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 - 15화 (123/513)

6권 - 15화

잠시 끊겼던 진동이 다시 울리며 액정에 같은 번호가 올라왔다.

번호를 확인한 강성태는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밥을 떴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최치곤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전전긍긍이었다.

“받아보지 그러냐? 광룡이 우리나 조태완을 치겠다는 연락일 수도 있잖냐?”

“광룡이 달려들면 조태완이 어떻게 할 거 같냐?”

“너한테 연락하겠지.”

“그럼 조태완이 나한테 고개 숙이는 거니까 나쁠 거 없잖아.”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웃했던 최치곤이 홱 시선을 가져왔다.

“병렬이 형님이나 우리를 노리는 거면?”

“문도진이 그걸 우리에게 알려줄 이유가 있어?”

강성태의 반문을 듣고 속을 들켰다는 것처럼 진동이 멈췄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보스란 놈들이 무슨 유리 인형도 아니고 어쩌면 그렇게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건지.

그 자리에 오르려면 그래도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들이려니 생각했던 강성태가 오히려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최치곤이 급하게 밥을 욱여넣으며 식사가 끝났다.

“서방님은 얼른 커피를 준비하셔.”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기는 강성태를 밀어낸 최치곤이 소매를 걷고는 스펀지를 집었다.

“그런데 진짜 왜 전화했을까?”

“영어로 어금니가 뭔지 아냐?”

“몰라.”

“정답.”

최치곤은 멀뚱멀뚱 강성태를 지켜보았다.

“왜 전화했는지 나도 몰라.”

고개를 갸웃했던 최치곤이 장난스럽게 인상을 구기고는 스펀지를 홱 뿌렸다.

“야!”

“의사 선생 만나더니 영어를 써서 바보로 만들어야 속이 후련했냐? 아후, 요거! 나도 누구한테 꼭 써먹어 봐야지.”

설거지를 하는 최치곤 옆에서 강성태는 커피를 만들었다.

문도진은 최악의 경우를 각오한 상대였고, 그런 만큼 불편하게 만날 사이였다.

아침 7시 전에 전화할 정도로 급한 일이라면 문자를 남겨도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쪽 반응을 살피려거나 조태완의 움직임을 알아보려는 의도일 확률이 높았다. 그도 아니라면 이간질을 하고 싶었거나.

말이 오가면 틈이 생긴다. 그래서 죽이기로 작정한 대상과는 길게 말해서 좋을 게 없다.

총이나 칼을 겨눈 채 주절주절 떠드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에서는 목숨을 반쯤 바치는 멍청한 짓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최치곤이 식탁에 앉았다.

마음이 급한지 앞에 놓아준 달달한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병렬이 형님께 전화해볼까?”

눈짓으로 답을 한 강성태는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문도진은 스마트폰을 오래도록 노려보았다.

게으른 놈이었나?

이 시간까지 잠을 잤다면 그야 이해할 만했다. 이 바닥 인간들이 거반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 그렇다.

한 번 더 걸어볼까 했던 문도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화장실에 갔든, 소리를 죽여놔서 못 들었든, 번호를 확인하면 전화를 걸어올 거라 생각에서였다.

생각은 그런데 괘씸한 건 또 별개였다.

“어린놈의 새끼가 오냐, 오냐 했더니 내 전화를 씹어?”

어지간한 검사들도 바로 받는 문도진의 전화를 영등포에서 기지개나 켜는 새파란 놈이 감히 안 받아?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

불현듯 화가 치민 문도진이 거친 욕을 뱉어냈다.

그렇게 그는 화가 치민 상태에서 고개를 들었다.

“태완이네 애들이 확실히 이상한 거지?”

“예, 형님. 어제 오후부터 늘 다니던 사우나까지 한 놈도 보이지 않습니다, 형님.”

조직 간의 전쟁을 앞두었을 때나 보이는 징조였다.

“술이나 파는 개 양아치 새끼들이 무슨 모사를 치려고 갑자기 대가리를 감추고 지랄이야?”

입술을 뒤튼 문도진은 다시 전화를 노려보았다.

‘강성태라?’

강남의 세븐 우드 호텔 커피숍에서였다.

그것도 문도진이 보는 앞에서 송대길을 두들기는 배짱과 실력이라니.

광룡이 안중으로 부른다는 말에 이왕이면 으슥한 곳에서 보자던 강성태의 대꾸가 갈고리로 변한 것처럼 문도진의 뒷덜미를 께름칙하게 긁었다.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세게 나오는 거야?”

“예? 형님?”

대꾸조차 귀찮은 문도진은 손을 뒤로 휘휘 저었다. 그런 뒤에 손을 가져가서 양쪽 볼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강성태가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조태완과 강성태가 손을 잡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가만?’

상황을 하나씩 짚어가던 문도진은 맹수처럼 이가 드러내며 인상을 구겼다.

