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 - 20화 (149/513)

7권 - 20화

생각을 정리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대기음이 두어 번 울린 뒤였다.

- Hello, Sung?

익숙한 음성이 전화를 받았다.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에게 내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 않나? 이두안 회장이 자넬 찾으려고 했다면 나를 통하지 않았어도 가능한 일이야.

상대방이 늘어놓은 변명이 건너왔으나 강성태는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한다.

잠시 뒤에 진지한 사과가 넘어왔다.

- 자네 성격에 그런 일을 따지려고 전화한 건 아닐 테고, 원하는 걸 말해. 최선을 다해 알아봐 주지.

“한국에서 출발해 멕시코 시각으로 오늘 오전에 도착한 의료팀이 납치된 거 같다. 개조한 장갑차를 사용했고, 정부 관리로 보이는 인물이 마중 나왔었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 젠장. 삼합회의 광룡을 들먹이더니 이제는 멕시코 카르텔인가?

“비용을 지불할 테니 의료팀이 납치되었다면 감금된 장소까지 알아봐 줘. 짐작하기에는 게레로 주가 아닐까 싶다.”

- 다섯 시간 안으로 연락하지.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잠시 이두안을 떠올렸다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분명 의료팀을 위한 안내자를 준비했을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쯤 상황을 파악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전화를 걸어 매달리기보다 지금은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게 현명한 처신이었다.

속이 바작바작 타들어 가지만, 준비를 철저히 할 때였다.

강성태는 몸을 돌려 침대 위편에 늘어진 비상버튼을 눌렀다.

- 무슨 일이세요?

당직 간호사의 급한 음성이 울렸다.

“원장님을 급하게 뵙고 싶어서 그런데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 아직 병원에 계시니까 바로 연락드릴게요.

인터폰을 통해 유헌우 원장을 찾은 강성태는 다시 한 번 안다미의 번호를 눌렀다.

- 지금은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전화기 너머 응대는 변함이 없었다.

**

침대에 걸터앉은 이두안은 상체를 기울여 로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좋은 꿈 꿔, 로라.”

“오빠는 언제 만나요?”

“일이 생긴 모양인데 조만간 보게 될 거야.”

“한국은 참 신기해요. 유연하고 강한 면이 동시에 있어요.”

“그러니까 미스터 강과 같은 남자가 있겠지. 이제 정말 자야 할 시간이다.”

머리맡의 스위치를 눌러 등을 끈 이두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거실 한가운데 비서 폴리 와이건이 서 있는 것을 본 그는 눈가를 좁혔다.

아직 이두안은 정장 바지에 셔츠 차림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 시간에 부르지 않은 비서가 기다린다면 결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서재로 가지.”

로라가 들을 것을 염려한 이두안은 거실을 지나 그의 취향대로 꾸민 서재로 향했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후-.” 하고 숨을 길게 내쉰 뒤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지?”

“멕시코 시티에 도착한 선발진이 납치되었습니다.”

이두안은 입술을 뒤틀며 책이 즐비하게 꽂힌 책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표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잠시 후에 그는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자세하게 설명해주겠나?”

“우리가 고용한 안내원이 공항 주차장에서 살해된 채 발견됐습니다. 호세 마리오 국장은 약속대로 선발진을 안내했는데 그들이 조직원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납치한 조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정부 대응은?”

“한국의 선발진을 찾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연락이었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왼손을 들어 이마를 매만지며 이두안은 잠시 시간을 끌었다.

“한국 정부는?”

“아직 우리 정부에서 납치라고 인정하지 않아서 한국 대사관에 통보하지 않았습니다. 공적인 의료 지원이 아니라 상업적인 목적에서 파견한 의료진이라 회장님께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도 전해왔습니다.”

“그사이 또 누군가 돈을 뿌렸나 보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이두안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미스터 강은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버트에게 연락해서 한국의 의료팀을 납치한 조직을 알아보라고 해. 가능하다면 몸값 협상에 응해도 된다고 전하고.”

“알겠습니다.”

비서가 서재를 나서고도 한동안 이두안은 소파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동상처럼 소파에 있던 그는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한국 시각으로 오후 10시 40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몸을 일으켜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차를 준비해.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로라를 보살필 사람을 한 명 부르고.”

