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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 18화 (105/513)

5권 - 18화

제8장. 시간을 이 정도 줬으면 뭔가 해내야지?

욕실에 들른 강성태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미친놈처럼 싸운다. 절대 물러서거나 꺾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생각 없이 움직인다면 그건 죽을 길로 걸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었다.

물을 잠근 강성태는 왼편의 수건을 집어 들고 거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조태완의 심복 김동팔이 지금껏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뭔가 일을 꾸민다는 의미였다. 멕시코의 범죄조직처럼 총기를 들고 오지는 않겠지만, 나름으로 준비한 한 수를 들고 나올 게 분명했다.

강성태는 물끄러미 세면대 위에 달린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옅게 웃었다. 이모 장숙경이 가장 염려하던 모습이고, 안다미가 무엇보다 실망할 일을 참 씩씩하게 잘해내고 있었다.

미안해, 이모.

미안합니다, 다미 씨.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될 것 같은 일에 악착같이 뛰어들어서요. 그런데 눈을 한번 감는다고 편안한 삶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생각을 정리한 강성태는 수건을 수거함 바구니에 넣었다.

트와일라잇에서의 약에 취했던 어린 여자아이와 주사기의 약을 마음 놓고 뿜어대는 약쟁이들까지, 여기에서 고개 숙인다고 저놈들은 절대 곱게 물러나지 않는다.

강성태를 주저앉혀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지 않으면 다른 조직에 밀리는 게 이 바닥의 생존 방식이라 더 악착같이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강성태는 단호한 눈빛으로 거울 속에 담긴 또 다른 강성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강남을 거쳐 서울을 먹는 지루한 싸움은 여기에서 그만두자.

지용호를 잡자.

그리고 광룡과 바로 붙자.

어차피 제이 브라이튼에게 한번 부탁할 거, 제대로 하자.

마음을 굳힌 강성태는 욕실을 나서 조태완이 있는 거실로 움직였다.

뭐 하냐, 김동팔?

시간을 이 정도 줬으면 뭔가 해내야지?

이병렬과 김진용은 여전히 자리에 앉았고, 그 뒤에 최치곤이 다부지게 서 있었다.

조태완의 앞으로 움직이는 강성태를 향해 최치곤이 고개를 돌렸다.

‘괜찮냐?’

‘걱정하지 마.’

강성태를 걱정하는 최치곤을 향해 짧게 눈짓도 건넸다.

조태완의 앞으로 걸은 강성태는 식탁 앞에 두었던 의자에 앉았다.

“30분을 준다고 했는데 아직 결정이 안 됐어?”

질문을 건넨 강성태는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우리가 12층에 올라와서 이 방에 들어오는 동안에도 김동팔이 보이지 않았거든. 여태 움직임이 없고. 둘 중 하나겠지? 이참에 조태완을 버리고 대가리가 되고 싶거나, 아니면 엉뚱한 짓을 꾸미는 거.”

강성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태완이 비릿하게 웃었다.

너처럼 웃는 놈 여럿 상대해 봤거든.

이 뒤에 뭐라 하는지도 대강 알 것 같고.

조태완을 향해 비슷하게 웃은 강성태는 고개를 든 뒤에 이병렬을 향해 입을 열었다.

“벨을 누르는 것으로 수작을 부릴 확률이 가장 높아. 벨이 울리면 내가 조태완의 목을 가를 거다. 그 뒤에 호텔을 나설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아니지? 괜히 허풍 떠는 거지?’

비웃음을 담고 있던 조태완의 눈이 강성태의 의도를 알기 위해 바쁘게 흔들렸다.

“이왕 시작한 싸움이다. 이곳을 나서면 한 놈이라도 더 죽일 거니까 그렇게 알아. 호텔 밖으로 나가면 반나절만 피해 있어. 그 정도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이 정신병자를 어떡해서든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

의미가 분명한 눈빛으로 조태완이 고개를 뒤로 돌린 직후였다.

“너는?”

이병렬의 굵고 짧은 질문이 있었다.

“치곤이는 알 텐데 한 번 정도는 수습할 방법이 있다. 어차피 광룡하고 붙는 건 피하지 못해. 그럴 바엔 태완이파 놈들을 하나라도 더 죽여서 클럽이라도 문을 닫게 해야 유리하니까 그렇게 알면 돼.”

네놈이 뭘 아는데?

조태완이 고개를 한껏 돌려 최치곤을 올려다보았다.

‘뭐? 이 씨발놈아? 나는 성태가 하라면 해!’

최치곤의 표정과 눈빛이 말로 뱉은 것보다 더 다부지게 조태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병렬과 김진용을 순서대로 거친 조태완이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순간이었다.

딩동.

넓은 특실에 벨 소리가 울렸다.

이병렬과 김진용이 퍼뜩 고개를 문으로 돌릴 때, 최치곤만은 강성태를 분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딩동.

두 번째 벨이 울릴 때 강성태는 독한 눈빛과 표정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식탁에 두었던 회칼을 집어 들었다.

