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 8화
진동 소리가 요란했다.
혹시 조태완에게서 온 전화인가 하는 최치곤과 지난번에 보았던 안다미였으면 싶은 김민정이 동시에 강성태를 보았다.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잠시만’하는 눈빛을 보낸 뒤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급한 통화인데 괜찮냐?
이병렬은 올라온 흥분을 억지로 누른 듯한 음성이었다.
“무슨 일인데?”
- 강남 삼대장 중 도진이 형님이 나한테 직접 전화했다. 너랑 보고 싶다는데 뭐라고 할지 몰라서 물어보겠다고 했거든. 어떻게 할래?
문도진이 먼저 전화했다고?
강성태는 앞에서 바라보는 최치곤과 김민정에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낸 뒤에 카페의 문 쪽으로 움직였다.
딸랑.
문을 열고 나선 강성태는 주차장을 향해 섰다.
“보자는 이유가 뭐야?”
- 이런 말 하는 게 쪽팔리기는 한데 왜 그러냐고 물을 생각도 못 했다. 도진이 형님 위치가 그래.
“시간이랑 장소는?”
- 너더러 정해서 알려달라더라.
어려워서 이유조차 묻지 못하는 이병렬을 감안하면 우호적인 분위기를 위해 문도진이 최대한 양보한 수준이었다.
“문도진이 직접 전화한 거 맞지?”
- 행사에서 한두 번 본 게 전부라서 목소리로 확인하기는 어려운데 우리 바닥에서 이름 파는 건 죽을 짓이라 그건 믿어도 될 거 같다.
강성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도진이라…….
싸움에서는 화해를 권하는 놈이 배신자고, 협상 테이블에 끼어드는 놈은 욕심을 채우려는 목적 외에 없다.
길 건너편의 건물과 그 위로 펼쳐진 하늘을 보며 강성태는 마음을 굳혔다.
“저녁 먹은 뒤에 보는 거로 하자. 8시쯤. 너 하고 나만 나간다고 그쪽도 문도진과 한 놈만 더 나오는 거로 해. 장소는 호텔 커피숍이면 좋으니까 문도진더러 정하라고 하고.”
- 괜찮겠냐?
“중재 나서는 놈이 사고 칠 건 없을 테고, 가봐서 분위기 이상하면 바로 나오면 돼. 우리는 헛걸음으로 끝나지만 문도진은 개망신당한 꼴이니까 손해 볼 거 없다.”
- 하긴, 아우라 호텔 일 정도는 알 테니까 납치하려 들지는 않겠지. 그나저나 태완이 형님하고 붙은 지 하루도 안 돼서 도진이 형님까지 나서니까 어안이 다 벙벙하다. 일단 전화하고 다시 연락할게.
“그래.”
통화를 마친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최치곤은 상관없더라도 카페 안에 김민정이 이쪽을 보고 있어서 들어가기 전에 표정을 풀 필요가 있었다.
딸랑.
안으로 들어선 강성태를 김민정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서 최치곤이 왼쪽 눈을 찡긋하며 사인을 보냈다.
저 입 싼 놈.
강성태가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오빠? 그때 의사 선생님하고 잘 된다며?”
짐작했던 화제를 꺼낸 김민정이 궁금한 얼굴로 답을 기다렸다.
“그냥 마음만 전한 단계야. 괜히 실망하게 되실지 모르니까 이모께는 조금 더 발전하면 말씀드리자.”
강성태의 답을 들은 김민정이 홀가분한 얼굴로 들고 왔던 가방을 집었다.
“이만 가볼게. 엄마한테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정신이 없던 모양이라고 할 테니까 저녁에라도 전화 한 번 드려. 먼저 일어날게, 치곤이 오빠.”
최치곤과 인사를 나눈 김민정은 이은주에게도 고개를 숙인 뒤에 문을 나섰다.
강성태는 김민정을 배웅하기 위해 함께 카페를 나섰다.
“저녁이라도 먹고 가지.”
“시간이 그렇잖아. 퇴근하는 길이라 피곤하기도 해.”
“피곤하다니까 잡지도 못하겠다. 이모부하고 민재에게 안부 전해주라.”
“그럴게.”
몸을 돌리려던 김민정이 생각난 것이 있는 얼굴로 강성태를 보았다.
“오빠. 엄마랑 나, 아빠, 민재 오빠, 모두 같아. 오빠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게 반가운 거야. 혹시라도……. 아냐, 오빠. 갈게!”
하려던 말을 삼킨 김민정이 짧은 미소를 끝으로 몸을 돌렸다.
상대가 의사라서 결말이 불행할지 모른다는 염려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되면 상처를 감당해야 하는 강성태가 안쓰러운 눈치였고.
