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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 - 2화 (151/513)

8권 - 2화

아침이었나?

고개를 돌린 강성태를 최치곤이 바라보고 있었다.

“또 사고 꿈이었냐?”

“지금 몇 시야?”

“8시 20분. 원장님이 와서 너 절대 깨우지 말라더라. 그래서 식사 때도 놔뒀어.”

답을 하지 않았어도 강성태가 악몽을 꾸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눈치였다. 낑낑거리며 침대에서 내려간 최치곤이 휠체어에 앉아서는 바퀴를 굴렸다. 그사이 제법 익숙해져서 방향을 바꾸는 모습이 능숙했다.

몸을 슬쩍 움직였을 때, 통증은 여전했다.

스마트폰을 든 강성태는 연락 온 곳이 없는지를 살폈고, 다음으로 안다미의 번호를 눌렀다.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응답이 건너왔다.

“아침 먹어.”

다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쟁반을 걸친 최치곤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아직 죽이더라.”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쟁반을 침대로 올려준 최치곤이 문을 슬쩍 돌아보았다.

“내가 샌드위치 꼬불쳐 놓은 거 있거든. 먹을래?”

“지금은 이것만 먹을게.”

다른 때 같으면 샌드위치를 먹었을 강성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빠른 회복을 위해서 유헌우의 지시대로 따를 생각이었다.

그릇을 든 강성태는 퉁퉁 불어터진 쌀죽을 천천히 부어 넣었다. 씹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바로 넘어가서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편했다.

죽을 마시는 동안 최치곤은 또 휠체어를 움직여서 물병을 가져왔다.

“고맙다.”

“쟁반이나 줘.”

쟁반을 받아서 다리에 올린 최치곤이 바퀴를 열심히 굴렸다.

구석으로 간 최치곤이 쟁반을 내려놓을 때였다.

문이 열리며 유헌우와 선반을 든 간호사가 들어왔다.

샌드위치를 먹었더라면 민망할 뻔했다.

“깼네요?”

“원장님은 안 주무세요?”

“토막토막 끊어서 잡니다. 안 그러면 이 생활 못 견뎌요.”

강성태의 침대로 다가온 유헌우는 배를 감은 붕대를 가위로 자르고 상처를 살폈다.

“어떻습니까?”

“아직은 모르겠어요. 주사를 놓을 테니까 좀 더 자요. 오전 11시에 다시 확인할게요.”

“원장님. 결과가 어떻든 내일은 출발할 겁니다.”

배의 상처에 거즈를 감은 유헌우가 강성태를 말없이 보았다.

“일단 자요.”

그 뒤에 그는 간호사가 들고 있던 선반에서 주사기를 들었다.

“항생제라서 구토가 올라올 수 있습니다.”

유헌우가 링거 줄에 바늘을 꽂은 다음이었다. 곧바로 조금 전에 먹었던 죽이 목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강성태는 악착같이 버텼다.

“이건 진정제입니다. 일단 자고 일어납시다.”

“그냥 지켜보시죠?”

“강성태 씨.”

유헌우가 굳은 표정으로 강성태를 불렀다.

“안 선생은 내게 가족과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라도 달려갔을 겁니다.”

그의 눈이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링거줄을 잡은 유헌우가 또다시 주사제를 넣자 혈관이 타들어 가는 듯한 뻐근한 통증이 올라왔다.

“통증이 있을 겁니다.”

조금 뒤늦게 유헌우의 말이 들렸는데 강성태는 이미 반쯤 잠에 빠져든 상태였다.

**

구불구불한 도로를 3시간이나 달린 승합차는 비포장 길을 뒤뚱거리며 올랐다.

긴 비행 후에 좁은 승합차에 갇혀 쉼 없이 달리는 상황이었다. 도로의 굴곡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승합차의 진동도 끔찍했지만, 안에 탄 남자들에게서 풍기는 역한 냄새와 돌아가며 피우는 담배 연기가 계속해서 안다미를 괴롭혔다.

그나마 산길에 들어선 이후로 풍기는 맑은 공기가 안다미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었다.

덜컹. 덜컹.

엔진 소리를 요란하게 울린 승합차가 앞뒤와 좌우로 흔들렸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사형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에 보이는 햇살이 새롭고, 폐를 파고드는 맑은 공기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생각이 달려서 그럴까?

아주 어릴 적부터 멕시코 시티 공항에 내릴 때까지의 기억들이 빠르게, 하지만 더할 수 없이 또렷하게 안다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의대 합격을 확인하는 순간, 부친 안호상은 딸이 후배가 되었다며 아이처럼 좋아했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안다미는 부친과 맥주를 함께 마셨다.

