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 14화
강성태를 병실로 옮긴 건 오후 1시가 다 되어서였다.
특실을 세 개 잡았다.
강성태가 누운 방에 최치곤이 함께 들어갔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김진용 옆자리에 이병렬의 침대를 놓았다. 중환자실이 없는 방지병원에서 스태프를 5층에 올리는 바람에 응급실에 있던 조태완도 특실로 옮길 수 있었다.
처음 보는 기계들이 즐비하게 올라왔고, 병원 스태프들이 5층 프런트에 대기하며 수시로 환자들을 살폈다.
서달수와 영등포 덩치들이 5층으로 올라온 덕분에 병원 입구와 주차장에서 보였던 살벌함도 가렸다.
안호상과 안다미는 유헌우 원장의 개인 사무실 겸, 휴게실로 사용하는 공간의 소파에 마주 앉았다. 한숨을 주고받는 동안 탁자에 놓인 커피가 온기를 반쯤 잃을 정도로 덧없이 시간이 흘렀다.
“가야겠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던 안호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다미는 달다 쓰다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소파를 빠져나간 안호상은 문을 나서기 전에 안다미를 돌아보았다.
상처 똑똑히 봤지? 칼에 맞았다.
저러고 살아!
저놈이 당하기만 했겠냐!
다른 놈 몸뚱이를 저렇게 만들었을 텐데 교도소라도 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고작 저런 놈에게 인생 망치는 걸 보려고 혼자 너를 키운 줄 알아!
내가 아니라 네 인생이 망가진다고!
제발 정신 좀 차려!
용암처럼 솟구치는 고함을 안호상은 입술에 힘을 꾹 주며 삼켰다.
“닷새 뒤에 출국해요.”
“끝내 선택을 안 바꾸겠다는 게냐? 저 꼴을 보고도?”
“성태 씨가 변하면 끝날 거예요.”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도 3년이나 나가 있겠다고?”
“아빠 딸이잖아요.”
마지막에 안다미가 던진 말에 안호상은 세상 무너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문의 손잡이를 당기는 그의 고개와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
병실로 옮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밤을 새운 데다 주사제의 영향 탓에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운 데도 이병렬은 휠체어에 앉아 악착같이 버텼다.
아무리 의지를 발휘한다고 해도 한계는 분명했다.
김진용의 몸에 연결된 기계에서 일정하게 울리는 소리,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밤을 꼬박 새운 뒤에 밀려드는 피곤함에 이병렬의 눈이 무겁게 내려앉을 때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서달수가 병실로 들어왔다.
눈을 끔벅인 이병렬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잠을 털어냈다.
“형님. 아침에 왔던 조철호 변호사가 젊은 여자 분과 다시 왔습니다. 형님께 말씀드리면 아실 거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잠시 창을 돌아보며 시간을 끌던 이병렬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봉진이 아직 병원에 있냐?”
“예, 형님.”
“그럼 봉진이를 태완이 형님 병실에 넣어. 지금 왔다는 젊은 여자를 안에 들여보낼 거니까 물이고 약이고, 태완이 형님과 관계된 건 절대 손 못 대게 지키라고 단단히 전하고.”
“알겠습니다, 형님.”
“그렇게 한 뒤에 조 변호사와 여자를 5층으로 데려와.”
“예, 형님.”
고개를 짧게 숙인 서달수가 병실을 나섰다.
**
김종수는 파김치가 된 몸을 호텔 소파에 축 늘어트렸다.
“에이, 씨발.”
조태완은 가망 없고, 문도진마저 깨졌으니 솔직히 말해서 클럽 하나쯤 손에 쥘 기회였다. 거기에 운이 좀 따라줬다면 카지노 지분에 침 바를 수도 있었다.
“어흐, 병신!”
정영권을 떠올린 김종수는 답답한 심정을 대신해 욕을 뱉어냈다. 두 번 다시 없을 기회가 생겼는데 정영권은 김정훈의 지시대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처음부터 김종수가 원하는 대로 당차게 움직였다면 결과는 지금과 확연하게 달랐을 거다.
그건 그렇고.
막판에 미친놈처럼 설쳐댄 김정훈은 또 왜 강성태에게 끔뻑 가서 조직 큰형님 모시듯 숙이는 건지, 이럴 때 독하게 마음먹으면 태완이파와 신호남파가 모두 김정훈의 몫이 아닌가 말이다.
‘전화라도 한번 해 봐?’
탁자에 놓인 스마트폰을 내려다봤던 김종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강성태에게 충성하는 김정훈이 버럭 달려들면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
혹시나 김정훈이 김종수의 뜻대로 움직여서 태완이파와 신호남파를 먹었다고 치자.
만에 하나, 강성태가 깨어나면……?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일이었다.
