아 마주 본 상태였다.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었는데 최치곤은 강성태를 떠나보내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운 눈치였다.

“커피숍에 자주 들러. 민재나 민정이 통해서 이모도 좀 살펴주고.”

감정이 비틀렸는지 최치곤은 화난 눈으로 강성태를 노려보고 있었다.

“간다.”

강성태가 휠체어의 바퀴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2주야! 딱 2주! 14일! 그때까지 안 오면 내가 씨발! 멕시코를 탈탈 털다시피 돌아다니며 찾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픽 웃은 강성태는 바퀴를 굴려 문으로 향했다.

“2주 안에 돌아와.”

애원처럼 최치곤의 마지막 말은 힘이 쭉 빠진 음성이었다.

드르륵.

문을 연 강성태는 마지막으로 최치곤을 돌아보았다.

“다녀와서 밤새 일대일로 시원하게 마시자.”

“닭똥집하고 족발은 내가 살게.”

강성태가 옅게 웃자 최치곤이 억지로 미소를 그려냈다.

시선을 돌린 강성태는 병실을 나섰다.

다리 위에 놓은 수건 감은 쿠크리, 아직 주렁주렁 달린 링거팩, 휠체어 뒤에 걸어놓은 배낭이 짐의 전부였다.

이병렬과 서달수, 영등포 덩치들이 줄줄이 있었고, 뜻밖에도 안호상과 유헌우까지 복도에 있었다.

“약속 지켜.”

굳은 눈빛에 감정을 가둔 이병렬의 당부였다.

2주 정도 걸릴 테고, 그때쯤 돌아올 거란 강성태의 말을 약속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김진용보다 더 심한 부상에도 멕시코로 향하는 모습, 느닷없이 두 번이나 방문한 곤잘레스 이두안, 다리에 얹은 쿠크리, 복도에서 기다리는 안호상까지, 강성태가 향하는 길이 힘겨우리란 것쯤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있는 한, 마약, 인신매매, 고리대금업, 중국놈, 일본놈들이 설치는 일도 없을 거다.”

이병렬이 다부지게 각오를 밝혔고,

“다녀오십시오, 형님.”

복도를 메웠던 덩치들이 순서에 따라 상체를 숙였다.

이병렬을 잠시 바라보던 강성태는 몸을 돌리기 위해 바퀴를 잡았다.

바퀴를 막 밀었을 때, 눈치 빠른 서달수가 다가와 휠체어의 손잡이를 붙들었다.

안호상과 유헌우가 함께 움직여서 엘리베이터를 탔고, 그렇게 1층으로 내려갔다.

로비를 지나 현관으로 나선 강성태는 유헌우를 돌아보았다. 입구를 향해 뒷문을 활짝 열어놓은 앰뷸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까지 링거를 연결해서 타기 위한 선택입니다. 이동 거리에 따라 비용이 추가되지요. 현금으로.”

가볍게 웃은 강성태는 유헌우과 서달수의 도움을 받아 앰뷸런스 뒤편의 휠체어에 옮겨 앉았다.

“여기에서 인사합시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박사님께서 주사를 놔주실 겁니다.”

조심하라거나, 꼭 돌아오라거나 하는 말 따위 없이 유헌우가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십시오, 형님.”

서달수가 깊게 상체를 숙이는 사이 유헌우가 앰뷸런스의 문을 닫았다.

바로 출발한 앰뷸런스가 속도를 올렸을 때, 강성태는 점퍼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전화하겠습니다.”

안호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강성태는 바로 장숙경의 번호를 스피커통화 버튼으로 눌렀다.

“여보세요? 이모?”

- 너, 뭐야? 오늘 온다고 했잖아. 어디야?

“이모. 나 지금 멕시코에 가요.”

- 멕시코가 옆 동네도 아니고. 지금 어떻게 가?

“다미 씨 아버님이 가서 숙소랑 확인해보고 오라셔서요.”