강성태를 가장 아끼는 사람들마저 염려하는 시선이 당사자인 안다미에게는 얼마나 독하고 아프게 다가갈까.
김민정이 빠져나간 입구를 바라보며 강성태가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딸랑.
문이 열리며 최치곤이 나왔다.
“민정이 저거 무섭더라. 클럽 영상을 얼핏 본 모양인데 너 아니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다미 씨 팔았다. 그랬더니 너 다친 거 아닌지 살피더라. 그래서 다미 씨 전화 받는 거 같다고 둘러댔지.”
김민정이 나간 입구에서 고개를 가져온 최치곤이 심오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쟤는 어떻게 이모랑 똑같아지냐? 누군지 몰라도 민정이 남편 될 사람이 좀 불쌍해진다.”
“병렬이 전화였다. 문도진이 직접 전화했었단다.”
“뭐?”
너스레를 떨던 최치곤이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잠깐 저쪽으로 가자.”
카페 입구를 벗어난 강성태는 사무실 계단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 뒤에 이병렬과의 통화 내용을 있는 대로 최치곤에게 들려주었다.
“이건 뭐 씨발. 느닷없이 도진이 형님은 왜 튀어나와?”
“문도진이 나섰다면 광룡이 움직였다고 보는 게 좋다. 궁금한 건 피 튀기는 싸움에서 문도진이 얻을 게 뭐냐는 거지.”
“뭐가 됐든 태완이파에 신호남파까지 달려드는 꼴이니 사람이 쫄려서 어디 살겠냐.”
강성태의 시선을 받은 최치곤이 아차 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도진이 형님 조직이 신호남파거든. 예전에 호남 OB 하고 손 털고 새로 출발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두 명 나오라고 했는데 거기에도 김동팔처럼 심복이 있냐?”
“있지. 송대길이라고 졸라 야비한 인간 하나 있다. 도진이 형님 숙소에 워낙 돈이 도니까 살아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연장질 당해서 벌써 너덜너덜해졌을 거다.”
최치곤이 떠들 정도면 문도진 역시 들었을 말이었다.
알면서도 송대길을 심복으로 두었다면 문도진 역시 조직을 운영하는데 야비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뜻이었다.
“보자. 만나보면 알겠지.”
강성태가 흘러가는 말처럼 대꾸를 내놓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병렬이 형님 아니냐? 얼른 받아봐.”
스마트폰을 꺼내는 강성태를 최치곤이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액정을 확인한 강성태는 최치곤이 볼 수 있도록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름이 아니라 몇 번 통화한 번호였다.
“뭔데? 사채 권유냐?”
“조태완.”
“뭐? 이 번호가?”
픽 웃은 강성태는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 나 김동팔이다.
“말해.”
- 형님께서 보자신다.
눈을 반짝이는 최치곤 앞에서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손가락이 없는지 입이 막혔는지는 몰라도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전화하라고 해.”
- 야, 강성태? 영등포 그렇게 안 크다?
호텔 로비에서 그렇게 맞고도 김동팔은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분한 심정을 전했다.
이런 성격을 지닌 인간 몇 봤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눈앞에 있는 최치곤이 그랬다.
“영등포를 아작내든, 병렬이를 작업하든 원하는 대로 해. 대신, 조태완하고 너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강성태의 다부진 반응에 눌린 모양이었다.
뜨거운 숨을 내쉰 김동팔은 대꾸를 내놓지 못했다.
“아쉬운 게 있으면 고개를 숙이고 부탁해. 건방지게 협박하지 말고. 호텔에서 한 번은 봐줬다만, 내 앞에서 또 주접떨면 광대뼈를 바스러트려서 앞으로 1년은 죽만 먹게 할 테니까 알고 행동해라.”
말을 마친 강성태는 종료버튼을 바로 눌렀다.
“김동팔이었냐?”
강성태는 고개만 끄덕였다.
“뭐라는데?”
“조태완이 보자고 했단다. 그래서 직접 전화하라고 했다.”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폐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최치곤은 소리조차 없는 웃음을 흘려냈다.
최치곤의 웃음이 채 수습되기 전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손안에 든 강성태의 스마트폰이 울며 김동팔이 연락했던 번호를 액정에 올려놓았다.
“이번은 조태완 같은데?”
“어떻게 하려고?”
“일단 받아봐야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바라보는 최치곤 앞에서 강성태는 태연하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조태완이다.
이를 꽉 깨문 상태에서 뱉어낸 듯한 조태완의 음성이었다.
- 잠깐 보고 싶은데.
“바빠.”
- 흐음.
거칠게 나오던 김동팔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얼굴을 마주한 것도 아니고, 눈을 들여다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풀 꺾인 조태완의 태도가 스마트폰을 타고 그대로 느껴졌다.