“그나저나 태완이 형님은 힘도 좋아.”
언제 젊은 애는 들여앉혔는지 원.
이거저거 귀찮은 김종수는 정장을 입은 그대로 소파에서 눈을 감았다.
잠깐이라도 잠을 자둘 필요가 있었다.
**
점심시간이 지나 한숨 돌린 이은주가 재료들을 살필 때였다.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김민정이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네. 잘 지내셨죠?”
이제는 낯이 익어서 스스럼없이 인사한다. 두 사람 모두 강성태의 여동생 느낌이라서 묘한 공감대도 있었다.
“마실 거 드려요?”
“오빠는요?”
“매니저님이요? 오늘 안 나오셨어요.”
“어디 갔는지 아세요?”
어설픈 핑계로 말 돌려봐야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점을 이은주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만큼 김민정의 음성과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전화해보셨어요?”
“안 받아요.”
이은주는 듣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피는 척 홀을 돌아보았다.
“저기요.”
“무슨 일이에요? 아는 대로 말해주세요.”
“매니저님하고 제 친구가 좀 깊은 사이가 됐나 봐요. 지난번에 인사하셨죠?”
평소 같으면 훅 빨려들었을 김민정이 지금은 진실을 알아내겠다는 듯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제 친구가 야간이거든요. 아침 7시에 전후로 퇴근하는데 그때쯤 꼭 매니저님 집에 들러 함께 있는 눈치예요.”
“정말요?”
“네에.”
확신에 찬 이은주의 답에 김민정은 날카로움을 반쯤 내려놓는 눈치였다. 착한 사람에게 거짓말한 게 켕겨서 이은주는 흔들리는 눈빛과 표정을 감추려 커피 머신으로 움직였다.
“치곤이 오빠 아시죠?”
“예?”
“오빠가 다미 씨와 함께 있어서 전화를 못 받는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치곤이 오빠도 전화를 안 받아요.”
“원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시잖아요. 여기도 오후 3시나 돼서야 오시는데요.”
뻔뻔하게 답을 건넨 이은주는 스쿠푸를 집어 들었다.
“오늘 커피 맛있어요. 한잔 드릴게요.”
“아니에요. 정말 마시고 싶은데 지금 가봐야 해요.”
“그럼 다음에는 여유 있게 오세요. 그런데 매니저님께 급하게 연락할 일이 있으세요?”
“그보다는 지난밤 내내 엄마가 오빠 이름을 부르며 악몽에 시달렸거든요. 엄마가 좀 과한 건 있는데 정도가 심했어요. 거기에 오늘따라 전화까지 안 받으니까 걱정돼서 달려온 거예요.”
혹시 진짜 위험에 빠진 걸 이렇게 막무가내로 둘러댄 거면 어떻게 하지?
김민정의 설명을 들은 이은주의 낯빛이 착 가라앉고 말았다.
“엄마는 제가 전화하면 괜찮아질 거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혹시 오빠 오면 전화 좀 꼭 해달라고 전해주세요. 갈게요.”
절반쯤 염려를 던 얼굴로 김민정이 카페를 나섰다. 그런 뒤에 주차장을 나서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김민정이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가 보이지 않을 때, 이은주는 스마트폰을 들고서 문자를 급하게 입력했다.
**
오세아는 퉁퉁 부은 눈에 겁을 잔뜩 담고서 5층으로 올라왔다. 주의해야 할 점을 분명하게 전달한 이병렬은 그녀를 병실에 들여보냈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가고 난 다음이었다.
이병렬은 이제 그만 가보라는 투로 조철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깐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또 둘만 있어야 하는 거면 일단 가십시오.”
“이 회장?”
“저, 회장 아닙니다.”
“김종수 대표가 클럽하고 카지노 관리를 이 회장이 맡을 거라던데 아니었소?”
“그거 결정할 분이 지금 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말씀하십시오.”
이병렬의 말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강성태를 본 적이 없는 조철호가 조태완이 있는 방을 돌아본 뒤에 시선을 가져왔다.
“복도 끝에라도 갑시다. 정 불안하면 아까처럼 흉기를 지니면 되잖소.”
지친다는 표정으로 조철호를 바라보던 이병렬이 시선으로 서달수를 불렀다.
“휠체어 좀 저 끝으로 옮겨주라.”
“예, 형님.”
서달수가 휠체어를 밀자 조철호가 조용하게 뒤를 따랐다.
“됐다. 잠깐 병실 앞으로가 있어.”
고개를 숙인 서달수가 이병렬과 강성태의 병실 중간으로 움직여 이쪽을 바라보고 섰다.
“조 회장이 내 집안 조카뻘 되오.”
서달수를 확인한 조철호가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꼼꼼한 면이 있는 사람이라 유언장은 말할 것 없고, 이런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이런저런 당부를 많이 해뒀소.”
