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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 - 17화 (146/513)

7권 - 17화

아침 햇살이 창을 타고 들어왔다.

네모난 창의 형태 그대로 침대를 비춘 햇살은 강성태의 손을 잡고 기도하듯 잠든 안다미의 볼을 쓰다듬었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그녀는 눈을 몇 차례 껌벅였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여러 가지 수치를 보여주는 모니터를 먼저 확인한 안다미는 이어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바라보는 강성태는 곱상한 인상이었다.

흉터와 상처들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이마, 눈, 코, 턱선의 모든 것이 매력적인 남자였다.

동화처럼 눈을 떠서 안다미를 향해 미소 지어주면 좋으련만, 잠자는 숲 속의 왕자인 양 강성태는 여전히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강성태를 바라보던 안다미는 옆 침대의 최치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저건 습관일까, 아니면 타고난 잠버릇일까?

하필이면 바지 앞섶에 손을 찔러 넣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지, 확실히 최치곤은 자는 모습만으로도 기분을 망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선을 돌린 안다미는 침대를 짚고서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강성태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체온은 정상이었다.

밤사이 네 번이나 강성태를 살핀 스태프들도 특별한 이상은 없다는 의견을 전해주었다. 무엇보다 부친 안호상과 유헌우 원장 모두 오늘쯤 깨어나리라 예상했다.

거기에 더해 유헌우는 푹 잘수록 강성태에게 좋은 거라는 알기 어려운 의견도 주어서 지금 자는 모습이 그다지 염려되지는 않았다.

“나가봐야 해요. 오후에 올게요.”

강성태에게 말을 건넨 안다미는 조심스럽게 병실을 나섰다.

강성태와의 관계를 의식해서인지 복도를 지키고 있던 덩치들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는데 안다미는 시선을 떨군 채 반응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층으로 내려간 다음이었다.

안다미는 유원우 원장의 진료실로 향했다.

“원장님 나오셨어요?”

“어제 못 들어가셨어요. 지금 안에 계시고요.”

“고맙습니다.”

간호사에게 인사한 안다미는 노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진한 커피 냄새가 안다미에게 달려들었다. 그래서인지 안다미는 조금 전에 병실을 나왔는데도 가슴이 아릴 정도로 강성태가 그리웠다.

“원장님?”

“일어났어? 아까 가보니까 자고 있어서 그냥 뒀더니.”

“그러셨어요?”

보기 좋은 웃음을 지은 유헌우가 책상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커피?”

“감사합니다.”

의자 뒤쪽 테이블에서 커피를 따른 유헌우가 소파로 움직였다.

“내일 출국인데 준비도 해야지? 박사님과 식사도 하고.”

“네.”

답을 한 안다미는 뜨거운 커피를 입에 넣었다.

“원장님. 전에 성태 씨에게 주셨던 영양제 있죠? 그게 뭐예요?”

“그거?”

안다미의 시선 앞에서 유헌우는 아쉽고 난처한 눈치였다.

“임상시험용 치료제라고 생각해. 그나마 다른 환자에게 투여하고 조금 남은 거 사용한 거라 더 구하기도 어려워. 왜? 강성태 환자에게 투여하고 싶어서?”

구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은 뒤라서 안다미는 가벼운 미소만 짓고 말았다.

“강한 사람이니까 일어날 거야. 지금 깊게 자는 것도 어느 정도는 그 치료제의 효과를 보는 걸 테고. 그보다는 가기 전에 박사님과 풀고 가. 하필 이런 일이 있어서…….”

말끝을 흐린 유헌우가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

곤잘레스 이두안은 눈썹을 매만지며 서류를 넘겼다.

“미스터 강이 활동하려면 최소 2개월은 걸릴 테니까 그동안 책임자는 이 계획서대로 하지.”

만년필을 들어 사인한 이두안은 앞에 선 비서에게 고개를 들었다.

“안전에 특히 신경 써. 말 그대로 선발진이니까 위험한 지역은 피하고, 답사 위주로 스케줄을 짜서 진행해.”

“알겠습니다.”

“출발 시간은?”

“오전 5시 10분입니다.”

이두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가 바로 몸을 돌렸다.

그가 물러가기 무섭게 또 다른 비서가 다가왔다.

“사건은 조용하게 묻히는 눈치입니다.”

“항상 사건은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해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터지지. 혹시 모르니까 계속 집중해. 정보를 얻는 일도 게을리 하지 말고.”

“제이 브라이튼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심해도 되겠군.”

보고가 만족스럽다는 듯 이두안은 이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5분만 쉬지.”

고개를 숙인 비서가 옆방으로 향하자, 이두안은 만년필의 끝을 양손에 걸고서 의자에 몸을 묻었다.

