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 19화
제8장. 눈치채지 못하게 해.
지켜보는 것만으로 내용을 짐작할 최치곤이었다.
통화가 지닌 무게에 눌린 모양이었다.
최치곤이 갑갑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죽고 사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김동팔이든, 조태완이든, 누군가에게 돌아갈 비참한 최후를 익히 예상하는 최치곤에게는 더 그렇게 느껴질 일이었다.
“병렬이한테 전화 좀 해주라. 지금 보잔다고.”
시선을 내린 최치곤이 운전석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는 상체를 집어넣었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돌아왔다.
잠시 후였다.
“최치곤입니다, 형님. 저녁은 드셨습니까, 형님?”
스마트폰을 귀에 댄 최치곤이 아버지인 최재섭에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공손한 태도로 이병렬의 식사를 챙겼다.
“성태가……, 성태 형님이 형님을 잠시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형님. 예? 형님? 아닙니다. 옆에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형님.”
스마트폰을 내린 최치곤이 받아보라는 얼굴로 내밀었다.
“여보세요?”
- 무슨 일인데 그래? 저녁은 먹었어?
두 가지 다른 질문이 동시에 넘어왔다.
“태완이파 오늘 정리할지 모르는데 반대로 우리가 당할지도 모르는 일 의논하려고. 저녁은 아직 안 먹었고.”
- 쉬운 게 없네.
강성태가 전한 무거운 이야기를 이병렬은 털털한 음성으로 받았다.
- 저녁 먹으면서 말해도 되지? 어디야?
“서라대학병원 앞 고수부지.”
- 그러면 프리 스테이션으로 와. 여기에서 저녁 먹자.
“알았어. 지금 출발하게.”
답을 한 강성태는 최치곤에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혹시 몰라 액정을 확인한 최치곤이 종료버튼을 한 번 더 누른 뒤에 재킷에 넣었다.
“어디로 가?”
“프리 스테이션에서 저녁 먹기로 했다.”
트렁크에 기댔던 몸을 세운 강성태가 움직이자 시선을 내린 최치곤이 바로 움직였다. 열어두었던 뒷문을 닫은 최치곤이 운전석에 올랐고, 강성태는 조수석에 앉았다.
“입이 그래서 먹겠어?”
“샌드위치 사 갈까?”
“흐히히히히.”
시동을 건 최치곤이 미친놈처럼 웃었다.
그렇게라도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고수부지를 빠져나오는 오르막을 지나며 최치곤이 입을 뒤틀었다.
“인천 연수구 갈 때 생각난다.”
“그때가 왜?”
“내 심정이 그래. 조마조마하더라고.”
“그래서 회칼 들고 뛰어들어 왔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그렇게 뛰어들었는데, 아오! 다들 멍한 얼굴로 보고 있는 거 아니냐. 내가 진짜 그날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사이, 최치곤은 두껍게 앉은 긴장을 조금씩 털어내는 눈치였다.
**
완력, 잔머리, 사람을 구워삶는 수완, 눈썰미, 밑바닥에서 술장사를 시작한 덕분에 숙일 줄 아는 인내가 지금의 조태완을 만든 밑천이었다.
소파에서 창을 노려보는 조태완의 코에서 뜨거운 김이 조용하게 쏟아졌다. 씩씩댄 거 아니다. 욕을 뱉지도 않았다. 그저 볼을 씰룩이며 무겁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원인은 오세아였다.
룸살롱 아가씨부터 탤런트와 아이돌을 수없이 상대했던 조태완에게 여자란 그저 하룻밤 욕정을 해소하는 상대였다.
눈길 가는 여자들이 사방에 깔린 데다 인기를 얻기 위해 몸 던지기를 마다치 않으니 사랑 따위 거치적거리는 일이었다.
오세아는 지금껏 시궁창에서 살던 조태완에게 천상에서 살던 고귀한 천사와 같은 느낌으로 나타났다.
스키장이었다.
하얀 스키복에 모자, 고글을 머리에 걸친 오세아를 남자들 셋이 둘러싸고 있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오세아의 선한 눈을 보는 순간 조태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거, 조태완이 가장 좋아하는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야?”
조태완이 끼어들자 남자 셋과 오세아가 동시에 놀랐다. 혼자도 아니었다. 부장 검사를 챙기러 온 길이라 김동팔과 친위부대 격인 숙소 덩치들이 함께였다.
“무슨 일이냐고?”
남자들보다 오세아가 더 놀란 눈을 했는데 그 맑은 눈망울이 조태완의 심장을 채찍질하듯이 뛰게 만들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내가 아는 애라 그렇다.”
항의하는 남자를 보며 조태완은 막힘없이 대꾸를 내놓았다.
“이리 와.”
그런 뒤에 조태완은 오세아의 팔을 당겨서 로비 안쪽의 커피숍으로 움직였다.
“어허, 어디를 가시려고?”
