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 14화
제6장. 그걸 말이라고?
대리 기사를 불러 최치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강성태는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거실에 앉은 최치곤이 TV 채널을 돌리는 동안,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응급실에 들러도 되냐고 물어볼 참이었다.
우우웅.
[오늘 올지 모른다는 말 기억나서 연락해요. 응급 수술이 밀려서 내일 일 마치고 잠시 들르든가 할게요.]
그런데 정신없이 바빠 보이는 안다미의 문자가 그 순간에 액정에 떠올랐다.
[편하게 하세요. 틈 봐서 잠시라도 쉴 수 있었으면 싶습니다. 기운 내세요.]
강성태가 답문을 보냈으나 더 이상 문자는 오지 않았다.
“술을 마시다가 말았더니 목이 자꾸 칼칼하네. 뭐냐?”
“다미 씨가 보낸 문자. 응급 수술이 밀려서 그렇다고 내일 아침에 잠깐 들르든가 한단다.”
“그런 거 보면 의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최치곤이 거실로 걸어가 벌러덩 누워서는 팔을 위로 들었다.
“도진이 형님하고 송원인가 하는 놈은 어떻게 할 거야?”
“내일 곤잘레스 이두안 회장을 만나고 나서 하나씩 준비할 생각이다.”
“준비? 뭐? 회칼?”
누워있던 최치곤이 고개만 들고는 질문을 쏟아냈다.
“혹시 내일 약속 있냐? 없으면 내일 오후부터 시간 좀 비워주라. 나머지는 그때 의논하자.”
“얼마든지.”
픽 웃은 최치곤이 머리를 다시 바닥에 눕혔다.
“좀 씻고 자.”
“내일 아침에.”
“아니면 베개랑 이불이라도 가져오든가.”
“희한하게 잠들고 깨보면 우렁각시가 덮어주더라.”
뻔뻔한 대꾸를 뱉어낸 최치곤은 아예 잠이 들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매일 저러는데 미워 보이지 않는 것도 재능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강성태는 이불과 베개를 꺼내다 말고 옷장 옆에 두었던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사람을 죽일 수 있냐고?
마약을 퍼트리는 놈들이라면 고민하지 않는다.
그걸 위해서 내일은 세상에서 제일 싫은 과정을 거칠 각오까지 세웠다.
다짐처럼 상자를 향해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인 강성태는 이불과 베개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크흐흑. 크흑. 크륵!
코를 고는 최치곤에게 우렁각시 역할을 마친 강성태가 침대로 향할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손에 든 스마트폰이 묵직한 느낌으로 울었다.
번호를 확인한 강성태는 침대에 걸터앉은 뒤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다. 조태완.
“말해.”
- 내가 투자받은 돈이 대략 6백억쯤 된다. 삼합회가 소개해서 광룡이 현금으로 건네준 건데 지금 준비할 수 있는 돈은…….
“조태완. 태완이파 보스답지 않게 말 돌리지 말고, 원하는 게 뭐야?”
- 이병렬이 신호남파 보스가 되는 걸 돕겠다. 마약에서도 손 떼겠다. 그래! 문도진과 광룡이 만나는 자리에 애들도 데리고 가마! 그렇게 하면 나를 지켜줄 방법이 있냐?
강성태는 옅게 웃으며 옷장을 바라보았다.
“전쟁 중인데 목숨은 각자 알아서 챙겨야지. 그런 건 이기고 나서 따져야 하지 않을까?”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뜨거운 숨소리가 스마트폰을 타고 넘어왔다.
“이병렬이 목에 칼 꽂으려던 순간을 기억하지? 그때 병렬이가 흉내만 냈을까, 아니면 진짜 찌르려고 그랬을까?”
- 끄응.
“전쟁은 그런 거다. 가진 걸 전부 걸고 달려드는 놈이 이기고, 이긴 놈이 다 갖는다. 광룡과의 싸움은 내가 한다. 대신 내가 목을 뚫으라고 할 때 병렬이처럼 칼 찌를 자신이 생기면 그때 다시 전화해.”
- 이긴 뒤에도 내가 태완이파 보스라는 걸 인정하냐?
“세 가지는 손대지 마.”
- 너한테……. 내가…….
강성태는 조태완이 들을 정도로 픽 웃었다.
“형님 소리 듣고 싶은 마음은 없다. 병렬이와 지내는 거 보면 알잖아.”
우습게도 안도하는 조태완의 숨소리가 답처럼 들렸다.
- 알았다. 이제부터 네 말대로 움직일 텐데 6백억은 내가 먹는다.
“그건 알아서 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하는데 내가 찌르라고 할 때 헛짓하지 마. 등 뒤에서 칼 뽑지 말고.”
- 이제 내가 뭘 하면 되지?
“광룡과 약속 시각이 정해지면 연락할 테니까 일단 기다려.”
- 흐흐. 흐흐흐. 흐하하하.
