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 - 16화 (145/513)

7권 - 16화

제7장. 확신이 섰어요.

거대한 덩치의 흑인 남자 뒤로 유헌우와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안다미가 침대 옆에서 몸을 일으킬 때는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들 여섯 명이 들어와 침대와 병실 입구 사이를 막아섰다.

경호에 익숙한 태도, 곱슬머리, 짙은 쌍꺼풀, 갈색이 도는 피부를 보며 안다미는 ‘혹시 이 사람이?’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안 선생.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님. 성태 씨와 멕시코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다네. 국회 보사위에서 주선한 거라 면회를 거절할 수 없었어.”

궁금한 시선의 안다미에게 유헌우가 알려준 내용이었다.

역시 안다미의 추측이 옳았다.

“의사는 아닌 것 같은데 미스터 강과 어떤 관계입니까? 아! 실례했습니다. 곤잘레스 이두안입니다.”

“안다미에요.”

한 템포 늦게 자신을 소개한 이두안이 손을 내밀었고, 안다미가 마주 잡았다.

“이제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3년 뒤에 결정될 거라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군요. 3년 뒤에 결정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곤잘레스 이두안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안다미의 답을 기다렸다.

“다미 씨는 서라대학병원의 의사입니다. 이번에 멕시코 의료 지원 사업에 선정돼서 3년을 해외에서 근무해야 합니다.”

유헌우의 설명을 듣던 이두안이 묘한 미소와 함께 안다미를 돌아보았다.

“파견 의사 명단을 확인한 미스터 강의 반응이 평소와 다르더니 닥터 안 때문이었나 보군요.”

“성태 씨가 명단에 관해서 특별하게 한 말이 있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미스터 강은 닥터 안을 감추고 싶어 했지요.”

여유롭게 대꾸를 건넨 이두안이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시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안다미가 비켜준 공간으로 들어간 이두안은 물끄러미 강성태를 내려다보았다.

“늘 변함없는 사람입니다.”

강성태를 내려다보던 이두안이 혼잣말처럼 내린 평가였다.

“멕시코에서도 이랬었죠.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당시가 떠올랐는지 이두안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더 강성태를 지켜본 뒤에 고개를 들었다.

“멕시코에서 고작 세 명을 데리고 납치 조직 70명을 상대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딸 로라의 납치 계획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일로 2개월을 꼬박 침대에서 보냈지요.”

그런 일이 있었어?

안다미는 물론이고, 유헌우마저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담당 의사가 6개월은 입원해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두 달 만에 퇴원해 나와 로라를 지켜준 사람입니다. 강한 남자입니다. 미스터 강은 이번에도 틀림없이 일찍 일어날 겁니다.”

말을 건넨 이두안이 안다미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냈다.

“지킬 사람이 있을 때, 더 강해지는 사람입니다. 경호 대상이 위기에 빠지는 순간에는 누구도 미스터 강을 막을 수 없지요.”

말을 하는 이두안의 눈이 ‘미스터 강이 지켜야 할 대상이 바로 당신이오.’라는 듯 안다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이러지?

안다미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용무가 끝났다는 투로 이두안은 유헌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치료는 충분합니다. 그래도 바라는 게 있다면 조용하게 치료하고 싶습니다.”

“병원과 미스터 강이 드러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습니다.”

유헌우의 요청을 이두안은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리고는 더할 수 없이 적절한 대꾸를 내놓았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닥터 안. 의료 지원에 나서준 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일정이 조금 더 빨라질 수 있겠지만, 닥터 안의 협조를 바랍니다.”

“2주에서 닷새로 줄었어요. 그 여유가 더 줄어든다는 말인가요?”

“선발진의 일정만 조절될 겁니다. 닥터 안이 선발진에 포함되었던가요?”

질문과 달리 이두안은 이미 선발진의 명단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거기에 일정이 조절될 거란 말 또한 즉흥적인 결정으로 느껴졌다.

왜 이렇게 서두르지?

강성태에게도 멕시코로 와달라는 제안을 했다고 들었다. 그 제안에 안다미가 모르는 어떤 조건이 있을까?

안다미가 답을 내놓지 않자 이두안은 작별을 고하는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멕시코에서 다시 만나면 차나 식사를 함께하길 바랍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 역시 기쁜 일이었습니다, 닥터 안.”

안다미와 악수를 나눈 이두안은 강성태를 돌아본 뒤에 몸을 돌렸다.

흑인 남자가 앞섰고, 안다미에게 눈짓을 던진 유헌우와 이두안이 그 뒤를 걸었으며, 병실 입구를 지키던 남자들이 훈련된 동작으로 문을 나섰다.

찜찜한 무언가가 남는 만남이어서 안다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가 강성태의 침대 옆 의자에 앉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휠체어에 앉은 최치곤이 들어왔다.

“여기서 나간 분이 곤잘레스 이두안이라는 재벌 맞아?”

“그렇다고 하네요.”

“인사했어?”

“했어요.”

말투 참 한결같다.