호텔이라고 여기기에는 터무니없이 넓은 공간에서 이두안은 맞은편에 걸어둔 커다란 멕시코 지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알게 모르게 엄청난 협박과 회유가 있었다.

한국으로 향한 것도 도피의 일종이고.

포기하기를 바라는 마약 카르텔에게 내일 출발하는 선발진은 이두안 계획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어떤 저항이 있을까?

그렇게 잠시 지도를 보고 있던 이두안은 곧바로 몸을 세우고 호출 버튼을 눌렀다.

“협력사 현황 보고받지.”

- 예, 회장님.

냉정한 표정 아래로 잡념과 근심을 감춘 이두안은 들어서는 비서에게 시선을 주었다.

**

집에 들러 샤워를 마친 안다미는 커다란 트렁크 세 개를 가득 채우며 오전을 보냈다.

11시경 집을 나선 그녀는 부친 안호상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향했다.

“원장님은요?”

“진료 중이세요.”

“뒤에 환자 없죠?”

“네. 점심 전 마지막 진료세요.”

간호사의 답을 들은 안다미는 잠시 대기실에 앉아 기다렸다.

환자가 나온 다음이었다.

순서를 기다렸던 환자처럼 안다미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흰색 가운을 벗던 안호상이 누군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뻑뻑하고 불편하며 어색한 표정으로 재킷을 집었다.

“점심 드실 거죠?”

답은 없었다. 그렇다고 거절한 것도 아니었다. 안호상은 그저 재킷을 들고 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원장실을 나섰다.

“다녀오세요.”

간호사의 인사를 받으며 나선 두 사람은 병원 후문을 통해 식당가로 향했다.

“불고기 먹어요.”

힐끔 안다미를 돌아본 안호상이 단골 식당으로 향했다.

늘 그랬듯이 안쪽 방으로 안내한 종업원이 앉기 무섭게 고기를 올려주었다.

안다미가 미운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안쓰럽고, 떠나는 것이 못내 서운한데 그 모든 감정이 다시 미움으로 바뀌는 복잡한 변화가 안호상의 눈과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불고기를 앞에 둔 사람들처럼 안호상과 안다미는 손을 움직였고, 입에 음식을 담았다.

“아빠.”

식사 중간에 안다미가 부르자 움찔한 안호상이 입에 있던 음식을 힘겹게 삼켰다.

“제 선택이 못마땅하신 거 알아요. 아빠 뜻을 따르지 못해 죄송하고요. 그렇지만 아빠를 존경하는 마음은 변함없어요. 멕시코에 가서 힘들 때면 아빠 생각이 가장 먼저 날 거예요.”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려는 듯 안호상은 입술에 굳게 힘을 주었다.

“닷새 뒤라고 했지?”

“내일 오전 5시 10분 비행기로 당겨졌어요.”

놀란 눈을 했던 안호상이 뾰족한 칼에 옆구리를 찔린 것처럼 아픈 표정을 지었다.

“필요한 건?”

“옷이랑 필요한 거 다 준비해놓고 왔어요. 오후에 엄마한테 갔다가 병원에 있을 생각이고요.”

“그놈은?”

“아직요.”

인상을 찌푸린 안호상을 향해 안다미는 평소 부친을 향해 보이던 미소를 그렸다.

“아빠, 나 잘 다녀올게요.”

울컥 눈물이 올라온 안호상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눈과 입술에 힘을 꾹 주며 버티던 안다미는 급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조금 전까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앉았던 자리가 텅 비었다.

억지로 감정을 누르던 안호상은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는 눈을 가리며 울음을 쏟아냈다.

**

병원의 하루는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이병렬과 최치곤은 서달수가 준비한 갈비탕을 먹을 정도였고, 김진용도 의식이 또렷하게 돌아와 걱정을 덜었다.

지루하던 병실에 김정훈이 찾아와 일을 수습하는 과정을 설명한 게 그나마 특별하다고 여길만한 일이었다.

“형님. 혹시 신사동 광택이 형님 아십니까?”

“신사동? 오광택이 말이냐?”

“예, 형님. 어제 잠깐 뵈었는데 형님더러 신사동은 쳐다도 보지 말라고 전하라십니다.”

오광택을 떠올린 이병렬은 쓴웃음을 그려냈다.

철산동에서 붙고 난 이후로 이병렬이 인정한 몇 안 되는 깡패였다. 물론 속으로야 인정하더라도 동생들 보는 앞에서 기가 꺾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한 번 찾아가 보기는 할 텐데 그 인간 독종이니까 어지간한 일은 건드리지 마라.”

“예, 형님. 그럼 몸조리하십시오, 형님.”

인사를 마친 김정훈이 고개를 깊게 숙이고 병실을 나섰다.