실제로 광룡이 거금을 투자한 인간은 문도진이 아니라 조태완이었다. 지용호를 죽인 것도 조태완이 아니라 광룡이 알아서 해결한 거고. 마지막으로 광룡은 아직 약속 시간과 안중 어디인지 정확한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뒤에서 연락하고 있다면 안중에서 죽는 건 강성태가 아니라 바로 문도진……?

그래서 전화를 안 받는 거냐, 강성태?

당장이라도 칼을 꽂을 듯 번들거리는 눈으로 묘한 미소를 그려낸 문도진이 손을 뻗었다.

오냐. 이왕 한 거 어디 받을 때까지 해 보마.

만약 끝까지 안 받는다면?

문도진은 눈알만 들어서 앞에 늘어선 덩치들을 보았다.

오늘 중으로 조태완이 죽든, 강성태가 죽든, 누구 하나는 죽는 거지.

마음을 독하게 다진 문도진은 스마트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이병렬과 만나기 위해 나서려던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다시 울었다.

‘이제 좀 받아봐라.’

간절한 최치곤의 눈을 무시한 채 강성태는 거절버튼을 눌렀다.

“뭐 해?”

“보면 몰라? 통화 거절했잖아. 얼른 나가자.”

모처럼 편한 진바지에 셔츠, 점퍼를 걸친 강성태는 현관으로 움직였다.

“진짜 너랑 다녀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속이 타 죽었을 거다.”

“지금 문도진이 그럴 거다.”

신발을 신느라 허리를 굽혔던 최치곤이 이건 또 뭔 소리야, 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인질범과 협상할 때는 조건을 듣기만 하고 어지간한 건 잘 안 들어주거든. 대신 인질범이 악에 받치지 않게 음식이나 약, 이런 건 또 넣어주지.”

“문도진이 누굴 납치한 건 아니잖아?”

문을 열어 바깥을 살핀 최치곤이 복도로 나서며 건넨 질문이었다.

“그래서 이러는 거다. 독이 올라도 문도진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거든. 대신 엉뚱한 실수를 할 수는 있지.”

적당하게 답을 한 강성태는 계단을 내려갔다.

“안중에서 만나든, 그 전에 달려오든, 문도진이 함부로 설칠수록 우리한테 유리해. 또 하나 있는데…….”

계단을 내려가며 강성태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뺏길 게 많은 놈이 손해 보는 싸움인데 문도진은 가진 게 터무니없이 많아. 그러니까 당분간 전화를 무시하는 게 좋아.”

말을 마친 강성태가 주차장으로 나서자 최치곤이 얼른 운전석으로 움직였다.

둘이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8시쯤이어서 출근하는 차량으로 길들이 혼잡했다.

“씨발. 최치곤이 진짜 열심히 산다.”

제 딴에는 이런 시간에 밥 먹고 나선 게 기특한 모양이었다.

약속 장소는 커피알리고 2층 사무실이었다.

별로 멀지 않은 거리였는데 유턴을 해야 했고, 신호에 계속 걸려서 30분을 소비하고서야 주차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병렬이 형님 와 계신데?”

빈자리로 움직이던 최치곤이 안쪽에 서 있는 검은색 승용차를 시선으로 가리켰다.

강성태와 최치곤을 발견했는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이병렬과 김진용, 서달수가 차에서 내렸다.

한 대만 온 게 아니었다.

옆에 있던 승용차와 승합차에서 덩치들이 줄줄이 내렸다.

강성태는 창에서 내려 곧장 이병렬에게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형님?”

김진용을 시작으로 서열에 따라 깊숙하게 고개를 숙이는 남부끄러운 인사가 강성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찍 왔네?”

“누가 보자는 건데 시간을 끌어? 카페 안 열었을 시간이라 내가 커피도 사 왔다.”

이병렬이 눈짓을 하자 덩치 하나가 일회용 컵 네 개가 담긴 캐리어를 두 개나 가져왔다.

“올라가자. 진용이하고 달수, 치곤이는 같이 가.”

강성태가 앞서서 복도를 올라가자 이병렬을 시작으로 줄줄이 뒤따라 들어왔다.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다섯 명이 들어가자 가뜩이나 좁은 사무실이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앉아.”

“실례하겠습니다, 형님.”

이병렬과 강성태가 마주 앉는 바람에 상석이 비었다.

김진용과 서달수가 빈자리에 앉자 최치곤이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와 사이에 끼었다.

“씨발! 누가 보면 더럽게 미련하다고 하겠다. 그러지 말고 앞으로는 그냥 상석에 앉아. 치곤이 꼴이 저게 뭐냐?”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최치곤을 보며 이병렬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침을 먹었냐는 상투적인 인사를 나눈 뒤에 이어서 커피를 하나씩 앞에 두었다.

“보자고 한 이유가 뭐냐?”