한마디를 쏘아주려던 안다미는 그것도 지친다는 느낌에 한숨만 나직하게 뱉었다.

“에이 씨! 이왕 올 거면 내가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오지. 헬로우, 아이엠 치곤 최! 아이 엠 올드 프렌드. 베리 베리 올드 프렌드. 이렇게 영어도 되는데.”

혼자 흥분한 최치곤에게서 관심을 끊은 안다미는 강성태의 손을 쥐었다.

멕시코에서도 이랬단다.

이두안의 딸을 지켜내고 6개월을 입원하라는 권유에도 두 달 만에 다시 경호에 나섰단다.

“잘했어요. 성태 씨.”

영어 문장을 떠올리던 최치곤이 돌아보았는데 안다미는 강성태를 눈에 담고 있었다.

“이두안 회장의 말을 듣고 나서 확신이 섰어요. 이번에도 성태 씨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했을 거라는 확신이요. 고마워요, 성태 씨.”

‘나는?’

최치곤이 검지로 얼굴을 가리켰으나 안다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최치곤은 알 길이 없었다.

**

김진용은 오후 4시 10분쯤 눈을 떴다.

얼굴은 말할 것 없고 온몸이 퉁퉁 부었는데 얼굴과 목덜미, 손에 검붉은 피멍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형님?”

침대 옆을 지키고 있던 조봉진이 몸을 세우며 힘겹게 눈을 뜬 김진용을 들여다보았다. 척 봐도 김진용은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가게는…?”

“예? 형님?”

“너까지 여기 있으면 프리 스테이션 영업은 누가 하냐고?”

겨우 눈을 뜬 김진용이 가게 영업을 걱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봉진은 대답조차 내놓지 못했다.

“영업을 왜 네가 걱정해?”

그때 서달수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은 이병렬이 침대를 빙 돌아 김진용이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했다.

“형님…….”

“태완이 형님 깨어나서 병원 옮겼고, 수습도 생각보다 잘되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한숨 더 자.”

“성태 형님은…, 어떠십니까?”

“수술 끝나서 바로 옆 병실에 있다. 아직 의식이 없어서 기다리는 중인데 너도 알다시피 며칠만 지나면 펄펄 날아다닐 테니까 우리가 빨리 낫는 게 급해.”

강단 있게 김진용을 다독인 이병렬이 말끝에 헛웃음을 달았다.

“피를 그렇게 봤는데도 배고프니까 육개장이 생각난다. 거기 사장님이 네가 가야 건더기 많이 주니까 빨리 일어나.”

“예, 형님.”

김진용이 눈을 뜬 덕분에 근심 하나를 덜었다.

이제 한 명 남았는데 워낙 부상이 커서 그게 걱정이었다.

강성태를 떠올린 이병렬이 착잡한 심정으로 입맛을 다실 때였다.

문이 열리고 김정훈이 들어왔다.

혹시나 싶어 병실에 함께 들어온 영등포 덩치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김정훈은 상체를 깊게 숙였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형님?”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너는 괜찮아?”

“숙소 동생들이 막아준 덕분에 크게 다친 곳은 없습니다, 형님.”

아닌 게 아니라, 김정훈이 멀쩡한 대신 함께 나섰던 숙소 덩치들 22명 중 마지막에 서 있던 놈은 셋밖에 되지 않았다.

“태완이 형님은?”

“그렇지 않아도 태완이 형님 뵙고 오는 길입니다. 형님.”

안을 돌아본 김정훈이 이병렬을 향해 말을 이었다.

“태완이 형님께서 일어나시면서 수습이 빨라졌습니다, 형님. 그리고 숙소 동생들이 신호남파 정리 중입니다, 형님.”

“동팔이네 숙소 일도 있고, 클럽 일도 있는데 지금은 눈치 좀 살피는 게 좋지 않겠냐?”

“도진이 형님이 워낙 독고다이로 지내셔서 말입니다, 형님. 인심을 많이 잃었습니다, 형님. 태완이 형님이 선배들 연결하신 데다 조 변호사님이 카지노 지분 인수하고, 또 검찰에서 눈 감겠다는 언질도 받으신 모양입니다, 형님.”

백억을 썼고 필요하면 더 가져가겠다더니 조태완의 수완은 확실히 남달랐다.

“태완이 형님이 고문으로 가시면서, 형님을 태완이파 보스로 정하셨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형님. 김정훈입니다, 형님.”

양손을 늘어트린 김정훈이 상체를 깊숙하게 숙여 인사했다.

이병렬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덤덤하게 김정훈을 보았다.

사건 뒷수습과 신호남파까지 정리한 조태완이 정말 순순히 고문으로 물러난다는 건가?

그가 마음을 악하게 먹으면 병원에 있는 이병렬은 적수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김정훈을 보내 앞뒤를 설명하는 건 누가 뭐래도 강성태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강성태가 없다면?

조태완은 이병렬을 작업하라고 김정훈을 보냈을지 모른다.

