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 13화
통화버튼을 누른 강성태는 느긋하게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갔다. 별것 아닌 듯한 이 여유가 문도진을 다급하게 만든다.
“여보세요?”
- 강 사장이지? 나 문도진이여.
“예, 말씀하시죠.”
- 지용호 다음 빳다로 말이여. 송원이 이짝 책임자가 됐다드만. 성이 송이고, 이름이 원. 그 송원이 하고 통화를 했는디 우리 강 사장을 만나겠다고 하더라고.
사투리가 이어지는 것으로 봐서 문도진은 여유가 생긴 눈치였다.
통화를 지켜보던 최치곤이 공연히 주변을 둘러본 뒤에 궁금한 시선을 가져왔다.
- 만나는 장소 말인디. 안중으로 하자던데 우리 강 사장 생각은 어때? 아, 거기가 광룡이 설치는 곳이니까 강 사장이 쫄리지 않겄어? 그래서 내가 중재인으로 나설 생각이거든. 그 정도면 괜찮지 않어?
지랄들은.
고작 쥐어짜 낸 계획이란 게 광룡과 문도진이 손잡고 강성태 주저앉히겠다는 거라니?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 어째 대답이 읎어? 마음에 안 들어? 그라면 강 사장이 원하는 장소를 말하든가.
끝에서 사투리가 사라진 문도진의 질문이 있었다.
오랫동안 대가리만 했으니 약점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문도진, 본인은 모를 수도 있겠다.
불행하게 내 몸 상태가 급속도로 좋아졌거든.
그런저런 이유로 문도진 너는 사망.
“안중 좋지. 최근에 시끄러운 일이 많았으니까 이왕이면 으슥하고 조용한 곳으로 부탁한다고 전해주십시오.”
- 크하하하! 이런 배짱을 봤는가? 최고여! 최고! 내가 확실하게 전할라니까 마음 푹 놔버려!
흡족한 모양으로 문도진의 사투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 시간은 어쩔란가?
“이틀 뒤로 해서 편한 시간으로 정하면 됩니다.”
- 그라제! 뭐든 뜸을 들여야 맛이 나제! 그라믄 내가 송원하고 시간을 정해서 전화할 테니 바로 받소!
“그러시죠.”
문도진의 통쾌한 웃음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뭐라냐?”
“죽여달란다.”
“누가? 도진이 형님이?”
“지용호 대신 우리나라를 맡은 송원이란 놈하고 문도진이 손을 잡은 모양인데 수법이 너무 유치해서 소름이 다 돋는다.”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최치곤이 술기운이 올라와 벌겋게 변한 눈을 끔벅였다.
“조태완이 어떻게 할지 결정한 뒤에 이야기하자. 잠시만.”
강성태는 들고 있던 스마트폰에서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린 뒤였다.
- 여보세요?
뱃속부터 올라온 듯한 쇳소리가 스마트폰을 타고 넘어왔다.
“애들 시켜서 지켜봤을 테니까 내가 어디 있는지 알지?”
- 끄흠.
“그건 됐고. 방금 문도진이 전화했었다. 지용호 대신 송원이라는 놈이 책임자로 왔다는데 이틀 뒤에 안중에서 셋이 만나기로 했다.”
강성태가 내용을 설명하자 ‘어쩌려고 그래?’ 하는 눈으로 최치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인데 나, 문도진, 송원이 만나기로 한 거다. 그 전에 들은 조건은 조태완을 작업해서 클럽을 내게 넘겨준다는 거였는데 그걸 의논하기 위한 거고.”
- 씨발 것들이! 사람을 아주 주물러서 터트리려고 하나!
“조태완이 자고 있다가 추워서 깨보니까 중국의 수술대 위일 거라고 하던데?”
- 누가 그래? 문도진이? 그 개호로 새끼가 뒈지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송원은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으니까 문도진 말고 없지.”