“아까는 두 가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건을 해결하는 데 일단 현금 백 억을 사용 중이고, 필요하면 좀 더 쓸 거요.”
이병렬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 조철호는 주변을 경계하듯 시선을 자꾸만 좌우로 움직였다.
“전에 있었던 재벌 총수 사건도 그렇고, 김성웅 총장이 이런 사건에 유연한 분이라 힘을 쓰고 있는데 결과는 지나 봐야 알 것 같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돈을 더 내라는 겁니까?”
“돈은 충분해요.”
딱딱하게 표정이 굳은 조철호가 이병렬의 질문을 단숨에 받았다.
“조 회장이 저대로 눈을 감으면 클럽 지분은 오세아 씨에게 넘어갑니다. 대신 운영은 병원을 지키는 이 회장에게 넘길 테니 그리 아시고.”
사무적으로 내용을 전달한 조철호가 반 박자 머뭇댄 뒤에 말을 이었다.
“아무리 손을 써도 일이 커질 때가 있소. 그럴 때는 이 회장이 열 명에서 열다섯 명 정도를 추려서 검찰에 보내주시오.”
“변호사님. 부장판사 출신이라고…. 관둡시다. 일단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이병렬은 욱하는 심정을 눌렀고, 조철호는 굴욕을 삼키느라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 가시죠?”
서달수를 향해 이병렬이 시선을 들 때였다.
조태완의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조봉진이 튀어나왔다.
결국, 조태완이 사망한 거야?
지켜보던 이병렬과 조철호의 생각이 처음으로 일치한 순간이었다.
“뭐야!”
서달수가 급하게 물었고,
“태완이 형님 깨셨습니다, 형님!”
조봉진이 큰소리로 내용을 알렸다.
“가봐야겠소!”
급하게 몸을 돌리던 조철호가 아차 하는 심정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런 뒤에 이병렬의 휠체어 뒤로 움직여 힘껏 밀었다.
**
병실에서 최치곤은 그동안 보고들은 내용과 느꼈던 점들을 적당하게 걸러서 안다미에게 전했다.
“멕시코에서 진절머리 나게 봐서 다른 건 몰라도 마약만큼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고 합디다. 내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악착같았는데 중국의 삼합회 하부조직이 나서면서 더는 피할 방법이 없었어.”
존대 반, 반말 반으로 설명을 마친 최치곤이 침대에 누워 있는 강성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멕시코에 가지?”
그리고 툭 던진 질문에 안다미가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거기 졸라 위험하다고 성태가 걱정하더라.”
“그걸 어디에서 들었어요?”
“이번에 파견인가? 아무튼, 의사들 보내달라는 양반이 예전에 성태가 경호했다는 멕시코 재벌이야.”
“아직 연락하고 있었어요?”
“그게 아니라. 그 양반이 지금 한국에 있어. 카페에 찾아왔었고, 호텔에서 보자고 해서 갔는데 성태도 와달라고 했다더구만.”
최치곤이 건넨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 안다미는 잠시 시간을 끌었다.
“세상 참 좁네요.”
머릿속이 복잡한 표정으로 안다미는 강성태의 침대를 보았다.
“위험하다던데, 성태까지 이렇게 됐으니까 거기 못 간다고 해.”
“가야 해요. 성태 씨가 이렇게 돼서 더더욱이요.”
“사람이 뭐 그렇게 냉정해? 성태 생각은 안 해?”
다른 때 같으면 쨍하는 눈빛과 함께 날카로운 대꾸를 쏟아냈을 안다미였다.
각오를 단단히 세운 최치곤이 기다리는데 안다미는 침대 옆에 놓인 강성태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서 대꾸가 없었다.
뭐지? 이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은?
침대의 등받이를 세운 최치곤이 입술을 뒤틀 때였다.
“뭐야!”
“태완이 형님 깨셨습니다, 형님!”
복도에서 서달수와 조봉진의 음성이 커다랗게 울렸다.
몸이 들썩였으나 최치곤은 혼자 침대에서 내려가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갑갑하고 궁금해서 문을 바라보던 최치곤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전화기 혹시 못 봤어?”
“원장님이 따로 보관했어요. 성태 씨가 팔에 묶고 있던 칼도 거기 있고요.”
“그걸 돌려줘야지, 왜 원장이 가지고 있어?”
“아까 의식 없었거든요? 새벽부터 그렇게 수술하면 진짜 진이 빠져요. 잠깐 주무시는 모양인데 일어나면 돌려주겠죠. 그리고,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진짜 대놓고 반말할래요?”
“큼.”
쨍하는 안다미의 반응에 최치곤은 얼른 고개를 문으로 돌렸다. 계단에 앉아 있어도 좋으니까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