“여기 달수랑 동생들하고 인사부터 해.”

이병렬이 고개로 가리키자 서달수가 손을 모으고 인사했고, 이어 방을 채운 영등포 덩치들이 서열에 따라 상체를 숙였다.

“식구들끼리 인사는 보스 일어나실 때까지 미루자. 세 가지만 지켜. 마약 안 된다. 물뽕부터 하다못해 떨이까지, 그런 놈이 있으면 무조건 내보내. 다음으로 사람 장사랑 고리 하지 마라.”

“예, 형님.”

김정훈은 공손하게 답을 내놓았다.

“종수 형님하고 영권이는 내일이나 오지 싶습니다. 신호남파 정리 끝나면 숙소 관리하는 동생들과 업소 담당하는 동생들 데리고 찾아뵙겠습니다, 형님.”

“바쁜데 굳이 그럴 게 뭐 있어? 다른 거 없으면 너도 이제 그만 가 봐. 여기저기서 찔러보려고 오는 곰들 많을 테니까 신경 쓰고.”

“예, 형님. 쉬십시오, 형님.”

마지막으로 상체를 숙인 김정훈이 서달수의 인사를 받으며 병실을 나섰다.

태완이파 보스가 되었다는 말을 들어서 그럴까.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서는 영등포 덩치들의 몸짓과 표정에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병렬이 태완이파와 신호남파를 동시에 거느린 보스가 됐단다. 거기에 수완과 재력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조직 고문이 조태완이고.

검찰, 국회, 연예계, 언론, 심지어 전국의 조직 선배들에게도 인심 한 번 잃지 않았다는 조태완이 말이다.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도 한데 뭔가 가슴을 누르는 듯한 중압감에 이병렬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람이 분수에 안 맞는 자리에 올라가면 죽는다던데?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 이병렬은 헛웃음을 토해냈다.

이게 다 강성태란 한 남자가 만든 성과였다.

심지어 조태완이 욕심을 접고 뒤로 물러난 것 역시 강성태의 존재 덕분이었다.

쿠크리를 들고 광룡의 조직원들에게 뛰어들 때는 솔직히 이병렬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씨발.’

생각을 이어가던 이병렬은 불쑥 올라오는 욕을 삼켰다.

그런 강성태에게 죽어라고 달려들었으니 팔다리가 멀쩡한 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건 그렇고.

“달수야.”

“예, 형님.”

“클럽이나 카지노 쪽으로는 아예 눈길도 주지 마라. 진용이, 너, 봉진이한테 오만 잡놈들이 달려와서 아양 떨 건데, 그런 거에 넘어가면 먼저 내가 죽고, 다음에 너희가 죽는다.”

“예, 형님.”

이병렬이 진심을 담아 건넨 경고에 서달수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

강성태의 침대 옆에서 고민하던 안다미는 마음을 굳혔다.

출국을 앞뒀다고 일을 소홀히 할 생각 따위 없었다. 그러나 아직 의식이 없는 강성태를 걱정하며 환자를 보다가는 무슨 실수를 할지 염려됐고, 또 새벽 수술과 꼬박 새우다시피 한 전날 밤 탓에 실제로 눈마저 침침했다.

‘하루만.’

출국 전에 하루쯤 강성태 곁에서 밤을 보내겠다는 생각에 안다미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녀가 막 병원 번호를 찾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출근을 독촉할 생각인지 병원의 번호가 액정에 올라왔다.

어쩌면 새벽에 튀어나온 것 때문에 욕을 산더미처럼 먹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치곤이 옆 침대에 있어서 통화버튼을 누른 안다미는 빠르게 볼륨을 줄였다.

“네. 여보세요?”

- 안 선생?

“네, 선생님.”

- 미안한데 출국이 내일모레 새벽으로 바뀌었네.

“예?”

- 우리도 황당하기는 한데, 저쪽 사정이 아주 급한가 봐. 그래서 말인데, 오늘부터 오프하고, 아예 내일모레 출국하는 거로 하자. 괜찮아?

예상하지 못한 통보를 들으며 안다미는 오후에 보았던 곤잘레스 이두안을 떠올렸다.

- 안 선생?

“예, 선생님.”

- 다른 두 사람한테는 모두 연락했거든. 안 선생이 마지막인데 되겠어?

운명이 함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마저 훼방 놓는 느낌에 안다미는 강성태를 돌아보았다.

- 안 선생이 곤란하면 이 선생으로 바꾸고. 그럴 거면 최대한 서둘러서 좀 나와줘.

어차피 갈 생각이었다.

여기에서 주저하면 부친은 강성태 때문에 맡은 일도 제대로 못 한다고 비난할 거다.

“제가 갈게요, 선생님. 비자랑 서류 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 비자는 도착해서 처리한다고 들었어. 그럼 오늘부터 오프로 처리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짐이랑 준비해. 비행편과 시간은 문자로 보내줄게.

“예, 선생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아쉬운 얼굴로 앉아 있는 안다미를 최치곤이 궁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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