“광룡하고 문도진이 손을 잡는 바람에 죽게 생긴 거 같은데 나한테 전화할 여유가 있어?”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강성태는 조태완의 염장을 긁었다.
- 누가 나를 죽여? 이 씨발!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흥분하기를 바랐다.
“지용호를 내놓을 거 아니면 끊어.”
- 그 씨발 지용호가 뒈졌다고. 그러니까 일단 만나서 의논 좀 하자는 거 아냐?
이거 봐?
지용호가 죽었어?
강성태는 힐끔 최치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뭐? 뭘 해달라는 거야?’
눈빛과 입 모양으로 묻는 최치곤을 향해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오늘 저녁하고 내일 오후는 중요한 약속이 있어.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 뒤에 보자.”
- 정말 고영주 머리통을 받아야 정신 차릴래? 이광준의 사촌 여동생이라는데 그렇게 되면 너도 견디기 힘들어.
죽을지 모른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자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고영주를 왜 자꾸 들먹이는지 모르겠는데 그건 알아서 하고, 다음번에 전화할 때는 예의를 갖춰.”
- 야, 강성태!
독이 잔뜩 오른 음성이었다.
쫙 깔린 조태완의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에 살기마저 잔뜩 묻어 있었다.
- 어처구니없이 한 번 당한 거로 너무 건방 떠는 거 아니냐. 영상? 어디 한 번 터트려 봐. 어떻게 되는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강성태를 쓰러트리고 말겠다는 독기가 스마트폰을 타고 담뿍 건너왔다.
제 딴에는 독기를 뿜어낸 거겠지만, 이건 조태완이 그 정도로 위기에 빠졌다는 자백과 같았다.
“조태완. 내가 문도진과 손잡으면 넌 진짜 죽어. 가뜩이나 마음 흔들리는데 정말 영상 풀어볼까?”
화들짝 놀라는 최치곤을 보며 강성태는 조태완을 떠올렸다.
아우라 호텔에서 처음 봤을 때의 위엄 있는 모습, 목에 칼이 들어가자 강성태를 형님이라 부르며 매달리던 비굴함, 급한 순간을 모면하고자 태안의 거래마저 불어대는 가벼움, 그 모든 것이 조태완이었다.
- 문도진이 연락했었나?
욱 올라왔던 성질을 누르며 조태완이 떠보는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모습을 보고 그를 판단했던 이들은 모두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런 순간에도 조태완은 감정을 조절했다.
- 여보세요?
“기회는 네게 가장 먼저 줬다. 전에 약속했던 대로 지용호가 죽었다면 영상도 세상에 나갈 일 없고. 하지만 나를 노린다면 말이 달라져. 그러니 알아서 행동해.”
- 광룡이 죽은 지용호의 사진을 내게 보냈다. 그 뒤에 다음 주로 약속됐던 동남아시아 거부들의 파티를 취소한다고 연락했는데 지금은 문도진이 애들을 불러들인다.
“용건만 말해.”
- 광룡을 상대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얍삽한 인간!
강성태는 조태완에게 들리고 남을 만큼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치욕스러울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조태완은 침묵을 지켰다.
“끊고 전화를 기다려. 직접 받아. 엉뚱한 놈이 받으면 그거로 끝이니까.”
조태완의 답은 없었다.
“조태완? 대답해야지?”
- 끄응. 알았다.
답을 들은 강성태는 미련 없이 스마트폰을 내려 종료버튼을 눌렀다.
시선을 든 강성태 앞에서 최치곤은 뜻밖에도 존경하는 눈빛이었다.
“뭐냐, 그 눈빛은?”
“세상에 조태완에게 대답하라고 다그치는 사람이 있을 줄을 몰랐다. 그것뿐이냐? 도진이 형님이 만나자고 시간과 장소를 정하라고 했다며? 나 진짜 너 존경한다, 성태야.”
“미친놈.”
“태완이파에 신호남파까지 약 올렸으니 미치기라도 해야 버티지.”
정말 실성한 놈처럼 최치곤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왜 문도진은 형님이고, 조태완은 그냥 이름을 부르냐?”
“조태완은 연장 들고 맞붙었잖아. 위아래 정리가 안 끝났으니까 결론 날 때까지는 그냥 조태완인 거지. 도진이 형님하고도 붙게 되면 그냥 문도진으로 가는 거고.”
설명을 늘어놓았던 최치곤이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까지 별일 없을 거라더니 말대로는 됐는데 이렇게 숨통 조이며 사느니 차라리 칼질을 하고 말겠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고민해야지.”
“뭐? 뭘 고민해?”
“문도진을 만나보고 말할게.”
답을 한 강성태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조태완? 문도진? 아니면 두 놈 모두?
어떤 놈을 죽일지 고민한다는 말을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