뒤따르던 남자 셋을 김동팔이 팔을 넓게 펴서 막았다. 뒤편에 있던 덩치들이 여차하면 주먹을 날릴 듯한 표정으로 뒤를 받쳐서 남자 셋은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김동팔은 명함을 꺼내 검지와 중지에 끼운 뒤에 내밀었다.
“여기까지 해. 그리고 서울 오면 들러. 형이 진하게 한번 살 테니까.”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김동팔의 살벌한 인상과 덩치들의 위압적인 태도에 남자 셋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김동팔이 덩치들을 데리고 커피숍으로 향한 뒤였다.
조태완이 손을 가볍게 들었다.
“예, 회장님.”
“친구들하고 왔다네. 방이 좁은 모양이다. 특실 하나 잡아와.”
“예, 회장님.”
조태완과 김동팔은 막힘이 없었다.
“저기 그러지 않으셔도…….”
“내가 우리 직원 두 명 둬서 더는 귀찮은 일 없도록 할 테니까 안심하고 놀아.”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나 보다.
오세아의 친구 둘이 놀란 눈으로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친구들?”
조태완은 능숙하게 친구 둘을 앉힌 뒤에 업소 아가씨들 관리하던 뻔뻔함에 부장 검사들을 대하던 능숙함을 흩뿌려 혼을 반쯤 쏙 빼놨다.
“회장님. 특실 준비했습니다.”
조태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동팔이 오세아의 앞에 카드 키를 놓았다.
“방 그리 옮겨. 아! 오늘 밤에 씨앤세븐 오는 거 알지?”
오세아는 겁먹은 눈으로 어쩔 줄 모르는데 친구 둘이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씨앤세븐 애들 오면 특실에 가서 인사 좀 하라고 해.”
“예, 회장님.”
“어머? 어머?”
게임이 반쯤 끝난 상황이었다.
“간다.”
조태완은 고수였다.
질척대지 않고 바로 일어섰다.
“저기…….”
일어선 오세아가 조태완을 불렀고, 친구 둘도 몸을 일으켰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부담스러워서 이런 거 싫어요.”
“그냥 살다가 행운이 떨어질 때 있잖아. 그거라고 생각해. 더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염려하지 말고.”
죽이는 멘트를 끝으로 조태완은 실제로 스키장을 빠져나왔다.
서울에서 접대해야 할 사람도 있었고, 무엇보다 맛있는 음식은 먼저 색과 모양을 살피며 기대감을 한껏 올리고, 코로 향을 충분히 즐겨야 입에 넣었을 때의 기쁨이 극대화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객실 상무에게 연락해서 투숙 기록으로 연락처 알아놔.”
“예, 형님.”
이후에도 조태완은 오세아의 부친이 하는 사업을 알아내서 챙겼고, 이모부가 교통사고로 구속될 걸 막았으며, 무엇보다 선물에 공을 들였다.
처음엔 옷, 지갑, 구두, 다음엔 독일 차.
1년을 공들인 어느 날, 오세아는 조태완의 여자가 되었다.
3년 전의 일이었다.
그 뒤에도 오세아의 선한 눈매는 변함이 없어서 명품을 조르는 일도 없었고,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태완이 1년 동안 보여준 성의와 가족을 일으켜 준 것에 감사하며 숨은 여자가 되었다.
오세아와 청담동의 단독 빌라는 김동팔과 그 숙소 놈들만 아는 사연이었다.
그걸 강성태가 말할 때 조태완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저 새끼가 칼을 박으려 했단다.
거실 유리에 비친 김동팔을 노려보며 조태완은 뜨거운 숨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내쉬었다.
청담동의 단독 빌라도 그렇지만, 지하에 둔 현금과 마약은 김동팔이 아니면 떠벌릴 사람도 없었다.
사람 참 더럽게 치사해진다.
조태완을 쓰러트린 김동팔이 청담동으로 달려가서 오세아를 덮치는 상상을 하자 조태완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이 개호로 새끼…….”
마치 강성태를 향한 것처럼 욕을 뱉어낸 조태완은 당장에라도 머리통을 으깨고 싶은 욕망을 악착같이 눌렀다.
“동팔아.”
“예, 형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 김동팔이 빠르게 다가왔다.
“강성태란 놈에게서 온 전화인데…….”
“예? 형님?”
조태완이 눈알을 희번덕거리자 김동팔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 새끼가 나를 완전히 꼬봉으로 알고 까불어서 아우라 특실로 오라고 했다. 말은 문도진하고 광룡을 상대할 계획을 세우자고 하는 건데 어찌 됐든 더는 못 참겠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형님?”
“지금 나하고 가자. 호텔에 강성태가 오면 조용하게 특실로 데리고 오게 해 놔. 데려오는 놈들도 모두.”
대답이 없는 김동팔을 조태완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알겠습니다, 형님.”
