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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 - 9화 (117/513)

6권 - 9화

제4장. 내가 좀 독해질 거야.

안호상 박사는 들어서는 유헌우를 반갑게 맞았다.

“바쁜데 이렇게 불러서 미안하네.”

“저야 야간에 더 바쁜 편이라 지금이 오히려 편합니다.”

소박한 소파였다.

여직원이 가져다준 차를 마신 유헌우가 맞은편에 앉은 안호상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걱정이 있으세요?”

“자네는 어쩌면 알고 있지 않나 싶어서. 아니더라도 이런 의논을 할 사람이 자네밖에 더 있겠나. 다미 말일세. 자네 병원에 데려갔던 환자를 좋아한다지 뭔가.”

참담한 얼굴로 말을 꺼냈던 안호상이 혹시 하는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유 선생, 혹시 알고 있었나?”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한 답이었다. 그러나 안호상은 그런 유헌우가 서운한 눈빛이었다.

“그런 눈치를 봤으면 말려주든가, 아니면 내게 언질이라도 해주지 그랬나.”

“선생님이 누구보다 안 선생을 잘 아시잖습니까? 하겠다고 한 일을 못 해낸 게 있어야죠.”

“그래서 문제 아닌가. 남자에게 관심조차 없던 아이가 눈을 반짝이면서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는데…….”

말을 하다 속이 답답한지 팔걸이에 상체를 기울인 안호상이 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이 새벽의 물안개처럼 소파 주변에 내려앉았다.

“안 선생이 선생님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아십니까?”

유헌우가 건넨 다독임 같은 말에 안호상은 벽을 바라보던 시선을 가져왔다.

“말려서 될 일이 아니겠지. 그래서 말인데 서라대학 병원에서 의료봉사팀을 꾸린다더군. 거기에 다미를 포함시켜 달라고 부탁했네.”

“선생님?”

“실력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안 선생 실력이야 차고 넘치지요. 그렇지만…….”

“3년이라고 들었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 정도면 잊히지 않겠나? 겉만 번지르르한 그 친구도 한창때니까 다른 여자를 만날 테고. 그렇지 않나?”

긍정의 답이 간절한 안호상을 보며 유헌우는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안호상과 안다미는 한번 결심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털어놓은 안다미, 그걸 말리고 싶은 안호상, 나중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당장은 타협점을 찾기 어려운 성격들이었다.

“서라대학 병원 일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오늘 새벽에 급한 수술 요청을 받아서 들른 길에 들었지. 다미를 포함시켜 달라는 전화는 좀 전에 했고.”

“이미 결정하신 것 같은데 저를 부르신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까?”

“내가 다미에게 잠자리를 했냐고 물었네.”

솔직하게 털어놓은 안호상이 입맛을 다시며 착잡한 심정을 표현했다.

“알지. 다미가 뭐든 내게 말할 정도로 나를 존경하고 따른다는 거. 그런데 딸자식이 깡패를 만났다고 하니까 그런 저속한 걱정이 불쑥 들더군. 솔직히 다미의 선택을 무시하는 심정이기도 했네. 어쩌겠나? 이미 뱉었는데.”

슬쩍 유헌우를 들여다본 안호상이 결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다미를 좀 설득해 주게. 파견을 거절하면 그만이라니까 다녀오라고 해줘. 파견 다녀와서도 그놈과 미래를 원한다면 나도 허락하겠다고 대신 말해주고.”

안다미의 성격에 파견을 거절하고 강성태를 택하겠다면 안호상은 더 막을 방법이 없었다. 기껏해야 평생 안 보겠다며 외면하는 게 전부였는데 유헌우가 아는 안다미는 그런 협박에 고개 숙일 성격이 아니었다.

속마음을 털어낸 안호상이 허탈한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대며 늘어졌다.

“선생님. 혹시 강성태란 친구가 단순히 깡패라고 생각하십니까?”

등받이 너머로 머리를 기대고 있던 안호상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투로 고개를 세웠다.

“그 친구 보기보다 능력 있습니다.”

“능력? 깡패니까 싸움은 좀 하겠지. 상처를 보니까 결정적인 칼은 모두 비켜나게 할 정도로 운동신경은 있는 모양이더구만. 총상을 핑계로 외국에서 용병을 했다느니 떠들었나 본데 갱단에 있으면서 총질을 한 건지 누가 알겠나?”

“다른 건 몰라도 레드워터라는 용병회사를 나온 건 분명합니다.”

“용병을 했든, 경호를 했든 과거가 그렇다고 지금 당장 깡패인 게 바뀌나? 자네도 자식이 있을 테니까 내 심정을 이해할 게 아닌가.”

변명처럼 들리는 유헌우의 말이 억지로 누르고 있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안호상의 음성이 한 톤 올라갔다.

