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 1화
제1장. 함께 돌아와.
침대에 앉아있는 게 아니라 묶여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갑갑했다. 그렇게 숨이 턱 막히는 상태에서도 강성태는 이두안과 영어로 나눈 대화를 최치곤에게 들려주었다.
“뭐야? 그럼 처음 말했던 거하고 다르잖아.”
“뭔가 사정이 있는 거 같기는 했었거든. 출발할 때 알려준다고 했으니까 들어봐야지.”
말을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뒤에 안다미의 번호를 눌렀다.
오후 11시 55분이었고, 역시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납치했다면 뭔가 원하는 걸 내놓겠지?”
“그러길 바라야지.”
커다랗게 숨을 내쉬는 강성태를 최치곤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좋은 건 더 이상 한국에서 파견되는 직원이 없게끔 협상을 하는 거고, 최악은…….”
잠시 뜸을 들인 뒤에 강성태는 말을 이었다.
“얼마든지 와보라는 식으로 살해하는 거지.”
“씨발 새끼들이….”
“카르텔의 대가리가 되면 재산이 10조 이상인 경우가 많아. 그걸 지키기 위해서 1년에 최소 3만 명은 죽어 나가. 그중 세 명이 추가됐다고 생각하겠지.”
숫자를 듣고 난 최치곤은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의사라 혹시 하는 기대는 한다. 반대로 미국의 마약단속반 요원도 살해하는 놈들이라 그게 더 걸리기도 하고.”
강성태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이 울었다.
기대 가득한 최치곤의 시선 앞에서 강성태는 빠르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Hello?”
- 자네 예상대로 세타스 카르텔이 움직였다. 이두안 회장 측에서 보낸 안내원이 철사로 목이 졸린 채 공항의 주차장 승용차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호세 마리오라는 정부 관료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쳤다고 보고했다.
“현재 인질들의 위치는?”
- 장갑차와 버스를 버리고 다른 차로 움직이는 바람에 현재 위치나 목적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자네가 지닌 마지막 카드 외에는 답이 없을 거 같다.
“그러면 인질들이 정말 죽어.”
- 멕시코 군대나 디이에이(DEA, 미국마약단속반)가 모두 나서도 인질은 죽는다. 그럴 바엔 레드 워터가 나서는 게 가장 효과적이지.
“협상의 가능성은?”
- 추가로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알려주겠는데 인질의 상태와 소재가 파악될 때까지는 알기 어렵다.
“고마워.”
가볍게 웃는 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끝났다.
영어로 나눈 통화여서 강성태는 다시 최치곤에게 내용을 알려주었다.
윤곽은 알았지만,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어떡해서든 구해낸다.
그러려면 멕시코로 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도 있었다.
잠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강성태는 명함에서 찾아 입력했던 이두안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밖에 울리지 않았는데 응답이 있었다.
- 여보세요?
“회장님, 강성태입니다. 부탁이 있어서 늦은 시간에 전화 드렸습니다.”
- 현지 책임자 버트와 연락하느라 오늘 밤은 서재에 있을 테니까 언제고 전화하게. 급한 부탁을 말해주겠나?
“멕시코 정부에서 우리 외교부에 연락하더라도 발표하지 않도록 힘써 주십시오.”
- 인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그렇게 협조를 구할 셈이었네. 다만, 과거의 예로 봐도 2주 이상은 어려울 거야. 또 납치한 조직에서 발표하는 건 막을 방법이 없네.
“그 정도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 알았네. 특별한 소식이 있으면 연락하지.
짧고 간단하게 끝난 통화였다.
“이두안 회장에게 납치 사건을 발표하지 않도록 부탁했다.”
“시간이야 번다고 쳐도 어떻게 구하냐?”
최치곤이 갑갑한 속을 대신해 입술 사이로 바람을 뿜어냈다.
**
이두안은 20분 단위로 보고를 받았다.
멕시코에서 보고가 있기도 했지만, 비서들이 비상체제에 들어가 20분에 한 번씩 확인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멕시코 정부에서는 6시간 뒤까지 소재가 파악되지 않으면 실종으로 처리하겠답니다.”
이두안은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였다.