시작은 헛웃음이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속에 쌓였던 응어리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더 큰 웃음이 넘어왔다.
- 씨발! 조태완이 정말 잣 됐네! 알았다. 일단 대기하고 있지. 아 참, 그리고 고영주 말인데. 그 뒤에도 찝자 붙어서 손을 봐주다가 말이야.
이상하게 또 말을 빙빙 돌리는 게 찜찜했지만, 고영주에 관한 이야기라 강성태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 일본의 AV 영상물 하나 찍다가 약을 놨거든.
독하고 욕심 많으며 안하무인인 여자와 악한 인간들이 마주쳐서 만든 최악의 결과였다. 한숨이 푹 나오는 상황에 강성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 조금 전에 연락해서 촬영은 중지시켰고, 약빨 빠지면 돌려보내라고 했다. 계약금 3억 준 거로 퉁 칠 테니까 이번 건은 모르는 척 넘어가.
“여기까지다.”
- 알았다. 분명하게 정리하지. 그리고 이 번호는 내가 직접 받을 테니까 급한 일 생기면 이리 전화 주면 된다.
“약속이 잡히면 연락할 테니까 그동안은 조심해. 한 가지 더. 이 통화를 듣는 놈들이 있다면 그놈들 중에서 배신자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비해. 이 말은 절대 밖으로 내지 말고.”
주변을 둘러보는 모양인지 조태완의 대꾸는 없었다.
“내게 내민 조건이 강남 클럽을 넘겨주겠다는 거였다. 클럽의 수입이 얼마인지 아는 놈들이라면 눈이 뒤집힐 조건 아냐? 광룡이 밀어준다는 말까지 들으면 목숨 걸 만도 하고.”
- 흐음.
“살아 있어야 지켜주든가 하지. 그러니까 마지막 경계를 늦추지 마. 그럼 약속 잡히면 연락하자.”
주의하라고 경고한 강성태는 통화종료버튼을 눌렀다.
조태완이 제대로 움직이면 일이 훨씬 더 쉽겠는데?
스마트폰을 침대 옆으로 놓은 강성태는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아저씨 같은 양반 한 명만 있으면 문도진하고 송원인가 하는 놈들은 수월하게 해결할 텐데, 강성태는 숨을 길게 내쉬며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를 떠올렸다.
물론 연락이 된다고 해도 이런 일에 뛰어들지 않을 양반이긴 하지만, 곤잘레스 이두안을 통하거나 레드워터에 물어보면 어떻게 사는지는 알아볼 것도 같았다.
잡니다.
아저씨도 오늘은 편하게 주무셨으면 좋겠습니다.
꿈에서라도 그분을 보았으면 싶고요.
강성태는 잠에 빠져들었다.
**
강성태를 깨운 것은 안다미의 문자였다.
[일이 있어서 오늘은 못 들를 것 같아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밤새 급한 수술이 잡혀있다던 안다미가 아침에도 잠시 짬을 내지 못한다는 연락이었다.
[나는 괜찮습니다. 건강 챙기세요.]
강성태는 간단하게 답을 보냈다.
가뜩이나 바쁘고 정신없는 사람에게 말 길게 늘어놔 봐야 힘들게만 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일은 참 어렵다.
짧게 온 문자 하나를 바라보며 안다미의 숨결과 음성, 눈빛을 되새기는 걸 언제까지 감당해야 하는 건지.
씁쓸하게 웃은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뒤에 천천히 팔을 넓게 펼쳤다.
문도진과 송원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몸은 정말 좋아졌다.
**
안다미는 흰색 벤츠를 주차장에 세우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전화를 걸어 부친인 안호상 박사의 음성을 듣는 순간, 왜 느닷없이 구성된 의료봉사팀에 자신이 포함됐는지 바로 알았다.
이른 시간이라 한가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안다미는 거침없이 디지털 도어록의 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호상은 주방 앞쪽 식탁에 앉아 커피를 앞에 두고 있었다. 들어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던 안호상은 피하는 것처럼 커피잔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안다미는 가방을 현관 앞에 내려두고 곧장 부친인 안호상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간을 달라던 게 이러려고 그러신 거예요?”
“그게 싫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의료지원팀 거절하고, 좋아한다는 남자와 미래를 꾸며. 대신 내게 축하해 달라는 말 따위는 바라지 마라.”
화난 눈빛으로 입을 꾹 다문 안다미를 향해 안호상 역시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도 자식을 낳아보면 그때는 내 맘을 이해하게 될 거다.”
“적어도 나는 아빠처럼 비겁하게 굴지는 않을 거예요.”
“깡패다! 깡패!”
안다미의 말에 참았던 분노가 터진 모양이었다. 안호상이 느닷없이 목청을 높였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랴! 내 딸이 결혼하는데 상대가 깡패랍니다, 그래야겠냐? 김 박사, 이 원장,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병원에 있는 직원들에게는 뭐라고 하랴?”
안호상은 전에 없이 화난 얼굴이었다.