- 송원이란 놈은 원래 지용호 따까리였다. 몇 번 본 적 있는데 내가 있는 상에 앉지도 못하던 놈이었다.
강성태는 조태완이 들을 수 있도록 픽 웃었다.
“그럼 뭐 해? 조태완이 작업한 뒤에 클럽을 내게 넘겨준다고 할 정도로 대가리가 컸는데. 어떻게 할래?”
대꾸는 없었다.
대신 눈알을 굴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조태완의 모습이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항상 같아. 너한테 먼저 기회를 줬다. 그러니까 결정해.”
- 무슨 결정? 뭘 어떻게 결정하라고?
“태완이파 보스 조태완이 결심하면 내가 문도진하고 송원의 목을 가른다. 그렇게 손잡고 살아날래? 아니면 내가 저쪽으로 붙어서 조태완이 수술 당하는 영상 받아볼까?”
- 하아, 이 씨발!
기가 막힌 탄식과 함께 바람 빠지는 듯한 조태완의 웃음이 건너왔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문도진에게 해도 돼. 이렇게 통화한다고 말해놨으니까 알아들을 거다. 대신 문도진과 통화한 이후에는 너도 목이 갈라진다는 것만 기억하고 행동해.”
- 아주 씨발. 염라대왕 나셨네.
“조태완.”
강성태가 나직하게 부르자 자존심이 상한 모양으로 조태완의 뜨거운 숨소리가 넘어왔다.
“아우라 호텔에서 말인데, 김동팔이나 거기 모인 멍청한 놈들이 무서워서 너를 살려둔 게 아니거든. 커피숍에서 내가 했던 말을 잊어버렸나 본데 그 말 때문에 살려둔 거란 것만 알아.”
- 무슨 말?
“태완이파는 내가 접수한다.”
듣고 있던 최치곤의 목이 불쑥 올라왔다.
“같은 맥락이다. 이틀 후에 신호남파도 내가 접수한다. 태완이파와 다른 건 문도진의 숨통이 그날 끊어지는 거고.”
전화로 굳이 이런 말을 할 필요 있냐?
최치곤이 다급한 눈빛과 표정, 심지어 입 모양으로 강성태를 다독였다.
-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문도진이 없어지면 신호남파는 이병렬이 맡는다. 너는 계속 태완이파 맡아. 조건은 하나밖에 없다. 마약에서 손 뗄 것. 광룡이 무서우면 지금 문도진에게 전화해. 대신 목숨 걸고 하는 선택이니까 신중하고.”
버릇이 된 것처럼 조태완의 대꾸는 없었다.
“동남아 자금? 중국, 일본 자금? 그냥 처먹고 모른 척해. 깡패라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언제까지 우리나라 사람들 피 빨아서 그쪽에 넘겨주고 살 건데?”
- 끄응.
“분해? 나한테 반말 듣는 건 피가 끓는데 동남아 놈들한테 우리 여고생 약 먹여서 들여보내는 건 자존심 안 상하고? 그게 강남 삼대장 조태완이야? 그 자존심? 에라, 이 지랄을 해라.”
거친 말을 뱉어낸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더럽게 사람 팔아가며 사는 너도 사망…….
- 시간을 주라.
강성태가 판정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조태완은 기가 막힌 타임으로 생명 연장의 줄을 잡아당겼다.
“하루다. 내일까지 답 없으면 내가 알아서 한다.”
- 끄으응.
스마트폰을 내린 강성태는 종료버튼을 눌렀다.
이제는 대리를 불러서 집으로 가야 했고, 궁금해 반쯤 미쳐가는 최치곤에게 통화 내용을 알려줘야 할 시간이었다.
**
통화를 마친 조태완은 스마트폰을 오른손에 꼭 쥐고서 부들부들 떨었다.
던지고 싶다. 미치도록.
그런데 조금 뒤라도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할까.
문도진이 이상한 조건을 내걸면 알려주기 위해 연락할 텐데?
유심을 바꾸면 괜찮다는데 그래도 될까.