“어제 문도진과 조태완이 전화했었거든.”

이어진 대화에서 강성태는 조태완, 문도진과 있었던 통화 내용을 차례로 들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아침 일찍 걸려왔던 문도진의 전화를 무시했다는 말을 했을 때는 사무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피어났다.

최치곤이 그렇더니, 조직의 생리에 익숙한 이병렬과 김진용, 서달수에게 문도진이라는 인물과 신호남파의 무게감이 그 정도로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일단 계획은 신호남파 접수해서 병렬이 네가 맡는 거다. 나머지는 만나자는 날짜와 시간 봐서 정할 거고.”

문도진을 죽이려고 작정한 강성태의 각오를 짐작하는 눈치였다.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처럼 이병렬은 강렬한 눈빛으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눈빛만으로 속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전장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우라 호텔에서 그냥 돌아오겠다는 강성태의 계획을 단번에 알아챘고, 그 전에는 조태완의 목에 칼을 대고 망설이지 않았다.

최치곤이 둘도 없는 친구라면 이병렬은 깡패들이 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란 생각도 들었다.

너라면 알겠지?

나는 이미 각오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마약은 용납 못 해.

강성태는 이병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느낀 김진용과 서달수, 최치곤이 눈치를 살피면서 묘한 긴장이 새벽녘 저수지에 피어난 물안개처럼 좁은 사무실 아래를 맴돌았다.

“신호남파 보스는 누가 하든 상관없다. 대신 하나만 부탁하자.”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물안개를 흐트러트리는 모양으로 이병렬의 나직한 음성이 피어나는 긴장을 밀쳐냈다.

“칼을 주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목을 뚫을 거고, 뒤를 지키라면 배가 뚫리는 일이 있어도 막는다. 그러니까 나나 진용이, 달수, 저기 치곤이까지. 우리를 그저 머릿수만 채우는 꼬봉으로 만들지는 마라.”

이병렬은 강성태의 각오를 짐작하는 게 분명했다.

강성태가 옅게 웃는 것을 본 이병렬이 긴장을 풀어내는 얼굴로 픽 웃었다.

“씨발. 워낙 엄청난 보스를 모시니까 강남 삼대장이 진짜 별것 아닌 거로 느껴지네.”

말을 뱉은 이병렬이 뜨거워진 속을 식히려는 듯 커피를 들이켰다.

**

10시쯤 모두 돌아가고 나서 모처럼 강성태는 예전처럼 혼자 커피알리고의 영업을 준비했다. 이런 일상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던 과거로 문득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한편으로는 기계에 스위치를 올리고, 테이블과 의자를 닦으면서 이리저리 뒤엉켰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효과도 있었다.

청소를 마친 강성태는 첫 번째 커피를 만들며 익숙한 커피 향을 즐겼다.

커피 향이 진해질수록 이상하게 안다미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짙어졌다. 이러다가 안다미를 떠올리면 지금 맡고 있는 커피 향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강성태는 헛웃음을 지었다.

강성태가 커피를 입에 가져가서 한 모금을 마시고 난 뒤였다.

딸랑.

“매니저님?”

놀라는 얼굴로 이은주가 커피알리고에 들어섰다.

“오늘 커피는 어떤지 한번 드셔 볼래요?”

커피알리고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

곤잘레스 이두안은 새벽 6시에 조찬 회의를 시작으로 거의 20분 단위로 변하는 스케줄을 소화했다.

동반한 임원들만 십여 명에 달해서 각자 담당한 파트별로 회의를 진행해서 결과를 보고하는 통에 왼쪽과 오른쪽에 선 비서들이 다른 보고서를 들고 있을 정도였다.

“서라대학병원에서 올라온 추천서입니다.”

오전 10시쯤 비서 한 명이 가져온 서류를 받은 곤잘레스 이두안은 서류를 빠르게 넘겨 확인한 뒤에 고개를 들었다.

“이 명단이 확정인가?”

“그렇습니다. 회장님께서 사인하시면 서라대학병원에 대한 투자와 지원이 진행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곤잘레스 이두안은 오른쪽 아래에 있는 서명란에 이름을 적어넣었다.

“조인식은 부사장이 참석하는 거로 하지.”

“알겠습니다, 회장님.”

비서가 고개를 숙인 뒤에 책상에서 멀어질 때였다.

“5분만 시간을 줘.”

곤잘레스 이두안의 한마디가 떨어지자 여덟 명의 비서진이 만지던 서류를 그대로 내려놓은 채 조용하게 방을 나섰다.

책상에 앉은 곤잘레스 이두안은 뚜껑을 닫은 만년필을 머리에 댄 자세로 회전의자를 돌렸다.

“전쟁이 시작된 것치고는 너무나 평화로운 오전이군.”

특실의 거실 바깥에서는 따스하게 느껴지는 햇살이 서울의 빌딩들을 비추고 있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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