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 2화
의지가 강한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할 목표가 생겼을 때 얼마나 무서운 능력을 보이는지 최치곤이 식탁에서 증명했다.
라면 두 개를 끓인 최치곤은 즉석밥 하나를 말아 넣고도 5분 만에 식사를 끝내는 능력을 보였다.
평소 같으면 내일 아침에 하자고 미뤘을 설거지마저 번개같이 해치운 최치곤은 물병을 앞에 두고 탁자에 앉았다.
“다 먹었다. 이제 조태완을 어떻게 할지 말해주라.”
먹었다기보다는 퍼 넣은 수준이었다.
“네 말대로 지용호도 아우라 호텔 일을 알게 될 거다. 남은 건 조태완의 선택이지. 광룡에게 솔직하게 말하느냐, 아니면 덮으려고 주접떠느냐, 마지막으로 내게 머리를 숙이느냐.”
“너는 조태완이 어떻게 할 거 같은데?”
“말했잖아. 어떡해서든 덮으려고 설치다가 나중에 올 거라고.”
“그러니까! 어떻게 덮냐고?”
“지금 조태완이 찔리는 게 두 가지거든. 하나는 영상, 다른 하나는 태안의 거래를 털어놓은 거거든. 영상은 날 건드리지 않으면 당장 탈이 없어. 남은 건 태안을 털어놨다는 사실인데.”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는데?
최치곤의 눈이 강렬하게 다음 내용을 요구하고 있었다.
“다른 놈이 태안 마약 건을 털어놨다면 조태완이 빠져나가겠지? 최소한 시간도 벌 거고?”
“우리가 다 들었는데 누구한테 그걸 덮어씌워?”
대꾸에 실망한 기색으로 상체를 세운 최치곤이 물을 마셨다.
“지용호.”
“컥! 캑! 캐액! 캑!”
사레가 들린 최치곤이 입에 담겼던 물을 식탁과 바닥에 뿜어냈다.
“어흑!”
둘이서 티슈로 물을 닦느라 잠시 틈이 있었다.
“지용호가 그걸 받아들이겠냐?”
“입을 막으면 되지.”
“어떻게 그 새끼 입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최치곤을 향해 강성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룡이 그걸 믿을까?”
“조태완은 지용호가 털어놓은 거라고 우길 테고, 우리는 조태완에게서 들었다고 말하는 상황이지? 네가 광룡이라면 누구 말을 믿을 거 같냐?”
“그야 뭐.”
“지용호가 죽어버린 뒤에는 광룡도 조태완과 전쟁을 벌이기 어렵지. 서로 피해가 큰 데다 강남의 클럽을 버리기 아까워서라도 믿는 척할 거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는 그러니까 우리를 노리고 달려들겠지.”
“뭐야? 이씨! 기껏 조태완을 궁지에 몰았다고 하더니 결국은 광룡이 우릴 노리게 되는 거 아냐?”
거칠게 물병을 들던 최치곤이 삐뚜름한 시선으로 강성태를 보았다.
‘뭔가 생각이 있지?’
놈의 표정과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광룡을 때려잡을 생각이다.”
“어떻게?”
“광룡이 나와 너를 노리게 하면 되지.”
답을 들은 최치곤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기억하지? 강남 삼대장을 거느리려던 이유가 광룡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는 거. 그런데 그걸 우리 둘이? 인간적으로 부탁한다. 차라리 날 유치장에 다시 넣어주라.”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던 최치곤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너 혹시 그 의사 선생과 사귈 생각으로 이런 무리한 계획을 세운 거냐? 빨리 끝내려고?”
“솔직히 아까 다미 씨를 보며 생각이 굳었다는 건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렇더라도 태완이파를 손에 넣으면 다음은 문도진, 그다음은 또 누구, 이런 식으면 끝도 없겠다 싶어서 단숨에 끝낼 계획을 고민한 게 먼저였다.”
“하아. 사랑이 무섭긴 하다. 광룡을 달랑 둘이? 이건 아냐.”
타는 속을 달래려는 것처럼 물병을 입에 문 최치곤이 그대로 남은 물을 모조리 마셨다.
짜그락.
단숨에 물병을 찌그러트려 뚜껑을 닫는 모습에 최치곤의 갑갑함이 얼마나 큰지 모두 보였다.
“너는 용병이라도 했었지. 나는 그냥 독기 좀 센 게 전부야. 아우라 호텔 로비에서 태완이파 두들기는 널 보면서 또 한 번 느꼈던 건데 솔직히 난 그렇게 못한다.”
덤덤한 표정의 강성태를 본 최치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정은 최치곤의 몫이었다.
강요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고.
“너보다는 내가 이 바닥을 잘 알잖아. 삼합회나 일본 야쿠자 정도 되면 솔직하게 병렬이 형님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감당하기 어려워.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고 태완이파가 마음만 먹으면 그냥 죽은 목숨이고.”