“후! 목소리를 높여서 미안하네. 자네가 싫다면 내가 하지. 어차피 병원에서 통보받으면 내게 달려올 테니까.”

유헌우는 안호상의 화가 누그러지기를 기다렸다.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거리였던 딸이자, 비밀이라고는 없을 정도로 모든 일을 의논하고 따랐던 안다미가 깡패로 보이는 강성태를 선택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제가 먼저 만나보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유헌우가 슬그머니 나서자 미안한 표정으로 안호상이 상체를 세웠다.

“부탁 좀 하세.”

“3년 뒤에도 안 선생이 강성태란 친구를 선택하면 정말 허락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다른 방법이 있겠나. 그 정도까지 독한 마음이라면 받아들여야지.”

답을 내놓은 안호상은 고개를 젓다 말고 시선을 탁자로 떨어트렸다.

**

강성태가 입을 양복과 셔츠를 챙긴다는 핑계로 최치곤이 카페를 나선 뒤였다. 여고생들이 몰려들면서 한 시간쯤 정신없이 보냈고, 그 덕분에 카페는 활기를 되찾았다.

“확실히 커피알리고는 매니저님이 계셔야 활기가 돌아요.”

주문대와 싱크대를 정리한 이은주가 흐뭇한 표정으로 홀을 돌아보았다.

“은주 씨. 저녁때쯤 나갔다 와야 하거든요. 봐서 일찍 끝나면 오기는 할 텐데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오늘은 성안이가 마감하는 날이에요. 제가 도울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강성태의 미안한 요청을 이은주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매니저님 계실 때와 달라서 좀 아쉬워요. 그래도 여학생들 몇 명하고는 친해져서 사적인 고민도 듣고 그래요.”

이은주는 어느새 매니저의 역할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된 건 정말 행운이었다. 더불어 친구인 안다미를 만났으니 나중에 옷을 한 벌 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가볍게 웃은 강성태는 전에 읽던 책을 펼쳤다.

독한 상황에 뛰어들다 보면 인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전투에서 동료가 쓰러질 때처럼 말이다. 그런 때 사람다운 모습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련이 강성태에게는 독서였다.

오후 5시 30분쯤, 이성안이 커피알리고에 들어서면서 저녁 장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어서 와.”

“어? 계셨어요?”

“그래. 그동안 고생 많았지?”

“누나가 힘들었지 저는 평소랑 같았어요.”

반갑게 인사한 이성안과 이은주가 교대로 김밥을 먹는 동안, 강성태는 계속 주방에 있었다.

“어서 오세요, 커피알리고입니다.”

일과를 마치고 들른 직장인들을 강성태가 맞이하는 동안, 이은주와 이성안이 양치를 마치고 돌아왔다.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아 돌아가는 것처럼 이은주와 이성안은 강성태가 만들던 음료를 이어받았고, 주문을 막힘없이 처리했다.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강성태는 다용도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안다미에게 전화를 해볼까 했던 강성태는 병원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문도진을 만나고 난 뒤 응급실에 잠시 들러볼 생각이었다.

“은주 씨,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성안아, 고생 부탁해.”

“네. 마치고 문자 드릴게요.”

“들어가세요, 형.”

이은주와 이성안에게 인사한 강성태는 손님들에게 눈인사를 전하고는 카페를 나섰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문도진이 정했다는 강남의 호텔 커피숍으로 향하기 적당한 시간이었다.

강성태가 주차장을 가로질러 도로에 나섰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유턴한 흰색 벤츠가 인도에 바싹 붙어 멈춰섰다.

눈에 익은 승용차였다.

자동차 유리를 통해 운전석에 앉은 안다미의 얼굴도 보았다.

강성태는 절로 나오는 미소를 누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빠르게 내려간 조수석 유리 저 안쪽에서 안다미가 상체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디 가세요? 제가 태워다 드릴까 하는데?”

“죄송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요?”

활짝 웃은 안다미가 얼른 타라는 듯 조수석을 두드렸다.

퇴근 시간이었다.

신호를 받은 차들이 밀려오고 있어서 오래 시간을 끌기도 어려웠다. 조수석에 앉은 강성태가 벨트를 매자 안다미가 차를 출발했다.

“저녁 약속 있으신가 봐요?”

“친구가 기다려서요.”

“이렇게 생기신 분이 사랑하는 사람도 없어요?”

“없긴요. 엄청나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바빠서요. 낮에 잠 깨울까 봐 전화도 못 해요.”

“어머!”

놀랍다는 투로 안다미가 돌아보았다.

뒤로 묶은 머리에 목 아래를 감싼 면티, 재킷을 입었는데 미소를 그린 얼굴에서 별처럼 눈이 빛났다.

