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 17화
지원한 건지, 선발된 건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안다미가 의료지원팀에 포함됐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어젯밤이나 오늘 오전에 안다미 역시 그 사실을 알게 된 눈치였다.
강성태는 시선을 돌려 로비 안쪽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을 기다린다며 두 시간쯤 시간을 달라던 로라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제야 강성태를 발견한 모양으로 최치곤이 다가왔다.
“뭐냐? 한두 시간 걸린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됐어. 가자.”
“무슨 일 있었냐?”
함께 입구를 나서며 최치곤이 건넨 질문이었다.
“너는 어디에 있었길래 나를 바로 봤냐?”
“여기서 달달한 거 달라기 뭐하잖아. 게임이나 좀 할까 하고 로비에 앉았다가 화장실 다녀오던 길이었다. 저기!”
입구를 나서며 화장실 방향을 가리킨 최치곤이 발렛 티켓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야? 혹시 도진이 형님 쪽에서 연락 왔었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 그래.”
기껏 말을 돌렸는데도 최치곤이 다시 물어볼 만큼 강성태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밖으로 나선 강성태는 머리 위로 펼쳐진 가림막 너머의 도심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화려한 오후의 햇살이 떨어지는 호텔 입구로 자가용과 택시들이 연달아 들어와 손님들을 내리거나 기다리던 이들을 태우고 도로를 향해 빠져나갔다.
이렇게 높은 건물, 밤거리가 크게 불안하지 않은 치안, 택시를 기다리며 총알이 날아올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 살아온 이들은 절대 마약 세상의 두려움을 짐작하지 못한다.
마드레 산맥 근처에서 내려다본 멕시코는 완벽하게 다른 세상이었다.
거대한 땅에 가득한 양귀비, 농부들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아편 덩어리, 마약 카르텔이 정한 규정에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까지, 한국에서 지녔던 상식과 양심은 삶을 방해하는 요소만 될 뿐이었다.
주변을 경계하듯 둘러보던 최치곤이 손을 높게 들었다.
기다리던 승용차가 앞에서 멈추자 운전석에 최치곤, 조수석에 강성태가 올랐다.
“카페로 갈 거지?”
“응.”
힐끔 강성태를 돌아본 최치곤이 차를 움직여 도로에 합류했다.
침묵이 잠시 흐른 뒤였다.
“너 진짜 뭐 있지? 뭔데 그래?”
“일단 너만 알고 있어.”
강성태는 멕시코 개발사업에 한국의 건설사와 병원이 참여하게 되었다는 내용과 책임자 자리를 제안받았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기회네, 기회! 연봉 백 억 주면 간다고 해. 이모네랑 의사 선생한테 말하기도 얼마나 멋지냐? 군대 갔다고 생각하고 1년만 기다려라, 백억 만들어서 모시러 오마. 캬하!”
“의료지원 하는 병원이 서라대학병원이다.”
“응?”
무슨 뜻인가 멈칫했던 최치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씨익 웃었다.
“설마 부부동반? 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
“이미 정해져 있더라.”
“나나 병렬이 형님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면 너무 신경 쓰지 마. 네가 조태완만 적당하게 다독여도 병렬이 형님은 무사할 거고, 나는 네 비서로 가면 되니까. 연봉 1억은 줄 거지?”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는 최치곤의 반응을 들으며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갈 마음이 있으면 문도진과 광룡을 좀 더 빨리 해결하고 말지, 조태완을 다독이지는 않는다.”
“그게 걸렸던 거구나.”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최치곤의 상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커피알리고로 향하는 길에서 강성태는 멕시코 마드레 산맥 주변과 마약 카르텔의 위험성에 대해 적당한 선에서 설명했다.
“와, 씨발. 우리는 명함도 안 나오겠는데?”
“경찰서장과 시의원은 신문에라도 나오지. 농부들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집계도 안 되고. 그걸 파헤쳐서 범인을 잡으려 들면 경찰이 또 벌집이 돼서 죽는 거고.”
알아는 들었는데 실감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건설사나 병원, 안다미도 이럴 거다.
오지에서 건설에 성공한 이야기들이 미담처럼 여겨지는 한국의 실정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어떻게 하려고?”
“다미 씨에게 가지 말라고 권해야지. 나도 갈 마음 없고.”
입술을 내민 최치곤이 대꾸 대신 숨을 내쉬었다.
현지의 사정, 안다미의 성격,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도진과 광룡의 일들이 최치곤의 생각에도 갑갑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잠시만.”
강성태는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오후 4시 40분쯤이었다.
저녁나절에 출근하는 안다미가 일어났을 법한 시간이었고, 아니더라도 지원팀에서 빠지라는 권유를 전하기 위해서 깨울 수밖에 없었다.