말을 마친 최치곤이 고개를 모로 홱 비틀었다.
계속 이러면 삐뚤어질 테다.
입술까지 내민 최치곤을 보며 강성태는 픽 웃었다.
“웃기는? 씨…….”
“깡패 그만두는 건 괜찮지?”
“이제 와서? 네가 빠지면 병렬이 형님은 바로 죽은 목숨이라니까. 진용이 형님하고 달수 형님은 바로 발목 썰릴 텐데 앞에 내가 한 말을 듣기는 했냐?”
“하나씩 짚자. 심부름센터 하겠다며 출발했다가 여기까지 쭉 왔잖아. 병렬이한테 무리한 자리 맡겼으니까 뒤를 봐준 거고. 그거는 인정하지?”
“그거야 뭐.”
“내가 빠지겠다고 떠들지 않으면 조태완은 알 길이 없는 거고.”
“그것도 뭐.”
시선만 주던 최치곤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갑갑한 와중에도 방금 들은 계획이 두렵고, 그만큼 강성태를 설득하고 싶은 눈치였다.
“광룡을 그냥 두면 어떠냐? 태완이파 깼으니까 너는 그냥 슬쩍 뒤로 물러나 있어. 그렇게 넘어가는 거야. 그건 어때?”
강성태의 표정을 본 최치곤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래. 안 된다고 하겠지.”
“네가 그 정도로 말하는 거 보니까 내가 무리한 계획을 세우기는 했나 보다. 좀 더 생각해 볼게.”
이 반응은 뭐야?
진실을 알고 싶은 최치곤의 눈이 곧바로 강성태에게 달려들었다.
“태안 일은?”
“아직 시간이 있잖아. 조태완이 움직이는 거 보면서 판단하자.”
원하는 답이었다. 그런데도 최치곤은 손으로 볼을 움켜쥐듯 잡고는 아래로 길게 끌어내렸다.
“피부 늘어져. 너 주름 많은 게 그냥 생기는 게 아냐.”
“당장 죽게 생겼는데 주름이 문제냐?”
최치곤이 볼 거죽을 양손을 붙잡고 늘였다.
“좀 더 생각해 본다니까?”
“내가 널 모르냐? 그래놓고 혼자 광룡 상대한다고 설칠 거면서? 에이, 씨발! 아버지. 아들은 결국 이렇게 가나 봅니다.”
능청을 떨던 최치곤이 무너지는 것처럼 의자에서 아래로 내려가 거실을 향해 한 바퀴를 굴렀다.
“몰라!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거실에 누운 최치곤이 팔을 위로 번쩍 들었다.
곧바로 잠이 든다는 의미였다.
“양치라도 하고 자.”
“죽을 놈이 무슨 양치? 충치 생기기도 전에 뒈져 있을 텐데.”
혀를 길게 뺀 최치곤이 고개를 옆으로 뚝 떨어트렸다.
광룡이 영등포에서 생활하던 최치곤에게 어떤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강성태는 최치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전쟁은 적장의 목을 베거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무릎 꿇은 항복을 받아야 끝나.”
누워있던 최치곤이 고개를 세웠다가 다시 눕혔다.
“우리 둘로는 하여간 안 돼. 너는 살아도 나는 그냥 죽어. 베트남 조직이나 중국 하부조직 애들이 우리나라에 버글버글 하다고.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냐.”
말을 하면서 최치곤의 음성이 점점 가라앉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였다.
크르륵. 크륵. 크르르륵.
기가 막히게도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나 마약이 시작이거든.
그 커넥션이 완성되고 나면 절대 무너트리지 못해.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쌓일수록 조직이 더 단단해지는 걸 알게 된다면 너도 물러서지 못할 거다.
아무튼 고맙다, 치곤아.
끝까지 함께 해준다는 의지가.
자리에서 일어난 강성태는 베개와 담요를 가져와 최치곤의 잠자리를 봐주었다.
그런 다음 양치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
오전 6시쯤 눈을 뜬 강성태는 천천히 침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깨어난 아침 같아서 창으로 들어온 빛은 온화했고,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조차 반가웠다.
크으흑. 크흑.
잔잔하게 들리는 최치곤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강성태는 몸을 일으켰다. 몸은 기대하지 못했을 정도로 가벼웠다. 심지어 통증마저 확연하게 줄어서 확인하기 위해 상체를 손으로 쓸어볼 정도였다.
밖으로 나간 강성태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식탁에 앉았다.
이불을 가랑이 사이에 끼운 최치곤은 거실 벽을 향해 몸을 튼 채 자고 있었다.
원두를 내려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시간이 너무 일러서 피곤할 최치곤이 더 잘 수 있도록 강성태는 물을 마시며 작은 거실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난밤에 지용호는 어떤 결과를 맞았을까?
