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 6화
제3장. 시간을 좀 다오.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기존에 자리를 차지했던 손님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는데 뭐라 해도 카페 영업에는 좋은 현상이었다.
“외국에 있었어요?”
“네, 잠깐요.”
“잠깐치고는 영어가 능숙하시던데? 다시 봤어요.”
낯익은 손님들이 궁금한 눈으로 질문을 건넸고, 어쩌다 들르던 손님들은 의외다라든가 신기하다는 투로 돌아본 뒤에 카페를 나섰다.
손님들이 모두 나간 뒤였다.
“아까 나간 여자 손님들 보셨어요? 단골손님이 또 생겼구나 싶던데요?”
빈 잔을 모두 정리한 이은주가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학생들 오는 오후에 그런 일이 있었으면 엄청 요란했을 거 같은데 아까워요.”
이은주답지 않은 너스레였다. 그리고 그 반응에는 궁금해하는 심정도 녹아 있었다.
경호원을 했었다는 사실을 최치곤과 안다미에게 말했다.
안다미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이고, 안호상 박사에게 교제를 말하겠다고 나선 마당이니 당연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은주 역시 알게 될 일이었다.
“곤잘레스 이두안이라는 멕시코 갑부거든요.”
강성태가 설명을 시작하자 이은주가 귀를 쫑긋 세운 듯한 태도로 집중했다.
“전에 그분의 경호를 맡아서 일했었어요.”
“매니저님이요?”
강성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요?”
“그냥 그렇게 됐어요.”
“그럼 진짜 외국에 계셨었네요?”
“예. 대략 7년쯤 될 거 같네요.”
곤잘레스 이두안과 로라, 경호원, 존 보스만을 보아서인지 이은주의 눈에 궁금함이 더욱 진하게 떠올랐다.
딸랑.
“어서 오세요, 커피알리고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점심을 일찍 마친 손님들이 들어서며 더는 한가한 대화를 나눌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남은 이야기는 안다미를 통해 듣거나 다른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좋았다.
“카드 받았습니다.”
손님들이 몰리면서 이은주는 언제 농담을 나누었냐는 투로 음료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
안다미는 부친인 안호상 박사를 바로 만나지 못했다.
대학병원에서 급하게 도움을 요청해 새벽에 달려간 탓이었다. 밤새 응급실 근무에 지친 안다미는 링거를 맞는 환자용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안 선생님?”
그녀를 깨운 것은 간호사였다.
깜짝 놀라 깬 안다미는 주변을 둘러보고서야 응급실이 아니라 안호상 박사의 병원인 것을 깨달았다.
“박사님이 찾으세요.”
“고마워요. 지금 몇 시나 됐죠?”
“12시 조금 넘었어요.”
머리를 매만진 안다미는 침대에서 내려와 원장실로 향했다.
“아빠?”
“좀 더 자게 둘까 했는데 점심 아니면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깨웠다.”
“잘하셨어요. 먹고 자야죠.”
의사의 삶을 익히 짐작하는 안호상이 기특하고 안쓰럽다는 얼굴로 재킷을 집어 들었다.
“뭐 먹고 싶니?”
“어제 힘든 환자가 많아서 빨간 국물만 아니면 뭐든 좋아요.”
답을 내놓은 뒤에 안다미는 하품을 커다랗게 쏟아냈다.
“국물 있는 불고기 먹자.”
“그러세요.”
후문을 통해 병원을 나선 두 사람은 주택을 개조한 식당으로 들어섰다.
“박사님 오셨어요? 오늘은 같이 오셨네요.”
오랜 다닌 식당이어서 두 사람을 아는 사장이 가장 안쪽 방을 배려해주었다. 기본 반찬이 놓여 있는 데다 앉기 무섭게 둥그렇게 솟은 불판과 불고기가 들어왔다.
단골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종업원은 불판에 고기를 얹어주고 나갔다.
직장인을 위한 식당이었다.
고기는 바로 익었고, 국물은 이미 끓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환자 침대에서 자면서까지 기다려?”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어요.”
불고기를 떠서 접시에 옮기던 안호상이 멍한 얼굴로 안다미를 보았다.
“네가?”
“예. 제가요.”
“남자를?”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아셨어요?”
“하도 남자들을 거들떠보지 않길래 성 정체성에 문제가 있나 싶은 적이 있기는 했지. 그래 누구냐?”
젓가락을 멈춘 안호상 앞에서 안다미는 씩씩하게 국물을 적신 밥을 입에 넣었다.
“아빠도 본 사람이에요.”
“누군데? 최근에는 소개한 사람이 없으니까 그동안 몰래 연락했었던 거냐?”
