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 16화
제7장. 알고 있었구나.
곤잘레스 이두안과의 약속을 위해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2시 45분이었다.
“성태야. 나는 로비나 커피숍에 있을게. 끝나면 전화 주라.”
“미안하다.”
“정 그러면 눈 딱 감고 백억만 빌려달라고 해주라.”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은 강성태는 승용차에서 내렸다.
입구로 향하는 강성태에게 백인 남성 한 명과 이십 대 중반의 여성이 다가왔다.
“미스터 강?”
강성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비서실 폴리 와이건입니다. 이쪽은 아드리안.”
“반갑습니다. 폴리, 아드리안?”
강성태는 차례로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른 일 없다면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그러죠.”
앞에 가는 두 사람을 따라 강성태는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소공동에 있는 특급 호텔이었다.
지역에 따라 다른 건지는 몰라도 한가한 시간임에도 손님들이 꽤 많았다.
로비의 오른쪽으로 향한 두 사람은 안쪽에 숨겨놓은 듯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이전에도 강성태는 비서진과 사담을 나눈 적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친해지면 경호 도중 시선을 빼앗길 염려가 있었고, 다음으로 혹시라도 흘러나올지 모를 업무 내용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침묵 속에서 문이 열리고 폴리, 강성태, 아드리안의 순서로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보안카드를 숫자패널에 댄 폴리가 17층을 눌렀다.
이후 17층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는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폴리를 따라 강성태는 복도를 향해 걸었다. 대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복도가 좌우로 나뉘는 일반적인 호텔의 구조와 달리 복도의 오른편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호텔 한 층의 절반을 모두 사용하는 특실인 모양이었다.
복도 입구에 서 있는 경호원을 지나친 폴리는 다시 두 명의 경호원이 지키는 가장 안쪽의 문으로 강성태를 안내했다.
벨을 두고도 폴리는 가볍게 노크만 했다.
사소한 소리에 방해받기 싫어하는 곤잘레스 이두안을 위한 배려였다.
안쪽에서 문을 연 경호원이 폴리와 안드리안, 강성태를 확인하고는 한쪽으로 비켜섰다.
이 정도면 멕시코에서와 비슷한 경호 수준이었다.
한국의 신뢰할 만한 치안과 호텔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차고 넘치는 경호였다.
안으로 들어간 강성태를 향해 존 보스만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냄비뚜껑만 한 손을 내밀어 악수한 존 보스만이 고개로 거실 안쪽을 가리켰다.
마지막 경계를 통과한 셈이었다.
과거에는 강성태가 저 역할을 맡았었다.
눈인사를 남긴 강성태는 폴리와 아드리안의 안내를 받으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똑똑똑.
가볍게 노크한 폴리가 문을 열었다.
“미스터 강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것 역시 익숙한 장면이었다.
저 회의실 안에 있는 여덟 명에서 열 명에 달하는 비서진들이 곤잘레스 이두안의 진짜 브레인이었다. 지금 안내를 맡은 폴리나 아드리안이 저 단계에 도달하려면 적게 잡아 5년, 길게 잡으면 10년의 경험이 필요했다.
브레인에 포함되면 계열사 사장이 부럽지 않은 연봉과 발언권, 결정력을 얻는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또 곤잘레스 이두안의 “너는 해고다.”라는 한마디에 날아가는 살벌한 자리였다.
“미스터 강?”
마침내 폴리가 안을 가리켰다.
안쪽은 역시 회의실이었다.
긴 테이블 안쪽의 책상에서 곤잘레스 이두안이 몸을 일으켰고, 들어서는 강성태의 옆으로 여덟 명의 비서진들이 조용하게 방을 나섰다.
“어서 오게.”
책상에서 나선 곤잘레스 이두안이 강성태를 향해 손을 뻗어 악수를 나누었다.
“앉지.”
강성태를 향해 회의 탁자의 자리를 가리킨 그가 맞은편에 앉았다.
정장 바지에 셔츠 위로 카디건을 겹쳐 입어서 이렇게 마주 앉아 웃을라치면 넉넉하고 편안한 사람처럼 보였다.
강성태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진한 커피 향이 코를 간질였다.
“이 냄새를 기억하나?”
“정말 오랜만입니다. 간혹 흉내 내고 싶어서 도전했다가 매번 실패하곤 했습니다.”
강성태의 반응을 흡족하게 받아들인 곤잘레스 이두안이 앞에 놓인 커피잔을 손으로 가리켰다.
알투라(Altura)라는 명칭을 받는 품질 좋은 커피에서 고르고 골라 고작 15킬로그램 가량 밖에 얻지 못하는 특별한 원두였다.