강성태가 안호상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 성태야. 도대체 뭐 때문에 그래? 잘못된 일이 있으면 감추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걱정 가득한 음성이 스마트폰을 타고 건너왔다. 그 직후에 장숙경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투로 안호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 지금 다미 씨 아버님과 함께 공항에 가는 길이에요. 잠시만요.”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안호상이 상체를 기울였다.

“안녕하세요? 다미의 아비 되는 안호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 네에? 네. 저는 성태의 이모예요.

“멕시코에 가는 건 제가 부탁했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워서요. 이모님께서 걱정하실 거라 염려해서 전화 바꿔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아, 예. 당황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어요.

“제가 자그마한 병원을 하나 운영합니다. 안 외과병원입니다. 괜찮으시면 내일이나 모레 한번 들러주시겠습니까?”

이건 약속한 내용이 아니었다.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안호상은 마른침을 삼켰다.

“차라도 대접하면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조카를, 이렇게 갑자기 멕시코로 보내서…,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 그렇게까지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제가 염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안호상의 감정이 치닫는 느낌이어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입 앞으로 당겼다.

“이모. 더 통화하기 곤란하니까 멕시코에 도착해서 연락할게요. 선물 뭐 사다 줄까?”

- 성태야.

“예, 이모.”

- 이번에는 일찍 돌아오는 거지?

“그럼요.”

- 나한테는 네가 건강하게 돌아오는 게 가장 큰 선물이야. 얼른 다녀와. 이모가 김치찌개 끓여줄게.

강성태가 옅게 웃을 때였다. 전화가 끊겼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마트폰을 점퍼 주머니에 넣으며 강성태는 안호상을 다독였다.

앰뷸런스가 빠르게 달리는 사이 안호상은 감정을 많이 추스른 눈치였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예.”

“커피숍을 운영한다고 들었네. 그 정도만 해도 자네를 반대하지 않았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깡패들 싸움에 뛰어들었나?”

“클럽에서 공공연하게 마약이 도는 걸 보고 나섰습니다.”

“그걸 꼭 자네가 막아야 할 이유가 있었나? 아니, 지난 일을 덮어두세. 앞으로도 이렇게 나설 건가?”

“보셨다시피 틀은 잡았습니다. 이병렬이 잘해낼 거라 믿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잖나.”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이쯤에서 그만두겠다는 답을 듣고 싶은 눈치였다.

“돌아오면 그때 생각해 보고 답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차 싶은 모양이었다.

미안한 얼굴로 안호상이 시선을 돌렸다.

“다미 씨에게 선보라던 상대가 클럽에서 강제로 여자에게 마약을 투여하려다가 걸렸습니다.”

멈칫했던 안호상이 남자를 떠올렸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밤에 잘못 만났다면 다미 씨의 차에 약을 풀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그 사람을 가만둘 거 같은가?”

“우리나라만큼 권력이나 돈을 지닌 사람들에게 관대한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원장님께서 아무리 처벌해달라고 외쳐도 빠져나갔을 겁니다.”

“후-.”

참담한 얼굴로 숨을 내쉰 안호상이 미련 남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일단 무사히 돌아오게. 자네 말대로 남은 이야기는 그 뒤에 하세.”

“예.”

먹먹한 침묵 속에서 앰뷸런스가 공항으로 연결된 도로를 달렸다.

주차장에 도착한 앰뷸런스는 몇 차례 절차를 걸친 뒤에 곧장 활주로로 들어섰다. 작은 기종을 예상했던지 737을 본 안호상이 조금은 놀라는 눈치였다.

“주사를 놓겠네.”

안호상이 주사를 놓고 나자 이두안의 비서 폴리 와이건이 두 명의 남자와 함께 앰뷸런스로 다가왔다.

“회장님은 비행기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모시겠습니다.”

강성태는 안호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녀오겠습니다.”

“미안하네.”

“부탁하지 않으셨더라도 갔을 겁니다. 최선을 다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개를 숙여 인사한 강성태는 폴리 와이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안다미와 두 명의 동료는 창고에 갇혀 밤을 보냈다.

샌드위치 패널과 나무로 벽을 만들었고, 바닥은 작은 돌들이 박힌 맨땅이었다.