스마트폰을 꺼낸 강성태가 번호를 찾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거짓말처럼 손안에 든 스마트폰이 몸을 떨면서 액정에 안다미의 이름이 올라왔다.
최치곤을 향해 눈짓을 한 강성태는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통화 괜찮아요?
안다미는 평소와 다름없는 음성이었다.
“지금 카페로 가는 차 안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하고 있었는데요…….”
- 응급수술은 거의 매일 있는 거라서 염려할 정도는 아니에요. 내일 아침에는 꼭 들를 거니까 우리 함께 아침 먹어요. 치곤 씨 있을 거면 샌드위치 준비할게요.
“다미 씨?”
- 잠깐 전화한 거예요. 이따가 봐서 다시 전화할게요.
급하게 끊는 전화였다. 마지막에 흔들리는 음성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끊은 느낌이었다.
액정을 들여다본 강성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다미의 당당함과 강한 성격을 믿는다.
강성태와 만나는 것이 후회돼서 멕시코로 피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의료지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와 흔들리는 감정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전화를 끊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다.
지금이라도 다시 전화를 해?
아니면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아직 2주라는 시간이 남았다는 생각에 강성태는 아침을 기다리기로 했다. 만약, 안다미가 끝까지 의료지원팀에 나서야 한다면 함께 갈 각오도 세웠다.
“치곤아. 카페에 가기 전에 지하차도 한번 지나가 보자.”
“지금?”
“어차피 하려던 거잖아.”
“그게, 네가 원하는 모습이 보이면 좋은데 괜히 위험해지기만 하면 어쩌려고 그래?”
“문도진하고 광룡이 무슨 꿍꿍이를 쓰는지 알게 된다면 해볼 만하잖아. 걱정은 그만하고 병원 앞 지하차도로 가봐. 거기가 가장 효과가 좋았잖냐. 혹시 볼 안쪽을 깨물면 고수부지로 피하기도 좋고.”
강성태가 거듭 요구하자 최치곤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말했던 대로 어차피 계획에 있었던 일이었다. 게다가 혹시 멕시코에 가게 된다면 문도진과 광룡을 제대로 정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
전화를 마친 안다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못했다.
출근하기 전에 만나서 의료지원으로 출국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려 했었다. 그러나 중간에 감정이 일렁여서 내일 아침으로 미뤘다.
감정을 확인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3년을 떨어져 지내는 데도 강성태는 지금과 같이 마음을 간직할까?
휴가가 있을 테니 1년에 한두 번이야 볼 테고, 스마트폰을 이용해 목소리야 듣겠다. 그렇더라도 말이다. 강성태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닌가 싶어 가슴 한쪽이 아팠다.
부드럽게 웃어주는 강성태의 미소는 햇살이 잘 비치는 바닷속의 해초처럼 싱그럽다. 안다미를 내려다보며 웃을 때 반짝이는 눈빛으로 감정 또한 확신할 수 있었다.
군대라면 면회 오라고 조르기라도 할 텐데.
부친인 안호상을 평생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온갖 생각을 떠올리던 안다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몸을 일으켰다.
씩씩하게, 안다미.
강성태란 남자에게 솔직하게 말하자.
부친을 외면하지 못한다고. 그렇다고 강성태를 포기할 수도 없으니 의료지원에 다녀오겠다고.
돌아온 뒤에 결과가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말도.
안다미는 억지로 끌어낸 기운에 의지해 욕실로 향했다.
**
다리를 건넌 최치곤은 커피알리고의 주차장 입구를 지나 유턴을 받기 위해 차를 멈췄다.
오후 5시 10분쯤이어서 아직 도로는 한가했다.
“진짜 괜찮겠냐?”
“뒤에 타게 유턴해서 잠시만 세워주라.”
저런 눈을 한 강성태는 못 말린다.
그런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최치곤은 고개만 끄덕였다.
신호를 받은 최치곤은 차를 오른쪽에 세웠다. 그리고는 조수석에서 내린 강성태가 뒷좌석에 앉기 무섭게 다시 출발했다.
다리 오른쪽으로 빠져서 왼편으로 돌아가면 서라대학병원으로 향하는 지하차도가 나온다.
사이드미러를 확인하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던 최치곤이 구부러지는 도로를 따라 왼편으로 틀었다. 그리고는 길을 따라 지하차도로 향하는 도로에 합류했다.
“후-.”
최치곤이 길게 숨을 내쉴 때 뒤에 앉은 강성태는 이를 꽉 물며 앞을 노려보았다.
이 미친 짓을 또 할 줄은 몰랐다.
