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 - 1화 (109/513)

6권 - 1화

제1장. 호랑이는 개를 안 키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강성태에게 통증이 달려들었다.

풀어져 있다가 갑자기 움직여서 그런 모양이었다. 고통을 표시 내고 싶지 않았던 강성태는 이를 지그시 깨물며 참았다.

“나 때문에 깬 거죠?”

강성태는 옅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치곤이는요?”

“문 열어주고 샌드위치 사러 간다고 잠시 나갔어요.”

거실 방향을 본 강성태는 당황했을 최치곤을 떠올렸다.

핑계를 대려면 좀 그럴듯한 걸 내놓든가, 세 개나 있는 샌드위치를 두고 뭘 더 사겠다고 그랬는지.

“무슨 일입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급하게 달려온 얼굴이었다.

정리할 때 하더라도 무시하거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거실로 가죠.”

사무적으로 들릴 법한 요구였다. 그래서였을까. 침대에서 내려온 강성태가 거실로 나가도록 안다미는 대꾸가 없었다.

“앉으세요. 커피하고 주스가 있을 텐데 좀 드시겠어요?”

“근무 중에 잠깐 들른 거예요. 30분 여유라서 바로 가봐야 해요.”

식탁 옆의 냉장고를 연 강성태는 물 두 병을 꺼내 하나를 안다미 앞에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물병을 향해 시선을 떨궜던 안다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러 왔어요. 곤욕스러운 상황에서 성태 씨가 나타나니까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을 제대로 못 했어요.”

평소 성격대로 솔직하게 당시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어서 전혀 변명처럼 들리지 않았다.

“냉정한 모습을 지키겠다고 차트를 들여다보았고, 차갑게 말했는데 성태 씨가 돌아가고 알았어요. 입장이 바뀌었다면 나는 치욕스러웠을 거 같아요. 내가 부족했어요. 미안해요, 성태 씨.”

끓기 직전의 물처럼 긴장한 숨결, 감정에 최선을 다하려는 눈빛까지, 진심으로 건네는 사과였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강성태는 귀 옆으로 흘러내린 안다미의 머리칼에 시선을 주었다.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다.

“응급실에서 차갑게 대한 거 미안해요.”

눈치를 살피는 듯한 안다미의 표정은 처음 봤다. 좀 더 당당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사과하러 와준 것이 고맙고, 실수한 모습 하나에 놓아주겠다며 나왔던 모습이 미안해서 강성태는 보기 좋은 미소로 웃었다.

“용서해주는 거죠?”

“매일 응급실에 가게 될 거 같은데 괜찮겠어요?”

“다쳐서 오는 게 아니어야 하고, 더는 간식 사는 데 돈 쓰지만 않으면 돼요.”

현실과 감정 사이에서 후자를 택한 안다미가 내놓은 지극히 현실적인 조건 두 개였다.

안다미는 정말 지금 선택에 아파하지 않을까.

적어도 사랑한다면 아프지 않도록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이제 가봐야겠어요.”

강성태의 고민을 모르는 안다미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는요?”

“주차장에 세워뒀어요. 내일 오전에 일 마치면 들르든가 할게요. 상처도 살필 겸 해서요.”

현관으로 향하던 안다미가 뒤따라 움직이는 강성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품을 파고들었다.

“성태 씨를 좋아하게 됐다는 말을 누구한테 가장 먼저 할지 생각해봤는데 그 첫 번째가 은주였어요. 치곤 씨한테도 할 거고, 민정 씨에게 말할 거예요.”

옅게 웃은 강성태는 안다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성격 있고, 강한 여자인데도 품에 안긴 안다미는 작은 새처럼 연약하게 느껴졌다.

처음이라 이런지 모른다.

밀고 당길 줄 모르는 어설픈 사랑이어서 이런지도.

강성태의 품에 안긴 안다미의 체온과 숨결, 뜨겁게 뛰는 심장이 가슴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팔을 당긴 강성태는 안다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며 촉촉해진 안다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마에 입을 맞춘 강성태는 눈을 감은 안다미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좀 더 깊게 숙였다.

감촉은 감미로웠고, 숨결은 봄날처럼 따스했다.

가봐야 한다고 했다.

응급실을 대강 짐작해서 붙잡기도 어려웠다.

“와줘서 고마워요.”

강성태가 안다미의 머리를 다시 쓸어내린 다음이었다.

확실히 행복해진 얼굴로 안다미가 물러났다.

“갈게요.”

“바래다줄게요.”

“내가 의사인 거 잊었어요? 다른 건 양보해도 계단 걷는 건 안 돼요. 주차장에 차가 있으니까 오늘은 그냥 있어요. 대신 얼른 나아요. 나, 하고 싶은 거 많아졌어요.”

문 앞에서 강성태를 재차 말린 안다미가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남기고 나섰다.