강성태는 잔을 들어 향을 즐긴 후에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어느 날, 이모네 가족, 최치곤, 포장마차에서 먹는 안주와 폭탄주가 미치도록 그리울 때 마시던 커피였다.
이 진한 향을 맡고 있노라면 그리움이 누그러지곤 했었다.
커피를 마신 강성태는 옅게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던 커피 향이 지금은 멕시코에서의 생활을 살갗에 닿는 바람처럼 선명하게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추억을 되새기는 일은 여기까지가 좋았다.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도 시간을 정하는 곤잘레스 이두안이 고작 커피 한 잔을 대접하기 위해 강성태를 불렀을 리 없었다.
이제 시작하십시오.
강성태는 의미가 분명한 눈빛으로 시선을 들었다.
“멕시코 사정을 들었나?”
“한국에 들어와서는 굳이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인 곤잘레스 이두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DEA(미국마약단속국)와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양귀비 재배 농가를 줄이는 성과를 얻었지. 풍작으로 양귀비 단가가 떨어진 것도 한몫했고.”
정유 사업을 하는 사람이 느닷없이 왜 양귀비 재배를 말하지?
시간도 그렇지만, 사업에 관한 한 곤잘레스 이두안은 허튼 구석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그를 잘 아는 강성태는 이어질 말에 신경을 집중했다.
“문제가 생겼지. 마드레 산맥 주변의 농가들이 빈민으로 전락해서 젊은 남자들은 범죄조직, 여자들은 매춘에 뛰어들고 있다네. 그 외에도 발생하는 문제들이 하나둘이 아니야. 정부에서 의료용 명목으로 양귀비를 구매해주지만 중과부적이지.”
고개를 돌렸던 곤잘레스 이두안이 아예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움직였다. 그런 뒤에 한쪽에 놓였던 서류 파일을 가져와 강성태 앞으로 밀었다.
경호를 담당하는 강성태는 곤잘레스 이두안의 사업에 관해 듣거나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
이걸 왜?
강성태의 눈을 본 곤잘레스 이두안이 펼쳐보라는 투로 턱짓을 건넸다.
강성태는 파일의 커버를 넘겼다.
“정부에서 내게 내민 제안일세. 마드레 산맥에서 발견된 금광을 소유할 수 있는 조건부 개발 사업이라고 하면 되겠지.”
금광이라고?
강성태는 첫 페이지에 있는 위성사진들에 시선을 집중했다. 위에서 찍은 사진의 몇 곳에 둥그렇게 원이 그려져 있었다.
사진을 확인한 강성태는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저 사람은 이런 서류 하나에도 목적이 있어서 자칫 뒤를 보았다가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게 더 문제였다.
이런 서류를 보여주는 이유가 분명한 사람이라서 그랬다.
마드레 산맥?
사진을 내려다보던 강성태는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지 모른다던 로라를 떠올렸다.
호텔의 특실과 거실에 늘어선 경호원도.
‘설마……?’
아닐 거야. 안 되는 일이야.
강성태는 간절하게 예상이 빗나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역시 짐작하는 모양이군. 시날로아 카르텔, 메데인 카르텔, 아마도의 후속 조직을 모두 몰아내야 하지.”
귀신에 씌웠나?
곤잘레스 이두안의 말을 들은 직후에 강성태의 가슴 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시날로아 카르텔을 몰아낸다니?
열 명이 넘는 시날로아 카르텔의 조직원들이 기관단총을 난사해 경찰서장을 살해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고작 신문에 이틀밖에 올라오지 못했었다. 이틀 뒤에 시의원의 머리를 잘라버린 사건이 연달아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경찰서장의 시체가 워낙 너덜거려서 팔과 다리, 머리를 따로 들었을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로라가 한국에 있을지 모른다는 계획과 바깥의 철저한 경호까지 강성태는 단박에 이해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저는 여기까지만 듣겠습니다.”
“시날로아 카르텔과 맞서서 살아남은 경호원은 자네가 유일하지.”
“레드워터에 연락하시면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을 받으실 겁니다.”
“그들이 거절했네.”
강성태는 곤잘레스 이두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가를 좁혔다. 레드워터의 수장 제이 브라이튼은 절대 이런 사업을 거절하지 않는다.
“미국은 멕시코 정부의 이번 개발사업을 반대했지. 그런 이유로 제이 브라이튼 역시 공식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고.”
“누군가를 지키는 일이라면 몰라도 저 혼자서 카르텔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구르카 용병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나?”
“영국이 그들을 내주겠습니까?”
“그건 내게 맡기게. 공식적으로 나서지 못한다고 해서 제이 브라이튼이 비공식적인 도움까지 거절한 것은 아니니까.”
레드워터의 수장인 제이 브라이튼이 돕는다면 구르카 용병을 동원할 수는 있겠다.