**

저녁을 먹고 나서부터 최치곤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얼굴로 안다미를 힐끔거렸다.

“내일 새벽에 간다며?”

“몇 번을 말해요? 새벽 5시 10분 비행기니까 여기에서 3시쯤 출발할 거예요. 불편해도 그때까지만 참아요.”

“짐은?”

“차에 실어놨어요. 공항에 도착하면 탁송기사 편에 아빠한테 보낼 거니까 차도 걱정할 필요 없고요. 됐어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나가면 바로 멕시코 아냐? 성태 좀 흔들어보면 안 돼? 거기 위험하다고 했다니까. 못 가게 할 거라고 했다고.”

“지금 내 생각해주는 거예요?”

“그렇다기보다는 가는 걸 그냥 뒀냐고 성태가 뭐라 하면 할 말이 없으니까 그렇지.”

최치곤을 향해 옅게 웃은 안다미는 다시 강성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자정쯤에 병실에 들렀던 유헌우가 안다미와 따로 인사를 나누었고, 이후로 병원 스태프가 한 번 더 강성태를 살폈다.

새벽 2시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갈 때까지 못 올 거 같아. 알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끙끙대며 침대에서 내려온 최치곤이 휠체어에 앉아 바퀴를 굴렸다.

그가 병실을 나선 뒤에도 안다미는 강성태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렇게 또렷한데 어쩐지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10분이 훌쩍 지났고, 그 뒤의 10분은 안타깝게 흘렀다.

이제 병실을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몸을 일으킨 안다미는 강성태의 머리칼을 쓸어준 뒤에 상체를 기울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눈, 코, 마지막에 강성태의 입술에 입을 맞춘 안다미는 몸을 세우고 부친 안호상에게 보여주었던 미소를 지었다.

“씩씩하게 다녀올게요. 성태 씨도 얼른 일어나요. 그래서 전화해요. 알았죠?”

안다미가 강성태에게 말을 건넨 직후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녀의 스마트폰이 울었다.

액정을 확인한 안다미가 복잡한 표정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예요.”

- 방지병원 주차장이다.

“아빠?”

- 공항까지 태워다 줄 테니까 내려와.

“알았어요. 지금 내려갈게요.”

통화를 마친 안다미는 마지막으로 강성태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뒤에 걸음을 옮겼다.

**

안다미가 떠난 병실에서 최치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는데 그림이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꼬박 침대 옆에 붙어서 있다가 갔다는 말을 들으면 강성태가 많이 힘들어할 거다.

멕시코 현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니까 나중에 가게 될지 몰라도 저 상태로 당장 몇 달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강성태의 성격상 속이 새카맣게 타서 피부색마저 검게 변할지 모른다.

“몰라, 이 씨! 알아서들 하겠지! 씨발! 나는 무슨 죄야?”

짜증이 올라온 최치곤이 혼잣말을 뱉은 직후였다.

“치곤아….”

뭐야?

벌떡 몸을 세운 최치곤은 배의 상처가 울려서 인상을 찌푸렸다.

“치곤아….”

“아후, 잠깐만!”

배를 감싼 채 악착같이 침대에서 내려간 최치곤은 휠체어 앉아 강성태에게 다가갔다.

왼손으로 마스크를 벗은 강성태가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정신이 드냐?”

“병원…이냐?”

“응. 방지병원.”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냐?”

“이틀째야. 태완이 형님이 깨어나서 병원 옮겼고, 뒷수습도 해준 덕분에 잘 넘어가는 거 같아.”

빠르게 상황을 전해준 최치곤은 잠시 망설인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만나는 의사 선생 말이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꼬박 네 옆에 있었고, 오후에도 와서 내내 있다가 조금 전에 출발했다.”

‘출발?’

뜻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강성태를 보며 최치곤은 입술을 핥았다.

“저기, 다미 씨 멕시코 갔어.”

“뭐……?”

“멕시코 갔다고. 오늘 새벽 출발로 일정이 당겨졌다더라. 5시 10분 비행기니까 지금 막 출발했겠다.”

최치곤의 끝나기 무섭게 강성태는 왼팔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야! 너 지금 일어나면 상처 다 찢어져!”

“끄응.”

“성태야!”

최치곤이 당황해서 부르는 소리에도 강성태는 끝내 침대에서 몸을 세웠다.

“지금 몇 시냐?”

“5시 5분.”

시간을 알려준 최치곤은 마른침을 삼켰다.

눈이 붉게 물들 정도로 고통이 심한 강성태가 다리를 돌려 침대에서 내려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 강성태!”

최치곤이 부를 때였다.

링거줄을 길게 끌고 간 강성태는 창턱을 붙들고 어두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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