“그래! 너만 행복하다면 내 체면이야 무슨 상관이겠냐? 그런데 딸이 진흙탕, 아니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빤히 보면서 어떻게 가만있어?”
“제가 의료지원을 간다고 바뀔 거 같으세요?”
“알지. 네 성격을. 그렇지만, 강성태란 남자는 바뀔 거다. 그렇게 생긴 사람은 반드시 인물값을 해. 그렇지 않다고 해도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고. 아!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도 너한테 아닌 척할 수는 있겠구나.”
배배 꼬는 안호상을 보며 안다미는 지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돌아가신 지 17년 됐어요.”
“그 이야기가 왜 여기에서 나와?”
“아빠를 좋아한 분들 있다는 거 제가 몰랐을 거 같으세요? 그런 날이면 아빠가 엄마를 찾아가거나 저랑 저녁 먹거나 대학교 다닐 때는 술을 마시자고 하셨잖아요.”
“오늘은 이만 하는 게 좋겠다.”
안호상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아빠는 그렇게 엄마를 사랑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 성태 씨는 절대 그러지 못한다고 확신하시는 거잖아요.”
식탁과 의자를 짚으며 일어서던 안호상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3년이다. 그 뒤에도 너와 그 남자가 변함이 없다면 나도 인정하마.”
조건을 내놓은 안호상이 슬픈 얼굴로 웃었다.
“결혼식에 참석해서 네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가고, 웃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할 도리는 다하마.”
“축하는요?”
“그건 아직 자신 없다. 하지만 네가 3년을 이겨낸 것처럼 나도 이곳에서 노력하마.”
안타까운 심정으로 사랑하는 딸을 바라보는 안호상의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
그래서였을까.
오늘따라 부쩍 나이 들어 보이는 부친을 바라보는 안다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왜 그러냐며 달랬을 부친이었다.
늘 강단 있는 딸의 눈이 붉게 물든 것을 보면 다가와 어깨를 보듬어주었을 안호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시선을 떨군 채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갈게요. 의료봉사.”
안다미의 결정을 들은 안호상은 칼에 찔린 사람처럼 아픈 얼굴이었다.
“아빠가 결혼식에서 축하해주길 바라서 가는 거예요.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태에서 3년을 떨어져 있으면 헤어질 수도 있겠구요. 그렇게 돼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대신…….”
안다미의 뒷말이 끊기는 바람에 안호상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고개를 들었다.
“3년을 이겨낸다면 그때는 축하해주세요. 그거면 돼요.”
마른침을 삼킬 뿐, 안호상을 답을 하지 않았다.
“갈게요. 공복에 커피는 안 좋아요. 간단하게라도 아침 드시고 나가세요.”
일어선 안다미는 꿋꿋한 걸음으로 움직여 가방을 들고 곧장 문을 나섰다.
문이 다시 닫히고 도어록이 잠기는 순간, 안호상은 진이 빠져버린 사람처럼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강성태는 아침을 먹으며 어젯밤에 조태완과 나누었던 통화 내용을 최치곤에게 들려주었다.
“태완이파 조태완이 고개를 숙였다는 거 아냐?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아직은 변할 소지가 많아서 그렇구나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오전에 병렬이랑 잠시 볼까 싶다.”
“만나야지. 이런 이야기는 만나서 해야지. 내가 전화할까?”
“밥 먹고 하자. 그거 말고 이두안 회장 만나고 나서 차를 좀 썼으면 싶은데 되겠냐?”
“호텔까지 내가 태워갈 거고, 기다렸다가 같이 올 텐데 그 차 쓰면 되지. 왜? 어디 갈 데 있어?”
세 번째 즉석밥을 뜯은 최치곤이 손에 묻은 밥풀을 입으로 가져가며 질문을 던졌다.
“지하차도를 지나가 보려고.”
머슴처럼 숟가락을 엄지 쪽으로 든 최치곤이 놀란 시선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이번을 잘 넘기면 태완이파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따라올 거고, 여차하면 신호남파도 먹는다. 중요한 순간에 변수가 생기면 곤란하니까 한 번 해봤으면 싶다.”
“죽을 수 있다지 않았냐? 다미 씨한테 말하고 도움받는 건…….”
강성태가 고개를 젓자 최치곤은 하던 말의 뒤를 삼켰다.
“씨발! 이런 거라도 내가 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 지지리 복도 없어서 어릴 적에 교통사고 한 번 없었다.”
“미친놈. 그걸 말이라고?”
“그냥 갑갑해서 해본 소리야. 얼른 마저 먹자. 그래야 병렬이 형님한테 전화하지.”
강성태를 다독인 최치곤이 시원하게 밥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식탁에 둔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이건 누구지?
최치곤이 고개를 길게 빼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문도진인데?”
“뭐?”
“밥 먹어. 지금은 그게 좋아.”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밥을 떠서 입에 넣는 강성태를 최치곤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