추억은 불쑥 과거로 달려갔다.

안다미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안호상은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그녀를 안호상은 늘 자랑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의대 생활로 힘들어하는 안다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다독이며 안호상은 선배로서의 조언을 들려주었다.

그는 한 번도 안다미의 의지를 꺾으려 들지 않았다.

강성태를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

그렇게 강성태를 떠올린 안다미는 느닷없이 가슴 한쪽이 먹먹했다.

두 남자, 그리고 아프게 가슴에 남는 두 가지 일, 멕시코에 보냈다며 자책할 안호상, 붙잡지 못했다며 힘겨워할 강성태.

멕시코 마약 카르텔이 잔인하다는 말이야 들었다.

‘이렇게 여기에서 죽는 거겠지?’

안다미가 최후를 떠올렸을 때였다.

나뭇잎 사이를 뚫고 온 햇살이 안다미의 볼을 쓸었고, 이어서 신의 응답처럼 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환하게 비추었다.

‘어떡해서든 구해낼 거니까 살아만 있어요.’

상상으로 이럴 수 있을까?

강성태의 음성이 직접 들은 것만큼이나 선명하게 안다미의 가슴에서 울렸다.

**

안호상은 8시 50분에 방지병원에 들어섰다.

곧장 원장실로 향한 그는 간호사의 인사를 대강 받으며 문을 열었다.

“선생님?”

안호상은 한숨도 못 잔 얼굴이었다.

“전화를 안 받아. 서라대학병원도 연락이 안 된다고 하고. 초대한 멕시코 쪽 파트너사에서는 통신이 어려운 지역을 통과한다고 했다는데 뭔가 이상해. 자네도 자식이 있으니까 알 게 아닌가? 뭔가 잘못된 거야.”

“앉으십시오, 선생님.”

몸을 돌린 유헌우가 커피를 따라서 소파로 움직이고 나서야 안호상은 문 쪽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미안하네.”

자리에 앉은 안호상은 볼을 길게 쓸어내렸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어제저녁부터 가슴이 이상하게 답답해. 그러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다미가 우는 걸 보며 깼지 뭔가. 그때부터 나쁜 생각만 드는데, 거기에 전화까지 안 받으니까… 후-.”

어깨를 늘어트린 안호상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아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친구 말일세. 강성태.”

“예, 선생님.”

“멕시코에서 경호원을 했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그쪽으로 아는 사람이 없을까? 내가 외교부에 아는 사람에게 연락해 봤는데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 그게 더 이상해.”

유헌우는 질문조차 내놓지 못했다.

“알아보겠다거나 연락이 안 된다거나 해야 맞지 않나?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말에 뭔가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혹시 그 친구가 멕시코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알아봐 달라고 하면 어떻겠나? 내가 가서 미안하고 염치없지만 한 번만 도와달라고 해볼 테니까…….”

유헌우의 얼굴을 본 안호상이 눈과 볼, 입술을 늘어트린 채 시선을 떨궜다.

“오늘까지 연락이 안 되면 내일이라도 내가 멕시코로 가야겠어. 요란을 떤다고 해도 좋고, 집착이라고 해도 할 말 없는데 그 아이가 내 삶의 전부였어. 그러니까…….”

똑똑똑.

혼잣말처럼 속을 털어놓는 안호상의 말을 노크가 잘랐다.

그런 뒤에 원장실의 문이 열렸다.

“원장님.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님이 오셨어요. 강성태 환자에 관해 의논할 게 있답니다.”

뭔가 하고 간호사를 보았던 안호상이 퍼뜩 놀란 눈으로 유헌우를 돌아보았다.

“곤잘레스 이두안? 이번에 서라대학병원에 의료진 파견을 신청한 회사의 회장 아니었나?”

“예, 선생님.”

놀라는 안호상 앞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숙인 유헌우가 원장실을 나섰다.

**

유헌우와 함께 병실에 들어선 이두안은 잠들어 있는 강성태를 잠시 살폈다.

“비행기를 탈 수 있습니까?”

영어로 건너온 질문이었다.

담긴 의미가 묘해서 유헌우는 먼저 시선만 돌렸다.

“나는 미스터 강을 압니다. 내가 돕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비행기에 오를 겁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 개인 비행기에서 누워 가게 하는 게 도리입니다.”

“의료진에 관한 소식이 있습니까?”