서울에서 가져온 트렁크들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참이라 입고 있는 게 옷의 전부였다.

세 사람은 한쪽에 쌓인 짚더미에 올라가 벽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서늘한 냉기에 몸이 움츠러들었는데 그 와중에도 안다미는 요란하게 들리는 새소리가 평화롭다고 느꼈다.

다락방처럼 만든 창고의 2층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비스듬하게 내부를 비출 때였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화들짝, 안다미와 세 사람은 잠에서 깼다.

툭! 투욱!

커다란 생수병 하나와 더러운 천 주머니를 던진 멕시코 남자가 안다미와 동료들을 쭉 훑어본 뒤에 밖으로 나갔다.

끼익. 덜컹.

문이 닫히자 동료 한 명이 천 주머니를 열었다. 그가 주머니를 반쯤 뒤집자 참으로 성의 없이 만들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빵 세 개가 몸뚱이를 드러냈다.

“건강한 맛이겠네.”

동료 두 명이 기가 막힌 얼굴로 안다미를 보았다.

그 시선 앞에서 안다미는 물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약을 탔을까 봐 그래?”

“근처에서 떠온 물 같아. 배탈이 날지 모르니까 입에 한참 머금은 뒤에 조금씩 넘겨.”

“안 선생은 그걸 어떻게 알아?”

“고등학교 때 배웠어.”

빵을 집은 안다미는 동료 두 사람에게 하나씩 건네고 남은 한 개를 손으로 뜯었다.

“어후.”

빵을 입에 넣은 동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닌 게 아니라, 익히지 않은 밀가루를 씹는 듯 거북한 냄새가 안다미의 입에서도 날뛰었다.

“안 선생, 우리 별 일 없겠지?”

질문을 받은 안다미는 대답 대신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그런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마음이 약해질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

비행기의 의자가 병원 침대보다 더 안락했다.

그 외에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공항에서 보자던 이두안이 함께 멕시코를 향해 날고 있다는 점이었다.

몸 상태를 물었던 이두안은 이륙할 때까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한동안 위로 치솟던 비행기가 균형을 잡자 직원들이 수프와 몇 가지 요리들을 가져다주었다.

강성태는 이두안 앞에 놓인 커피에 시선을 주었다.

“상처 때문에 건강식을 준비한 모양인데 커피를 하겠나?”

“감사합니다.”

강성태의 답을 들은 이두안이 손으로 직원을 불러 커피를 주문했다.

아침에 맞은 주사 덕분인지 지금은 몸을 움직이는 게 확실히 좀 더 수월했다. 강성태는 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들어 향을 맡았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커피알리고, 이은주, 안다미, 그리고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의 기억들이 커피향을 타고 강성태를 스치며 지나갔다.

강성태가 잔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강력한 단속과 새로운 약물이 나오면서 양귀비 재배 수입이 점점 줄어들고 있네. 그래서 마약 카르텔들이 집중하는 게 아보카도지. 다른 말로 그린 골드(Green gold)라고 할 정도로 돈이 되니까.”

비행시간은 길다.

뜸을 들이는 이두안의 말을 자르고 싶지 않아서 강성태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정유업을 하는 사람일세. 마약이나 아보카도에는 관심이 없어.”

강성태를 본 이두안이 묘한 느낌의 미소를 그렸다.

“시에라 마드레 산맥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유전이 발견됐다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이거였나?

그동안 이두안이 보여주고 설명했던 일들의 앞뒤가 떠올라 강성태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두 가지를 해결해야 하지. 10만 명이 넘는 농부들의 이주, 그들의 피를 빨아가며 부를 축적한 마약 카르텔의 와해. 물론 동시에 해결해야 할 문제일세.”

멕시코 군대와 미국 마약단속반이 수십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일을 이두안 홀로 감당하겠다며 나선 꼴이었다.

설마 했던 내용을 실제로 듣고 나자 강성태는 오히려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민감한 상황에서 굳이 의료팀의 출발 일자를 당긴 건 왜 그러신 겁니까?”

강성태의 질문을 받은 이두안은 잠시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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