“강성태 씨라고 아빠가 치료한 사람이요.”
젓가락을 움직이려던 안호상이 멈칫한 뒤에 설마 하는 얼굴로 시선만 주었다.
“연예인 아니냐고 했던 그 사람 맞아요. 총상으로 의심되는 흉터 있는 사람이요.”
뻣뻣하게 얼굴이 굳은 안호상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빠는 인정해 주실 거죠?”
열무김치를 밥에다 올린 안다미가 부러 만든 뻔뻔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동안에도 안호상은 한숨만 내쉴 뿐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안다미가 불고기와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밥에 담을 때였다.
세수하듯 얼굴을 문지른 안호상이 한숨과 함께 손을 내렸다. 그렇게 했는데도 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강성태 씨요.”
“잘생긴 건 인정하마. 그렇더라도 깡패를…….”
“카페 매니저예요. 실질적 사장이고요.”
답을 듣는 안호상은 볼이 붉어져 있었고, 표정은 참담했다.
“내가 치료했다. 자상이었고. 이병렬이라고 영등포 깡패 우두머리가 된 놈이 데려왔다. 바로 앞에서 아랫놈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걸 빤히 봤는데 깡패가 아니라고?”
“외국에서 용병으로 생활하다가 경호원 거쳐 귀국했고요. 이번에 나선 건 마약을 막으려다 일이 생긴 것뿐이에요. 조만간 정리하고 다시 카페 일에 집중할 거예요.”
숟가락을 내려놓은 안다미는 부모의 교통사고, 이모 집에서 자랐던 환경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대학은?”
“안 다닌 거 같아요.”
“부모님은 뭘 하는 분이고?”
“교통사고로 어릴 적에 두 분 모두 돌아가셨대요.”
그러나 두 번의 질문에 나중에 말하려던 아픈 상처들이 식탁 위로 하나씩 떨어졌다.
“고아원에서 컸다는 거냐?”
“이모가 길러주셨대요. 사촌 여동생을 만났는데 경찰이었어요. 밝은 성격이었고요.”
“벌써 사촌 여동생을 만났어?”
“카페에서 우연히 본 거예요. 그리고 성태 씨와 진지하게 교제하기로 결심한 건 이틀밖에 안 됐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장 먼저 아빠에게 말씀드리겠다는 약속 지키려고 이러는 거고요.”
놀라거나 반대할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그러나 부친인 안호상 박사가 볼을 씰룩여가며 화를 삭일 줄은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했다.
“너 혹시 그 사람하고 잠자리를 했냐?”
“아빠!”
불쾌한 질문과 안다미의 날카로운 반응이 애꿎게 타는 불고기 위에서 부딪쳤다.
평소 같으면 미안하다고 했을 안호상은 감정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 듯 거친 숨을 연속해서 내쉬었다.
“너는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본인의 상처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뿌린다. 거기에 없이 자란 사람들은 좋은 것을 받아도 고맙다는 생각을 못 해.”
“성태 씨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좋을 때는 안 보이지. 그러나 관계가 지속되면 그 사람의 환경과 심성이 너를 지치고 힘들게 할 거다.”
“아빠가 소개했던 남자들보다는 백배는 나은 사람이에요.”
“깡패보다는 낫지.”
“깡패 아니라고요.”
안호상은 볼을 씰룩이는 것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뻑뻑한 침묵을 밀쳐내는 것처럼 안다미는 레버를 돌려 가스 불을 껐다. 국물은 이미 졸았고, 고기는 시커멓게 타 버린 뒤였다.
“아빠. 사람만 봐주세요. 돈은 벌면 되잖아요.”
“연애와 결혼은 달라. 정서적 교감, 정치적 견해, 심지어 종교, 그리고 지적 수준도 맞아야 하는 거다.”
“저도 못 읽는 책들을 읽는 사람이에요. 종교는 없고, 정치는 말한 적 없는데 정의로운 사람이니까 그 점을 믿을 거고요. 정서적 교감은 제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에요.”
폐를 토해내는 것처럼 안호상이 처참하게 들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갑자기 너무 흥분했다. 미안하다. 아빠에게도 시간을 좀 다오.”
“그러세요.”
“만약 시간이 지나도 아빠가 반대한다면 어떻게 할 테냐?”
시선을 들었던 안호상이 서글프게 웃었다. 안다미의 성격으로 봐서 물러서지 않으리란 사실을 짐작해서 그런 눈치였다.
“한 가지만 약속해다오.”
“말씀하세요.”
“네가 처음으로 남자를 좋아하게 돼서 익숙하지 않은 감정에 흔들린다는 것을 인정해라.”