“당분간 비밀을 유지해달라는 요청은?”
“그 부분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군 수색대가 움직일 예정이고, DEA에도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이두안은 면도를 마친 사람처럼 턱을 매만졌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지.”
“예, 회장님.”
비서가 자리를 비우자 이두안은 입력된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울릴 때까지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 버트입니다.
“카르데나스 가르시아와 연락할 방법이 있을까?”
카르데나스 가르시아는 안다미를 포함한 한국 의료팀을 납치한 세타스 카르텔의 수장이었다.
- 아시다시피 DEA가 그의 목에 3천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어두는 바람에 심복들조차 그의 소재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굴 성형과 지방 흡입을 통해서 체형까지 바꿨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이두안이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 세타스 카르텔이 회장님의 목에 5백만 달러의 상금을 걸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보고가 버크에게서 건너왔다.
- 아직은 소문입니다. 그러나 이쪽이 술렁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불행하게 로라 양에게도 같은 금액의 상금을 걸었다는 내용입니다.
“사실이라면 가르시아가 지시했겠지?”
- 그가 수장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우리 쪽이 협상하자고 꼬드겨도 그가 나서지는 않을 겁니다.
“결국, 누가 먼저 죽이느냐의 싸움이 되는군.”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의료팀의 생존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검지와 중지를 세운 이두안은 천천히 이마를 문질렀다.
“미스터 강이 멕시코로 향할지 몰라. 그렇게 된다면 그가 원하는 무기를 구해주게.”
- 알겠습니다.
무언가를 덧붙이려던 버크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강성태가 와봐야 혼자 설치다가 죽어서 돌아가게 되기 쉽다.
버크가 삼킨 말을 능히 짐작한 이두안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인질이 잡혀 있는 장소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알아봐 주게.”
-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이두안은 스마트폰을 소파의 빈자리에 가볍게 던졌다.
**
도로 중간에서 승합차로 옮겨 탄 안다미는 동료들 두 명과 함께 중간에 앉았다.
일본산 12인승 승합차였다.
조수석과 가장 뒤쪽에 앉은 멕시코 남자들이 대놓고 소총을 들고 있어서 반항은 생각조차 못 했다.
왕복 2차선 도로를 두 시간 달린 뒤였다.
길가에 늘어선 허름한 상점을 비켜난 승합차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헤이!”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소총의 총구를 까딱이며 문을 가리켰다.
고개를 숙인 세 사람이 내리자 기다리던 남자 둘이 전혀 다른 색의 승합차를 가리켰다.
목이 마른지, 화장실을 들를 건지 따위 묻지 않았는데 요청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동정이나 인간미라고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 눈빛과 태도였다.
이미 소총을 든 두 명이 뒷자리에 있었다.
안다미와 두 명의 동료가 중앙에 앉자 소총을 든 남자가 조수석에 타는 것도 이전과 같았다.
승합차는 다시 형편없는 포장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내려와 대형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세 사람은 어느새 초췌한 얼굴에 겁먹은 눈을 하고 있었다.
도로를 달리는 도중에 몸이 쉴 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헤이!”
뒤편에 있던 남자가 소총의 총구로 안다미의 날갯죽지를 쿡쿡 찔렀다.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였다.
시키는 대로 고개를 떨구며 안다미는 강성태를 떠올렸다.
그의 몸에 새겨진 흉터의 의미를 이토록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반대로 악몽을 꾸는 것처럼 멍할 뿐,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총을 든 남자들이 앞뒤로 있는데도 말이다.
고개를 떨군 안다미는 부친 안호상 박사를 생각했다.
멕시코 파견을 직접 신청했으니 안다미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죄책감에 짓눌려 벗어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내가 선택한 거예요.’
할 수만 있다면 안다미는 그 한 마디를 안호상에게 꼭 해주고 싶었다.
그사이 승합차는 허름한 상점들조차 드문드문 보이는 길을 달리고 있었다.
**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열고 멕시코의 지도를 세심하게 살폈다.
밤이 깊어 새벽으로 가는 동안, 간호사가 다가와 두 번이나 주사를 놓았는데 약이 얼마나 독한지 잠을 쫓기 위해 버릇처럼 고개를 털어내야 했다.