문을 보고 서 있던 강성태는 방으로 들어가 스마트폰을 집었다. 자리를 피해 준 건 고맙다. 그러나 혼자 돌아다니고 있을 최치곤이 염려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목록에서 최치곤의 번호를 찾은 강성태가 통화버튼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삑삑삑삑삑삑삑. 띠루룩.

디지털 도어록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뭐냐? 어디 있었어?”

“위층 계단.”

“뭐?”

“집 밖은 위험하잖냐. 혹시 나 없는 동안 너를 노릴지도 모르고. 그래서 위쪽 계단에 앉아있었다.”

뻔뻔한 대사를 날리며 들어선 최치곤이 강성태의 위아래를 훑었다.

“왜?”

“잘된 거지?”

강성태는 픽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역시 우리 서방님이야! 그 미소로 사로잡은 거지? 그래서? 벽에는 밀어붙였냐?”

“너 벽에 무슨 판타지 있냐?”

“얼래?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고 단단하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데 왜 그렇게 받아들여? 키스도 그래. 그냥 입술만 대면 이 남자가 날 사랑하기는 하나?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말을 하던 최치곤이 팔을 들어 누군가의 머리와 상체를 안는 자세를 만들었다.

“모름지기 키스란 건 말이지. 내가 뱀이 됐구나 싶을 정도로 현란하게 혀를! 어? 낼름낼름! 알지? 낼름낼름. 그래서 키스가 끝나고 났을 때 두 사람의 타액이 길게 늘어져 있어야 사랑이 완성되는 거라니까.”

야동을 통해 사랑을 배운 게 아닌가 싶은 최치곤의 조언이었다. 말로만 끝내는 게 아니라 혀를 입술 밖으로 내민 최치곤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더러워서 못 보겠네, 진짜.”

“야! 좋은 거 알려주니까!”

“그런 건 너나 하고. 커피 마실 건데 어떻게 할래?”

“나는 그럼 샌드위치랑 먹어야겠다.”

거실 끝으로 움직인 최치곤이 봉지를 들고 왔다.

“아후. 식품은 좀 냉장고에 넣어두라니까.”

“허어! 우리 서방님이 샌드위치를 또 모르네. 빵이 딱딱해지면 맛이 반으로 줄어. 너 같으면 뜨거운 커피를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먹고 싶겠냐?”

입으로 이놈을 어떻게 이기겠나.

고개를 저은 강성태는 물을 끓이기 위해 전기 포트로 움직였다.

**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빌라로 돌아온 조태완은 상처를 치료했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거실 소파에 앉았다.

화려한 거실은 조태완의 성공을 증명하며, 창 아래로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은 그의 삶을 대변하는 상징과 같아서 어렵고 힘든 순간이면 지금처럼 소파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급한 게 뭐였지?’

일단 주둥이를 나불거릴지 모를 고영주를 김종수에게 넘겨서 입을 막았다.

김종수의 계약에 걸린 고영주는 ‘마님 사정 볼 것 없다’, 또는 ‘반지하의 제왕’ 따위의 비디오를 찍느라 허덕일 테니 계약이 끝날 때까지는 마음을 놓아도 좋았다.

다음으로 해결할 문제는 광룡과의 관계였다.

‘지용호, 이 개새끼! 모사쳐서 나를 함정에 빠트렸으니 이번에는 네놈이 제물이 돼서 나를 구해줘야지?’

어두워진 바깥을 향해 조태완은 야비하게 웃었다.

지금껏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파라 호텔로 달려간 강성태가 지용호를 데려가면 만사 오케이였다. 납치가 아니라 묵사발을 만들어놓은 채 그냥 가도 괜찮다.

데려가면 찾아오는 과정에서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이었고, 으깨놓고 가면 오늘 밤에라도 목줄을 따 버릴 계획이었다.

소파에 앉은 조태완은 주먹을 슬며시 쥐었다.

깊게 잠든 놈은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태안으로 들어오는 마약 건도 죽기 전에 지용호가 털어놓은 것으로 돌리면 어쨌거나 조태완은 위기를 넘기고 다음을 노릴 수 있었다.

멋지지는 않았으나 나쁘지도 않은 계획이었다.

김동팔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고영주는 넘겼습니다, 형님. 그런데 강성태가 그냥 갔습니다, 형님.”

이게 뭔 개소리야?

소파에서 상체를 세운 조태완은 들었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으로 김동팔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럼 강성태가 어딜 갔어?”

“강성태는 모르겠고 말입니다, 형님. 이병렬과 김진용은 나이트에 있고, 형님. 프리 스테이션 주점도 영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형님.”

“지용호는?”

“낌새가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호텔 앞에서 설렁탕을 먹고 있답니다. 혹시 택시라도 타고 튀면 어떻게 할 건지 물어서 일단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형님?”

강성태가 파라 호텔에 가지 않았다고?

낌새를 눈치챈 지용호는 튈지 말지를 간 보고 있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 씨발.”