결과를 알 수야 없지만, 구르카 용병이라면 산맥의 싸움에 특화된 면이 있어서 해볼 만도 하고.
“구르카 용병이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닙니다.”
“금광 개발과 동시에 빈민 지역을 개발해야 하네. 의료지원 사업을 하려는 이유가 거기에 있네. 그걸 시작으로 금광 개발 지역을 우리가 완벽하게 통제해야 해. 자네가 그 적임자일세.”
경찰서장, 시의원도 너덜거릴 정도로 총알 세례를 받는 지역의 책임자를 맡아달라는 말이었다.
태완이파, 신호남파, 광룡과의 싸움을 앞둔 데다 안다미와 사랑을 익혀가는 이 순간에?
“혹시 제가 경호원을 그만둔 일이 마음에 안 드셔서 이러십니까?”
강성태의 말에 곤잘레스 이두안이 헛웃음을 지어냈다.
“왜 자네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군. 그 서류의 뒤를 보게.”
이미 중요한 이야기는 다 나온 상황이었다.
강성태는 아예 홀가분한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도로, 채광시설, 기반시설의 건설을 한국의 건설사가 맡기로 했네.”
강성태를 바라보던 곤잘레스 이두안이 눈짓을 통해 페이지를 더 넘겨보라며 권유했다.
이왕 보기 시작한 거니까.
영어와 에스파냐어, 한글로 된 약정서였다.
일전에 병원에 투자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었다.
페이지를 넘겨 첫 줄을 본 강성태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약정의료기관 : 서라대학병원]
“의료지원은 서라대학병원이 담당하네.”
이두안의 설명을 흘리며 강성태는 의료지원 내용을 빠르게 살폈다.
이런 대화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약점을 보이면 안 된다.
안다. 아는데 말이다.
[외과 : 신중목, 이승수, 안다미, 박재구]
의료진의 명단에서 안다미의 이름을 보는 순간,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강성태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남았을 곤잘레스 이두안이었다. 그렇더라도 지금은 악착같이 별일 아니란 투로 넘겨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안다미가 정말 위험해질 수 있었다.
강성태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건설회사와 의료진이 그렇게 위험한 지역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멕시코 정부가 안전을 보장하니까.”
치안이 훌륭하고 총기를 사용하지 않는 한국에서나 먹힐 법한 답변이었다.
“결정하는 데까지 얼마나 필요한가?”
“여유가 얼마나 있습니까?”
“의료진이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거로 알고 있네. 자네의 결정이 늦어질수록 그들이 위험해지겠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하게.”
“정유업을 하시던 회장님이 왜 이렇게 위험한 개발사업에 뛰어들려고 하십니까?”
강성태의 시선 앞에서 곤잘레스 이두안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명단을 보고 감정을 추슬렀던 강성태처럼 그 역시 억지로 무언가를 누르고 있었다.
증거는 없다.
고정된 눈빛, 변화가 너무 없어서 오히려 이상해 보이는 표정을 보며 알아챈 사실이었다.
“그걸 거부하는 순간, 내가 유지하는 모든 것을 잃게 돼. 그리고 죽게 되겠지. 로라를 포함해서 말일세. 더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말게.”
곤잘레스 이두안이 그나마 솔직하게 털어놓은 내용이었다.
“고민은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기대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네.”
고개를 끄덕인 곤잘레스 이두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나가보라는 의미여서 파일을 덮은 강성태도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기 전에 연락할 테니 로라와 저녁이라도 하세.”
“그런 자리라면 언제고 나오겠습니다.”
악수를 마친 강성태는 조용하게 걸어 회의실을 나섰다.
강성태가 나서고 문이 닫힌 다음이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여덟 명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 자료에 있는 의료지원팀의 명단을 확인해. 한 명이라도 변경되거나 누락되면 투자 건은 없는 것으로 하고, 의료지원 사업 지연 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으로 진행해.”
뭔가 말하려던 담당 비서가 곤잘레스 이두안의 눈빛을 보고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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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로 나온 강성태는 존 보스만과 악수를 한 뒤에 폴리의 안내를 받으며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 탈 때까지 대화는 없었다.
로비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서야 강성태는 몸을 돌려 손을 내밀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여기서 인사하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폴리가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을 본 강성태는 곧장 호텔 입구를 향해 걸었다.
호텔 리셉션에 걸린 시계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강성태는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안다미가 어떻게 멕시코 의료지원팀에 들어가 있지?
이걸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돼?
번호를 찾던 강성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받았던 문자들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올지 모른다는 말 기억나서 연락해요. 응급 수술이 밀려서 내일 일 마치고 잠시 들르든가 할게요.]
[일이 있어서 오늘은 못 들를 것 같아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알고 있었구나.’
스마트폰을 내린 강성태는 손님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호텔 입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