더럽고 치사한 생각을 떠올리던 조태완은 악착같이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후아-.”
최근 가장 큰 인내를 발휘해서 겨우 해냈다는 일이 스마트폰을 집어 던지지 않은 거라니.
조태완은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더럽게 물렸네, 씨발!”
맞다. 다른 말 필요 없이 진짜 더럽게 물렸다.
영등포 뒤집어엎는 거야 쉽다.
우르르 몰려가 부수고 두들기면 그만이었다.
그럴 힘도 충분했다.
문제는 그 뒤였다.
사건을 덮어달라고 부탁한 상황에서 덜컥 영상이 풀리면 위쪽에 있는 인간들은 조태완을 버릴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미칠 일인데 강성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놓치기라도 하면?
“하후.”
아예 습관이 된 것처럼 조태완은 한숨을 연속해서 뱉어냈다.
깡패 생활 한두 해 한 거 아니고, 강남 삼대장 마작판에서 주워온 게 아니어서 조태완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제대로 지녔다.
강성태는 말이지.
분명 사람을 죽여본 눈이었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라 여럿을.
김동팔이 강성태를 막아내?
개가 호랑이의 귀나 꼬리를 물 수야 있겠다.
그다음에 배가 찢기고, 대가리가 터지도록 깨물리는 게 문제여서 그렇지. 더 큰 문제는 김동팔이 그렇게 깨지고 나면 다음이 조태완의 순서가 아니냔 말이다.
그렇다고 문도진을 칠 수도 없었다.
강남을 피바다로 만들면 그 순간 조태완과 문도진은 바로 달려 들어간다.
4조 타이틀 달면 칠십쯤 돼야 바깥에 나올 테고.
뺏길 게 많은 조태완과 문도진은 결국 강성태의 적수가 아니었다. 힘으로 누르자니 영상이 문제고, 문도진의 신호남파를 조지자니 4조 타이틀 달고 들어갈 게 걸리고.
“크흐흐흐.”
머리가 핑핑 돌던 조태완은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을까?
아니면 아우라 호텔에서 계산했었나?
지용호를 두고 간 이유가 정말 광룡이 알아서 제거할 거라고 믿어서였다고?
“방법이 없네.”
이병렬이 신호남파의 보스가 되게끔 도와야 산다.
결국, 강남 삼대장의 한 자리를 이병렬이 차지한다는 의미였다.
이병렬이 강성태를 보스로 모시니까, 조태완도 고개 숙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반항하면 강남 신호남파와 강성태를 조태완 혼자 상대해야 한다. 이를 북북 갈 광룡도 있고, 영상이라는 약점도 있고, 동남아, 중국, 일본에서 돈을 뜯긴 갑부들도 있는 상태에서 말이다.
상체를 숙여 양손에 이마를 걸친 조태완은 강성태를 떠올렸다.
“태완이파를 접수한다.”
흘려들었던 그 한마디가 이토록 무서운 의미인 줄 깨닫자 등골이 오싹했다.
그래도 문도진, 그 개호로 새끼보다는 조건이 좋은 거 아닐까.
“흐흐흐흐흐.”
조태완은 서글픈 웃음을 토해냈다.
이번 싸움에서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웃음이었다.
**
호화로운 별장의 작은 방이었다.
솥뚜껑만 한 손이 불쑥 올라가더니 고영주의 목덜미를 세차게 갈겼다. 그 직후에 고영주는 이불장에서 쏟아진 이불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남의 돈을 쳐 잡쉈으면 약속을 이행해야지. 아니면 위약금 9억, 오늘 여기 모인 스태프, 장비 대여료, 다른 배우들 출연료, 장소 대여료, 해서 25억을 물어주든가.”
고영주를 내려다보던 덩치가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깐 와 보십쇼.”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가죽 가방을 든 변호사였다.
“계산을 조금 빠트리셨더라고요.”