짧게 지시를 내린 이두안이 무거운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병실로 올라온 유헌우는 최치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공항에 개조한 장갑차가 나타났는데 경찰이 그냥 지켜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불안해서라도 시민들이 신고하지 않겠습니까?”

“북한이 미사일 발사하고, 전쟁 운운할 때요. 외국에서 그런 질문 많이 받았습니다. 불안해서 어떻게 사냐고요? 그렇게 이해하시면 비슷합니다. 그게 그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마약 카르텔과 엮이지 않으면 삶에 지장이 없으니까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던 유헌우는 직접 안다미에게 몇 번이나 전화하고서야 갑갑한 눈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우리나라 외교부에 연락하겠죠? 그쪽으로 확인해 보고 이야기합시다.”

“잔인한 말이지만, 그때쯤이면 다미 씨는 시체도 온전히 찾기 어려울 겁니다.”

“강성태 씨?”

“원장님. 언짢게 여기실 건 압니다. 이걸 보십시오.”

강성태는 환자복의 상의를 붙들어 양쪽으로 힘껏 당겼다.

어설프게 걸쳐놓은 단추가 튀어나가며 피가 배어 나온 붕대와 흉한 흉터들이 병실 형광등 아래 그대로 드러났다.

“한국에 와서 싸운 건 원장님이 잘 아실 테니까 말 않겠습니다. 그 외에 이 흉터들의 절반이 멕시코에서 생긴 겁니다.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이두안 회장의 딸은 이미 시체로 발견됐을 거고요. 제가 지금 과장했다고 여기십니까?”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진통제와 항생제 처방만 부탁드립니다. 내일 오전에 가장 빠른 비행기로 멕시코로 가겠습니다.”

유헌우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면 중간에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어요.”

“배가 갈라지든, 상처가 벌어져 염증이 생기든, 가야 합니다. 원장님이 도움을 안 주셔도 갈 겁니다.”

질린 얼굴로 유헌우는 대답조차 못 할 때였다.

문이 열리며 흑인 경호원 존 보스만과 이두안이 병실로 들어왔다.

이두안을 본 유헌우가 놀란 눈으로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설마 안 선생 때문에?’

이제야 어느 정도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모양으로 유헌우의 얼굴에 당황한 감정이 떠올랐다.

침대 발치로 다가온 이두안이 유헌우에게 먼저 짧게 눈인사를 건넸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함께 들으셔도 됩니다.”

이두안의 요청을 강성태가 거절했다.

당황한 유헌우가 번갈아 고개를 돌렸는데 이두안은 불쾌한 눈매로 강성태를 내려다보았다.

“멕시코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라면 함께 들어도 되는 분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새 알고 있었군.”

불쾌한 눈매를 하고도 이두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를 대신해 현지 책임자로 임명한 사람이 버트 그레인이지. 그에게 상황을 알아보고 할 수 있다면 몸값 협상에도 응하겠다고 전했네.”

영어를 알아듣는 유헌우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미스터 강. 내가 이 시간에 직접 온 이유는 자네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서일세.”

“그렇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 돕지.”

“멕시코 시티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비행 편 일등석, 쿠크리를 가져갈 수 있는 출입국 협조, 멕시코에서 사용할 방탄조끼와 무기, 우선 그 정도입니다.”

“흐음.”

이두안은 한 템포 여유를 가진 뒤에 입을 열었다.

“그 몸으로 가봐야 도움되지 않아.”

“제가 알아서 합니다.”

“정보가 없다면 어차피 멕시코에 가서도 치료만 받고 있을 게 아닌가. 우선 버트 그레인이 기본 정보를 얻을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 보세.”

“세타스 카르텔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목적지는 레게로 주 근처일 거고요.”

강성태의 말에 이두안과 존 보스만의 눈빛이 변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반응을 지켜보며 유헌우는 납치라는 확신을 얻은 눈치였다.

“버트에게 그렇게 전하지. 그 역시 레드워터 출신이니 내 말대로 하루나 이틀만 기다려 보세. 최소한의 정보를 얻는다면 내 개인 비행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처리하겠네. 공항을 통과하기 훨씬 수월할 거야.”