시선이 마주친 직후에 강성태는 왼손을 움직여 안다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차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서 안다미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나 2주일 뒤에 쉬는데 혹시 시간 되세요?”

부친 안호상 박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모른다.

다만, 힘겨웠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시간 안 돼요? 이런 기회 자주 없는데?”

“1박 2일인 거죠?”

강성태의 뻔뻔한 대꾸에 안다미가 웃음을 터트렸다.

퇴근 시간이라도 차로 움직이기에는 워낙 거리가 가까웠다.

“골목이 좁아서 지금 안쪽에 들어갔다 엉키면 나오기 힘들어요. 차를 돌리기도 그렇고. 그냥 앞에 세워주세요.”

짧은 만남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쉬웠는데 당장은 방법이 없었다.

“카페 마감하고 잠깐 들러도 되죠?”

“외래 병원 통로에 갈 각오하고 오세요. 뭐더라? 벽에 밀어붙인다는 거까지는 기억하는데 다음을 모르겠네요.”

안다미의 당찬 대답에 강성태가 웃음을 터트렸고, 그 직후에 차가 멈췄다.

“갑니다. 힘들어도 기운 내세요.”

눈을 바라보며 인사한 강성태는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승용차와 강성태를 번갈아 보았는데 분주한 걸음이라 시선이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든 안다미가 승용차를 움직여 차량 사이에 스며들었다.

잠시 도로에 서 있던 강성태는 골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 참 어렵다.

빌라에 도착한 강성태는 계단을 올라가 번호를 눌렀다.

“우리 서방님. 전화하려는데 딱 맞춰 오시네.”

스마트폰을 든 최치곤이 현관으로 나오며 너스레를 떨었다.

“소녀가 저렇게 옷도 다 준비해놨어요.”

“야, 그 서방님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냐?”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날카로우실까?”

킬킬거린 최치곤이 냉장고를 열어 봉지를 꺼냈다.

“얼른 먹자. 병렬이 형님하고는 7시에 만나기로 했다.”

식탁에 김밥을 꺼내놓은 최치곤이 거실 구석에서 종이 봉지와 주스, 커피가 담긴 캐리어를 들고 돌아왔다.

“세븐 우드 호텔 커피숍 근처에서 진용이 형님하고, 나, 그리고 우리 식구 열 명 정도가 대기할 거야. 안으로 들어가는 건 너하고 병렬이 형님이고.”

샌드위치를 한껏 입에 문 최치곤이 이병렬과 정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세븐 우드 호텔이 문도진하고 관련이 있어?”

“거기 외국인 전용 카지노가 있거든. 아무래도 도진이 형님 나와바리라고 봐야지.”

김밥을 입에 넣은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병렬이 형님 납치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우라 호텔의 사건을 빤히 알 테니까 그렇게 나오기는 어려울 거다.”

손에 들고 있던 남은 부분을 모조리 입에 욱여넣은 최치곤이 바로 다음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겼다. 묻고 싶은 무언가를 억지로 삼키는 느낌이었다.

“치곤아.”

뻑뻑하게 샌드위치를 씹던 최치곤이 시선만 들었다.

“조태완과의 일도 있고 해서 긴장하는 건 이해한다. 질문을 삼켜준 것도 고맙고. 긴장을 유지하는 건 좋은데 너무 걱정하지는 마. 걱정한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덤덤한 조언을 들은 최치곤이 주스 잔을 집어서 벌컥벌컥 마셨다.

“아흐, 씨발. 그렇게 말해주니까 묘하게 마음이 좀 놓인다.”

“사고 터지면 제일 앞에서 설칠 거면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거야. 네 말대로 야비하게 조직을 굴리는 문도진 밑에 진짜 충성하는 놈이 몇이나 있겠냐?”

“그것도 그렇지.”

강성태의 몇 마디에 없던 기운이 솟았다기보다는 걱정해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말이 위안이 된 모양이었다.

최치곤은 씩씩하게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넣었다.

양치를 한 강성태는 셔츠와 정장으로 갈아입은 후에 최치곤과 함께 빌라를 나섰다.

“어딘가에서 조태완 애들이 보고 있을 거다. 여유 있고 느긋하게 움직여.”

“문 열어줄까?”

“뒤에 탈 테니까 그것만 이해해.”

강성태가 뒷좌석에 앉는 것을 본 최치곤이 운전석에 몸을 집어넣었다.

“저 새끼들 보는데 좀 좋은 집으로 옮겨야 하는 거 아니냐?”

“그건 좀 오바 아닐까?”

“이왕이면 멋지게 보이자는 거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최치곤은 빌라의 주차장을 빠져나와 신월동 나이트로 향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어둠이 세상을 뒤덮은 시간이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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