“아닌 것 같지만, 처음이니까 그건 아빠 말씀대로 인정할게요.”
“미안하지만, 잠자리에 관해서 한 번만 더 말하마. 성 정체성을 의심할 정도로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네가 폭탄 같은 사람을 만난다니까 아비로서 걱정이 앞선다.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싶어서다.”
날카롭게 변한 안다미의 시선 앞에서 안호상은 물러서지 않았다.
“감정에 흔들린 상태에서 돌이키지 못할 결과를 만들지 말라는 당부다. 지금껏 널 돌본 아빠로서 이성이 한 조각도 보이는 않는 딸에게 그런 요구조차 못 하는 거냐?”
“제가 지금까지 아빠를 실망시킨 적 있었어요?”
“그런 적 없었다. 대신 앞으로 너를 못 볼 정도로 커다란 실망을 안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다오.”
이런 충돌이 살면서 한 번도 없었다.
늘 인생의 조언자였던 부친이었고, 항상 대견하고 자랑거리였던 딸이어서 안다미도, 안호상도 더 나눌 대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짧은 사이에 팽팽하게 맞섰던 두 사람의 감정이 슬며시 가라앉았다.
“일어나세요.”
“먼저 가라. 잠시 있다가 가마.”
안다미는 미안했고, 안호상은 처참한 표정이었다.
“그럼 먼저 갈게요.”
답은 없었다.
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부친은 불고기를 노려보며 시선을 들지 않았다.
**
정신없이 바쁜 점심시간이 지났다.
이은주를 먼저 챙긴 강성태는 다용도실에 들어가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안다미는 지금 뭘 할까? 점심은 먹었을까?
스마트폰을 몇 번이나 들었던 강성태는 액정을 만지는 것으로 문자를 보내고 싶은 욕심을 접어 넣었다.
무엇보다 야간 근무로 피곤해서 겨우 잠들었지 모를 안다미를 깨울까 염려돼서였다.
양치를 마치고 돌아온 강성태는 모처럼 스마트폰을 뒤져 읽을 책 세 권을 주문했다. 결제를 마친 뒤였다.
딸랑.
문이 열리며 여중생 둘이 들어섰다.
“어? 아저씨?”
다시 보는 것이 반갑고, 자리를 비웠던 며칠이 서운했다는 표정을 지은 여중생 둘이 주문대로 다가왔다.
“어서 와. 일찍 끝났네? 또 시험이었어? 아니면 개교기념일?”
“개교기념일은 1년에 한 번 있다요.”
강성태와 눈이 마주친 여중생들의 볼이 삽시간에 붉게 변했다.
“오늘부터 계속 있어요?”
“내일은 힘들 거 같은데?”
“뭐예요? 아저씨가 만들어줘야 뭐든 맛있단 말이에요.”
이런 대화를 짐작했는지 이은주는 음료 재료들을 확인하는 척하며 슬쩍 물러나 있었다.
“대신 오늘은 최선을 다해 만들어 볼게.”
“진짜요?”
“그럼.”
강성태가 보기 좋게 웃자 ‘어쩜!’하는 표정으로 하트를 그렸던 여중생들이 부끄러운 기색으로 메뉴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요거트 스무디요.”
“나는 아이스초코요. 그리고 허니버터 브레드도 주세요.”
“점심 먹었잖아. 허니버터 브레드를 먹어도 되겠어?”
“아저씨가 만든 거 먹고 싶어서 그래요.”
작은 지갑에서 각각 꺼낸 체크카드 두 개가 주문대 앞으로 나왔다.
“그럼 허니버터 브레드는 내가 서비스로 할게. 괜찮지?”
강성태와 눈이 마주친 여중생이 ‘몰라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개를 틀었다.
계산을 마친 여중생이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강성태는 이은주와 함께 음료와 빵을 만들었다.
“주문하신 음료 두 잔과 허니버터 브레드 나왔습니다.”
강성태가 부르자 여중생이 다가왔다.
뭔가 말을 걸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여중생의 바람은 거친 동작과 인상에 밀려났다.
딸랑.
문을 열며 최치곤이 꺼덕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와 주문대로 걸어온 탓이었다.
“어서 오세요.”
“하이, 은주?”
오른팔을 든 최치곤이 이은주를 향해 웃었다.
정장에 노타이 차림이었는데 차라리 상체를 깊게 숙이는 인사를 보고 말지, 최치곤의 저런 모습은 영 아니었다.
“점심은?”
“먹고 한숨 자고, 씻고 나왔다. 달달한 거 하나 주라.”
“그래.”
이은주가 음료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강성태의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울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을 살핀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