숨이 턱턱 막히도록 갑갑했지만, 더 조르기도 어려워서 강성태는 잠자코 숨을 내쉬었다.

침착하자.

강성태는 환자복 상의를 추슬러서 드러난 몸을 덮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 쪽에서도 정보를 확인하고 있으니까 확인되면 내일이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자네의 정보망이라면 신뢰할 수밖에 없지. 그 점은 약속하겠네.”

조금은 홀가분해진 얼굴로 이두안은 잠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안전에 최선을 다했네. 자네도 현지 사정을 알다시피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누군가 엄청난 돈과 위협을 가한 것으로 보이고.”

“이해합니다.”

“멕시코에서는 납치와 관련해 최대한 협조하겠지만, 우리 회사가 파견했기 때문에 최종 책임은 내게 있다고 전해왔네.”

듣고 있던 유헌우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한마디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이만 가겠네. 의료팀의 구출을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우선 몸을 살펴.”

“회장님.”

강성태는 몸을 돌리려는 이두안을 나직하게 불렀다.

“닷새 뒤였던 의료팀 선발진의 일정을 급하게 당기신 이유를 들을 수 있습니까?”

경호원으로 일하던 당시였다면 건네지 못할 질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두안의 경호원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안다미와 동료 두 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어서 정확한 이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유헌우를 먼저 돌아본 이두안은 잠시 망설였다.

“출발하게 되면 알려주지.”

“저 때문이었습니까?”

팽팽한 긴장이 강성태와 이두안 사이에서 피어나 주변에 퍼져나갔다.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니까 출발할 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세.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더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건넨 이두안이 몸을 돌렸다.

강성태를 향해 고갯짓을 보인 존 보스만이 이두안의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고, 그렇게 두 사람이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힌 직후였다.

서 있기 힘겹다는 투로 유헌우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가 궁금해서 눈치만 살피는 최치곤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려주는 것보다 지금은 유헌우와의 대화를 마치는 게 중요했다.

“멕시코 정부가 안전을 보장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이 마약 카르텔과 거래하는 나라입니다.”

방금 이두안과의 대화를 들어놓고도 유헌우는 또다시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강성태를 보았다.

“대통령이 다음 대통령 후보를 지목합니다. 그런 선거 방식 때문에 현 대통령은 자신의 부패를 눈감아줄 후보를 지명합니다. 또, 그런 부패를 누구보다 마약 카르텔이 정확하게 잡아서 현 대통령이나 후보와 거래합니다.”

“믿을 수가 없네요.”

“몇 시간 안으로 최소한의 정보가 올 겁니다. 처방을 부탁드립니다.”

“현지 우리 대사관에 연락하면 도움받을 게 있지 않을까요?”

“원장님.”

강성태는 나직하게 유헌우를 불렀다.

“납치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일어납니다. 하나는 돈, 다음 하나는 납치범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다미 씨 일행을 납치한 건 돈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입니까? 돈이 아니면 의사들을 납치해서 뭘 하려고요?”

“멕시코 쪽으로 파견되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방송이 떠들면 떠들수록 다미 씨와 의사 두 분이 처참하게 살해될 확률이 높습니다.”

“내가 모르는 게 또 있나요?”

강성태의 눈을 본 유헌우의 어깨가 축 처졌다.

뻑뻑한 침묵이 흐른 뒤였다.

“성태 씨가 가면 방법이 있습니까?”

“최소한 구해낼 확률은 높아질 겁니다.”

“확신할 수 있습니까?”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네요. 이런 일에 확신이 있을 리가 없지요.”

혼잣말처럼 대꾸한 유헌우가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두안이 했던 말을 떠올리는 눈치였다.

“성태 씨 덕분에 딸이 안전했다고 하더군요. 6개월을 입원해야 하는데 두 달 만에 경호에 나섰다고도 했고요. 그러네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쏟아낸 유헌우가 비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얼핏 보면 함께 멕시코로 가겠다고 할까 싶을 만큼 다부진 표정이었다.

“최선을 다해봅시다.”

밑도 끝도 없는 각오를 남긴 유헌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급하게 병실을 나섰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