김동팔의 답은 반 박자 느리게 나왔다.
강성태를 어떻게 감당하겠냐는 의미였다.
“내가 마시는 꼬냑을 두 병 챙겨. 거기에 모두 약을 타고.”
“강성태가 마시겠습니까, 형님?”
“내가 충성을 맹세하면서 건배하자고 하면 마실 거다. 대신 나도 약 탄 걸 먹게 될 테니까 다 같이 의식이 흐려지면 네가 나머지를 알아서 해.”
“예, 형님.”
김동팔의 답이 살짝 길었다.
눈빛도 번득였는데 조태완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나와 강성태를 한 방에 작업할 기회니까 솔깃하지?’
더러운 새끼.
조태완을 쓰러트리고 나면 저 더러운 눈매로 오세아의 벗은 몸을 들여다볼 거고, 저 입술로 몸을 핥아댈 거다.
“끄응.”
“왜 그러십니까, 형님?”
“분해서 그런다. 씹어 먹어도 안 풀릴 정도로. 내가 마약을 먹는 한이 있어도 강성태 그 새끼하고 함께 온 놈들을 쓰러트릴 테니까 눈치채지 못하게 해. 알았냐?”
“예, 형님.”
“회칼도 필요 없다. 약을 처먹고 해롱거리면 그때 꼬냑 병으로 아예 대가리를 으깨서 죽여.”
“맡겨주십시오, 형님.”
고개를 숙이는 김동팔의 머리통을 조태완은 더할 수 없이 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
강성태와 최치곤이 프리 스테이션의 입구에 도착하자 덩치 둘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병렬이는?”
“안에 계십니다, 형님. 모시겠습니다.”
“놔둬. 내가 갈게.”
“예, 형님.”
강성태가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최치곤은 도로 옆에 서 있는 승합차와 승용차를 살폈다.
둘이서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옛날 동재 형님 숙소 식구들이다. 안중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 병렬이 형님을 가장 진하게 따른다더라.”
갈치같이 생긴 이동재가 떠올라 강성태는 픽 웃었다.
퇴원은 했나?
계단을 내려선 최치곤이 프리 스테이션을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불을 환하게 켠 안쪽에서 김진용과 서달수가 인사했고, 중앙의 테이블에 앉았던 이병렬이 몸을 일으켰다.
“오셨습니까, 형님?”
주방 쪽에서 나온 조봉진이 급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가 끝났다.
“시간 딱 맞춰서 왔네. 얼른 앉아. 저녁 먹자.”
이병렬이 손을 뻗어 테이블 맞은편을 가리켰다.
여섯 명을 위한 수저, 반찬, 물, 그리고 커다란 그릇에 담긴 것은 한눈에도 시뻘건 국물에 굵직하게 썬 파와 달걀이 흐트러지게 풀어져 있는 육개장이었다.
강성태는 입 안쪽이 욱신대는 통증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왜?”
“육개장은 어디서 난 거야?”
“내가 이거 먹을 때마다 네 생각이 나잖냐. 마침 시간도 되고 해서 애들 시켜서 사 왔다. 먹어봐. 죽여.”
당연히 죽겠지.
입 안쪽을 조금 전에 깨물고 온 참인데.
강성태는 다른 내색하지 않고 이병렬의 맞은편에 앉았다.
“얼른들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이병렬이 미리 다짐을 받아놓은 모양이었다.
김진용을 시작으로 자리에 앉아서 모처럼 여섯 명이 한자리에 앉아 김밥이 아닌 저녁상을 마주했다.
최치곤의 걱정하는 눈빛을 본 강성태는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고개를 저었다.
곤잘레스 이두안, 조태완, 문도진과 광룡까지, 복잡한 일이 줄줄이 늘어선 상황에서 지하차도를 지났다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였다.
“먹자.”
이병렬을 따라 젓가락을 든 강성태는 건더기만 들어서 밥에 올렸다.
“너도 그렇게 먹는구나. 나도 그런다. 육개장은 건더기를 따로 먹는 게 좋아.”
반가워하는 이병렬을 보며 강성태는 픽 웃었다. 그리고는 밥과 고기를 입에 넣었다.
조태완을 만날 일만 아니라면 조용하게 집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었을 거다. 김동팔, 이 개새끼가 조태완을 노리는 바람에 집에 못 갔다.
강성태는 튀어나오려는 욕을 밥과 함께 꿀꺽 삼켰다.
“죽이지?”
“죽겠다.”
“뜨거운 걸 그냥 넘겼냐? 눈이 왜 그래?”
입의 상처를 모르는 이병렬은 육개장을 함께 먹는 게 마냥 행복한 모양이었다. 하기는, 회칼 들고 함께 달려들 때가 있다면 이런 순간도 있어야겠다.
‘독한 놈.’
육개장 건더기를 입에 넣는 강성태를 최치곤이 질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