물을 한 모금 더 마신 강성태는 내추럴 독종 지용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멍청하게 그냥 죽지는 마라.
그러면 내가 널 찾아가지 않은 게 너무 아쉽잖아.
픽 웃은 강성태는 남은 물을 마저 마셨다.
**
설렁탕으로 저녁을 먹은 지용호는 파라 호텔의 방으로 들어와 소파에서 밤을 보냈다.
태완이파의 움직임이 뭔가 달랐다.
봐서 아는 게 아니라 감각으로 알아차린 변화였다.
여전히 고개 숙여 인사하지만, 눈빛만큼은 어제와 달라서 언제고 한칼 먹일 각오를 세운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질문했을 때 얼버무리는 표정은 또 뭐고.
‘애송이 새끼들.’
밖으로 나가 설렁탕을 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주변에 있던 놈들의 눈빛이 확실하게 변했다.
문 앞에 책상 의자를 하나 가져다 둔 지영호는 불을 환하게 켜놓은 상태로 소파에서 견뎠다.
물론 잠은 잤다.
긴장한 채 잠이 들었던 지용호는 퍼뜩 잠에서 깨어난 뒤에 스마트폰을 들었다.
오전 6시 15분이었다.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 그는 신호음을 들으며 상대가 받기를 기다렸다.
- 송원입니다, 형님.
“어제 말한 건 알아봤냐?”
- 강성태와 이병렬, 김진용, 최치곤, 이렇게 네 놈이 아우라 호텔에서 태완이파와 붙었었습니다, 형님.
“뭐어?”
타고난 독종 지용호가 놀란 소리를 길게 냈을 정도로 상상하지 못했던 소식이었다.
- 태완이파 김동팔을 포함해 열댓 명이 로비에서 얻어맞았고, 조태완 형님이 강성태에게 붙들려 특실로 올라갔었습니다, 형님.
이거였구나!
지용호는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강성태는? 죽은 놈은 없고?”
- 그게 좀 이상합니다, 형님. 특실에 올라갔던 영등포 식구 네 명이 멀쩡하게 걸어서 돌아갔고, 조태완 형님은 태완이파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빌라로 돌아갔습니다, 형님.
“흠.”
입술을 뒤튼 지용호는 몸을 일으켜 창으로 움직였다.
“강성태랑 이병렬이 멀쩡했다, 이거지?”
- 예, 형님. 이병렬은 어제 나이트에 들어가서 여태 그곳에 있고, 신월동 오거리 프리 스테이션도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영업했습니다.
지용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고 죽인 게 아니라 걸어서 나갔다? 그 뒤에 태완이파 놈들의 눈빛이 바뀌었고?
조태완과 강성태 사이에 뭔가 주고받은 게 있다는 의미였다. 독한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던 지용호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호텔에서 나가야겠다. 지금 어디 있냐?”
- 호텔 뒤편 골목입니다.
“내가 바로 나갈 테니까 시동 걸고 있어.”
- 예, 형님.
통화를 마친 지용호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나이트하고 주점 영업까지 편안하게 할 정도로 조태완이 약점을 잡혔다는 건데…….
그래놓고 나를 담그려고 기회를 노렸다?
코로 웃은 지용호는 소파에 올려두었던 회칼을 집어 재킷 안에 넣었다.
“조태완 너, 사람 잘못 봤어. 강남에서는 먹어줄지 모르지만, 광룡에게는 어림없다는 것도 알아야지.”
혼잣말을 뱉은 지용호는 태연한 표정으로 문으로 움직였다.
먼저 렌즈로 밖을 살핀 그는 품에 든 회칼을 확인한 뒤에 느긋하게 문을 당겼다.
복도로 나가지 않았다.
문을 당긴 지용호는 방의 안쪽에서 서서 누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일어나셨습니까, 형님?”
문이 열리자 다가온 모양이었다.
바깥에 있던 두 놈이 지친 얼굴로 방 앞에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배가 고파서 잠이 깼다. 내려가서 커피랑 토스트나 좀 먹고 오자.”
“모시겠습니다, 형님.”
두 놈이 앞서 걸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배고프지?”
“괜찮습니다, 형님.”
“혼자 먹기 그러니까 커피랑 토스트 같이 먹자. 아침에 진한 커피를 한잔해주면 정신이 번쩍 들어.”
“형님들이 계셔서 조심스럽습니다, 형님.”
“애들이 더 있어?”
“예, 형님.”
때앵.
지용호가 던진 질문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간 지용호가 엘리베이터 안쪽에 서자 뒤에 탄 덩치 둘이 입구에 서서 로비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는 순간이었다.
야비한 눈을 한 지용호는 재킷을 매만지는 것처럼 손을 안으로 넣었다. 문이 서서히 닫히는 사이에 재킷 안에 손을 넣은 지용호의 입술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