“잠깐만! 야!”

조태완이 다급하게 만류하는 소리 뒤에서 이병렬과 김진용이 몸을 세웠다.

“말을 우선 들어봐! 지용호를 데려왔을지 모르잖아!”

조태완의 다급한 애원이 특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터져 나왔다.

“동팔이는 내가 알아서 돌려보내도 되잖아! 야!”

정말 죽이나?

이병렬마저 긴장한 눈으로 강성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서 강성태는 의자에 걸어두었던 재킷을 왼손으로 들어 조태완의 머리를 덮었다.

“야! 야, 이 새끼야! 안 돼! 이거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라고!”

재킷 안에서 조태완의 머리가 거칠게 움직이며 고함이 터져 나왔다. 미친 황소처럼 머리를 헤집는 조태완의 고개를 잡기가 불편해서 강성태는 시선으로 최치곤을 불렀다.

“피가 튀면 불편하니까 목을 제대로 감아.”

“예, 형님.”

서둘러 다가온 최치곤이 소매와 재킷의 끝을 잡아 조태완의 목에 감았다.

“날 죽이면 수습하지 못해! 절대 안 된다니까! 여기 대한민국이야! 너도 무조건 잡힌다고!”

딩동. 딩동.

조태완의 고함에도 강성태는 말 한마디 없이 회칼을 들었다.

정말 죽이는 거구나!

볼을 씰룩한 이병렬이 급하게 강성태의 앞을 막았다.

“이런 일을 직접 하면 나중에 태완이파 애들을 상대할 때 불리해. 내가 한다.”

“비켜.”

“이것만은 맡겨줘. 보스를 따르는 나와 진용이, 치곤이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이다.”

이병렬은 진심으로 비켜서지 않았다.

시선을 돌렸을 때 김진용과 최치곤이 비슷한 표정으로 강성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곤아. 목을 꽉 붙들어. 그래야 칼이 제대로 박힌다.”

“예, 형님.”

최치곤이 잡고 있던 재킷의 끝을 힘껏 당겨 조태완의 목을 감았다.

“큭! 병렬아! 내가 다 토해낸다! 내가! 내가 지용호랑! 모두 토해낸다고!”

죽음을 직감한 조태완의 고갯짓이 얼마나 대단한지 최치곤이 팔을 돌려 머리통을 꽉 붙잡아야 할 정도였다.

“병렬아! 내가 강성태를 보스로 모시마! 강남 조태완이 고개 숙이겠다고!”

어떻게 할까?

시선을 돌린 이병렬을 향해 강성태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보스의 뜻이 워낙 강경해서 저는 어쩔 수 없습니다. 칼 드리겠습니다, 형님.”

다부지게 말을 건넨 이병렬이 회칼의 끝을 조태완의 목에 붙였다.

“성태 형니-임! 조태완이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형니-임!”

처절한 외침이 특실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딩동. 딩동.

조태완의 목숨을 재촉하는 것처럼 벨이 또 울렸다.

회칼이 조태완의 목을 파고들기 직전에 이병렬이 시선을 들었다. 거실 천장을 바라보며 독한 각오를 흐트러트리지 않으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힘만 주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지용호는 파라 호텔에 있어! 우리 애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전화만 하게 해줘!”

악에 받쳐 갈라진 조태완의 고함이 절박하게 튀어나왔다.

“이병렬.”

강성태가 부르자 이병렬이 퍼뜩 정신이 든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만 물러서 봐.”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병렬은 누가 봐도 긴장을 풀어내는 숨을 길게 내쉬며 한 걸음을 물러섰다.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도 버겁지만, 그 상대가 태완이파 보스 조태완이고, 호텔의 특실에서 대놓고 저지르는 일이라는 부담감이 이병렬을 짓눌렀던 모양이었다.

강성태는 비켜난 이병렬을 지나 조태완의 앞으로 움직였다.

고갯짓을 하자 최치곤이 감았던 재킷의 아래쪽을 풀고서 위로 벗겨냈다.

“허억! 헉!”

조태완은 삶아놓은 것처럼 붉어진 얼굴이었고, 눈은 아예 핏물이 올라온 것처럼 시뻘겋게 충혈돼 있었다.

딩동. 딩동. 딩딩동. 딩동.

대놓고 벨이 울리는 앞에서 강성태는 의자를 끌어다가 조태완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상체를 기울여 조태완의 눈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들여다보았다.

“지용호 어디 있어?”

“파라 호텔. 파라 호텔에 있다.”

가쁜 숨을 내쉬듯 급하게 나온 답을 들으며 강성태는 옅게 웃었다. 살았다는 안도감 뒤에 이 기회를 빠져나가고 보자는 웅크린 감정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너 같은 인간을 징그럽게 상대해 봤거든. 지금은 형님으로 모시니 뭐든 하겠다느니 하지만, 기회가 생기면 등 뒤에서 칼을 찔러넣을 거라는 것도 잘 알고.”

그런데 왜 살려줘?

당황한 조태완의 눈이 그런 의미로 꿈틀대고 있었다.