변호사는 선 채로 가죽 가방을 열어서 계약서를 꺼냈다.
“여기 보면 제 업무비용까지 포함하기로 돼 있거든요. 거기에 일본 업체에 손해배상이 별도로 있습니다. 작품당 우리가 받기로 한 금액이 5억인데, 취소할 경우 위약금까지 10억을 물어내야 합니다.”
너무나도 단정한 음성이어서 고영주는 이게 정말 현실이 맞나 싶은 정도였다.
“그래서요. 우리 고영주 씨가 촬영을 거부하면 총 물어내야 하는 금액이 35억이 됩니다.”
“이건 사기예요.”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하실 수 있습니다.”
“드라마 주연을 약속받고 계약했어요.”
“예. 분명하게 드라마 주연을 약속했습니다. 제가 적어드렸으니까요. 그 전에 일본과 합작 작품에 출연할 수 있다, 이 항목도 직접 확인하셔서 밑줄 그으셨고요.”
“포르노잖아요.”
“엄밀하게는 AV, 성인물이라고 해주시는 게 좋습니다.”
비련의 주인공처럼 양손을 바닥에 짚어 겨우 상체를 버티는 고영주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스태프부터 일본 측 출연자, 심지어 일본의 배우의 매니저까지 이런 일은 아예 일상이란 투로 바깥 거실에서 떠드는 모습을 보자 아예 기가 부러졌다.
“김종수 대표께서 고영주 씨를 특별하게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정 이게 싫으시면…….”
고영주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거실에 있던 일본인 남자 출연자가 머리에 수건 하나만 두른 알몸으로 걸어와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저 인간 말고도 다섯이나 더 홀랑 벗고 고영주를 기다리며 시시덕거리는 상황이었다.
“그날 클럽에서 거절했던 두 분께 갈 기회를 주셨습니다. 대신 약을 투여해야 합니다.”
“변호사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요?”
“제 미래를 염려해 주신 점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영주 씨의 현실을 보셔야 할 때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둘 다 싫다면 어떻게 할 건데요?”
재미있다는 투로 웃은 변호사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폭력은 없을 겁니다. 조태완 회장님의 이름을 팔고 다니신 벌로 얌전히 묻어드립니다. 저희도 사실 그 방법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 온 걸 다 알아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참고로 보도국장이 클럽에서 아주 재미있게 놀고 가셨다는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하흐흐. 흐흐흑.”
악착같이 버티던 고영주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매니저를 붙여주고 멋진 승합차를 제공하길래 설마 하고 달려왔다가 당했다. 설마 이런 촬영을 강요할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었다.
“시간을 끄시면 지연 배상이 있습니다. 이제 그만 결정해 주셔야겠습니다.”
“약을 주세요.”
눈물을 삼킨 고영주는 힘겹게 답을 내놓았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입술을 움직여 미소를 그린 변호사가 옆에서 지켜보던 덩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씨발 게, 변호사 말은 듣네.”
이죽거린 덩치가 방의 한쪽 서랍을 열어서 노란 고무줄과 얇디얇은 주사기를 꺼냈다. 고무줄을 감기 위해 팔을 당기는 덩치를 보며 고영주는 강성태를 떠올렸다.
까불지 말았어야 했다.
건방 떨지도 말고.
살 수 있는 길은 그 사람밖에 없었던 건데 뭐에 미쳐서 이랬는지.
팔뚝이 따끔한 직후였다.
지겹도록 더운 여름날, 소름 끼치게 달려드는 에어컨의 냉기처럼 강렬한 쾌감이 고영주를 덮쳤다.
“이제 촬영을 할까요?”
약속이 틀리다. 그러나 고영주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하고는 문 앞에 선 일본 남자배우를 향해 몸을 꿈틀거렸다.
고영주가 입술을 핥을 때였다.
거실에서 덩치 한 명이 빠르게 들어왔다.
“대표님이십니다.”
그리고는 변호사에게 스마트폰을 넘겨주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