이를 질끈 깨문 조태완은 턱 아래에 붙인 기다란 거즈를 잡아챘다.

“강성태 이 개새끼! 지용호를 찾아간다고 했으면 뱉은 말을 지켜야지!”

아우라 호텔에서 조태완을 상대로 거칠 것 없던 강성태가 그냥 돌아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었다.

설마 이런 계획을 짐작해서 그냥 갔을까?

거실 창으로 시선을 돌린 조태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세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강성태의 머리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였다.

“흐음.”

신음을 토해낸 조태완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태안에서의 마약 밀수가 터진다 해도 당장 광룡이란 조직이 조태완을 어쩌지는 못한다. 그러나 빌라를 나서면서부터 다시 들어설 때까지 언제, 어디에서 칼이 날아들지 모를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건 분명했다.

‘문도진과 손을 잡아?’

조태완은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지노 바닥에서 뒹굴던 문도진은 일본 자금을 끌어와 성공한 인물로 광룡을 통해 마카오로 진출하고자 하는 야망을 품은 인간이었다.

눈알이 안 보일 정도로 째진 눈에 매부리코,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지독한 그 인간이 조태완의 손을 잡는다는 건 칼을 꽂아넣고 죽었는지 확인할 때 외에는 없을 일이었다.

“저, 형님.”

인상을 찌푸리며 창을 보던 조태완의 시선을 김동팔이 끌었다.

“이세종이 트와일라잇에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놈들 다섯을 데려왔는데 아가씨만 여섯을 건드렸답니다, 형님.”

“그깟 계집애들은 그냥 대줘! 지금 그따위 말을 들을 때가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형님.”

고개 숙이는 김동팔을 외면한 조태완은 다시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성태에게 영상만 없어도, 아니 영상이 있다고 쳐도 모자란 놈들 둘이서 주사기를 들고 약을 뿜는 모습만 없었다면 뭐라도 해볼 텐데, 뭘 어떻게 하든 간에 조태완은 멱살이 잡힌 꼴이었다.

검사, 변호사, 장군, 차관, 경찰청 과장까지, 이리저리 떠올려 봤지만, 이 건에 대해 도움을 청하기는 어려웠다.

“지용호가 튀려고 하면 무조건 칼 줘.”

“예, 형님. 얼마나…….”

“그걸 말로 해야 알아?”

“알겠습니다, 형님.”

독한 지시를 내린 조태완은 이를 깨물며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된 거라면 차라리 튀어라, 지용호.

강성태에게 태안의 마약 건을 떠들어서 제거했다는 명분이 생긴다.

설명은 나중이다.

튀려고 하다가 뒈졌다면 광룡도 다른 말을 하기 어렵다.

택시를 타, 지용호.

조태완은 참으로 오랜만에 간절하게 빌었다.

**

최치곤이 두 개, 강성태가 하나를 먹는 것으로 세 개의 샌드위치가 사라졌다.

“쩝쩝. 이상하게 샌드위치를 먹고 나면 매콤한 라면이 땅기더라. 하나 끓일 건데 먹을래?”

“라면을 먹다가 국물이 남으면 또 밥이 땅긴다고 할 거지?”

“너 이제 내 속까지 보냐? 안 그래도 즉석밥이 있나 그거 걱정했다.”

뻔뻔한 대꾸를 내놓은 최치곤이 라면 두 봉과 즉석밥 두 개를 찾고는 냄비에 물을 부었다.

“병렬이 형님 말씀대로라면 조태완의 연락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여태 소식 없는데 괜찮은 거냐?”

가스레인지의 버튼을 돌려 불을 붙인 최치곤이 몸을 돌리며 질문을 건넸다.

“조태완이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의미로 봐야지.”

“그게 혹시 너를 노리는 거냐?”

강성태는 어깨를 들어 보인 뒤에 입을 열었다.

“나를 형님으로 모신다고 해놓고 마지막에 얼굴을 바꿨거든. 뺏길 게 많은 인간은 모험을 못 해. 아마 어떡해서든 덮으려고 하다가 결국 망가지면 내게 오지 않을까 싶다.”

“그럼 너를 형님으로 모시게 되는 거 아냐?”

“아쉬워서 오는 거지. 언제고 등에 칼 꽂을 생각을 하고서.”

“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건데?”

“호랑이는 잡아먹거나 물어 죽이고 말지, 개를 키우지는 않아.”

마른침을 꿀꺽 삼킨 최치곤이 감동한 얼굴로 강성태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먹거나 죽일 건데? 설마 정말 구워 먹겠다는 건 아닐 거 아냐?”

픽 웃은 강성태는 고개를 들어 싱크대를 보았다.

“물 끓는다.”

“어떻게 할 건지만 말해주라. 궁금해서 어디 라면에 집중하겠냐?”

“내용이 길어질 수 있으니까 라면 먹고 들어.”

남은 커피를 마시는 강성태를 최치곤이 아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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