“지용호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려고 그랬던 거니까 이제 뒈져.”

뭐? 아니지? 그럼 안 되는 거잖아!

급하게 눈을 든 조태완은 겁이 덜컥 난 얼굴이었다.

차가운 강성태의 눈도 그렇고, 칼을 먹이겠다고 나서는 이병렬의 단호한 태도, 무엇보다 얼굴을 가리는 동안에 느꼈던 죽음의 공포가 그렇게 만든 느낌이었다.

딩동. 딩동.

조태완의 시선을 외면한 강성태는 몸을 일으키며 최치곤에게 시선을 주었다. 다부지게 눈을 찢은 최치곤이 재킷을 드는 순간이었다.

“태안으로 필로폰 30킬로그램이 들어와!”

조태완이 빠르게 말을 토해냈다.

강성태가 시선을 돌리자 재킷을 위로 들었던 최치곤이 멈칫한 뒤에 팔을 내렸다.

“그걸 위해서 광룡의 중간 보스 셋이 들어와 있다.”

“약이 언제 들어오는데?”

“사흘 뒤, 공해상에서 받아서 어선으로 들어온다.”

30킬로그램이라는 양에 놀란 것처럼 이병렬이 강성태와 조태완을 번갈아 보았다.

“조태완. 나는 너 같은 놈을 잘 안다니까.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 뒤에 수작 부리려는 거라면 그건 다른 세상에 가서 알아봐.”

“정말 들어온다니까!”

“마약 거래 한두 번 해? 약이 들어오는 날짜를 사흘 전에 알려주는 멍청이들도 있어?”

멍해 있는 조태완을 외면한 채 강성태는 시선을 들었다.

“얼른 끝내고 저놈들 해결하자. 일 많다. 치곤아.”

강성태가 단호한 얼굴로 최치곤을 부른 직후였다.

“광룡의 중간 간부 셋이 들어와 있다. 그놈들이 스토락 호텔에 있으니까 확인해!”

급한 소리로 정보를 토해낸 조태완이 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배반한 조직원에 대한 복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놈들인 건 병렬이도 잘 알 테고, 이걸 털어놨으니까 광룡이 나도 죽이려 들 거다.”

완전히 지친 얼굴이 된 조태완은 이병렬에게 고개를 돌렸다.

“광룡이 심어놓은 애들이 우리 조직에 꽤 있다. 이제 나는 동팔이도 믿지 못해. 영등포에서 나를 지켜줘야 하는데 그게 되겠냐?”

“형님이 보스를 모시겠다고 약속하는 게 먼저입니다.”

“허어, 허허. 씨발.”

딩동. 딩동. 딩딩동. 딩동.

기가 막혀 하는 조태완을 재촉하는 듯이 벨이 연달아 울리고 있었다.

“이번 건이 깨지면 말레이시아와 홍콩, 싱가폴에서 삼합회의 위신이 크게 떨어져.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나를 반드시 죽이려 들 텐데, 씨발! 내 발로 죽을 길에 들어선 거네.”

조태완이 기가 막힌 얼굴로 혼잣말을 뱉어낼 때였다.

딩동. 딩동.

그를 무시하는 것처럼 벨이 울렸다.

“저 새끼들부터 정리하고 조용히 이야기하자.”

짜증 섞인 얼굴로 문을 노려본 조태완이 건넨 요구에 강성태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벨을 연달아 누르던 고영주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는 김동팔 외에 다른 덩치는 없었다.

‘불러봐.’

입 모양으로 지시를 내린 김동팔이 고개로 안을 가리켰다.

딩동. 딩동.

“강성태 씨! 고영주예요! 문 좀 열어보세요!”

벨을 누르던 고영주는 슬슬 악에 받치는 모양으로 눈에 독기가 올라왔다.

쾅쾅쾅쾅.

벨에서 손을 뗀 고영주는 주먹의 날을 이용해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나한테 영상도 없는 카메라를 줘서 이용한 거잖아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야비해요! 문 열어봐! 열어보라고! 야, 강성태! 강성태-애!”

김동팔이 그만하라고 고개를 젓는 데도 고영주는 문을 두드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쾅쾅쾅.

“야! 강성태!”

고영주가 악에 받쳐 고함을 버럭 질렀을 때였다.

달칵.

안쪽에서 걸쇠 푸는 소리가 분명하게 울렸다.

화들짝 몸을 세운 고영주가놀라 돌아보자, 고개를 끄덕인 김동팔이 얼른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칵.

김동팔이 복도를 벗어나기 전에 방문이 열렸다.

“너는 뭐야?”

급하게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몸을 틀던 김동팔은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움찔한 뒤에 걸음을 멈췄다.

“씨발 새끼들이 자존심 상하게 어디서 병신 같은 년을 보내고 있어? 너? 동팔이가 보냈어?”

복도에 울리는 쇳소리 가득한 음성은 누가 뭐래도 조태완의 것이었다.

최종 보스: 빛을 향해 달리는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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