폐와 목,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고통과 심장을 생으로 찢는 통증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올라올 정도였다.
‘보여주라.’
강성태는 정체 모를 어둠에 바람을 전했다.
문도진과 광룡이 꾸민 짓이 있다면 지금 보여주라.
강하게 바람을 전한 직후에 저 앞에서 지하차도가 보였다.
“성태야!”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내가 의식을 잃지 않으면 일단 고수부지로 가고.”
그 사이 지하차도가 바로 앞에 있었다.
“후우.”
강성태는 숨을 내쉰 뒤에 천천히 들이마셨다.
어떤 고통이라도 견딜 테니까 내가 원하는 장면을 보여줘!
최치곤, 이병렬, 김진용, 서달수를 지켜보겠다고 이러는 거 알지?
그러니까 원하는 장면을 달라고!
강성태가 독한 눈으로 이를 악무는 순간이었다.
지하터널 안쪽의 어둠이 승용차를 덮었다.
더컹! 더컹!
곧바로 연결부를 지나는 소리가 아래에서 울려 나왔고, 그 직후에 강성태의 심장이 쿵하고 울렸다.
더컹! 더컹!
누군가 코와 입을 막은 것처럼 숨이 막혔고, 이어 갑갑해진 폐와 목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폐가, 머릿속에서 동시에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달려들어 강성태를 물어뜯었다.
더컹! 더컹!
‘끄윽!’
상체를 앞으로 숙인 강성태는 머리를 감쌌다.
“성태야!”
최치곤이 부르는 소리가 마지막이었다.
어둠이 강성태를 덮치면서 꿈에서 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더컹! 더컹!
‘아버지. 조금 뒤에 사고가 일어나요. 그 사고에서 어머니까지 두 분이 돌아가시고요.’
심장을 생으로 찢는 고통에도 강성태는 의식을 놓지 않으려 귀를 움켜쥐었다.
‘이러는 거요? 마약을 막아보려고 그래요. 그 뒤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교통사고를 알아보려고요. 제발요…….’
콰자자작!
운전석 쪽이 받힌 승용차가 밀리면서 안에 있던 물건들이 느리게 떠올랐다.
그 직후였다.
어둠이 스멀스멀 달려들어 꿈에서 보던 사고를 삼켰다.
‘버티지 말고 의식을 놔. 그러면 편해.’
악착같이 버티는 강성태를 꼬드기는 것처럼 어둠은 천천히 몰려왔다.
‘끅! 끄윽!’
폐에서 일어난 불길이 목을 태우고 다시 머릿속으로 뿜어지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버티겠다고 해서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강성태는 어금니 사이에 볼살을 물었다.
‘해봐. 내가 포기하나.’
강성태의 독기에 질렸을까.
어둠의 한중간이 밝아지며 영상이 떠올랐다.
“그 녀석이 의료지원에 가겠다고 했네.”
힘 빠진 음성의 주인공은 안호상 원장이었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3년을 떨어지는 거라 헤어질 수 있겠다고 하더군. 그렇게 되더라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대신 그 뒤에도 강성태란 사람과 잘 되면 축하해 달라는 요구를 했지.”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유헌우였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안호상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다미는 내 딸이라 알지. 그 녀석은 3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거야.”
“강성태 씨가 변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혈기왕성할 때 아닌가? 인물도 뛰어나고. 뭐든 상관없어. 다미가 깡패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는 더한 짓이라도 할 거야.”
볼을 씰룩이는 안호상을 어둠이 서서히 덮었다. 그리고 강성태는 바람을 가득 넣은 매트 위에 누워 바다에 떠 있는 것처럼 갑자기 고통에서 벗어났다.
여전히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건 의식을 잃는 과정이 틀림없었다.
‘그대로 있어. 그럼 편안해.’
안호상과 유헌우를 지운 어둠이 강성태를 포근하게 감쌌다.
쉬고 싶다.
어둠이 이끄는 대로 의식을 놓으면 더는 고통도 없을 거다.
최치곤은? 이병렬은?
저런 각오로 강성태를 선택한 안다미는?
허탈하게 웃은 강성태는 눈을 독하게 뜬 다음 이를 세게 깨물었다.
꽈득!
염병할! 젠장! 빌어먹을!
볼 안쪽에서 일어난 고통이 강성태를 단숨에 깨웠다. 거기까지는 참을 만했다. 그런데 폐와 목, 머릿속이 타는 고통과 심장이 생으로 찢기는 통증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달려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머리를 감싸며 버티는 강성태의 눈앞이 서서히 밝아졌다.
“시간 끌 것 있겠어? 내일 작업하지?”
문도진의 음성이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