함께 걱정하던 최치곤은 주사약을 이기지 못해 잠이 들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잘된 일이지 싶었다.
게레로 주에서 양귀비를 재배하는 농가는 10만 명 이상이었다.
허름한 농가 어딘가에 세 사람을 가둬두면 멕시코군 수색대 아니라 DEA가 모두 나서도 최소 2주는 지나야 위치를 확인할 정도로 시에라 마드레 산맥은 험하고 깊었다.
공항에서 총격을 가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최소한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목을 자르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데려간 것일 수 있고, 아니면 목을 자른 뒤에 머리를 방송국으로 보낼 가능성도 있었다.
지도를 확인한 강성태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 뒤에 스마트폰을 들어서 번호를 눌렀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 헬로우? 성?
“멕시코 군인 중 정보원이 있으면 연결해 줘. 내가 지닌 현금과 비트코인을 모두 보내줄 테니 부탁한다.”
강성태의 요청에 당장 답은 없었다.
멕시코 군대에서 받는 급여의 10배가량을 월급으로 주는 바람에 군인들 상당수가 카르텔 조직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10배나 차이 나는 급여, 전투 중 사망할 경우 남은 가족에게 지급되는 수십만 달러의 보상금, 그 후에도 계속되는 보살핌을 확인한 후로는 숫자가 점점 불어나는 추세이기도 했다.
- 납치된 의사 중에 관련된 사람이 있나?
“서로 모르는 게 좋지 않겠어?”
강성태의 대꾸가 답과 같았다. 다만, 세 사람 중 누구인지는 묻지 말라는 의도 역시 담겨 있었다.
- 연락을 기다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앞으로 이 번호로 전화해도 연락이 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서 강성태는 무거운 심정으로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들기 위해 강성태가 고개를 저을 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며 유헌우가 들어섰다.
최치곤을 돌아본 그는 강성태의 눈을 확인하고는 대강 짐작한다는 투로 다가왔다.
“주사를 맞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런데도 안 자고 버텼어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강성태의 침대 옆으로 돌아온 유헌우는 주사기가 담긴 상자를 내려놓았다.
“팔 내미세요.”
“이것도 졸린 겁니까?”
강성태가 내민 팔을 잡은 유헌우가 주사기를 집었다.
“전에 맞았던 바로 그 주사입니다. 애걸복걸하다시피 해서 어렵게 구했으니까 잠이 오면 무조건 주무세요.”
“원장님?”
“강성태 씨를 믿고 나선 겁니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바늘이 강성태의 팔뚝을 파고들었다.
신중하게 주사제를 집어넣은 유헌우가 솜을 대고는 바늘을 뽑았다.
“자고 일어났을 때 효과가 컸거든요. 그러니까 주무세요.”
그렇지 않아도 억지로 견디던 참이었다.
치료제가 아니라 수면제를 놓은 건가 싶을 정도로 잠이 몰려들어서 강성태는 머리를 뒤로 기댔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시선을 돌렸는데 물속에서 보는 사람처럼 유헌우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더 견디지 못하고 강성태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강성태는 또다시 교통사고의 첫 장면으로 돌아갔다.
악몽이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오히려 반갑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걸 잊고 있었네.’
혹시라도 지하차도를 지나면 안다미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병원을 나서면 시도해 봐야겠다는 각오가 꿈에서도 선명하게 강성태의 뇌리에 떠올랐다.
뒷좌석에 앉은 강성태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옆에 앉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더컹. 더컹. 더컹.
승용차는 다리 위를 달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사고가 나기 전에 강성태는 운전석에 앉은 아버지와 곁에 앉은 어머니를 향해 생각을 전했다.
이제 트럭이 승용차의 왼쪽을 들이받을 차례였다.
아무리 각오해도 이 장면의 고통만큼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강성태가 이를 꽉 악무는 순간이었다.
“꼭 구해서 함께 돌아와.”
처음 듣는 음성이 강성태의 귀를 파고들었다.
놀란 강성태는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그리고는 눈을 파고드는 환한 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병실의 창을 뚫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정면에서 비추고 있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