“납치한 조직과 이동 경로는 대강 짐작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최소 2주가 걸립니다.”

아픈 통보였다.

안타까운 심정에 유헌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 알려드린 정보를 말해주지 않아도 미스터 강은 독자적으로 알아낼 겁니다.”

“강성태 씨가 그렇게 뛰어난 경호원이었습니까?”

“미스터 강은…….”

강성태를 잠시 보았던 이두안은 바로 시선을 가져왔다.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경호원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빛을 발휘하기 어렵죠.”

“왜 그렇습니까?”

“총기를 지닌 미스터 강은 또 다릅니다. 산악 지역에서는 무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유헌우는 대단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비행기를 탈 때 따로 준비해야 할 게 있습니까?”

“탑승 전에 주사를 맞았으면 하고, 링거를 연결하면 더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깨어나면 내일 오전 5시 30분 인천공항 출발이라고 전해주십시오.”

말을 마친 이두안이 경호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

강성태가 눈을 떴을 때는 오전 11시쯤이었다.

약이 독했는지 몽롱한 기운이 떨어지지 않았다.

“치곤아.”

목이 말라서 최치곤을 불렀는데 답은 없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누군가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헛것을 보나?

머리 쪽을 세운 침대에 기댄 상태에서 강성태는 안호상을 멍한 눈으로 보았다.

“정신이 드나?”

“예.”

안호상과 강성태의 질문과 답이 엇나가는 느낌이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유쾌하고 당당했던 안호상이 지금은 초췌하고 불안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강성태의 침대 옆에 앉았다.

“자네가 잠든 사이 이두안 회장이란 분이 다녀갔네.”

강성태의 눈을 보며 안호상이 말을 이었다.

“납치 조직과 장소를 대강 짐작한다고…, 그런데 정확한 위치를 찾으려면 최소 2주는 걸릴 거라고…….”

말을 하다 목이 메는지 안호상은 자꾸만 감정을 삼켰다.

“내일 인천공항에 비행기를 준비한다고 했다더군. 오전 5시 30분 출발이라네. 이런 부탁 염치없다는 거 알지만, 다미를…, 다미를 좀 데려와 주게.”

끝내 안호상은 고개를 떨구었다.

무릎을 꿇으라 하면 주저하지 않고 바닥에 내려앉을 듯한 모습이었다.

“박사님.”

강성태가 부르자 안호상이 고개를 들었다.

초췌한 얼굴에서 눈이 좀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 밤에 출발하겠습니다. 이두안 회장이라면 그 정도를 들어줄 능력이 있을 겁니다.”

막상 강성태의 답을 듣고 나자 부상이 덜컥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안호상의 시선이 강성태의 허리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내가 도와줄 건 없나? 경비라든가?”

“괜찮습니다.”

짧은 대화의 끝에서 다시 어색한 감정이 흘렀다.

“부탁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뭔가? 말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돕겠네.”

“제게 이모가 한 분 계십니다. 이런 모습이 되는 날이면 어떻게 아는지 그렇게 불안해하십니다.”

그 심정 이해한다는 투로 안호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찾아뵙기로 했는데 제가 멕시코에 가면 또 제대로 못 주무시고 걱정하실 겁니다.”

“내가 뭘 해주면 되나? 편하게 말하게.”

“박사님 이름을 한 번만 팔게 해주십시오.”

이해하지 못했는지 안호상이 고개를 갸웃했다.

“박사님.”

강성태는 다른 설명 없이 안호상을 나직하게 불렀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다미 씨는 꼭 박사님의 품으로 보내겠습니다.”

안호상의 눈에 설마, 하는 감정이 떠올랐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강성태, 안호상 모두 알았다.

게레로 주, 시에라 마드레 산맥을 들어가면 누구도 살아 돌아온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인질을 무사히 데리고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더.

죽음을 각오했다는 말을 듣는 게 두려워서, 그런 곳에 가서 딸을 구해달라는 게 미안해서 안호상은 입을 열지 못했다.

먹먹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 때였다.

“병원비 중간 정산이라니까요. 조태완 환자 병원비도 아직 남은 게 있고요.”

복도에서 울린 유헌우의 음성이 병실을 타고 들어왔다.

“우리 병원은 누가 와도 현금만 받습니다. 그러니까 카드 가지고 가서 현금을 찾아주세요. 이왕이면 아래층에 있는 현금 인출기를 이용해주시면 더 좋습니다.”

안호상이 나직하게 한숨을 쏟아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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